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구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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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반적인 궁가의 문장

일본의 구황족(旧皇族)은 1947년일본국 헌법이 시행됨에 따라 황적을 이탈한 11개의 궁가(宮家)[1]들을 지칭한다. 26명의 남성 자손들을 비롯하여 총 51명의 황족들이 신적강하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황족의 특권을 잃는 대신 성씨와 선거권을 포함해 평민으로서의 신분과 권리가 새로 주어졌다. 이후 구황족들은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현재까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황실에서 오랫동안 남자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구황족들을 다시 황족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 적도 있다.[2]

신적강하[편집]

신적강하(臣籍降下)란 원래 일본 황족이 특정한 사유가 있을 경우[3] 평민의 신분이 되는 것을 뜻하지만, 주로 1947년에 대부분의 황족 가문들이 동시에 황적을 이탈한 것을 지칭한다. 1945년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새로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만민평등의 원칙에 따라 화족을 비롯한 기존의 귀족 계급[4]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당시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방대한 황실을 운영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점이었다.[5]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경우엔 자청해서 황적을 이탈하겠다고 언론에 밝히면서 다른 황족들도 동참하기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에 궁내청은 당황하여 이를 부정하는 성명을 냈으며, 여러 황족들도 반발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현실적인 문제들이 겹치면서 다이쇼 천황의 직계 자손을 제외한 방계 황족 가문 총 11개의 궁가들이 신적강하의 대상이 되었다.[6]

구황족 궁가[편집]

구황족 가문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개창되었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여러 궁가들은 원래 천황의 직계자손이 끊길 경우 후계를 잇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구황족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1947년의 신적강하로 평민이 된 11개의 방계 황족 가문들을 의미한다.

후시미궁[편집]

23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후시미궁(伏見宮)은 가쓰라궁(桂宮)[7], 아리스가궁(有栖川宮)[8], 그리고 칸인궁(閑院宮)과 더불어 4대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중 하나이다. 이들은 왕 대신 친왕(親王)의 호칭을 사용하고 황위 계승권에서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현재의 일본 황실도 후시미궁의 계통이다.[9]

역사[편집]

난보쿠초 시대에 북조 스코 천황의 제1황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반대로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대신 후시미궁을 개창하였다. 이후 3대 당주 사다후사의 아들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는 등, 천황을 배출하기도 하며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각종 황실 궁가들은 대부분 후시미궁 가문의 계통이다.

23대 당주 히로야스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의 장군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당주인 히로아키왕은 쇼와 22년(1947년)의 신적강하로 황적을 이탈한 뒤, 후시미씨를 자칭한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伏見宮 栄仁) 1351 1409 . 1416 북조 스코 천황의 제1황자
2 후시미노미야 하루히토(伏見宮 治仁) 1370 1416 . 1417
3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伏見宮 貞成) 1372 1425 1447 1456 고하나조노 천황의 부친
4 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伏見宮 貞常) 1426 1456 . 1474
5 후시미노미야 구니다케(伏見宮邦高) 1456 1474 1516 1532
6 후시미노미야 사다아쓰(伏見宮 貞敦) 1488 1504 1545 1572
7 후시미노미야 구니스케(伏見宮 邦輔) 1513 1531 . 1563
8 후시미노미야 사다야스(伏見宮 貞康) 1547 1563 . 1568
9 후시미노미야 구니노부(伏見宮 邦房) 1566 1575 . 1622
10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伏見宮 貞清) 1596 1605 . 1654
11 후시미노미야 구니나리(伏見宮 邦尚) 1615 1626 . 1654
12 후시미노미야 쿠니미치(伏見宮 邦道) 1641 1649 . 1654
13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伏見宮 貞致) 1632 1660 . 1694
14 후시미노미야 구니나가(伏見宮 邦永) 1676 1695 . 1726
15 후시미노미야 사다타케(伏見宮 貞建) 1701 1715 . 1754
16 후시미노미야 구니타다(伏見宮 邦忠) 1732 1743 1754 1759
17 후시미노미야 사다모치(伏見宮 貞行) 1760 1763 . 1772 모모조노 천황의 아들
18 후시미노미야 구니요리(伏見宮 邦頼) 1733 1774 . 1802
19 후시미노미야 사다요시(伏見宮 貞敬) 1776 1797 . 1841
20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伏見宮 邦家) 1802 1817 . 1872 이 대부터 각종 궁가들이 파생되었다.
21 후시미노미야 사다노리(伏見宮 貞教) 1836 1848 . 1862
22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伏見宮 貞愛) 1858 1862 . 1923
23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 博恭) 1875 1923 . 1946 일본제국 해군 장군으로 러일전쟁 참전, 부상을 입음[10]
24 후시미노미야 히로아키(伏見宮 博明) 1932 1946 1947 . 히로야스의 손자, 현재 당주

신적강하 대상[편집]

후시미궁은 당주를 포함해 4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후시미 히로아키(伏見博明) : 24대 당주로, 당시 15세였다. 훗날 모빌석유에 근무한다.
  • 후시미 아사코(伏見朝子) : 당주의 모친
  • 후시미 미쓰코(伏見光子) : 당주의 여동생
  • 후시미 아키코(伏見章子) : 당주의 여동생

간인궁[편집]

마지막 당주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간인궁(閑院宮)은 4대 세습친왕가의 하나로, 에도 시대 중기에 히가시야마 천황의 나오히토(直仁) 황자가 창설하였다.

역사[편집]

일본의 조정에서는 황위 계승자 이외의 황자들의 경우 모두 출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1654년고코묘 천황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천황과 가까운 황족 남성들이 모두 출가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까지는 일단 출가한 황족이 환속한 전례가 없었으므로,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까지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화정궁(花町宮)의 황자가 고사이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나, 이와 같은 문제를 염려한 히가시야마 천황이 이런 경우 황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아들 나오히토로 하여금 세습친왕가를 하나 더 개창하도록 하였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간인노미야 나오히토(閑院宮 直仁) 1704 1718 . 1753
2 간인노미야 스케히토(閑院宮 典仁) 1733 1753 . 1794
3 간인노미야 하루히토(閑院宮 美仁) 1768 1794 . 1818
4 간인노미야 다쓰히토(閑院宮 孝仁) 1792 1818 . 1824
5 간인노미야 나루히토(閑院宮 愛仁) 1818 1828 . 1842
6 간인노미야 고토히토(閑院宮 載仁) 1865 1872 . 1945
7 간인노미야 하루히토(閑院宮 春仁) 1902 1945 1947 1988 일본 육군 기병 소위 출신. 최종계급은 소장.

신적강하 대상[편집]

간인궁에서는 당주 부부가 황적을 이탈하였다. 칸인궁은 1988년에 단절되었다.

  • 간인 스루히토(閑院純仁)[11] : 7대 당주
  • 간인 나오코(閑院直子)

야마시나궁[편집]

마지막 당주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야마시나궁(山階宮)은 에도시대 말엽, 후시미궁의 왕자 아키라(晃) 친왕이 창설하였다.

역사[편집]

후시미궁의 20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의 아들 후시미노미야 아키라는 1824년에 출가하였으나 황족으로써 잇따른 불상사를 일으켜 제적되었다. 그러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이 환속시켜 줄 것을 권유하자, 환속하는 대신 야마시나궁의 궁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에도막부 말기의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황족들은 대체적으로 서양 왕족들의 예를 따라 군인이 되었는데, 그는 드물게 문관직에 올라 활동하기도 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山階宮 晃親) 1816 1864 . 1898
2 야마시나노미야 기쿠마로(山階宮 菊麿) 1873 1898 . 1908
3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山階宮 武彦) 1898 1908 1947 1987 황족 중 최초로 해군 항공대에 소속

신적강하 대상[편집]

야마시나궁은 당주 1명만 황적을 이탈하였다.

  • 야마시나 다케히코(山階武彦) : 3대 당주. 1987년에 사망함으로써, 가문은 단절되었다.

기타시라카와궁[편집]

4대 당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일본제국 육군 소좌 역임

기타시라카와궁(北白川宮)은 메이지 시대 초기에 후시미궁의 사토나리(智成)친왕이 창설하였다.

역사[편집]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13남 사토나리는 1866년에 중이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8년에 다시 환속한 뒤 기타시라카와궁을 창설하였다. 이후 5대 당주인 미치히사의 대에 이르러 황적을 이탈하였는데,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유일한 민간인 남성 황족이었다.[12] 현재까지도 건실하게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미치히사의 여동생 하쓰코(肇子)는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의 부인 후보에 올랐으며, 미치히사의 장녀도 나루히토 황태자의 유력한 부인 후보로 오른 적이 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北白川宮 智成) 1844 1872 . 1872
2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北白川宮 能久) 1847 1872 . 1895 사토나리의 동생
3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 成久) 1887 1895 . 1923
4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 永久) 1910 1923 . 1940
5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미치히사(北白川宮 道久) 1937 1940 1947 .

신적강하 대상[편집]

기타시라카와궁은 당주 포함 4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기타시라카와 미치히사(北白川道久) : 5대 당주. 황적 이탈 당시 10세
  •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
  • 기타시라카와 사치코(北白川祥子)
  • 기타시라카와 하쓰코(北白川肇子)

구니궁[편집]

3대 당주 구니노미야 아사키라. 신적강하 이후 향수 사업에 손 대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구니궁(久邇宮)은 메이지 시대 전기에 후시미궁의 아사히코(朝彦)왕자가 창설하였다.

역사[편집]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 아사히코는 원래 출가하였으나 1863년에 환속하였다. 원래 나카가와궁(中川宮)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나, 1875년에 구니궁으로 바꾸었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에도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사이의 격동기를 생생히 증언한 『아사히코친왕일기』(朝彦親王日記)가 있다. 3대 당주 아사키라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엽 해군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신적강하 이후에는 향수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 朝彦) 1824 1863 . 1891 1871년에 친왕으로 승격
2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 邦彦) 1873 1891 . 1929 고준 황후의 부친
3 구니노미야 아사키라(久邇宮 朝融) 1901 1929 1947 1959
4 구니[13] 구니아키(久邇 邦昭) 1929 1959 . .

신적강하 대상[편집]

구니궁은 당주를 포함해 총 10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고준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었으나, 예외는 없었다. 가장 많은 수의 황족이 이탈당한 가문이기도 하다.

  •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 : 3대 당주
  • 구니 구니아키(久邇邦昭) : 일본 해군사관학교 재학 중이었다.
  • 구니 아사다케(久邇朝建)
  • 구니 아사히로(久邇朝宏)
  • 구니 지카코(久邇俔子)
  • 구니 시즈코(久邇静子)
  • 구니 아사코(久邇朝子)
  • 구니 미치코(久邇通子)
  • 구니 에이코(久邇英子)
  • 구니 노리코(久邇典子)

나시모토궁[편집]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딸 마사코는 조선의 왕세자 이은과 혼인한 뒤 이방자로 개명하였다

나시모토궁(梨本宮)은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貞敬)왕자가 창설한 가문이다.

역사[편집]

후시미궁의 19대 당주 사다요시의 9남이자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의 동생인 사다유키 왕자는 출가하여 원만원(円満院)이라는 사찰에 들어갔다. 그러다 메이지 원년인 1868년에 환속하여 미정궁(梶井宮)을 개창했다가, 1871년에 나시모토궁으로 개명하였다.[14] 그러나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야마시나궁 출신의 키쿠마로가 잠시 양자로 들어와 당주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쿠니궁의 아사히코의 4남이 가문을 계승하니, 이가 바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이다.

나리모토노미야 모리마사에게는 딸만 둘 있었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유력 후보였던 장녀 마사코는 조선의 이은 왕세자와 정략 결혼하게 되었다.[15]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는 일본 육군 원수를 역임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기소되어 재판받기도 했다.[16] 신적강하 이후에는 잇따른 도난 사고가 발생하여, 재산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나시모토노미야 모리오사(梨本宮 守脩) 1819 1870 . 1885
2 나시모토노미야 기쿠마로(梨本宮 菊麿) 1873 1885 1885 1908 야마시나궁 출신으로, 잠시 양자로 들어와 당주직을 맡았다.
3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 1874 1885 1947 1951 이방자 여사의 부친이다.

신적강하 대상[편집]

나시모토궁(梨本宮)은 당주 부부가 황적을 이탈하였다.

가야궁[편집]

2대 당주 가야 쓰네노리. 생전 계급은 육군 중장까지 올랐다

가야궁(賀陽宮)은 메이지 시대 중기에 구니궁(久邇宮) 출신 구니노리(邦憲)왕이 창설하였다.

역사[편집]

구니궁을 개창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차남 구니노리는 원래 쿠니궁을 계승할 예정이었지만, 병약하여 동생에게 양보하였다. 대신 교토에서 새로운 궁을 개창하여,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가야라는 궁호를 하사받았다. 2대 당주 츠네노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엽 육군 중장까지 올랐으나, 전후에는 직접 구청으로 가서 황적 이탈의 수속을 마쳤다. 쓰네노리는 야구 애호가이기도 하였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가야노미야 구니노리(賀陽宮 邦憲) 1867 1896 . 1909
2 가야노미야 쓰네노리(賀陽宮 恒憲) 1900 1909 1947 1978
3 가야 노부히코(賀陽 信彦) 1922 1978 . 1986
4 가야 하루노리(賀陽 治憲) 1926 1987 . . 현직 외교관

신적강하 대상[편집]

당주를 포함해 총 8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가야 쓰네노리(賀陽恒憲) : 2대 당주
  • 가야 토시코(賀陽敏子)
  • 가야 구니나가(賀陽邦寿) : 당시 육군 대위였다. 이후 카야 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 된다.
  • 가야 하루노리(賀陽治憲) : 일본 해군사관학교 제75기 졸업. 이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교관이 된다.
  • 가야 아키노리(賀陽章憲)
  • 가야 후미노리(賀陽文憲)
  • 가야 무네노리(賀陽宗憲)
  • 가야 다케노리(賀陽健憲)

아사카궁[편집]

아사카 다케히코. 제2차 세계 대전 이 끝나자 항공회사에 취직하였다

아사카궁(朝香宮)은 메이지 시대 후기에 쿠니궁의 야스히토왕(鳩彦王)이 창설한 가문이다.

역사[편집]

쿠니노미야 아사히코의 8남 야스히토는 프랑스 유학파로, 군인이 된 후에는 육군 대장까지 올랐다. 그는 전쟁 말엽에 이르러서도 강력히 항전을 주장했다. 황적 이탈 후에는 골프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다케히코는 육군 중령이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도쿄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하면서 항공 공학을 배워, 일본 항공 운항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아사카노미야 야스히토(朝香宮 鳩彦) 1887 1906 1947 1981
2 아사카 다케히코(朝香 孚彦) 1913 1981 . 1994 도쿄대학교에서 청강생으로 항공 공학을 배워, 일본 항공 운항부에 취직했었다.
3 아사카 도모히코(朝香 誠彦) 1944 1994 . .

신적강하 대상[편집]

아사카궁은 당주 포함 6명이 황적을 이탈한다.

  • 아사카 야스히토(朝香鳩彦) : 초대 당주
  • 아사카 다케히코(朝香孚彦) : 당시 일본 육군 중령
  • 아사카 도모히코(朝香誠彦)
  • 아사카 지카코(朝香千賀子)
  • 아사카 후쿠코(朝香富久子)
  • 아사카 미네코(朝香美乃子)

히가시쿠니궁[편집]

히가시쿠니궁을 개창한 나루히코.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막을 내리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전후처리에 주력하였지만, 54일이라는 가장 수명이 짧은 정권으로 막을 내렸다

히가시쿠니궁(東久邇宮)은 메이지 시대 후기에 쿠니궁의 나루히코왕(稔彦王)이 개창하였다.

역사[편집]

쿠니노미야 아사히코의 9남 나루히코는 당시 황실 관례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하여 그 직위가 대장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그는 쇼와 천황의 부탁으로 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황족 내각을 출범시켰다. 제43대 총리대신으로 취임한 그는 전후처리에 주력하였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부 (GHQ)의 적극적인 민주화 방침에 의해 54일이라는 최단기 정권으로 막을 내렸다. 구황족 중에서는 현재의 천황가와 가장 혈연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구황족의 복귀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항상 유력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 稔彦) 1887 1906 1947 1990 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17]
2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宮 信彦) 1944 1990 . . 나루히코의 손자

신적강하 대상[편집]

히가시쿠니궁은 당주 포함 7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 : 초대 당주. 제 43대 내각총리대신 역임
  • 히가시쿠니 도시코(東久邇聡子)
  • 히가시쿠니 시게코(東久邇成子)
  • 히가시쿠니 모리히로(東久邇盛厚)
  • 히가시쿠니 도시히코(東久俊彦)
  •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
  • 히가시쿠니 후미코(東久邇文子)

다케다궁[편집]

2대 당주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

다케다궁(竹田宮)은 기타시라카와궁의 쓰네히사(恒久)왕이 창설하였다 .

역사[편집]

기타시라카와궁의 2대 당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의 장남 츠네히사는 육군 중장으로 러일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2대 당주 쓰네요시는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황적 이탈 이후에는 기계 회사를 설립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쓰네요시는 육군 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스케이트를 즐기던 취미를 되살려, 스케이트를 비롯해 각종 스포츠 활동에 뛰어들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竹田宮 恒久) 1882 1906 . 1919
2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竹田宮 恒徳) 1909 1919 1947 1992 그의 3남 츠네카즈는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손자가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18]
3 다케다노 쓰네타다(竹田 恒正) 1940 1992 . .

신적강하 대상[편집]

다케다궁은 당주 포함 6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다케다 쓰네요시(竹田恒徳) : 2대 당주
  • 다케다 미쓰코(竹田光子)
  • 다케다 쓰네타다(竹田恒正)
  • 다케다 쓰네하루(竹田恒治)
  • 다케다 모토코(竹田素子)
  • 다케다 노리코(竹田紀子)

히가시후시미궁[편집]

히가시노미야 요리히토

히가시후시미궁(東伏見宮)은 메이지 시대 후기에 후시미궁의 요리히토(依仁)친왕이 창설하였다. 남성 후계자가 없어 1대만에 단절되었지만[19], 화족의 백작가문으로 편입되어 신적강하 때까지 존속하였다.

역사[편집]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의 17남 요리히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영국조지 5세의 대관식에도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황실 외교를 펼쳤지만, 아들을 갖지는 못했다. 그의 사망으로 인해 개창했던 히가시후시미궁은 1대만에 단절되었으나, 쇼와 천황의 배려로 화족 중 백작의 작위를 얻어 가문의 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쿠니노미야 쿠니요시의 3남 지고(慈洽)가 제사를 맡으면서 가문도 비공식적으로나마 함께 이어가고 있다.[20]

역대 당주[편집]

이름 출생 당주 취임 은퇴 사망 비고
1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東伏見宮 依仁) 1876 1903 . 1922

신적강하 대상[편집]

히가시후시미궁에서는 1명이 황적을 이탈하였다.

  • 히가시후시미 가네코(東伏見周子) : 1955년에 사망함

이왕가[편집]

이방자 여사. 1989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족들은 한일 병합 이후 왕공족으로 편입되어 일본 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또한 선일융화(鮮日融和)의 명목[21] 아래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 마사코와, 덕혜옹주는 대마도 출신 화족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각각 정략결혼하게 되었다. 마사코는 조선식 이름인 이방자(李方子)로 개명하였는데, 정략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금실은 매우 좋았다.[22]

이후 1926년에 이왕(李王)이었던 순종이 사망하자, 왕세자 이은이 이왕직을 계승하였다. 왕세자 이은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조선의 왕실인 이왕가(李王家)도 1947년의 신적강하의 대상에 포함되어, 그 신분과 특권을 모두 잃었다.[23] 이은을 비롯하여 일본에 남아 있던 옛 조선 왕족들은 귀국을 희망했는데,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24]로 인해 1962년까지 일본에 남겨져 곤궁하게 살아야만 했다.

구황족 근황[편집]

황적을 이탈한 후에도 황실의 친척이라고 하는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으며,[25] 황태자비나 내친왕의 남편 등 황족의 배우자를 구할 때에도 늘 주요 후보군으로 물망에 오른다.

국영친목회[편집]

일본의 구황족들은 황적을 이탈한 후에도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를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매해 신정일본 천황의 생일 때마다 정기적으로 모이며 현재의 황실 가문들과 교제한다. 정회원은 황족과 구황족 가문의 당주 부부 및 평민 남성과의 결혼에 의해 신적강하된 옛 내친왕[26] 등 37명으로 구성되며, 천황, 황후, 황태자 그리고 황태자비 등은 명예 회원이다.

황적 복귀 논란[편집]

일부에서는 오랫동안 황실에서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자, 황위 계승 문제 등과 관련하여 구황족을 다시 황족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였다[27]. 실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시절에 구황족 중 남자 후손들을 천황이나 황족들의 양자로 용인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하였다.[28] 하지만 지난 60여년간 평민으로 지내온 이들을 다시 황족으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이며, 실제로 현재까지 황적을 이탈했다가 다시 복귀한 사례는 없다.[29]

함께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간인 스루히토, 《일본사상의 비록》, 일본민주협회, 1968년
  • 다카시 후지타니, 《훌륭한 왕조 : 현대 일본의 권력과 화려한 왕실 행사[30]》,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사, 1998년
  • 다케다 쓰네야스, 《구황족이 말하는 천황의 일본사》,PHP연구소, 2008년

주석[편집]

  1. 일본 황실의 방계 가문 통칭
  2. "日, 양자 입적 황위계승 방안 검토" 연합, 2005.1.23
  3. 아키히토 현 일본천황의 딸 사야코 공주가 평민인 구로다와 결혼한 것도 신적강하이다.
  4. 옛 지방영주 가문이나 공가 출신 귀족들
  5.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신적강하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6. 황실 전범 제11조 제1항, 제11조 제2항, 제13조와 제14조 등 적용
  7. 1881년에 유일한 여성 당주였던 요시코 내친왕의 사망으로 단절
  8. 111대 고사이 천황을 배출했으나 1913년에 단절
  9. 현재 천황가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伏見宮貞成) 친왕의 후손이다.
  10. 노무라 미노루, 《야마모토 이소쿠로 재고》, 중 159~174쪽
  11. 칸인노미야 하루히토는 신적강하 이후 스루히토(純仁)로 개명한다
  12. 다른 당주들의 경우 모두 전현직 군인이었다. 일본 제국 시절의 일본 황족들은(이왕가 포함) 대부분 군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13. 가문의 당주이지만 더 이상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궁호(노미야)는 제외한다 - 신적강하 이후 당주에 취임한 경우 궁호는 없다
  14. 이름도 모리오사로 개명
  15. 아이를 갖지 못하는 체질때문이라고 하지만, 마사코는 훗날 아들만 2명을 낳게 되었다
  16. 형무소에서 반년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다
  17. 일본상식문답 19, "총리 집무실이 쇼윈도이다?",뉴데일리, 2010.10.10
  18. 『語られなかった皇族たちの真実 - 若き末裔が初めて明かす「皇室が2000年続いた理由」』를 비롯해 수많은 황실 관련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19. 현재까지도 일본은 남성 당주만을 인정한다.
  20. 당시 일본 황실은 공식적으론 양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21. 조선과 일본의 화합이라는 뜻이다
  22. 하지만 덕혜옹주의 경우엔 부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여, 끝내 이혼하기에 이른다
  23. "조선왕실의 마지막 운명과 이구씨의 삶(1)" 연합, 2005.7.22
  24. "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한겨레 특집, 2006년 8월 24일 제 624호
  25. 민법 상 천황의 친족인 경우도 있다
  26. 이를테면, 2005년에 구로다와 혼인하여 평민이 된 아키히토 천황의 딸 사야코 공주
  27. 특히 히가시구니궁이 그 대상으로 빈번히 오르내린다
  28. "일, 양자 입적 황위계승 방안 검토" 매일경제(mbn), 2005.1.24
  29. 1947년의 대대적인 신적강하 이후에 다시 복귀한 사례는 없지만, 그 이전에는 드물지만 황적에 다시 복귀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30. 《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