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우 (16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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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 (1633년)
송곡 이서우 존영
출생1633년 3월 1일
조선 한성부
사망1709년 10월 14일
조선 한성부
사인병사(노환)
거주지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字)는 윤보(潤甫)·휴징(休徵), 호(號)는 송곡(松谷)·송파(松坡)·구계(癯溪)·계옹(溪翁)
학력1660년 증광 문과 갑과 급제
직업문신, 시인, 학자, 정치인, 서예가
종교유학 성리학
부모아버지 이경항, 어머니 전주이씨
배우자증 정부인 청송심씨, 첩 1명
자녀아들 이정관, 아들 이석관, 아들 이홍관, 딸 이씨, 서자 이익관, 서자 이순관, 서녀 이씨(민관효[1]의 처)
친척형 이덕우, 형 이가우, 형 이희우, 매형 윤득열, 매형 이서규, 외조부 이경유, 외종조부 이경록, 외당숙 이서

이서우(李瑞雨, 1633년 3월 1일 ~ 1709년 10월 14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시인, 작가, 서예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字)는 윤보(潤甫)·휴징[2](休徵), 호(號)는 송곡(松谷)·송파(松坡)·구계(癯溪)·계옹(溪翁)이다. 166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공조참판(工曹參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으며, 예송 논쟁 당시 남인(南人)의 논객 중의 한사람이다.

고산 윤선도와 백호 윤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는 후일 허목·윤휴의 학통을 이익오상렴, 채팽윤, 채제공 등에게로 전수하였다. 본래 대북(大北)계열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남인(南人)으로 전향했다. 1651년(효종 2) 생원(生員)이 되고,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북인가문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관직 출사에 제한을 받았으나 문장으로 허목윤휴의 천거로 청요직에 올랐다. 이후 남인으로서 1675년(숙종 1) 사간원정언(正言), 1679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서인(西人) 송시열, 김수항의 예론을 비판,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의 공격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 14년) 의주부윤으로 특별히 임명된 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내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1689년 승지(承旨), 사간원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내고 그 후 황해도 관찰사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92년 좌의정 목래선(睦來善)의 천거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올랐다. 이듬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직(削職), 1697년 복관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사복시첨정 예조판서 이경항(李慶恒)의 아들이다.

외직으로는 경기도,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했고, 청렴하여 강릉, 부령, 동래부사로 재직중 선정을 베풀어 인정비가 세워졌다. 서예와 글씨에 능하여 여러 명인들의 비문과 행장을 찬하였다. 문인 국포 강박은 그의 외손이고, 이익의 문하이자 천주교비판론자인 신후담은 그의 외증손이다.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그의 외외증손이 된다. 윤선도, 이민구, 허목, 윤휴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이서우는 1633년(인조 10) 3월 1일 이경항과 전주이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는 윤보(潤甫), 호는 송곡(松谷)이다. 당색으로는 대북 계열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감(李戡)의 4대손으로 이성헌(李成憲)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길남(李吉男)이고 아버지는 사복시첨정으로 사후 예조판서추증이경항(李慶恒)이고 어머니는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7대손으로 수군절도사 이경유(李慶裕)의 딸이며 이경록의 조카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그가 태어날 때 형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희우(李喜雨)와 후일 파평윤씨 감사(監司) 윤득열(尹得說) 의 후처로 출가한 누나 이씨, 진사 이서규(李瑞圭)에게 출가한 누나 이씨 등이 있었다. 둘째 형 이가우김세렴의 사위이며 반계 유형원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훈구파와 대북 계열이었으나, 그의 외당숙인 완풍부원군 이서(李曙)는 인조반정에 가담한 반정공신이자 서인 중진 문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 이경항은 처사촌인 이서가 힘을 써주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3]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세 형 슬하에서 고학을 하였다.

고학 시절

고산 윤선도의 문하에서 학문과 시문을 수학하였고, 이수광의 아들인 동주 이민구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이후 백호 윤휴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가르침을 청한다. 그 뒤 성인이 된 뒤에는 남산골에 거주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나중에는 일찍이 아버지 이경항과 한 동리에 살았던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 찾아가 수학하였다. 후일 그가 북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허적, 권대운 등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의 스승인 허목윤휴가 나서서 그를 변호하고 감싸주었다. 특히 스승 윤휴로부터는 실학자 지봉 이수광과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의 시문과 학문을 계승하였다.

숙종이 세자시절 잠저에 나갔을 때 내관과 함께 서울 남산골에 들렀다가 스러져가는 초가에서 한 선비가 낭랑하게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다. 추운 겨울 밤, 온 종일 죽 한 그릇도 변변히 먹지 못한 채 얼음장 같은 냉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4] 그러나 목이 메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숙종이 우연히 보았다. 숙종은 별감을 시켜 약밥에 마제 은 한덩이를 봉지에 싸서 선비의 집으로 던졌다. 창 너머로 무엇인가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배가 고팠던 선비는 누군가 던져주고 간 약밥을 감사히 취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후, 어느 정월 대보름날 잔치에 밝은 달을 보며 당시 서울 남산골에서 글읽던 선비를 추억하였다.

벌써 몇해 전의 일이 되었구나. 언젠가 짐이 잠행으로 남산골에 이르렀을 때,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글 읽은 소리가 나는데, 얼마나 굶었는지 소리가 잘 나지 않을 지경인지라, 짐이 별감을 시켜서 약식을 넣어 준 일이었는데, 지금 그 선비는 어찌 되었는지.....[5]

그때 사헌부 감찰로 있던 이서우가 나와 부복하며 그때에 던져주신 약밥을 감사히 받았음을 아뢰고, 숙종이 그때 다른 것은 없었는가 하고 묻자, 그때 함께 있던 마제 은 한덩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서우가 보존하던 마제은 한덩이를 가져왔으나 한치도 닳아있지 않았다. 그의 청렴성에 감격한 숙종은 이서우가 가져온 마제은을 돌려주고 그의 벼슬을 승진시켜 주었다.[5]

관료 생활

과거 급제

미수 허목 초상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1651년(효종 2년)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년) 성균관유생으로 있을 때, 과제(課製)에 1등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1660년 10월 10일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직장(直長), 1668년(현종 9) 통훈대부성균관전적을 지냈다.

글을 잘 짓는다 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남인의 저격수로 청남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청남허목윤휴가 영수로 '오정창·오정위·오시수·이무·조사기·이수경을 중심으로 장응일·정지호·남천한·이서우 등이 '매와 사냥개'처럼 전위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삼복(三福)이라 하여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을 끼고 후일을 대비하였다[6]' 한다.

관료 생활 초기

1675년(숙종 1) 문장에 재주가 있다 하여 스승인 허목 등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해 정언에 천거되었으나 대북이었던 이경항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부 남인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허목기 강하게 관철시켜 성사되었다. 1675년(숙종 1) 사간원정언이 되어 인조반정 이후 대북가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올랐다.

그가 삼사의 청요직에 중용되자 그의 아버지 이경항광해군대북 인사였음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허목윤휴가 번갈아가며 그를 삼사 언관의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이때 허목은 "신이 그 아비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가 끝내 흉론(凶論)에 물들지 아니하였음을 압니다"하며 그를 감쌌고, 묵재 허적은 "신이 듣건대, 그 아비가 이이첨(李爾瞻)에게 친압(親押)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우상(右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은 전해 들은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우상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의 말이 옳습니다. 우상이 어찌 한낱 이서우를 위하여 감히 전하를 속이겠습니까?"라며 그의 중용을 반대하였으나, 허목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5월 경연에서 허목의 천거를 받았다.

1675년(숙종 1년) 7월 22일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그 해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예론과 그에 적극 동조한 김수항(金壽恒)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허적 등 대신을 공격하는 이수경(李壽慶)을 두호하다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부터 왕과 청대한 우의정 허목의 극력 변호와 설득으로, 동년 10월 9일 이수경과 함께 곧 복직되었다. 이어 10월 11일 윤휴의 추천으로 홍문록에 오르게 되었다.[7] 이때 허적이 다시 그의 아버지 이경항대북이었던 점을 들어 1623년 이후 대북파, 대북계열인 사람들의 출사가 금지되었던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7]

관료 생활

백호 윤휴
(스승의 한사람이자 청남의 영수로 그를 후원하였다.)

묵재 허적
(탁남의 영수로 그의 아버지가 대북 가문인 것을 문제삼았다.)

1675년 성균관사예를 거쳐 1675년 12월 11일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되었으나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긴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뒤 물러가서 처분을 기다렸다가. 이때 남인 허적서인(西人)은 그를 비판하였으나, 미수 허목(許穆)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후 그는 허목윤휴의 비호를 받았으며, 그의 글재주를 높이 산 허목윤휴가 번갈아가며 그를 추천하여 삼사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12월 26일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76년(숙종 2년) 1월 만과 설치와 종이호패 발급의 폐단을 지적하여 폐지하게 하였다. 만과 설치 이후 백수들이 헛된 꿈을 바라는 일이 늘어났으며, 종이 호패는 흉년기에 발급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병조정랑으로 비변사낭청이 되었고, 1676년 7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왕환하였다. 귀국 후 1677년 10월 4일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해 12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 뒤 비변사의 낭관을 거쳐 1678년 6월 16일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후 서인남인에서 여러 번 그의 아버지 이경항의 전력을 문제삼았으나 이때에도 허목윤휴가 번갈아가며 이서우를 두둔하였다. 이서우는 서인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 등의 예론이 예를 거슬린다며 비판, 규탄하였다.

2차 예송 논쟁

1679년 1월 25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부임한 후 강릉부사, 부령부사, 청주목사 등을 지내고 서인 송시열, 김수항의 예론을 비판,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예론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金壽恒)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허적 등 대신을 공격하는 이수경(李壽慶)을 두호하다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허목의 변호로 복관하였다. 1676년 7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정적 김수항

이후 남인으로 생활하다 1678년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78년 부호군으로 다시 비변사낭청이 되었고, 1679년 1월 25일 동래부사로 나갔다. 동래부사 재직 중 1679년 조선에 귀화한 차왜(差倭)와 함께 왜인 거주지를 측량하여 관왜들에 대한 새로운 보행한계(步行限界)를 조약으로 정하여 출입을 제한시켰다.[8]

우암 송시열

1680년 4월 경신환국 이후 서인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해 9월에는 김수항으로부터 그가 오정창(吳挺昌)의 심복인데 홀로 죄를 받지 않았다며 공격당하였다.[9]

10월 서인에 의해 홍수의 변 관련자인 오정창의 심복으로 지목되어 영변으로 유배당하였는데, 누명을 쓰고 유배되면서 그는 우울한 심사를 시로써 달랬다.

1688년 5월 2일 특별히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이서우는 외직에 여러 번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당색이 남인이었던 까닭에 서인의 줄기찬 반대로 무마되었다. 1688년 5월서인들이 주관한 비변사 회의에서 의주부윤에 천거되었을 때는 서인들도 반대하지 않아 그해 5월 2일 의주부윤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주부윤 재직 중 의주로 유배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과 시문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그해 6월 13일 영의정 남구만, 부제학 최석정(崔錫鼎) 등의 비판을 받고 바로 면직되었다.

복관과 인현왕후 폐위 전후

1689년(숙종 15년) 1월 왕자 균의 원자정호 문제로 2월 6일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내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의(兵曺參議)로 등용되었다. 바로 승지(承旨)가 되었고, 2월 15일 다시 승지로 재임명되었으며 바로 병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윤 3월 다른 남인 신료들과 합계하여 송시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이후 4월 23일 승지가 되었다. 8월 3일 다시 승지에 재임명되었다. 1689년 10월 3일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10월 23일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 후 함경도 관찰사,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을 두루 지냈다. 이 기간 중 그는 서인이 잘못된 예론을 고치지 않는다며 서인을 공격, 성토하였다.

1690년 1월 10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그 뒤 김수항, 송시열서인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폐출 때는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0년 5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9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4월 인삼에 대한 행정처리 잘못과, 인삼 채취를 목적으로 월경하는 백성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변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생애 후반

갑술환국과 복권

1692년 의정부좌의정 목래선(睦來善)에 의하여 문장으로 천거받아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동년 10월 5일 공조참판이 되었다. 11월 21일 다시 승정원도승지가 되고, 1693년 9월 9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9월 26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1694년 초 다시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다시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1694년 4월 갑술옥사로 파직, 삭출당하고 4월 16일 문외출송되었다가 1695년 다시 사면령이 내려졌으나 승지 이야(李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97년(숙종 23년) 4월에 풀려나 복관되었다. 그 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소론 재상 최석정(崔錫鼎)에 의하여 청백함을 인정받아 서용을 건의하였으며, 1698년 임금으로부터 서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현직에 나가지는 못했다.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송시열김수항 등이 진리를 호도하고 학문의 자유를 가로막고 권력으로 자신들의 사론을 관철시킨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비변사로부터 여러번 지방관 직의 물망에 올랐지만 번번히 낙마하고 만다.

만년

이후 광주 청계산 근처로 낙향하여 만년에는 후학에게 학문과 시문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연초재 오상렴(燕超齋 吳尙濂), 희암 채팽윤(希菴 蔡彭胤), 약산 오광운(藥山 吳光運), 국포 강박(菊圃 姜樸) 등이 그의 문하에서 시와 학문을 배웠다. 성호 이익 역시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고, 이는 안정복, 강박, 신후담, 채제공 등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윤선도, 이민구 등의 시문을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오상렴(吳尙濂)은 1704년(숙종 30년) 스물 다섯 살 때 김리만(金履萬) 등과 함께 송곡 이서우에게 시를 배웠다.[10] 그러나 오상렴은 1707년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다. 만년에는 성호사설을 지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도 그의 문하에 찾아와 자주 출입했다. 그는 이서우를 찾아 뵌 이후, 공부하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그에게 자주 묻고 배웠는데, 이익은 이서우를 '사백'(詞伯)이라 칭하면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이서우를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았다.『星湖僿說』에는 이익이 이서우에게 가르침을 청하거나 자신이 공부한 것을 검증받는 등의 내용을 기술하였다.[11]

최후

시(詩)에 뛰어나고 서도(書道)로도 알려줬다. 저서로 《송파문집》(松坡文集) 20권[12]과 《강사》(康史) 2권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김포 문수사(文殊寺)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의 전액이 유필(遺筆), 예산군 불산면 본점리 의정부영의정 이의배(李義培) 신도비의 수액, 이상의의 소릉문집 서문 등이 남아 있다.

1709년(숙종 35년) 10월 14일에 사거했다. 그의 나이 향년 76세였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 철곡(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철곡) 유좌의 부인 청송심씨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1701년 남인의 몰락 이후 두 서자 이익관, 이순관과 서녀 사위 민관효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다. 셋째 아들 이홍관은 처형당하고, 괘서를 돌리는데 가담한 이익관, 이순관 형제는 능지처참당하고 가산을 적몰당했으며, 이인좌를 도운 서녀 사위 민관효 일가 역시 처형당하고 가산은 적몰당한다. 이들의 후손들은 서손 이계강, 이철강 등을 비롯, 극변의 노비로 끌려가게 된다.

이서우 역시 역모로 연좌되어 추탈당했다. 그의 두 아들 이정관이석관은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화를 모면하였으나 그의 적손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경상북도 성주강원도 원주 등으로 흩어졌다.

1745년에는 나주 괘서 사건에 그의 손자 이심이 연좌되어 처형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했고, 외손 강박, 외증손 신후담 등도 연좌되어 출사에 제한을 받게 된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정조남인이 집권하면서 1795년(정조 19년) 다시 복권되었다. 그의 외증손 중에는 천주교비판론자인 신후담도 있고,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그의 서녀의 외손자였다.

그는 사후 남인 학문과 시맥의 정통이자 남인 문단의 종장으로 추숭되고 훗날 채제공에 의해 허목-이서우-이익으로 남인 학문, 시문의 법통으로 규정되었다.

그의 문집은 외손 국포 강박이 정리했고, 강박의 손자 강세륜강세백이 재정리하여 간행하였고, 1995년 연세대학교에서 국역으로 간행되어 알려졌다.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단강리에 그를 제향하는 영정각이 세워졌다. 매년 3월 1일 원주군 부론면 단강리 영정각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1995년 8월 후손들에 의해 묘비가 다시 수립되었다.

저서와 작품

저서

이서우의 시
  • 《송파문집》(松坡文集) 20권
  • 《강사》 2권
  • 《장산후지(萇山後誌)》[13]
  • 《동래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14]

작품

  • 문수사 풍담대사비(文殊寺 楓潭大師碑)
  • 오리 이원익 묘갈명
  • 노주 김태일 묘갈명
  • 이하진 묘갈명(李夏鎭墓碣銘)
  • 소릉문집 서문(少陵文集序文[15])
  • 백곡집 서문(柏谷集序) (1686)
  • 삭녕군수(朔寧郡守) 이상현(李象賢) 묘갈명, 경기도 광명시 소재
  • 충장공 이복남의 시호 상주(上奏) 시장(諡狀)
  • 증좌찬성 행호조판서 이명(李溟) 신도비의 글씨 (1673)
  • 진사 강석훈[16] 묘갈명(進士姜碩塤墓碣銘)
  • 강전(姜琠) 묘갈명,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암 해좌 소재
  • 초연재문집 서문(超燕齋文集序文)

도망후기몽(悼亡後記夢)

玉貌依俙看忽無 옥모의희간홀무 / 곱던 모습 희미하게 보일 듯 사라지고

覺來燈影十分孤 각래등영십분고 / 깨어보니 등불만 외롭게 타고 있네

早知秋雨驚人夢 조지추우경인몽 / 가을비 내 꿈 깨울 줄 알았더라면

不向窓前種碧梧 불향창전종벽오 / 창 앞에 벽오동 심지 않았을 것을


단도제 추모 만시(輓詩)

단도제(檀道濟)가 죽어지니 장성이 무너진 듯

이촬(李 (系最))이 죽으니 짧은 팔의 지탱을 뉘 밝히리.

새 무덤을 바라고자 서호로 낯을 돌리니

물빛이랑 산빛에도 슬픔을 못 이기네

평가

구경에 통달한 거유로서 도학군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당대에 받는 청백리로 도처에 인정비(仁政碑)가 세워져 선정휼민한 치적을 예찬하는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또한 학문이 뛰어나 구경(九經)에 통달한 거유(巨儒)로서 조야에서는 도학군자로 숭앙받았다.

정약용은 그의 작품성에 대해 '우리들(남인)의 시맥은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이후로 오직 송곡 이서우가 그 정통을 얻었으나, 성곡의 시논 정교하고 치밀하기만 할 뿐, 원대한 운치가 적다[17]고 평하였다.

가족 관계

청송심씨 부인 외에도 첩이 1명 더 있었다. 동명 김세렴은 그의 셋째 형수의 친정아버지로, 김효원 가문과도 인척간이었다. 한편 인조반정의 공신인 서인 완풍부원군 이서는 그의 외당숙이었다.

  • 첩 : 이름 미상(無名氏, ? - ?)
  • 첩 : 이름 미상(無名氏, ? - ?)
    • 서자 : 이익관(李翼觀, ? - 1728년)
    • 서녀 : 이순관(李順觀, ? - 1728년)
    • 첩며느리 : 신씨(愼氏, 신광원(愼光遠)의 누이)
    • 서녀 : 이씨(李氏)
    • 서녀사위 : 민관효(閔觀孝, ? - 1728년, 민종도의 서자, 민암의 서손자)
  • 장인 : 심광위(沈光胃, 본관은 청송)
  • 사돈 : 강석번]]((姜碩蕃), 사위 강석훈의 동생
  • 사돈 : 민종도(閔宗道, 1633년 - 1693년, 서녀사위 민관효의 아버지)
  • 사돈 : 민점(閔點, 1614 ~ 1680)
  • 사돈 민암(閔黯, 1636 - 1693)
  • 사돈 : 신광원(愼光遠, 첩며느리 신씨의 동기)

일화

  • 그의 호는 송곡으로 문집은 송곡문집이라 하였으나, 숙종 이후 남인이 몰락하면서 세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송파문집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하였다. 송파문집은 그의 외손자인 국포 강박이 자신의 백부 강석번의 양자로 출계하였는데, 강박이 이서우의 문집을 정리했으며, 뒤에 강박의 손자인 강세륜과 강세백[21] 형제가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 1728년 그의 서자 이익관, 이순관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모반 혐의로 처형되면서 그의 일족들도 연좌되었다.
  • 후에 김삿갓은 자신의 시집에 실린 시 '나부(懶婦)'라는 제목의 7언 율시를 지었는데, 이는 송곡 이서우의 시 를 자구만 바꾼 것이었다.[22][23]

기타

일찍이 민점(閔點)이 문형(文衡)을 추천할 때, 권유(權愈)와 이서우(李瑞雨)두 사람을 놓고 얼른 선택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을 내어 재주를 시험하자, 그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좌중을 놀라게 하여 문형에 올랐다고 한다.[24]

영남 안찰사 송곡 이서우는 귀임길에 태학사 권유(權愈)를 만나 말하기를, 〈영남 70주에 옛 도리대로 백성을 돌보는 이는 의령의 이사군(李使君) 숭일(이숭일, 이현일의 동생) 뿐이라〉하였다.[25]

그의 생전에 안경조선에 처음 유입되었는데, 그는 안경의 생김새를 놀라워하며 이를 묘사한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26]

바둑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는 젊어서 바둑을 둘 줄 몰랐다.[27] 그러나 바둑을 둘줄 몰라 여러 번 패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스스로 독학하여 바둑을 익혔다.

그는 처음에 바둑을 잘 두는 자를 찾아가 바둑을 두었는데 열여섯 집 차로 졌다. 세 판을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한판도 이기지 못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 들보에 매달아 놓고 누워서 쳐다보았다. 이틀만에 다시 바둑을 잘 두는 자를 찾아가 도리어 열여섯 집 차로 이겼다.[27] 그 뒤로 그는 바둑의 달인이 되었다 한다.

주석

  1. 민종도의 서자
  2. 의괴자료
  3. 인조 실록 제 19권, 6년(1628년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2월 25일(신해) 3번째기사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4. 이창범, 《잣은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벌통 속에 있다》 (한국문학도서관 펴냄, 2005) 176페이지
  5. 이창범, 《잣은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벌통 속에 있다》 (한국문학도서관 펴냄, 2005) 177페이지
  6. 이근호,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아출판사, 2005) 431
  7.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0월 11일(을축) 1번째기사 "축성에 대해 논의하고, 윤휴가 이수경·신선온·이후항이 도당록에서 빠졌음을 아뢰다"
  8. 2010 부산문화관광해설사 보수교육 (부산문화원 학예연구실, 2010) 189
  9.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1680 경신 / 청 강희(康熙) 19년) 9월 13일(무진) 2번째기사 "청나라 사신의 접견·도성 역사·어영청 등의 군사 훈련·강화도의 시재·공훈 등을 논의하다"
  10. 이용휴, 《혜환 이용휴 시전집》 (조남권 외 옮김, 소명출판, 2002) 179
  11. 《星湖先生全集 卷55》,『한국문집총간』199권, 519면
  12. 후에 외손자 국포 강박에게 전해졌다가, 강박의 손자인 강세륜, 강세백이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그의 두 서자가 1728년(영조 5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관계로, 문집은 그의 호인 송곡 대신 송파로 바꾸어 간행하였다.
  13.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687_1_0016162
  1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687_1_0016162
  15. 소릉문집
  16. 그의 사위이다.
  17. 편집부, 다산문선 (두산동아, 2010) 1176
  18. 국조인물고 이경항 편에 나타난 후사 없이 사망한 이경항의 백모
  19.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B4%ED%99%8D%EA%B4%80&keyword=%EC%9D%B4%ED%99%8D%EA%B4%80
  20. 94세까지 장수하여 남편의 작위와는 관계없이 특별히 숙부인으로 봉해졌다.
  21. 이서우에게는 증외고손이 된다.
  22. 안대회,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258쪽
  23. 이응수, 김립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44) 135~140
  24. 권유
  25. 이문열, 선택 (민음사, 1997) 193
  26. "새해 부자되세요" 조선일보 2006.11.28일자
  27.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467페이지

같이 보기

참고 문헌

  • 숙종실록
  • 국조방목
  • 국조인물지
  • 연려실기술
  • 명지록

참고 자료

  • 이문열, 《선택》(민음사, 1997)
  • 안대회,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467페이지
  • 정민, 《미쳐야 미친다: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푸른역사, 2004)
  • 이가원, 《李朝名人列傳》 (을유문화사, 1965)
  • 부유섭,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삶과 시〉, 《한국한시작가연구, 제12권》 (한국한시학회, 2008) pp.171~204
  • 임미정, 《송곡 이서우의 시문학 연구:석사학위 논문》(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19. 장희빈》 (금성출판사, 2010)
  • 김달진 역, 《한국 한시 2》 (민음사, 1989)
  • 우계이씨판서공파종중, 《송파집 상, 하》 (우계이씨판서공파종중, 2005)
  • 한국한시학회, 《한국한시작가연구 12》(태학사, 2008)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