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기타: 유묵 추가
94번째 줄: 94번째 줄:
== 기타 ==
== 기타 ==
===저서===
===저서===
* 그의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의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유묵===
[[서예]]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음: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뜻: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5690000,11&queryText=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 ([[대한민국 문화재청]])</ref>


===기념 사업===
===기념 사업===

2008년 11월 23일 (일) 13:52 판

안중근
출생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1910년 3월 26일
일본 제국의 국기일본 제국 료쥰
사인사형
성별남성
국적조선, 대한제국
별칭응칠(아명), 도마(세례명)
직업독립운동자
종교천주교
부모안태훈
배우자김아려
웹사이트http://www.greatkorean.org/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1]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생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1]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2],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김구와의 인연

김구가 동학난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의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안중근이 마지막 미사를 봉헌.
  • 1910년 3월 25일: 사형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시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3]

연보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백천조 씨 사이에서 출생.
  •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때 만주로 망명했다.
  •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 1909년 10월 26일: 거사
  •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순국.

평가

  •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4]즉, 안중근 의사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 고려대학교 사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4]
  •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4]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5]
  •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6]
  •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이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현감 역임
  •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 부인  : 김아려(金亞麗)
  •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7]
  • 둘째며느리 : 정옥녀
  • 딸: 안현생, 생사불명
  •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 손자 :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기타

저서

그의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유묵

서예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음: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뜻: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8]

기념 사업

  •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조선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 1963년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 1974년 안중근 의사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 1979년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 1979년 명동 천주교회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 1986년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 1990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 1999년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 2000년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 2000년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 2001년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 2002년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 2002년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 2003년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 2004년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다.
  • 2006년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9]
  •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10][11]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함께 보기

안중근의 역할을 연기한 배우들

주석

바깥 고리 및 참조 자료

틀:1999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