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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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일본어: 江戸時代 えどじだい[*]) 또는 도쿠가와 시대(일본어: 徳川時代)는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잡은 시기를 가리킨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세이이타이쇼군으로 되어 에도막부(왕조)를 연 시기를 에도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868년 3월 1일 에도 성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되는 때까지의 265년간을 가리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개요

에도시대 초기

법치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자신의 영지인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한다. 도요토미 정권 붕괴 후의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생산, 교육의 진흥, 그 외의 대책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오사카 전투에 의해 도요토미 세력을 일소한다. 길게 계속된 정국불안은 끝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철저한 정국안정책을 실행하여,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는 등 다이묘와 조정에 대해 철저한 법치체제를 깔았다. 다이묘의 대부분이 영지몰수로 모습을 감추고, 전국의 중요 지방은 직할령으로서 다이묘를 두지 않고 다수의 신반다이묘에게 큰 영지를 맡기고, 그 사이에 토자마다이묘를 배치하여 후다이다이묘에게는 작은 영지와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절묘한 분할정치책을 실시하였다.

자가우선주의라는 비평도 있지만, 이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265년 이상 계속된 장기안정정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천하태평이라는 일본어가 생겨날 정도로 상대적인 평화 상태를 일본에 가져왔다.

경제성장시대

농본주의적으로 생각되는 이에야스이지만,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또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규제완화에 의한 경제진흥책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성장중시의 경제 진흥파였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하여 대량의 병사(무사)가 비생산적인 군사생활에서 행정활동으로 옮아가고, 광역적인 개간활동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까지 긴 성장을 계속해왔던 경제는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고도성장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 금지령

에도시대에는 나가사키 데지마에서의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류와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류 이외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하지만 실제로는 류큐를 통한 대명, 청 교역이나 북방교역이 존재했다.) 바테렌(기독교 선교사)추방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하였지만, 쇄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시마바라의 난으로, 기독교잇키의 협력으로 인해 농민들의 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정치적 위험성이 강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쇄국정책

또한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일본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는 일본 식민지화의 의도가 있어 위험하다고 막부에 조언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정책을 해금(海禁)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에는 주로 연안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일본의 쇄국과는 사정이 다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쇄국도 중국의 해금과 같이 쇄국보다는 해금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하다는 설명도 있다. 쇄국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활발했고, 동남아시아에 많은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한 타이에 건너간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그 나라에서 중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급경제

하지만 쇄국 후에는 오로지 국내중시 정책이 채용되고, 기본적으로 국내 자급 경제가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3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 경제와 각지의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하는 한(藩)경제와의 복합적인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각지의 특산물이 주로 오사카에 집중되어, 거기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하여, 경제적인 번영을 보인 것이 겐로쿠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문학과 미술 면에서도 이하라 사이카쿠우키요조시, 마츠오 바쇼하이카이, 치카마츠 몬자에몬죠루리, 히시카와 모로노부우키요에 같은 것이 탄생한다.

에도시대 중기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재정을 튼실하게 하였지만, 다시금 재정이 악화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간세이의 개혁, 미즈노 다다쿠니덴보의 개혁을 하여보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겐로쿠 문화와 같이 상공인이 중심이 된 가세이 문화가 꽃을 피웠고, 가부키, 하이카이,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화폐상품 경제가 발달하자, 예전부터 쌀을 기반으로 연공수입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막부와 같이 번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슈 번사쓰마 번은 이 개혁이 성공하였고, 막부 말기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에도시대 말기

에도 말기 구미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채결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 사상이 고추되어 갔고 막부의 고위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선언하고 다음 해인 1868년 5월 3일에도 성메이지 정부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되었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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