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 청계천 | |
| 건립 연대 | 1410년 이후 |
|---|---|
| 현 소재지 | |
좌표: 37°34′10″N 127°00′07″E / 37.569464°N 127.001975°E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남산, 북악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목차 |
[편집] 역사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1]
1930년대부터 시작된 복개 사업과 1970년대에 완공된 청계고가도로의 환경 오염 및 노후에 따른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편집] 복원 사업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공약사항으로 추진되었으며,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는 복원 사업이 서울특별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 km의 구간이 복원되어 산책로, 녹지 등이 설치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에 흐르는 물은 청계천 본래 지류가 아닌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한다. 사업비는 386,739백만원 소요되었다. 청계천 통수(通水), 자동차 운행 감소, 고가도로 철거에 따른 바람길 형성 등의 영향으로 청계천변 숭인빌딩 앞의 기온이 평균 3.6도 낮은 것으로 측정됐다. [2]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일례로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저서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복원된 청계천을 "인공호수"라며 호되게 비판한 바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유적과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으나, 이전 복원이나 현장 보존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3]
[편집] 다리
[편집] 과거의 다리
조선 시대의 청계천의 다리 목록이다. 백운동천의 신교부터 송기교까지의 다리는 백운동천의 과거의 다리에 있다.
| 지정번호 | 사적 제461호 (2005년 3월 25일 지정)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270-1 외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9 외 |
| 제작시기 | 조선 |
-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놓여진 다리이다. 〈서울지도〉에 다리 표시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알 수 없다.[4]
-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 광통교(廣通橋) :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 광제교(廣濟橋) : 지금의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로, 〈동국여지비고〉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5]
-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개별)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하랑교(河浪橋)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랑위교(河浪尉橋), 화교(樺橋 또는 花橋), 화류교(樺榴橋), 하교(河橋)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관수교와 세운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교(新橋) : 장사동 250번지 일대에 있었던 다리로, 하랑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경지략〉에만 기록되어 있던 다리다. 창덕궁과 남산의 조선신궁을 일직선으로 연결했으며, 1900년대 이후 경성의 돌다리를 콘크리트로 바꿀 때 가장 먼저 바뀌었다. 이 다리는 백운동천 상류에 있던 신교와는 다른 다리다.[6]
- 효경교(孝經橋) : 영풍교(永豊橋), 효교(孝橋),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했다.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세운교와 배오개다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했다.
- 태평교(太平橋) : 창선방교(彰善坊橋), 마전교, 오교(午橋)라고도 불렸다. 다리 부근에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다리다. 1907년 일제가 오간수문을 헐어버린 뒤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 영도교(永渡橋)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편집] 현재의 다리
모전교부터 고산자교에 이르기까지 복원 사업 대상 구간에는 총 22개의 다리가 있다. 이 중 광통교와 장통교, 수표교, 세운교, 새벽다리, 나래교, 맑은내다리, 두물다리는 보도용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차도, 보도를 혼용하여 사용된다. 그 외에도 제2마장교, 세월교, 세월1교, 세월2교, 세월3교 등 8개 정도의 다리가 더 있다.
- 모전교 :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동 길에 위치하고 있다.
- 광통교 : 광통방에 있었던 큰 다리였기 때문에 광통교라고 부렀다.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세월교 :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
- 광교 : 남대문로의 광교 사거리에 위치를 하고 있으며, 옛 광통방 근처 넓은 다리라는 의미로 광교로 불렀다. 옛날 광통교 자리에 있었다.
- 장통교(관철교) : 중부 장통방에 있던 다리라서 장통교 또는 장교라고 부른다. 개설 당시 명칭은 관철교였다.
- 삼일교 : 삼일로를 연결하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삼일로는 독립선언을 한 탑골공원과 인접한 거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 임시보도교(수표교) : 1441년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청계천에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있었는데, 이 수표의 이름을 따서 수표교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었던 자리에 임시로 지어진 다리이다. 현재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정식 명칭은 임시보도교지만, 현재는 주로 수표교로 불린다.
- 관수교 :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세운교 : 옛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 배오개다리 : 배오개길과 연결되는 다리이다. 옛날 이 고개의 입구에 배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배고개라고 하던 것이 배오개로 되었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배오개교이었다.
- 새벽다리 :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주단과 포목을 팔던 광장재래시장과 인쇄와 지물을 팔던 방산재래시장 등 이른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 마전교 : 마전이란 우마를 팔고사는 곳을 뜻하는데, 부근에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유래이다. 근처의 마장동의 이름 유래와 비슷하다.
- 나래교 :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다리로,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 하였다.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나래1교이었다.
- 전태일다리(버들다리) : 통일상가 앞에 위치한 다리로, 전태일(全泰壹, 1948년~1970년) 열사 분신 40주년를 기해 2010년 11월 13일 이름을 변경했다. 주변에는 평화시장과 동화시장, 광의, 덕운시장 등의 전통 재래시장이 있었다. 2010년 개칭 이전에는 버들다리로 불렸으며,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푸른내다리다.
- 오간수교 : 청계6가 흥인문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는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으로 다섯칸의 다리로 되어 있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 맑은내다리 : 인도 전용 다리로, 동평화 상가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꾼이름으로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다리 명칭으로 결정지었다. 이 다리도 날개를 활짝 편 나비의 형상과 힘찬 비상을 나타내는 아치구조로 되어 있으며,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나래2교이었다.
- 다산교 :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딴 다산로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 영도교 : 인도 전용 다리로,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이치교이다. 1458년 세조 4년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향갈 때, 그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영영 이별을 고하였다 하여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건넌다리라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 후 정순왕후는 출가하여 일생을 불가에 귀의하였다.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석조를 헐어다가 사용하였는데, 후에 나무다리가 놓였으나 유실이 잦았다고 전한다.
- 황학교 : 청계 8가 난계로에 위치하며, 황학동에 있어서 황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서 황학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 세월1교 :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7]
- 비우당교 : 동대문구 신설동과 성동구 왕십리동을 잇는 다리이다. 조선 세종 때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하정 유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이 이 다리 근처였는데, 그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 비우당교라 하였다.
- 무학교 : 조선 조 한양을 도읍으로 지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의 이름을 딴 무학로를 잇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무학교라고 이름지었다.
- 세월2교 : 무학교와 두물다리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7]
- 두물다리 : 두 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로, 청계천의 지류가 합류하던 지점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루었다. 공사 당시 임시명칭은 두물교이었다.
- 세월3교 : 두물다리와 고산자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7]
- 고산자교 : 고산자 김정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고산자로를 잇는 다리라서 고산자교라고 이름지었다.
- 신답철교 : 중앙선의 철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장동철교, 청계천 복개 당시에는 마장철교로도 불렸다.
- 제2마장교 : 마장동과 용답동을 잇는 다리이다. 서쪽에는 마장역, 동쪽에는 신답역이 있다.
- 사근·용답간 인도교 : 용답역의 2번출구로, 용답역을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까지 있는 역할을 한다.
- 세월4교 :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다리다.
[편집] 생태
2009년을 기준으로 식물은 식재종을 포함하여, 314종이며, 나머지는 다음과 같다.[8]
- 식물: 물억새, 노랑꽃 창포, 갯버들, 찔레꽃, 창포, 갈대, 붓꽃 등
- 어류: 27종
- 조류: 34종
- 제비, 까치, 괭이갈매기, 논병아리, 청둥오리, 직박구리, 참새, 왜가리, 백할미새, 황조롱이, 쇠백로, 붉은머리오목눈이
[편집] 석축 터
1773년 영조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현 무교동 사거리에서 시작된다. 이는 청계천을 따라 17.1미터의 폭을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복원 당시 발견된 석축은 동아일보사 앞의 좌안석축이 교차로를 기준으로 서쪽 57m, 동쪽 36m 정도, 반대편 우안석축은 9m 정도로 모두 100여 미터나 된다. 이를 보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청계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광통교와 광교 사이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편집] 가산 터
이 부분의 본문은 가산 (인공 산)입니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다. 이 가산들은 1760년 2월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편집] 작품
[편집] 스프링
이 부분의 본문은 소라탑입니다.
청계천 입구에 위치하며,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한 작품으로, KT가 34억의 비용을 들여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다. 높이 20m, 폭 6m, 무게 9t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적인 미가 결여되어 있고, 주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비판과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9]
[편집] 그 외
반차도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타일로 설치된 벽면 예술이다. 172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것이다.[10]
청계천 빨래터 옛 청계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는데, 이를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존치교각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은 것이다.
[편집] 평가
2011년 6월 조선일보가 건축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청계천은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혔다. 건축가들은 "청계천은 한국을 상징하는 공공 건축물인데 건축가도 없이 단기간에 불도저로 밀어붙이듯 만들었다"고 지적했다.[11]
[편집] 사진
[편집] 교통
[편집] 지하철
- 동대문역 : ● 수도권 전철 1호선· ● 수도권 전철 4호선
- 동묘앞역 : ● 수도권 전철 1호선 · ● 서울 지하철 6호선
- 신답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용답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용두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을지로입구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을지로3가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 수도권 전철 3호선
- 을지로4가역 : ● 서울 지하철 2호선 · ● 서울 지하철 5호선
- 종각역 : ● 수도권 전철 1호선
- 종로3가역 : ● 수도권 전철 1호선 · ● 수도권 전철 3호선 · ● 서울 지하철 5호선
- 종로5가역 : ● 수도권 전철 1호선
[편집] 청계천이 나온 방송 및 영화
영화
드라마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청계천의 탄생, 종로청계관광특구
- ↑ 되살아난 도심 환경
- ↑ 청계천 고가 밑 보물창고, 누가 파괴했나?《오마이뉴스》12.01.20 11:23
- ↑ 〈서울의 하천〉 239쪽
- ↑ 〈서울의 하천〉 242쪽
- ↑ 〈서울의 하천〉 244쪽
- ↑ 가 나 다 〈청계천 복원사업 백서 ②〉
- ↑ 동식물가족. 2010년 5월 21일에 확인.
- ↑ 조창현 기자 (2008년 10월 23일). 청계광장 스프링은 국운에 악영향 옮겨야. 동아일보. 2008년 12월 2일에 확인.
- ↑ 구룡초부 (2006년 12월 11일). 화성행차를 따라서 (1) 반차도. 2008년 12월 2일에 확인.
- ↑ 건축가들 "최악은 오세훈의 광화문광장, 3위는 MB 청계천" 뷰스앤뉴스 2011년 6월
[편집] 바깥 고리
|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 공식 홈페이지
- 청계천 복원사업 - 서울특별시 시청
- 청계천 10경
- 네이버 캐스트 : 여행 - 청계천
|
서울특별시에 흐르는 물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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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 | |
| 파류 | |
| 하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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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