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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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지리 유형: )
청계천 중류의 인공 방류지인 청계광장의 야경.
(2006년)
별명: 개천
나라 대한민국
지방 서울 종로구 · 중구 · 동대문구 · 성동구
소속 한강 수계 · 중랑천 수계 · 청계천 수계
구분 청계천 (백운동천)
지류
 - 왼쪽 중학천 · 성북천 · 정릉천
발원지 인왕산북악산 사이의 백운동 계곡
 -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하구 중랑천의 살곶이 인근 수역
 - 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
길이 10.92km (7mi)[1]
면적 50.96km² (20sq mi)[1]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2],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에서 중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본류의 길이는 10.92 킬로미터, 유역 면적은 50.96 제곱킬로미터이나, 인왕산의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km[3]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하에 공원으로 쓰인다.

이름[편집]

상류는 백운동천이라 일컫는다. 중·하류에서는 조선 조 내내 치수 사업이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었다.

역사[편집]

일제시대의 청계천
청계천 복원 공사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한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복원[편집]

1930년대부터 시작된 복개 사업과 1970년대에 완공된 청계고가도로의 환경 오염 및 노후에 따른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결국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하기로 공약한다. 이에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는 복원 사업이 서울특별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이 복원되어 산책로, 녹지 등이 설치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에 흐르는 물은 청계천 본래 지류가 아닌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한다. 사업비는 386,739백만원이 들어갔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2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복원에 대한 평가[편집]

서울학연구소가 시민ㆍ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간 서울 도심에서 시행된 주요 20개 사업 가운데 '청계천 복원'이 만족도와 기여도 평가에서 4.02점(5점 만점)을 받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4]

긍정적 평가[편집]

청계천 통수(通水), 자동차 운행 감소, 고가도로 철거에 따른 바람길 형성 등의 영향으로 청계천변 숭인빌딩 앞의 기온이 평균 3.6도 낮은 것으로 측정됐다. [5] 또한 하수도로 사용되어 BOD가 과도하게 높아졌던 물길에 깨끗한 물을 흐르게 했으며, 서울특별시의 도심인 종로구 한가운데에 녹지를 만들어 휴식공간을 만들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따르면 복원으로 인한 경제효과가 최대 23조원으로 투입액의 59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었고, 고용효과는 서울 24만명 등 전국적으로 31만명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6]

부정적 평가[편집]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복원된 청계천을 "인공호수"라며 호되게 비판하였다.[7] 또한 청계천의 기존 물은 양이 적어 취수장에서 전기를 이용해 한강물과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데, 이때 물을 끌어올리는 데 쓰이는 전기요금이 한해 평균 8억 정도가 쓰이고 있다. 또 끌어다 쓰는 물로 인해 녹조가 반복적으로 생겨 2007 ~ 2009년까지 8000만원을 녹조제거를 위해 쓰였다. 이 외에도 인건비, 청소·경비용역비, 토목·조경시설 유지관리비 등에 2011년에만 80억여원이 소모되었다. 이는 2005년 37억에서 2010년 77억원에 이은 것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11년 6월 조선일보가 건축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청계천은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혔다. 건축가들은 "청계천은 한국을 상징하는 공공 건축물인데 건축가도 없이 단기간에 불도저로 밀어붙이듯 만들었다"고 지적했다.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임기 안에 청계천 복원 사업을 무리하게 끝마치기 위해서 유적 복원을 날림으로 진행했다는 평가도 있다. 1773년에 쌓은 현 무교동 사거리에서 시작되며 청계천을 따라 17.1미터의 폭을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청계천 석축은 발굴 후 복원되지 못했다. 복원 당시 발견된 석축은 동아일보사 앞의 좌안석축이 교차로를 기준으로 서쪽 57m, 동쪽 36m 정도, 반대편 우안석축은 9m 정도로 모두 100여 미터나 된다. 수표교는 예산상의 문제라는 표면적 이유로 장충단공원에 남아 있고, 광통교는 원래와 다르게 복원되었다. 발굴된 하랑교와 효경교는 하부 교각만 물길에 심었고, 같이 발굴된 오간수문과 같이 청계천 하류의 펌프장에 쌓여 있다.

청계천 입구에 위치하는 소라탑 또한 일각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한 작품으로, KT가 34억의 비용을 들여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다. 높이 20m, 폭 6m, 무게 9t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적인 미가 결여되어 있고, 주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비판과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8]

재복원 추진[편집]

서울특별시는 2050년까지 장기 계획을 세워 청계천을 역사와 전통이 있게 재복원하기로 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18년까지 청계천의 인공 보(湺)를 철거한다. 2030년까지는 수표교 등의 유적을 제자리에 옮겨놓으며, 중·하류 수질을 개선할 예정이다. 백운동천이나 삼청동천의 계곡수 또한 이때까지 유입시키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2050년까지는 옥류동천남산동천을 청계천으로 잇기로 했다.[9]

다리[편집]

과거의 다리[편집]

조선 시대의 청계천의 다리 목록이다. 백운동천의 신교부터 송기교까지의 다리는 백운동천의 과거의 다리에 있다.

서울 청계천 유적
서울 淸溪川 遺蹟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廣通橋地, 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종목 사적 제461호
(2005년 3월 25일 지정)
시대 조선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270-1 외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9 외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놓여진 다리이다. 〈서울지도〉에 다리 표시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알 수 없다서울의 하천〉 239쪽
  •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 광통교(廣通橋) :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 광제교(廣濟橋) : 지금의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로, 〈동국여지비고〉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10]
  •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개별)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하랑교(河浪橋)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랑위교(河浪尉橋), 화교(樺橋 또는 花橋), 화류교(樺榴橋), 하교(河橋)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관수교와 세운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교(新橋) : 장사동 250번지 일대에 있었던 다리로, 하랑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경지략〉에만 기록되어 있던 다리다. 창덕궁과 남산의 조선신궁을 일직선으로 연결했으며, 1900년대 이후 경성의 돌다리를 콘크리트로 바꿀 때 가장 먼저 바뀌었다. 이 다리는 백운동천 상류에 있던 신교와는 다른 다리다.[11]
  • 효경교(孝經橋) : 영풍교(永豊橋), 효교(孝橋),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했다.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세운교와 배오개다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했다.
  • 태평교(太平橋) : 창선방교(彰善坊橋), 마전교, 오교(午橋)라고도 불렸다. 다리 부근에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다리다. 1907년 일제가 오간수문을 헐어버린 뒤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 영도교(永渡橋)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흥선대원군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현재의 다리[편집]

조선시대의 다리를 계승한 경우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 모전교 :
    첫 번째 다리 모전교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광통교 :
    두 번째 다리 광통교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세월교 :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
  • 광교 :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장통교 : 도보 전용 다리이며,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였다.
  • 삼일교 :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 수표교 :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다리이다. 하지만 기존의 수표교를 다시 옮기는 데 문제가 많아 계속 사용된다.
  • 관수교 :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세운교 : 옛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 배오개다리 : 옛날 배나무가 심어져 있어 이름이 유래된 배오개(배고개)가 인근에 있어 그 이름을 땄다. 창경궁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새벽다리 :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이른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 마전교 : 부근에 우마를 팔고사는 마전이 조선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였다. 동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나래교 :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다리로,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 해서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나래1교이었다.
  • 전태일다리(버들다리) : 청계천에 자라는 버들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전태일(全泰壹, 1948년~1970년) 열사 분신 40주년을 기해 2010년 11월 13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푸른내다리다.
  • 오간수교 : 조선시대에 있던 오간수문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율곡로와 장충단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맑은내다리 :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나래2교이었다.
  • 다산교 :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영도교 :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이다.
  • 황학교 : 황학동에 위치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비우당교 :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유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하정로와 마장로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 무학교 : 무학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무학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두물다리 :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 고산자교 : 고산자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고산자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신답철교 : 중앙선의 철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장동철교, 청계천 복개 당시에는 마장철교로도 불렸다.
  • 제2마장교 : 마장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마장역신답역이 있다.
  • 사근인도교 : 용답역의 2번출구로,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 세월교 :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다리다. (상류의 세월교와는 다르다)

사진[편집]

등장하는 작품[편집]

영화

  • 기다리다 미쳐 (2007년)
  •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 (2007년)
  • 집나온 남자들 (2009년)
  • 전우치 (2009년)
  • 초능력자 (2010년)
  • 피에타 (2012년)

드라마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한국하천일람》 108-109쪽, 국토교통부 한강홍수통제소, 2012년 12월 31일 발간, 2014년 10월 5일 확인.
  2. 청계천의 원류로 볼 수 있는 하천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이요 다른 하나는 삼청공원에서 발원하는 중학천이다. 현재는 둘 모두 복개된 상태인데, 백운동천(복개 구간 2.50km+수성동 계곡 0.30km)이 중학천(복개 구간 2.40km)보다 더 길어 청계천 본류의 지위를 차지한다.
  3. '서울특별시의회 제254차 임시회 제5차 교통위원회 회의록', 서울특별시의회 사무처, 2014년 7월 24일 작성, 2014년 10월 5일 확인.
  4. 민선 서울 15년 최악 사업은 '신청사 건립'
  5. 되살아난 도심 환경
  6. 청계천 복원..23조원 경제유발효과
  7. 《직선들의 대한민국》, 우석훈.
  8. 청계광장 스프링은 국운에 악영향 옮겨야 《동아일보》 2008-10-23
  9. "청계천 옛 물길 2050년까지 완전 복원", 한국일보, 2013.11.28 작성, 2014.2.9 확인
  10. 〈서울의 하천〉 242쪽
  11. 〈서울의 하천〉 244쪽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