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1절 발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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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3·1절 발포사건1947년 3·1절제주에서 일어난 경찰의 발포사건이다. 이 사고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년 뒤 발생되는 제주 4·3 사건을 불러일으킨 씨앗이 되었다.

사건 경위[편집]

미군정은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의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라는 목표로 열리게된다는 것을 알고 시가행진을 허가하지 않고 행사장소도 제주서비행장으로 하라고 했지만,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엔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1][2]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한 응원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알고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1][2]

경과[편집]

도립병원 검시 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총탄에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여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였고 일부 경찰도 파업에 동참하였다. 파업에는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교통, 통신기관에 관련된 160개 단체, 4만여명이 참가하여 제주도의 행정기능이 마비되었다.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이 파업에 참여하였고, 경찰의 일부도 파업에 참여하였는데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200명이 이틀 사이에 검거되었다. 4월 10일까지 파업에 관련된 사람중 잠적해 버린 몇 사람을 제외하고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다.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결원은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충원되었다.[2] 이는 훗날 경찰로 충원된 서북청년회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과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4.3사건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5월에 제2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미군정은 좌우익 정당을 똑같이 대우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남로당은 그런 상황에서 당원을 늘려나가 1948년 초에는 5,000 ~ 6,000 명의 당원을 모을 수 있었다. 남로당의 핵심 당원들은 500 ~ 700명 정도였다고 미군정은 추정하였다. 경찰은 경찰관에 대한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좌익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여 2,500명을 검속하였고 이 과정에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8년 3월에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인민유격대'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김달삼, 특별경비대장에 이덕구를 임명하였다. 인민유격대에는 전투부대25부대와 직속부대 25부대, 그리고 각 읍,면 단위로 한 두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가 각각 편성되었으며, 인민유격대의 본부는 한라산에 설치되었고 애월면 샛별 오름 하단의 들판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3]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107~109쪽.
  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0~21쪽
  3. 6·25전쟁사 1, 전쟁의 배경과 원인 432~433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