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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D. 왓슨

제임스 듀이 왓슨 (James Dewey Watson 1928년 4월 6일 ~ )은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1953년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미국의 분자 생물학자, 유전학자, 동물학자이다. 이 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 졸업 후에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여기서 그는 미래의 공동연구자인 프랜시스 크릭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DNA의 구조 규명 이후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분자생물학 연구를 해오고 있다. 게놈 프로젝트를 주창했고 이 프로젝트의 초대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저서로는 교과서인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 (1965), DNA구조 발견에 대한 베스트 셀러인 The Double Helix(1968)가 있다. 그는 최근에 인종에 대한 논쟁적인 발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제임스 듀이 왓슨의 생애[편집]

1928년 4월 6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원래 왓슨은 살마도어 루리아의 작업에 의해 분자 생물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루리아는 최종적으로 유전자 돌연변이에 관한 ‘루리아 델브룩 실험’ 으로 노벨상을 탔다. 루리아는 세균을 감염시기는 박테리오 파지라는 바이러스를 사용 가능하게 하는 연구원 단체에 속해 있었다. 루리아와 맥스 델브룩은 초파이와 같은 유전적 제도에서 세균 유전학으로 움직이려는 유전학자들의 중요한 운동인 새로운 “파지 그룹”의 리더였다. 1948년 초 왓슨은 인디아나 대학의 루리아의 실험실에서 그의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 해 봄, 그는 그는 루리아의 아파트에서 델브룩을 처음 만났고, 그 해 여름 왓슨의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로의 첫 번째 이동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파지 그룹은 왓슨인 일하는 과학자가 되었던 지적 매체였다. 중요하게도, 파지 그룹의 멤버들은 자신들이 유전자의 물리적 본질의 발견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49년 왓슨은 펠릭스 하우로위즈와 같이 당시의 전통적 관점인 유전자가 단백질이고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강의를 받았다. 염색체의 다른 중요한 분자 요소인 DNA는 “멍청한 테트라뉴클레오티드” 라고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이런 이른 시기에도 파지 그룹의 영향을 받고 있는 왓슨은 DNA가 유전 물질이라고 제안한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트 실험을 알고 있었다. 왓슨의 연구 프로젝트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그의 동물학 박사 학위를 1950년 인디애나 대학에서 받았다.(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왓슨은 1950년 9월, 박사후 연구를 위해 생화학자 코펜하겐 대학의 허번 칼크라의 실험실로 처음 향했다. 칼크라는 효소의 핵산 합성에 관심이 있었고 그는 파지를 실험적 제도로 이용하길 원했다. 그러나 왓슨은 DNA 구조에 대해 알고 싶어 했기에 그의 관심은 칼크라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칼크라와 그 해에 일을 한 후에 왓슨은 파지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대신 미생물학적 물리학자인 올리 말로에와 실험을 하기위해 나머지 시간을 코펜하겐에서 썼다. 왓슨이 지난 여름의 Cold Spring Harbor phage 학회에서 배웠던 실험은 파지의 어떤 분자 요소가 실제로 타겟 세균을 감염시키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추적자로써의 방사성 인산염을 사용하는 법을 담고 있었다. 그 목적은 단밸질과 DNA 중 유전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지만 맥스 델브룩의 자문에 의하면 그들은 그들의 결과가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그 결과는 DNA로 새롭게 이름 붙여진 분자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었다. 왓슨은 절대 칼크라와의 건설적인 상호교류를 하진 않았으나 그가 DNA 엑스레이의 회절 데이터에 대해 말한 모리스 윌킨스를 본 이탈리아에서 만남을 갖는 친구로서는 지냈다. 왓슨은 당시 DNA가 더 자세하게 설명이 될 수 있는 분자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951년, 캘리포니아의 화학자 리너스 폴링은 분자 모델 구성과 엑스레이 결정학에서의 그의 노력의 산물인 알파 나선 아미노산 모델을 출판했다. 그의 파지와 인디애나 대학, Statens Serum Institute(덴마크),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의 다른 실험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결과를 얻고 난 후, 왓슨은 DNA구조를 알아낼 수 있게 해주는 엑스레이 회절 실험을 배우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루리아는 존 켄드류를 만났고 그는 잉글랜드의 왓슨을 위해 새로운 박사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1953년 3월, 왓슨과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추정했다. 왓슨과 크릭이 일하는 캐번디시 실험실의 감독인 로렌스 브래그 경은 1953년 4월 8일, 솔베이 컨퍼런스에서 벨기에에서 발견한 단백질을 처음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쇄되어지지는 않았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 25일 출간된 과학 저널 네이처에 논문을 제출했다. 이것은 다른 생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불렸다. 브래그는 런던의 Guys Hospital Medical School에서 1953년 5월 14일 목요일에 The News Chornicle of London지의 1953년 5월 15일자의 리체 캘더의 논문 “왜 너가 너인가. 생명의 신비 가까이”에서 나온 결과에 대해 강연을 했다. 시드니 브래너, 잭 두니츠, 도로시 호드킨, 리슬리 오겔과 오톤은 옥스퍼드 대학의 화학과에서 일하던 1953년 4월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을 처음 봤던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그 새로운 DNA 모델에 감명받았는데 특히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새로운 분자생물학 연구소에서 그 후에 크릭과 일하게 된 브래너가 그랬다.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 신문인 Varsity도 1953년 5월 30일 그 신문만의 짧은 기사를 실었다. 왓슨은 1953년 6월 초 제 18회 Cold Sring Harbor Symposium on Viruses에서 DNA 이중나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왓슨과 크릭이 네이처에 논문을 실은지 6주 후였다. 그 모임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 발견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1953년 Cold Harbor Symposium 은 많은 사람들이 DNA 이중나선 모델을 처음으로 볼 기회였다. 왓슨은 노벨상을 수상한 후 급여에서 1000달러 인상을 거부받았다고 주장했다. 왓슨,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1962년 그들의 핵산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왓슨은 1956년에 시작해 조교수로부터,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을 달성했다. 그는 대학의 초점을 생태학, 발생 생물학, 분류학, 생리학 같은 훈련들이 침체되어 왔고 그런 것들은 분자 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훈련일 뿐이고 생화학은 그들의 기초를 밝혀왔다는 진술을 통해 고전 생물학에서 분자 생물학으로 바꾸는 것을 옹호했다. 심지어 학생들에 의해 그들의 연구가 방해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6년에 학교를 떠났다. 1968년, 왓슨은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감독이 되었다. 1970년과 1972년 사이에 왓슨은 두 아들을 갖게 되었고 1974년 그의 가족은 Cold Spring Harbor에 그들의 영원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왓슨은 35년과 연구 감독과 연구 소장으로써 일했고 나중에 대학 총장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2007년 10월, 왓슨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사임했다. 그곳에서의 그의 과거의 업적에 대해 말하자면, 연구소장 브루스 스틸번은 “짐 왓슨은 어떤 과학계에도 비할 바 없는 연구 환경을 만들어냈다” 고 말했다. 그것은 “ 그의 감독 하에 그 연구소는 암의 유전적 기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중요한 공헌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감독, 연구소장, 그리고 총장으로서의 왓슨은 CSHL을 오늘날의 임무를 “암과 신경학적인 질병과 다른 인간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을 발전시키기 위한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의 탐구에의 기여”로 만들었다. 2007년 10월, 왓슨은 인종과 지능에 관한 비판적 관점을 철회했고 1주 후, 25일에 79세의 나이로 “40년 가까이 고귀한 봉사를 했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에서 은퇴했다. 왓슨은 성명서에서 그의 은퇴 이유를 그의 나이와 그가 더 이상 기대하거나 갈망하는 상황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7년 1월, 왓슨은 Champalimaud Foundation의 장인 레너 블레자의 권유를 받아들여 재단의 고문을 하는 기관인 과학적 심의회의 장이 되었다. 그는 다른 심의회 위원들을 선발할 것이다. 왓슨은 Chang Yi Wang이 설립한 Board of Directors of United Biomedical의 이전 멤버였다. 그는 6년간 일하고 1999년 은퇴했었다. 왓슨은 또한 Allen Institute for Brain Science의 이전 고문이었다. 앨런 연구소는 자선가 폴 앨런과 조디 앨런에 의해 2003년에 만들어진 시애틀과 워싱턴에 있는 비영리 의학 연구 단체이다. 신경과학자들의 많은 전문 단체, 분자 생물학자들, 정보학자들, 공학자들, 수학자들, 통계학자들 그리고 수치적 생물학자들이 앨런 연구소의 과학적 중심을 이루기 위해 불러들여졌다. 생쥐 모델 시스템을 이용하여 각 분야의 과학자들이 성숙한 생쥐의 20000개의 유전자의 발현과 세포수준을 넘어 신경해부학적 경계에서 유전자 발현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이런 접합의 노력으로부터 얻어진 데이터는 Allen Mouse Brain Atlas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Allen Mouse Brain Atlas의 완성에서 이 과학자들의 조합은 우리의 신경적인 회로와 뇌의 기능을 정의하는 신경해부학적 기본을 넘어 추가적인 문제를 추구할 것이다.

제임스 왓슨의 업적[편집]

이중나선구조[편집]

왓슨과 크릭은 DNA가 뉴클레오티드로 구성된 이중나선 구조라고 설명하였다. 만일 DNA 이중나선을 꼬여진 사다리로 생각한다면 발판은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A-T와 G-C염기쌍이고, DNA의 가로대는 공유결합으로 연결된 디옥시리보오스와 인산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다. DNA 뉴클레오티드에는 디옥시리보오스, 염기, 인산이 각각 하나씩 있다. DNA는 흔히 직선 구조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아주 복잡하고 그 복잡성이 DNA 기능에 도움이 된다. DNA 뉴클레오티드에 포함된 염기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2개의 유기 고리 구조를 갖는 퓨린이고, 시토신과 티민은 1개의 유기 고리 구조를 갖는 피리미딘이다. A와 T 그리고 G와 C가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염기쌍은 각 염기쌍이 하나의 고리 구조와 2개의 고리 구조를 갖기 때문에 나선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다. 이러한 퓨린-피리미딘 쌍을 상보적 염기쌍(complementary base pair) 또는 염기쌍이라 부른다. 상보적 염기쌍은 유전자 기능과 DNA 복제의 기본이다. DNA 이중 나선을 구성하는 두개의 사슬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데 이러한 머리-꼬리 배열은 DNA가 역평행임을 의미한다. 화학 규칙에 따라 디옥시리보오스의 탄소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번호를 붙이면 분명해진다. DNA 가닥은 디옥시리보오스의 5번 탄소에서 시작하여 3번 탄소에서 끝이 난다. 두 가닥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놓여있다. 하나의 완전한 나선의 회전은 10 개의 염기쌍인 34Å의 길이에 해당한다. 각 염기쌍은 3.4Å에 해당하며 가닥들이 교차하는 지역에서는 관찰자에게 수직인 염기쌍들이 숨겨져 있다. 내경은 10Å이고 외경은 20Å이다. 이중나선의 원통형의 윤곽은 크고 작은 두 개의 고랑을 가지며 모두다 폴리펩티드 사슬을 수용할 정도로 충분히 크다. 아데닌-티민 (A-T) 염기쌍은 두 개의 수소결합을 가지는 반면, 구아닌-시토신 (G-C) 염기쌍은 세 개의 수소결합을 가진다.

엄청난 양의 DNA가 간단한 세포 안에 채워져 있는데, 만일 인간의 염색체 46개에 있는 DNA 염기를 A,C,T,G로 표기하면 32억 개의 문자가 차지하는 분량은 500쪽 책 4,000권에 해당된다. 세포는 DNA를 실패에 감듯이 히스톤 단백질을 이용하여 체계화 시킨다. 진핵세포에서 하나의 염색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146개의 염기쌍이 8개의 히스톤(histone) 단백질로 이루어진 구조물 주위를 두 번 휘감아 1개의 뉴클레오솜(nucleosome)을 형성한다. 뉴클레오솜의 지름은 10nm 이다. 연속적인 DNA는 실에 꿰인 구슬처럼 뉴클레오솜을 연결하고, 이것이 다시 접혀 지름 30nm의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러한 DNA 응축 방법은 분열하는 세포에서 고도로 응축된 중기 염색체를 만든다. 분열하지 않는 세포는 DNA 응축 정도를 달리하면서 필요한 부분에 효소가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DNA가 부분 부분이 풀리면서 RNA로 전사된다. 전사를 하기 위하여 DNA가 히스톤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단단히 감겨있어도 DNA 본래의 구조와 염기 서열은 그대로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세균과 고세균의 DNA도 단백질과 함께 응축되어 있다.

샤가프의 법칙[편집]

1950년대 초 샤가프는 각종 생물에 의하여 조정된 DNA에 대하여 그 디옥시뉴클레오티드 조성을 상세하게 연구하여 생물종에 따라 그 조성은 각기 고유의 차가 있으나, DNA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규칙성을 발견하였다.

즉, 염기인 아데닌(A)와 티민(T)의 함량이 항상 같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의 함량이 항상 같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A+C=G+T의 관계도 성립한다. 이와 같은 DNA의 조성에 대한 규칙성을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샤가프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발견은 후에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 나선 구조의 모델을 유도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암과의 전쟁[편집]

이중나선을 발견한 뒤 왓슨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캘텍에 잠시 머무른 다음 1956년에 하버드 대학 생물학 교수로 부임했다. 1962년 노벨상 수상은 생물학자로서 그의 삶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하버드에서 왓슨은 순조롭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하버드에서의 교수 생활 대신에 뉴욕주 롱아일랜드 북부 해변에 위치한 콜드 스피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어나가는 연구관리자 일에 매력을 느꼇다. 19세기 말에 생물학자들의 여름철 휴양을 겸한 실험연구소 용도로 세워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특히 멘델 유전학의 수용에 앞장서면서 미국 유전학의 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파지유전학자들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는 그 규모와 비전에서 쇠퇴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거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던 파지그룹의 한 사람이기도 한 왓슨은 일찍부터 콜드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청사진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시간제로 하버드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오가며 근부하던 왓슨은 1968년 끝내 하버드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소장직에 전념했다. 소장으로서 그의 청사진은 연구소를 세계적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왓슨은 분자생물학 혁명의 목적이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전자 치료와 암 정복에 대한 도전을 연구소의 모토로 삼았다.

1911년에 미국의 프랜시스 라우스가 후대에 라우스육종바이러스라 불리는 발암 바이러스를 발견해 196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는 등, 암의 원인 규명과 정복에 대한 관심과 경쟁이 일었다. 왓슨은 연구소의 새로운 일을 바로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측면에서의 암 연구에서 찾았다. 연구소장으로서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세계 최고의 암 연구센터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1971년 1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암퇴치법을 통과시켜 역사상 최대의 암 정복 운동을 벌였다. 법안의 요지는 연방정부가 국립암연구소를 통해 암 정복의 기초 연구에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금을 10여 년에 걸쳐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생명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DNA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져온 결과, 1960년대 말에는 분자유전학, 바이러스학, 동물세포 배양 기술 등이 고등동물세포 내에서의 생화학적 연구를 혁명적으로 변모시켰다.

예를들어 포유류와 인간의 세포를 마치 박테리아의 경우처럼 배양접시에서 성장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론이 개발되었다. 또한 종양바이러스로 알려진 일부 동물바이러스는 배양세포를 암세포로 변화시키는 기능이 있음이 보고되었다. 이러한 노하우를 응용해 세균배양용 샬레에서 암세포를 키워 악성종양의 기원과 진행에 대한 통제된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로부터 실험실에서의 암 연구는 새로운 호기를 맞게 되었다.

1958년 이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동물세포와 그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새로운 기법을 소개할 수 있는 여름학술프로그램의 개발에 주력했다. 또한 이전의 파지 생물학자들에게는 암 기초 연구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종양바이러스 모델의 개발에만 마음을 쓰게 했다. 박테리오파지가 박테리아세포의 유전학을 증명하는 수단을 제공했듯이, 이제 종양바이러스는 포유동물 세포에 비슷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왓슨은 분자바이러스학이 암의 신비를 밝혀내는 핵심열쇠라고 믿었다. 그는 규모도 작고 전망도 없어 보였던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1968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지원하에 동물바이러스와 종양바이러스에 대한 과제 수행에 나섰다. 왓슨의 지도에 따라 연구소의 재원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과학 지도자로서 왓슨의 능력은 돋보였다. 특히 연구소가 나아갈 과학 어젠다(agenda)의 설정과 인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두드러졌다.

왓슨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최상의 암 연구소로 도약시키고자 했다.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DNA와 RNA 종양바이러스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DNA 종양바이러스는 세포를 암 변형시키는 서열, 즉 암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세포나 동물에 감염되면 암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종양바이러스 연구프로그램을 구축하려한 왓슨은 당시 널리 알려진 종양바이러스인 SV40(Simian vacuolating virus 40) DNA 연구로 유명한 젊은 바이러스학자 조지프 샘브룩을 연구소로 초빙했다. 그리하여 샘브룩을 중심으로 종양바이러스 그룹이 연구소에 설치되었다.

1970년 의학계와 정치권의 관심에 힘입어 암 정복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콜드 스프링 하버는 이러한 준비 덕에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5년 동안의 암 연구기금을 국립암연구소로부터 유치하면서 샘브룩은 최고 수준의 젊은 종양바이러스학자들을 연구소로 끌어들여 연구 역량을 한층 강화했다.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자들은 1970년대에 선보인 제한효소 기술을 신속하게 채택했다. 또한 그들은 분자 수준의 DNA와 RNA 분석에 필요한 제한효소 사용 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강력한 새 분석도구인 에티듐 브로마이드 아가로오스 겔(ethidum bromide agarose gel)로 크기가 다른 DNA분자를 분리할 수 있는 값싸고 신속한 방법을 개발했다.

이러한 기법은 제한효소에 의해 잘려진 바이러스 DNA의 단편을 분리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이 기법은 또한 암세포 변형을 초래한 종양바이러스 DNA의 부위를 알아내고 이러한 변형유전자가 바이러스 염색체상에 존재하는 위치를 파악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배양세포에서 악성종양의 변화를 유도하는 유전자들을 종양유전자라고 부르는데,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바로 종양유전자에 의해 생성된 단백질을 정제하고 바이러스복제에서의 그 기능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종양 바이러스 그룹의 초기 연구는 바이러스 DNA가 단백질 합성을 위해 RNA 정보로 전사하는 메커니즘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977년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 또는 분할유전자를 발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mRNA는 핵 안의 DNA로부터 유전정보를 읽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세포질에 유전정보를 전달한다. 정보를 전달하기 전 미성숙 mRNA는 불필요한 염기 서열인 인트론을 제거하고 유용한 염기인 엑손을 연결하는 과정인 접합절단을 거치게 된다. 콜드 스프링 하버의 실험과학자들은 MIT의 연구자들과 함께 RNA 정보는 단백질 합성 이전에 편집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능 유전자 내에 띄엄띄엄 있는 것은 단백질 합성을 위해 잘려나간 쓸데없는 DNA 염기였다.

1972년경 로버츠는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1980년경이 되어 세상에 알려진 제한효소의 절반 이상의 그의 실험실에서 분리되었다. 이러한 효소들이 DNA 재조합 관련 업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기미가 보이자, 로버츠는 새롭게 발견된 효소를 무료로 전 세계 학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했다. 이를 계기로 콜드 스프링 하버는 종양 바이러스 연구자들을 위한 메카가 되었으며,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암과의 전쟁에 선봉에 선 왓슨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간게놈프로젝트[편집]

1988년, 60세의 연륜과 경험이 있는 왓슨은 NIH 산하 인간게놈 연구기획에 합류했고, 그 이듬해에는 인간게놈연구센터의 초대 소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8월에는 NIH와 DOE 공동으로 HGP가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정부가 산하 기관을 통해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청사진인 모든 유전정보를 완전히 해독한다는 것이다.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 전부를 해독하고, 아울러 게놈지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작성하는 일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게놈지도는 유전자 지도와 물리지도로 분류해 연구되었다.

유전자 지도란 염색체 위에 유전 표지판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지, 즉 각 표지의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물리지도는 염색체상에 놓여 있는 유전 표지판의 절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즉, 유전자 지도 작성은 유전체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고, 물리지도 작성은 어느 서열이 정확히 염색체의 어디에 있는지 밝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염색체에서 각 서열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면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서열이 있는 위치도 찾아낼 수 있다. 인간게놈 분석은 2005년도 완성을 목표로 약 15년 동안 연간 2억 달러 정도의 비용이 들것이라고 예상되었다.

HGP에서 왓슨의 역할과 관련해 주목할 것이 있다. 그가 이 프로젝트에 내재한 잠재적 분란에 대한 제도적인 대비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HGP 예산의 일부를 이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했다.

우리는 과거 우생학이 잘못 사용된 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미국과 독일에서 불완전한 지식이 오만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DNA가 개인적인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신시켜야 한다.

왓슨의 선언에 힘입어 HGP가 본격화된 1990년부터 게놈연구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윤리,법,사회관계’에 연간 예산의 5%가 투입되었다. HGP에서의 띠냐 연구는 HGP로부터 예상되는 문제점 도출과 그에 대한 실제적인 제도적 대안 마련,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폈으며, 이후 ELSI 연구는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에서 필수적인 세부 과제로 점차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왓슨이 이끄는 HGP는 양적으로도 상당한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 의학잡지는 이렇게 적었다.

왓슨의 매력은 과학적으로 무지한 의원들을 충동하고 현혹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마법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저명한 『이중나선』의 저자는 그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안타깝게도 1992년 HGP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왓슨은 NIH의 소장으로 붕미한 버너딘 힐리와 충돌을 빚으면서 HGP 일선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의 분쟁 원인은 DNA의 특허 문제 때문이었다. 왓슨은 NIH의 연구자들이 분석한 수천 건의 DNA 서열을 가지고 정부 특허 취득에 나서겠다고 한 힐리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힐리는 유전체 덩어리에 특허권을 얹어 상업적 가능성을 얻어 정부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왓슨은 불확실한 유전자에 특허를 내줄 경우 장기적으로 유전자를 이용한 의학 연구와 발전은 끔찍하리만큼 지체될 것이라고 보았다. 특허 문제에 대한 공개논쟁이 종료되면서 왓슨은 HGP를 떠났다.

1992년을 기점으로 HGP는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미국이 주도하고 분석 작업 역시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이루어졌지만, 영국,프랑스,독일,일본을 비롯한 쟁쟁한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동참했다. HGP는 전 세계18개국의 연구진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인간 이외에도 세균에서 꼬마선충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생물의 염기 서열 분석이 완료되는 등 그 범위와 속도를 더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HGP 연구 성과에 탄력을 준 일은 1998년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인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구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하여 2005년까지 끝내기로 한 것을 2003년으로 앞당겨 끝냈다. 2000년 6월에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게놈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다. 마침내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에 이 두 조직은 전체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생명현상에 대한 좀더 확실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인류가 시달려왔던 많은 유전병 치료와 의약용으로 쓰일 각종 생체물질의 연구와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인간게놈지도가 완성됨으로써 암과 심장병 같은 복잡한 유전병에 대해 얻게 될 생물학적 통찰력은 물론 의학적 혜택 또한 엄청나다. 이는 각종 인간 질병의 예방과 치료 등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인간의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의학과 건강, 인류의 복지에서 혁명적 진전이 가능할 것이다. 이미 반세기 전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생명현상의 신비를 규명하는 데 가장 강력한 불씨를 지핀 주인공의 하나인 왓슨은,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인류복리를 위한 응용을 목적으로 HGP라는 거대한 도전에도 뛰어들었다.


그를 향한 논란[편집]

위험한 발언들[편집]

왓슨은 종종 유전자 연구 영역 내에서 논란거리가 될만한 발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반박하곤 했다.
왓슨은 ‘멍청함’을 질환이라고 얘기하며, ‘정말 멍청한’ 하위 10%의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람의 ‘미모’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조작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왓슨은 “사람들은 모든 여자가 예쁘게 되면 끔찍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 편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왓슨이 “만약 어떤 여자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아이를 원치 않고, 우리가 성적 취향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여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Sunday Telegraph에 인용되었다. 이에 대해 생물학자 리처드 Dawkins는 “잡지에서 왓슨의 말을 왜곡했고, 왓슨은 낙태를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부모의 결정을 존중해야할 필요성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왓슨은 “당신은 뚱뚱한 사람을 면접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라는 비만에 대해 논란거리가 될 만한 발언을 했다. 2000년 컨퍼런스에서 왓슨은 피부 색깔과 성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사진을 슬라이드에 띄우면서, 멜라닌이 성 충동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이것이 당신에게 라틴계 연인이 있는 이유입니다.”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또한 왓슨은, 2007년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들은 잘못됐다”며 “인종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문제가 커지자 지난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며 공식 사과했지만 영국에서는 왓슨 박사의 발언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인간 게놈 지도 제작을 이끈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피부색과 지능간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물론 그런 유전 정보도 없다”며 왓슨 박사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했고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은“근거없는 인종주의 이론이 유전공학을 악용해 인종간 우열 순위를 매기려 한다”며 왓슨 박사의 발언을 과학의 탈을 쓴 인종주의적 선전문구라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영국 각지에서 다양한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CSHL이 왓슨 박사에 대해 직무정지 결정을 내린 이후 왓슨 박사를 초청하기로 했던 기관들이 줄줄이 일정을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영국 의학연구협의회 회장인 옥스퍼드대학의 콜린 블레이크모어 교수는 “왓슨 박사가 도발적이고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런 뛰어난 과학자가 자신의 불쾌한 견해로 인해 침묵을 강요당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의견을 보였고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석좌교수 또한 왓슨 박사에게 있을 오류는 과학적 논쟁을 통해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프랭클린의 자료의 도용, 그리고 은폐[편집]

왓슨과 크릭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실험자료를 허락없이 도용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나선 구조가 또렷하게 찍힌 X선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지만, 보다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DNA 구조 연구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상급 연구원인 월킨스는 프랭클린이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월킨스는 외부 연구원인 왓슨과 크릭과 얼마 후 친해졌고, 그들이 DNA를 연구한다는 것을 알고 프랭클린의 자료를 가져다 주었다. 당시에는 오직 한 연구소만 DNA 연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지라 월킨스가 왓슨과 크릭에게 부채감을 가진 것은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만, 자료를 함부로 가져다준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 프랭클린 본인이 허락하기는 커녕, 프랭클린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료가 외부유출되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후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자료를 반쯤 끼워맞추다시피 하여 DNA가 나선 구조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발표했다. 과학계 기준으로는 연구 현황에 비해 성급한 발표였지만, 그 예측은 맞아떨어져 왓슨과 크릭은 일약 과학계의 총아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프랭클린의 자료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연구한 것처럼 행동했다. 프랭클린이 죽은 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프랭클린을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방법으로 응대했다. 프랭클린의 부모는 이런 상황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왓슨과 크릭이 왜곡한 이미지로 프랭클린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느니 차라리 완전히 망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바로잡아지지 않은 채, 아직껏 이어지고 있다.


그와 관계된 사람들[편집]

로잘린드 프랭클린[편집]

로절린드 엘시 프랭클린(영어: Rosalind Elsie Franklin, 1920년 7월 25일, 영국 런던 노팅 힐 - 1958년 4월 16일, 런던 첼시)은 영국의 생물물리학자로 X선 결정학을 통해 DNA, 바이러스, 석탄, 흑연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DNA의 구조를 밝혀낸 것이 가장 유명한데, DNA는 세포 대사와 유전학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DNA 구조의 발견을 통해 학자들이 유전 정보가 어떻게 부모에서 자식에게로 전달되는 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DNA 이중 나선의 발견을 이끈 DNA의 X선 회절 사진에 관련된 연구로 가장 유명하다. 프랜시스 크릭에 의하면, 프랭클린의 데이터는 DNA의 구조에 관한 왓슨과 크릭의 1953년 논문을 위해 실제로 사용된 데이터이다. 그러나 DNA의 나선 구조를 보여주는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이미지는 프랭클린의 허가 없이 사용되었다. 이 이미지와 그녀의 정확한 데이터 해석이 DNA 구조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과학적 기여는 자주 무시되곤 한다. 출판되지 않은 그녀의 논문 초안을 보면 그녀는 독자적으로 DNA 나선 구조와 구조 바깥쪽의 인산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논문은 네이쳐에 실린 세 개의 DNA 관련 논문 중, 그녀의 기여를 암시하기만 한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 뒤이어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었다. DNA 관련 연구를 끝낸 뒤 프랭클린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와 폴리오 바이러스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이끌었다. 그녀는 난소암 합병증에 의해 1958년에 3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과학자로서 프랭클린의 주된 관심은 석탄이나 목탄 등의 부정형 물질처럼 다루기 까다로운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X선 결정학 방법을 적용하려 했다. 프랑스 파리의 국립연구소에서 이미 X선 결정학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던 프랭클린은 앞날이 밝은 과학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킹스 칼리지로 초빙된 그녀에게는 생체물질인 DNA 분자 구조 분석을 위해 X선 결정학을 적용하는 연구가 주어졌다. 성실하고 꼼꼼했던 프랭클린은 매우 엄격하고 높은 수준을 요구했던 뛰어난 실험과학자였다. 그녀는 지적인 자부심이 매우 높았으며 최고의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역시 강했다. 그녀는 매우 훌륭한 X선관 실험장치는 물론 좋은 DNA시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히 황금의 손이라 불릴 만한 그녀만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프랭클린을 초빙하기 위해 킹스 칼리지의 랜들은 책임급 과학자로서의 예우를 보장했지만, 프랭클린은 윌킨스와 갈등하게 되면서 공동연구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고 홀로 고립된 채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지만 프랭클린의 DNA 연구 성과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만의 실험 노하우로 DNA 생체물질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질적인 면에서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매우 우수한 회절 사진을, 그것도 신속하게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DNA에는 두개의 형태가 존재함을 파악했다. 'DNA는 수분 흡수 정도에 따라 섬유가 길고 가느다란 젖은 B형과 짧고 건조한 A 형으로 나뉘며, 실험자는 수분 양을 조절해 DNA의 형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또한 프랭클린은 잘 정제된 DNA 시료의 샘플이 좀더 습해지면 쉽게 가늘어지면서 더 선명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원리를 응용해 수소가 채워진 카메라 내부의 습기를 염용액을 가지고 조절하는 데성공했다. 바로 이 기술에 따라 탄생한 X선 사진은 B형 DNA의 나선형 구조를 확연히 보여주는 것으로, 훗날 동료 연구자로부터 "이 세상 모든 물질에 대한 X선 사진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고 극찬을 받았으며 빌헬름 뢴트겐(Wilhelm Rontgen, 1845~1923) 이래 가장 유명한 X선 사진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랭클린이 계속 연구를 하며 내놓은 B형 DNA 사진 필름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이것은 호랑이 줄무늬 같은 까만 점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X자를 보여준다. 프랭클린은 이 사진에 '51번'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바로 이 51번 사진 때문에 학자들은 프랭클린이 DNA 구조 문제를 거의 해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단지 오늘이냐 내일이냐 하는 시간 문제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51번 사진이 비공식적인 통로(고슬링->윌킨스)를 통해 왓슨과 크릭의 손 안으로 들어갔고, 이 명백한 실험 증거에 그들의 과학적 상상혁과 통찰력이 더해져 대발견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왓슨과 크릭이 그 사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라는 역사적 가정이 제기되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직까지 프랭클린의 잃어버린 '과학 발견 우선권'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끝이 없는 토론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랭클린이 DNA 구조의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탁월한 과학자였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크릭[편집]

런던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49년부터 캐번디시연구소에서 X선을 사용, 나선상단백질 분자구조를 연구하던 중 미국의 생물학자 왓슨과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의 협력을 얻어 1953년 DNA의 2중나선 구조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1962년 왓슨, 윌킨스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이 밖에도 대장균의 인공돌연변이에 의한 DNA의 뉴클레오티드 배열 순서의 변화를 해석하고, 유전정보의 단위가 3개로 조합되어 있음을 예언하였다. 또, 콜라겐 단백질의 구조, DNA에서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올렸다.


흔히 크릭과 왓슨의 만남은 위대한 공동연구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는 이들의 만남이 단순히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두 커다란 연구 조류의 결합을 이룩해냈기 때문이다. 즉, 생체물질의 구조에만 집착하던 영국의 연구학파와 생체분자의 추상적인 기능 연구에만 철저했던 미국의 연구학파가 물리학, 화학, 유전학의 경계 영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왓슨의 경우 그가 속했던 파지그룹이 DNA의 중요성을 조명하는 데 선구적이었으나 정작 그 분자 구조를 밝히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크릭은 물질의 외적인 구조와 형태를 탐사하는 결정학 연구 부류에 속해 있던 나머지, 샘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좀더 근워적인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사색하지는 못했다. 왓슨과 크릭의 이러한 학문적인 배경 차이는 서로 충돌과 반목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DNA 구조 발견 과정에서 상호보완적인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우선 왓슨의 처지에서는 캐번디시에서 먼저 자리잡고 있던 크릭의 관심사가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에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크릭 역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주장에 빠져 있었다. 세포의 유전자는 대부분 염색체상에 있으며 염색체들은 핵산과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크릭은 DNA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는 동료 과학자들의 태도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왓슨은 한마디로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DNA 유전자에 대한 공동연구의 전개 과정에서도 그들 각자가 지닌 성격과 기질상의 유사성이 상당히 돋보였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일종의 오만함과 무모함, 그리고 지저분한 생각을 참지 못하는 날카로운 면' 이 있었다. 크릭은 왓슨에 대해 지나치게 영리해서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고, 왓슨은 크릭에게서 겸손한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친화력이 뛰어났던 것은 물론이고 말릴 수 없는 재담가였기에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크릭의 눈은 항상 즐거움을 드러내면서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총명함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크릭은 항상 왓슨의 형처럼 굴었다. 자신의 젊은 동료인 왓슨을 격려하고 그의 생각에 대해 피병하면서 새롭게 해석을 내려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작은 연구실에서 끝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과학 연구의 공동전선에 뛰어들었다. 즉, 왓슨과 크릭은 완벽하게 준비된 짝이었다.

모리스 윌킨스[편집]

뉴질랜드 태생 영국의 생물물리학자이다.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DNA)에 대한 X선 회절의 연구로 제임스 웟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분자구조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세 사람은 이 연구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아버지가 더블린 출신의 물리학자였던 윌킨스는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버밍엄대학교에서 고체의 발광을 연구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2년 동안 원자폭탄에 사용되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질량분광기를 통해 분리하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영국에 돌아와서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에 런던대학교 킹스 칼리지의 의학연구부 생물물리실에서 연구했으며, 1955년에는 이 연구실의 부소장이 되었다. 1970~80년에 이곳의 소장으로 있는 동안 연구실의 이름이 신경생물학연구실로 바뀌었으며 이후 세포생물물리학 연구실로 다시 바뀌었다. 그는 이곳에서 후에 DNA에 대한 X선 회절 연구로 이어진 일련의 작업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 미국의 공중보건협회(Public Health Association)로부터 앨버트 래스커 상을 받았다.


당시 실질적으로 DNA X선 결정학 연구의 거점은 킹스칼리지였는데 그 중심에는 윌킨스가 있었다. 뉴질랜드 출신인 윌킨스는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존 랜들(John Randall, 1905~1984)의 지도 아래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원자폭탄에 사용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질량 분광기를 통해 분리하는 작업에 종사하며 맨해튼프로젝트에 1년동안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승 랜들이 킹스 칼리지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분야인 생물리학과의 교수가 되자 윌킨스도 그의 뒤를 따라 킹스 칼리지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그는 초음파 진동을 이용해 초파리 돌연변이의 원인을 찾는 시도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후 세포 내 DNA 함량과 분포 상태에 관한 연구에 착수했다. DNA 구조 연구를 시작한 윌킨스가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DNA의 X선 회절 패턴을 얻는 것이었다. 그 뒤 1950년, 윌킨스는 자신의 박사학위 과정생인 레이먼드 고슬링과 함께 향상된 이미지의 DNA사진을 얻었고, 이로부터 DNA의 나선세계를 예측했다. 그러나 윌킨스의 X선 회절 연구가 더디게 진전되자 그의 상관인 랜들 교수는 X선 결정학에 조예가 깊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을 초빙했다. 이미 프랭클린은 물리화학 지식을 배경으로 X선 회절 연구에서 몇 년동안 탁월한 경험을 쌓은 여성 과학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던 터라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합류가 DNA 분자 연구의 촉발제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기대는 물거품으로 변했다. 처음부터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도 그들의 상관인 랜들의 미숙한 관리 능력에 있었다 할 것이다. '서커스' 라고 불린 랜들의 실험실에서 랜들은 새로운 생물리학 분야를 개척한다는 자부심과 열정에 심취해 실험 성과만을 중시한 채, 그에 걸맞은 관리와 운영에는 체계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로 초빙되면서 DNA의 X선 회절에 대한 연구룰 총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자신의 연구 보조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은 각자 자기를 중심으로 DNA 연구를 진행하고 싶어했다. 영역 분쟁은 실험실에서 두 사람의 공감대를 없애버렸다. 특히 프랭클린은 사회적, 인간적으로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프랭클린은 과학자로서의 자율성과 주관이 매우 뚜렷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윌킨스는 실험실에서 여성 과학자에 대한 태도와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성격 차이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만연했던 과학계의 남성주도적 분위기는 적어도 여성 과학자의 관점에서는 봉건시대와 다름 없었다. 프랭클린은 모든 일에서 이러한 장벽에 부딪혀야 했다. 윌킨스는 윌킨스 나름대로 DNA연구의 활력을 찾지 못해싸. 예를 들어 우리킨스의 DNA 나선형 구조 연구와 관련해 프랭클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호하고 의도적인 말투로 그에게 X선 작업을 포기하라고 주문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암묵적인 대립이 지속되자, 공동연구도 거의 불간으해지면서 DNA 구조 발견을 위한 장기 여정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왓슨, 크릭과는 대조적으로 윌킨스와 프랭클린 짝은 결합에 의한 시너지를 발휘하기는 커녕 상호견제와 불신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라이너스 폴링[편집]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미국 패서디나에 있는 칼텍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다. 그러나 그의 실험은 대발견의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통해 다른 경쟁자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준 일종의 반면교사 욕할을 수행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DNA 삼중나선(triplex) 구조라는 틀린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폴링은 DNA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경종을 울려준 것이다.

폴링은 1925년경부터 칼텍 대학원에서 X선 결정학과 화학을 공부하고 유럽에서 박사후 연구생으로서 양자역학 등의 분야를 섭렵한 뒤, 간단한 분자로부터 단백질에 이르기까지 분자 구조의 여러 양상을 다루는 화학 연구에 집중했다. '화학 결합의 본질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 (1939)의 저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폴링은 화학이 생물학적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단백질 헤모글로빈 분자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를 벌였다. 그리고 생체화합물인 단백질 입체 구조의 안정성은 수많은 아미노산들이 펩티드 결합이라고 하는 화학결합으로 서로 연결되어 길게 늘어진 폴리펩티드 구조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폈다. 특히 화학결합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직관을 바탕으로, 복잡한 단백질 분자에서 수소결합에 의해 아미노산이 나선형 구조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는, 이른바 알파나선 구조를 발견했다. 단백질 X선 회절 사진을 통해 확인하고 간단한 분자모형을 이용함으로써 폴링은 단백질의 나선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링이 제시한 단백질의 알파나선형 모델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바로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단백질 X선결정학 연구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던 캐번디시 연구소의 브래그였다. 폴링과 20년 이상에 걸쳐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온 브래그는 화학결합, 그리고 양자역학의 화학적 응용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폴링이 몰래 가져가 사용했다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브래그는 폴링에 대한 발견의 우선권 분재오가 과학 전문성 윤리를 제기해온 터였다. 그런 브래그의 비판도 폴링의 알파나선형 구조 발견 앞에서는 근거를 잃고 말았다.

폴링이 발견한 단백질의 기본 구조는 결정학자들과 고분자 구조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작업은 캐번디시 연구소도 연구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었기에 브래그는 폴링에 대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4년 폴링은 단백질 분자 구조에 대한 그의 공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폴링이 DNA 분자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1946년경이었다. 그는 외부에서부터 침입한 물질인 항원과 그에 저항하기 위해 생겨난 물질인 항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하면서 ‘아마도 유전자란 상보적 두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DNA에의 관심을 표했다. 2년 후인 1948년 폴링은 겸상적혈구성 빈혈이 적혈구 중 산소 운반을 담당하는 단백질인 헤모글로빈의 이상으로 생기는 유전적 현상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러나 단백질과는 달리 DNA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철저하지 못했다. 그는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업데이트한 DNA 회절 사진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 유럽의 과학문헌에 널리 알려진 애스트베리의 DNA 회절 사진만을 분석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이른바 삼중나선형 모델이라는 기이한 구조를 내놓고 말았다. 폴링이 이러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연유에는 그를 둘러싼 외적인 알력이 작용한 면도 없지 않다. 그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론을 주장하며, 제2차 세계대전 중 거국적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담하게도 자본주의대국 미국에서 아내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했던 급진적인 과학자였다. 무엇보다도 폴링은 원자탄과 방사능 위협에 대한 경각심에서 출발해 원자력의 안전한 통제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이 같은 급진적 정치 성향 때문에 그는 1952년 영국에서 열린 단백질 학회 참석을 앞두고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로 인해 여권이 취소당하는 일도 겪었다. 당시 미국은 자국 내 공산주의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매카시즘의 광풍이 각계를 휩쓸던 시기로, 평화주의자였던 폴링 역시 덩달아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미국 정부는 그가 유럽 학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권을 계속 취소시켰다. 그가 세계 단백질 구조 결정학자들의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DNA 연구 결과뿐 아니라 DNA 사진에 대한 접근 역시 가능했을 것이며, 당연히 삼중나선형 모델이라는 기괴한 주장을 내놓는 해프닝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핵 소신은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 이후 세계적 핵실험 금지 운동으로 이어져, 1962년 그에게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 평화상을 안겨주었다.

저서[편집]

이중나선[편집]

'이중나선'은 왓슨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기까지 겪었던 일들, 자신의 느낌을 적은 책이다. 왓슨은 보통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글쓰기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저서들을 쓸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들이지만, 이 책에서는 상당히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성격이 나쁘고 안좋은 여자로 묘사를 하고 있기에 논란이 되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년에 왓슨 자신도 인정을 하고 사과를 하게 된다.
이 '이중나선'으로 인해서 왓슨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되고, 노벨상은 모리스 윌킨스와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공동수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게 된다. 사실 화학구조 등에 훨씬 더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던 크릭이 직접적인 연구는 더 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과학자에게 있어 글쓰기 솜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The Double Helix(1968년)

《이중 나선 - 핵산의 구조를 밝히기까지》, 하두봉 옮김, 전파과학사,2000



지루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마라[편집]

제임스 왓슨이 2008년에 펴낸 자서전이다.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는 회고록이면서도 각 장이 끝나는 곳에 ‘과학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이라는 팁이 있어 그의 처세술을 일견할 수 있다. 왓슨이 생각하는 ‘지루한 사람’이란 ‘이미 종신재직권을 얻었기 때문에 더는 독특한 생각을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가 제시한 조언 가운데는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을 들어라’ 같은 속물적인 삶의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닮고 싶은 영웅을 정해라
'왜'를 아는 것이 '무엇'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
논문 주제가 아닌 분야의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켜라
현명한 사람도 휴식이 필요하다
과학은 극도로 사교적인 행위이다
시대에 앞선 과학의 목표를 선택해라
혈기왕성한 조수를 채용해라
가르치면서 자신은 더욱 발전한다
과학자의 의견에 관심이 없는 단체도 많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는 다른 삶이 펼쳐진다
학문적 성공에도 보상이 따라야 한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되어라
경쟁자들과 영광을 함께 나누어라
과학자들을 야구팀처럼 관리해라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그는 책 안에 그 말고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들을 해주고 있다.

일요일에도 일해라.
실험 도중에 정해놓고 쉰다는 것은 우리 뇌의 현실과 맞지 않는 처신이다. 뇌는 이미 성취한 일에 만족하여 더 일하고 싶지 않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선 것이 분명한 목표를 선택하라. 남들이 이룬 중요한 발견에 세부사항을 덧붙이는 일을 해서는 중요한 과학자가 될 가망이 없다.
학생들은 노력의 대가를 스스로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할 때 가장 잘 일한다.나는 학생들의 실험을 통해 생산된 논문에는 내 이름을 절대로 넣지 말라는 방침을 정하여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삶을 활기차게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유명해지지 않은 젊은 동료들하고만 전문적 교유를 나누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테니스 경기에서 당신을 때려눕힐지는 몰라도, 당신의 뇌를 계속 활동하게 해준다.
성숙이라는 억제력에 구애받지 않는 젊은 과학자들이 젊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창조력을 발휘한다.
트렁크에 넣어둔 골프 가방을 들키는 순간, 주변 사람들로부터 끝없는 놀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최고 기록, 가령 94타를 넘어서겠노라 집착하는 그 순간 주말 실험은 종친 것이나 다름없다.
남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당신부터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가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위기인 셈이다. 지도자는 참신한 활동이나 사고에 마음을 노출함으로써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편해야 한다.

Avoid Boring People(And Other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 (2008년)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김명남 옮김, 이레




Passion for DNA (2000년)

《DNA를 향한 열정》,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DNA: The Secret of Life (2003년)

《DNA : 생명의 비밀》, 이한길 옮김, 까치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