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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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일본왜구들은, 서쪽 마한백제지역 양반들의 기득권 및 카르텔을 깨기 위해, 경상도 노비들에게도 성씨를 부여해 줄 수 있는 민적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경상도 노비들도 원하는 성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노비천민 성씨는 경상도를 본관으로 두고 있다. 광산 김씨는 노비천민 성씨인가 ? 아닌가 ? 광주광역시 토종 성씨라면 양반 성씨가 맞겠지만, 경상도를 본관으로 둔다면 노비천민 성씨로 의심 받을것이다. 왜냐면 성씨는 고려시대 ~ 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벗어나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성씨는 노비천민 성씨일 가능성이 높다.
궁대균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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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
== 시조 ==

시조 김흥광은 신라 김알지 후예의 왕자로써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 추성군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시조 김흥광은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왕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광산김씨 정유대동보》, 《신라김씨선원보》, 《계림대보》, 《경주김씨보》 등에는 신라 45대 [[신무왕]]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김길(金吉)은 고려에 귀의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爵號)이자 세거지(世居地)인 광주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平章事: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平章里)로 불리고 있다.
김길(金吉)은 고려에 귀의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爵號)이자 세거지(世居地)인 광주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平章事: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平章里)로 불리고 있다.

2019년 12월 9일 (월) 07:58 판

광산 김씨(光山 金氏)
광산 김씨의 종문
관향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시조김흥광(金興光)
집성촌광주광역시 북구
전라남도 영암군·보성군·나주시·영광군
전라북도 남원시·군산시·고창군·무주군
주요 인물김태현, 김한로, 김국광, 김겸광, 김구, 김계휘, 김덕령, 김장생, 김집, 인경왕후, 김익희, 김익겸, 김익훈, 김익경, 김만기, 김만중, 김일경, 김춘택, 김상복, 김영철, 김동한, 김수환, 김춘수, 김우중, 김용준, 김대중, 김완주, 김하중, 김희중, 김장수, 김용옥, 김황식, 김효석, 김병조, 김용익, 김재균, 김우남, 김선수, 김선동, 김태년, 김용태
인구(2015년)926,316명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광주광역시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시조 김흥광은 신라 김알지 후예의 왕자로써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 추성군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시조 김흥광은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왕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광산김씨 정유대동보》, 《신라김씨선원보》, 《계림대보》, 《경주김씨보》 등에는 신라 45대 신무왕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김길(金吉)은 고려에 귀의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爵號)이자 세거지(世居地)인 광주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平章事: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平章里)로 불리고 있다.

역사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광산 김씨는 명문가로 명신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인 김집을 배출해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여주 이씨, 진보 이씨와 함께 6대 국반(國班)의 대열에 올랐다. 특히나 문묘 종사 현인을 한 가문에서 2명을 배출한 것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 송시열, 송준길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장생, 김집 뿐인데 송시열, 송준길이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이고 보면 광산 김씨의 업적은 실로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업적이다. 그들이 양간공파 대사간 김극뉴 후손들인 김장생·김집 부자이다.

이밖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고, 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문과 급제자 263명을 배출했다.[1]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다.(문형으로 불리는 양관대제학은 7명이나, 예문관 대제학(홍문관 설치 이전)을 지낸 김한로를 포함하면 8명이 된다.)

서석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 형제는 나란히 대제학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가 예조판서에 대제학, 그의 아들 김양택 또한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한 가문에서 3대가 대제학, 형제가 대제학을 배출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분파

광산 김씨는 크게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서직장공파' 5개파로 분류하며, 그 중 양간공파 후손들이 70%로 제일 많고 그 후손들 중에서 많은 명현들이 배출되었다.

  • 문정공파 - 15세 문정공 김태현
  • 문숙공파 - 14세 문숙공 김주정
  • 양간공파 - 14세 양간공 김연
  • 낭장공파 - 14세 낭장공 김규
  • 사온직장공파 - 17세 사온서직장 김영

집성촌

항렬자

  • 대동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