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회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장회해
출생749년
입적814년
칭호임제종 10대 조사
또 다른 초상화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1]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법명은 회해(懷海)이다.[1] 위앙종과 임제종의 제9대 조사이다.

위앙종과 임제종의 8대조사인 마조도일의 제자이다. 당대에는 백장회해와 남전보원보다 대주혜해가 더 유명했다.[2]

주요 제자로는 임제종 10대조사인 황벽희운과 위앙종을 창시한 위산영우가 있다.

일생[편집]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에서 출생했다.[1]

서산혜조(西山慧照)를 따라 삭발하고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 밑에서 구족계(具足戒)를 깨우쳤다.[1]

여강(廬江)의 부차사에 들어가 그곳의 경장(經藏) 안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연구하였다.[1]

그 후 백장은 767년 무렵에는 남강(南康)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만나 사사받았다.[1] 마조 밑에서 수도해 대오하였다.[1]

후에 백장산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 제자를 지도하고 교화하였다.[1]

일화[편집]

마조완월(馬祖玩月) : 마조도일이 달을 희롱하다[편집]

어느 날, 마조도일이 수제자인 서당지장, 백장회해, 남전보원과 함께 달맞이를 갔다. 마조도일은 제자들에게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느냐고 물었다.[3]

서당지장은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대답했다.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전보원은 소매를 뿌리치고 그냥 가버렸다.[4]

마조도일이 말하기를, 경(經)은 서당지장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회해에게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보원만이 경계에서 벗어낫구나라고 했다.[5]

<백장청규>(百丈淸規)[편집]

백장회해는 <선원청규>를 제정하여, 선사를 율사로 부터 독립시켰다. 선종 1대 조인 달마대사부터 이때까지 율원에 더부살이를 하던 선원을 독립시켜 선종총림을 수립되게 하였다.[6]

이 말의 뜻은 설명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사찰 중에 총림이라고 하여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큰 사찰이 있다.[7] 사찰은 백장회해가 <청규>를 제정하기 이전에는 율원(경전을 공부하는 곳)이 중심이 되어 선원(선수행을 하는 곳)이 더부살이를 했는데, <청규> 제정 이후에는 독립이 되어 총림이라고 하는 큰 절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백장회해의 <청규>를 <백장청규>라고 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한다.
  • 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운다.
  • 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한다.
  • 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을 세운다.[8]

<청규> 중에 노동생산 참여 규정은 백장회해가“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말로 강조했다. 노동 자체가 선수행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말에 용성(龍城), 학명(鶴鳴)에 의해 선농불교(禪農佛敎)로 이어졌다.[9]

각주[편집]

  1.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선종의 발달 > 백장,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심, 정섭 (2011년 12월 19일). “단숨에 깨달아 도에 들어가는 길”. 《법보신문》. 법보신문.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대주는 당시 백장이나 남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3. 정운스님, 정운스님 (2019년 6월 13일). “[선의 르네상스 선지식] 10. 한국 禪의 원류, 서당지장”. 《현대불교》. 현대불교신문사.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어느 날 서당·백장·남전이 마조와 함께 달맞이를 갔다. 그 자리에서 마조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 
  4. 정운스님, 정운스님 (2019년 6월 13일). “[선의 르네상스 선지식] 10. 한국 禪의 원류, 서당지장”. 《현대불교》. 현대불교신문사.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서당지장이 말했다.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에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전만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렸다. 
  5. 정운스님, 정운스님 (2019년 6월 13일). “[선의 르네상스 선지식] 10. 한국 禪의 원류, 서당지장”. 《현대불교》. 현대불교신문사.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서당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에게로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만이 경계에서 벗어났구나.” -<경덕전등록> 中 
  6. 월암스님, 월암스님 (2006년 6월 28일).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선종사에서 백장회해의 업적은 선종이 달마 이래 혜능스님에 이르기까지 율종 사찰에 더부살이를 했는데, 〈백장청규〉에 의해 비로소 선종총림이 수립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장청규〉의 원래 내용은 다 알 수 없으나, 〈선문규식〉과 그 외 관련 전적에 일부가 인용되어 있어 그 대략의 내용과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선사(禪寺)를 율사(律寺)로부터 독립시키고 〈선원청규〉를 제정하고, 
  7. 김, 상영. “총림 (叢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선원 · 강원 ·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8. 월암스님, 월암스님 (2006년 6월 28일).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하고, 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우며, 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하며, 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을 세우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9. 월암스님, 월암스님 (2006년 6월 28일).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4일에 확인함. “하루 일하지 않으면(一日不作),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食)”는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 백장은 노동생산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의 이와 같은 선농불교(禪農佛敎)의 주창은 면면히 이어져 선종이 오늘날까지 생존해 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선농불교는 농사일과 참선수행을 반반씩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노동 그 자체가 그대로 수행으로 승화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백장의 청규정신은 선종의 생명이자 생활(수행)방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조선 말 용성(龍城), 학명(鶴鳴)선사 등에 의해 반농반선의 선농불교로 제기되고 있다. 

참고 문헌[편집]

전임
마조도일
제9대 중국 선종조사
788년 ~ 814년
후임
황벽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