제2차 서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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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복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Seoul Battle- Korean War.jpg
미국 해병대가 서울에서 북한군 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다.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영국의 기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의 기 캐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올리버 P. 스미스
미국 에드워드 알몬드
대한민국 정일권
대한민국 신현준

대한민국 백인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승엽

제2차 서울 전투(Second Battle of Seoul) 또는 9·28 서울 수복(九二八 ── 收復)은 한국전쟁의 전투 중 일부로,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9월 28일까지 서울 수복을 위해 치러진 전투이다.

배경[편집]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인천과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했다.(인천 상륙 작전)

전개[편집]

유엔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 여러 나라의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루어져 전세를 뒤엎게 되었다.

서울 진격[편집]

상륙 부대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대는 9월 18일 김포 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해병대의 뒤를 따라 진격한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시흥·안양·과천 등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끼고 돌아 서빙고와 뚝섬 맞은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는 9월 26일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곳곳에서 퇴로가 끊기게 된 적의 패잔병들은 험준한 산악을 타고 38선 이북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하였다. 9월 20일 새벽 행주나루터를 강습하여 강을 건너간 한미 해병대는 이튿날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 변두리를 감싸고 있는 안산·와우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연희 고지 전투[편집]

적은 9월 23일까지 사흘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함재기(艦載機)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받아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이 고지들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서울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한강 도하 작전[편집]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와 뚝섬 일대에서도 한강 도하작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제7사단 제32연대가 남산과 왕십리 쪽으로 돌입하는 사이 국군 제17연대는 서울의 동쪽 용마산 일대의 능선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 망우리고개를 점령하였다. 시가전은 마포·남산·왕십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에 있었으며, 밤이 깊어지면서 시내 한복판으로 좁혀졌다 이날밤 북한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을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하였고, 서울 시가 전투는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서울 수복[편집]

9월 27일 새벽 국군 제17연대와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으로 돌입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그 잔당을 소탕하고 9월 28일에는 적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시민을 완전히 구출하였다. 반격이 개시된 지 2주일이 채 안 되는 9월 28일 정오,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결과와 그 후 전개[편집]

출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