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Picto infobox music.png
장덕
張德
Deok Chang
기본 정보
출생 1961년 4월 21일(1961-04-21)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990년 2월 4일 (2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마포구
직업 가수,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 배우
장르 대중음악
악기 기타, 피아노, 첼로, 드럼
활동 시기 1975년 ~ 1990년
가족 아버지 장규상,
어머니 이숙희
오빠 장현
소속사 코아기획
관련 활동
웹사이트 공식 홈페이지
공식 블로그
공식 장덕/현이와덕이 homepage
공식 장덕/현이와덕이 Cafe
공식 장덕/현이와덕이 Soundcloud
장덕/현이와덕이 SEO
공식 장덕/현이와덕이 Facebook
Naver 解說 關聯

장덕(張德, 영어: Deok Chang 또는 Deok Jang, 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 이은하 · 양하영 · 임병수 · 김범룡 ·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써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 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 작곡작품 개수는 총 129개(2015년 6월 기준: 신탁자코드 W0138300)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 포크 · 리듬 앤 블루스(R&B) · 컨트리 · 댄스 · 펑키 · 트로트 · 발라드 ·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1]

일대기[편집]

1961-79 : 어린 시절[편집]

1961-73 : 부모의 이혼, 불우한 유년기[편집]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규상과 서양 화가였던 어머니 이숙희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4가에서 1961년 4월 21일 태어났다.[2]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맏이 장현바이올린을, 둘째인 장덕은 피아노를 배우며 어린시절부터 자라났다.

장덕이 서울흥인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1969년) 종교적, 그리고 성격적 불화로 인하여 부모가 이혼하게 된다. 이후 장덕은 고모 집에, 장현은 아버지의 친구집에 맡겨지고, 아버지는 첼로 하나만을 메고 지방 공연을 떠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만 8세 때(1970년) 장덕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2달 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이 때 그녀의 어머니가 병간호를 해주었고, 비록 다쳐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장덕은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1971년 '중요한 건 마음뿐이고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동양 사상 뿐철학에 심취한 아버지를 따라 장현 · 장덕 남매는 도봉산의 사찰 비슷한 청기와집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그 곳은 외부와 통제된 곳이라 두 남매는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장덕은 5살 위인 오빠 장현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게 된다.

1972년 장덕은 오빠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북한산 기슭의 작은 집으로 이사 나오게 된다. 하지만 오빠는 남의 집 가정교사로 일하러 나가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나가 늦은 밤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장덕은 빈 집에서 홀로 남겨진 고독과 싸우며 외롭게 생활했다. 그리고 새 엄마가 들어오자 남다르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로움을 많이 탔던 장덕은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1973년) 장덕은 <누가 누가 잘하나> 등 동요 경연대회에 여러번 나가 1등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장덕은 오빠가 준 기타로 어설프게나마 작곡을 시작하였다. 당시 장덕은 기타를 비롯해 첼로,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었고, 그림글짓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1974-79 : 현이와 덕이 결성, 작사·작곡가로서의 입상, 10여편의 영화 출연[편집]

1974년 서울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한 장덕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수 없는가?'라는 생각에 우울해 하다가 그 해 가을 메모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친구집인 대구로 내려가 10일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장덕은 이내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장덕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주고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스처럼 맏이 장현과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준다.

1975년 4월 만 13세(중학교 2학년)가 된 장덕은 오빠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으로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열린 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라는 곡으로 데뷔한다. <To Be A Child Again>는 장덕 작곡의 첫 발표곡으로 영어가사는 미8군 관계자이자 드래곤 래츠를 초청한 엘 클리나드가 붙인 것이다(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 또한 엘 클리나드가 붙였다.). 장현 · 장덕 남매는 이 공연을 통해 출연료도 제대로 받았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드래곤 래츠의 노래와 미모에 반했다는 찬사를 들으며 엘 클리나드를 통해 출연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장현 · 장덕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고 1개월 뒤(5월) TBC TV의 청소년과 젋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 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장덕은 작사 · 작곡에 능한 천재소녀로 평가 받게 된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1976년) 장덕은 어머니에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엔 1년을 더 다녀야 된다며 말렸지만 하도 졸라대서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찾아갔고 다행히도 현이와 덕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라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는다. 그 해 4월 장현 · 장덕 남매는 드래곤 래츠에서 현이와 덕이로 듀엣명을 바꾸고 <친구야 친구>,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친구야 친구》를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개봉된 김응천 감독, 임예진 · 이덕화 · 전영록 주연영화 [푸른교실]에서 현이와 덕이는 오라오라에 출연해 불렀던 <꼬마인형>, <일기장>을 사운드트랙으로 싣게 된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장덕은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본 적은 있었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한달 뒤(5월)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만 13세) 때 작사 ·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 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1976년에 김기웅 곡의 <말해줘요>로 데뷔한 히트곡도 없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 작곡가로서 제1회 MBC 서울가요제(제 2회 대회부터는 서울가요제에서 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전한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도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장덕은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입상).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명감독 김응천 · 석래명 ·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 음악을 전공하는 청순한 여고생 역을 맡아 열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거듭난다. 당시 그녀는 10여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고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질 정도로 대단히 큰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는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정도였다.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이 시기 오빠 장현은 오라오라에 출연했을 때 부터 알게 된 부산연예협회지부장이자 왕년의 작사가였던 천봉의 딸 천인실과 극도로 가까워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장덕은 결혼한 오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1978년 현이와덕이 정규1집 <순진한 아이>가 발표 되었다.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일기장>, <소녀와 가로등>, <정말>, <작은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11곡+경음악1곡 수록, 같은 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발표)

1979년 1월 그녀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 · 장덕을 불러 유학을 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떠나면서 어머니는 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덕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현은 이미 천인실과 결혼을 하였고 임신 6개월이 지나 곧 아이를 낳게 된다고 실토한다. 어머니는 장현과 천인실의 관계를 예전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혼한 사실에 실망하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이 가수로서 성공하고 부양능력이 생겼을 때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수차 그것을 장현에게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6월 제2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3년연속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이 음반은 타이틀곡 <첫사랑>을 비롯 <나도 그래>, <웃어봐요> 등 신곡 4곡과 현이와 덕이의 1집 수록곡들을 다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그 해 10월 장덕은 오빠 장현의 집에서 나와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 되는데, 이 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동맥을 끊고 또다시 자살을 기도한다. 이 사건 이후 장덕은 오빠 · 아버지 가족과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해 초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이 시기 장덕의 자살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1980-83 : 유학생활, 결혼, 가족밴드 리 패밀리 결성[편집]

1980년 5월 제3회 MBC 서울국가요제에서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가 입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1977년 · 1978년 · 1979년 3년 연속 입상한 사실은 맞지만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정보를 찾아봐도 1980년 입상한 기록은 없다. - 1977년은 서울가요제이며 1978년 부터 서울국제가요제가 열렸다.

(※ 서울국제가요제는 78~81년까지는 대회 본선을 치르기 전에 국내가수들을 대상으로 본선 출전자를 뽑기 위한 예선을 따로 치렀는데 1980년 국제가요제 국내예선에서 장덕 작사/작곡 최병걸이 노래한 "사랑은 떠나도"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본선대회 출전자만 음반에 기록이 남아 있어서 기록을 찾을수 없는 것입니다. 국내예선에는 최병걸을 비롯한 13개팀이 참가해서 3개팀(혜은이, 와일드캣츠, 진미령)이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한편 대회 참가곡 "사랑은 떠나도"는 이듬해인 1981년 최병걸의 개인 독집앨범에 실렸습니다.)

또한 1981년 TBC 동양방송이 주최하던 세계가요제가 언론통폐합으로 KBS 주최로 열리게 되는데 이때 "연안부두"로 유명한 김트리오의 막내 "김선"이 "사랑은 영원히"로 본선에 오르게 된다. 장덕은 작사를, 김트리오의 "김파"는 작곡을 했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장덕을 간곡히 불렀다. 장덕은 어머니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새어머니가 장덕을 짝사랑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과의 선자리를 주선하여 그녀를 그와 결혼시키려 하자 어린 나이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1980년 10월이었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서 한인사회에 딱 하나 있는 밴드가 실력이 부족해서 곤경에 처해있다며 그들을 도와달라고 장덕에게 부탁한다. 그 밴드의 이름은 '리 패밀리'로 실제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였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은 같은 리 패밀리의 일원이자 자신을 아껴주는 이승언과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한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은 '감옥 같은 것' 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대학 졸업 후에 결혼하라고 충고했지만 장덕은 미국에 온지 1년만인 1981년 10월 17일, 내쉬빌에서 이승언과 결혼한다. 그리고 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밴드에서 장덕은 퍼스트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며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을 점점 그리워 하기 시작했고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전자 포커게임으로 한학기 대학 등록금을 다 날리기도 했다.

미국에 머물던 이 시기 장덕은 미국 가수에게 <여인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을 주어서 취입 시키기도 하였는데, 당시 장덕의 미국 내 창작활동은 미국 일간지 및 [테네시언]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학력[편집]

1983-85 : 이혼과 귀국, 솔로로서의 재기와 슬럼프[편집]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3] 한 달 뒤(11월) 그녀는 어렵게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이라는 금액에 전속계약을 맺고(그녀는 오랫동안 공백을 가진 스타였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는 계약이 쉽지 않았다.)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한다. 당시 장덕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려한 탓에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 6달 만에 타이틀 곡 <날 찾지 말아요>가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이 사이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 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해 주기도 했다.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 리메이크 하여 1984년 2월에 발매된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했다.

1984년 10월 장덕은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이에 장덕은 실망한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덕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 한 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

1985-87 : 현이와 덕이 재결성, 솔로 복귀와 제 2의 전성기[편집]

1985년 6월 장현 · 장덕 남매는 7년만에 재결합,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며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비롯 <이젠 안녕>, <그대의 투정>, <해바라기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발표한다. 현이와 덕이의 정규 1집 《순진한 아이》에서는 모든 곡들을 장덕이 작사/작곡했지만 이 앨범에서는 B면 3번 트랙 <그댄 없지만>과 그들의 정규 1집 《순진한 아이》에 실린 버전들의 재편곡 버전인 B면 4번 트랙 <소녀와 가로등>, B면 5번 트랙 <순진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장현 · 장덕 남매가 함께 만들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단숨에 가요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인기를 끌었고 장덕의 막힌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1986년 5월에는 장덕이 작곡한 곡들 중 가장 훌륭한 곡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동료가수 이은하에 의해 발표된다. 곡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 <이은하호랑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은하는 그룹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아버지께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갔다가 아버지가 노발대발 하면서 재떨이를 던지시는 모습을 본 후 너무 놀라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 때 그녀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한편의 시를 썼는데 그것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 처럼>의 가사였다. 이후 그녀는 절친 장덕을 찾아가 "내가 가사 좀 끄적여 보았는데..." 라고 말했고 장덕은 흔쾌히 작곡을 해주었다. 노랫말의 끝부분이 좋으니 노래제목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도 장덕이었다.

1986년 6월 오빠 장현과 추구하는 음악세계가 달랐던데다가 솔로로서의 욕심이 생긴 장덕은 더 이상 듀엣 활동을 이어나가지 않고 타이틀곡 <님 떠난 후>를 비롯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사랑해줘요>, <소외> 등이 수록된 솔로 정규 3집 《님 떠난 후》를 발표한다. 포크뮤직에 디스코가 섞인 타이틀곡 <님 떠난 후>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1987년 2월 18일 ~ 1987년 3월 18일) 연속 1위를 차지, 골든컵을 수상하였고 MBC 라디오 인기가요, KBS 2FM 인기가요 광장,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뮤직박스(도서출판), 전국 DJ 연합회 등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된다. 1986~87년 장덕은 제 2의 전성기를 보내며 가장 성공한 여성스타로 인정받았다.

1987-90 : 활발한 솔로 활동, 오빠 장현의 설암 판정과 병간호[편집]

1987년 7월 장덕은 타이틀곡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비롯 <이별인줄 알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때면>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4집《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재킷에 <골든앨범1집>이란 타이틀이 표기되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이별인줄 알았어요>는 가요톱10 등에서 순위권에 오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9월 장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3회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연합)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불렀던 노래 <너를 기다릴거야>는 1989년 발매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에 재편곡되어 수록되게 된다. 이 시기 장덕의 오빠 장현도 타이틀곡 <마지막 진실>을 비롯 <연민>, <어느날>, <만날 수 없는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솔로 데뷔 음반 《마지막 진실》을 발표하게 된다. 수록곡들은 대부분 장덕 작사/작곡의 곡들로 채워져 있어 장덕이 오빠 장현을 위해 만든 앨범으로도 여겨진다.

1988년 9월 장덕은 다른 싱어송라이터 김파, 김범룡과 함께 작업하며 타이틀곡 <얘얘>를 비롯 <내 말 좀 들어요>, <서울의 밤거리>, <나의 꿈 이야기>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5집《얘얘》를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골든앨범 2집>이란 타이틀로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얘얘>는 특히 무대 위 장덕의 귀엽고 깜찍한 율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9년 2월 오빠 장현은 그동안의 밤무대 일을 모두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장덕의 매니지먼트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여의도에 코아기획이라는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이 때 훈이와 슈퍼스타, 박혜성 등의 가수들도 영입하였다. 장덕의 새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을 때였던 1989년 6월 18일 장현은 국립의료원에서 설암 3기 판정을 받는다. 그전부터 혓바닥에 혓바늘 같은 것이 돋아 났지만 장현은 피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기고 넘어갔는데 혓바늘로만 여겼던 것이 자꾸만 커져가고 통증도 심해지자 다니던 작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걸 중단하고 국립의료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병원의 의사는 장현에게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 병의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혀의 절반을 자르면 5년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1년 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하였으나 장현은 수술을 하면 말을 할 수 없고 노래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고 자가요법을 택하게 된다. 암 발병 사실을 숨기려던 장현은 결국 앨범 작업 막바지에 장덕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혔고 그녀는 자신의 일에 신경쓰다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긴 병이라고 여기며 오빠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얼마 후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비롯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니>, <슬픈 약속>, <수레>, <나의 공주님> 등의 곡들이 수록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발표된다.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90년 1월에는 어렵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KBS 신년 특집극 드라마 <구리반지>에 주연으로 출연, 억척스럽고 발랄한 스무살 여성을 맡아 오랜만에 연기 활동도 하였지만 앨범 활동 중,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게 되자 장덕은 활동을 중단하고 오빠의 병간호를 하게 된다.

1990년 2월 4일 : 사망[편집]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0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2시 50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5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한 후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의상 담당 문인옥이 발견하고 장덕의 아버지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시 투여(투약)에 따른 상승작용(相乘作用) 즉, 약물 상호작용에 의한 쇼크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만 28세였다. 문인옥의 말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4]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2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아내와 아들 원을 남겨둔 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5]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사후[편집]

음반 목록[편집]

듀엣 음반 with 장현 (현이와 덕이 음반)[편집]

각 음반의 수록곡은 대부분 장덕 또는 장덕/장현에 의해 작사/작곡되었다.
캐럴 음반 《디스코 크리스마스》는 예외이며
컴필레이션 음반 《친구야 친구》, 그리고 참여 음반 《푸른교실 · 선생님 안녕 (OST)》은 장덕 또는 장현이 참여한 곡에 한한다.
자세한 정보는 각 음반 문서를 참고할 것.

컴필레이션 음반[편집]

캐럴 음반[편집]

정규 음반[편집]

참여 음반[편집]

솔로 음반[편집]

각 음반의 수록곡은 대부분 장덕에 의해 작사/작곡되었다.
자세한 정보는 각 음반 문서를 참고할 것(참여 음반은 장덕이 참여한 곡에 한한다.).

컴필레이션 음반[편집]

정규 음반[편집]

참여 음반[편집]

추모 헌정음반[편집]

각 음반의 수록곡은 대부분 장덕에 의해 작사/작곡되었다.
자세한 정보는 각 음반 문서를 참고할 것.

컴필레이션 음반[편집]

싱글 음반[편집]

출연 작품[편집]

영화[편집]

TV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은정. 요절가수 장덕·장현 남매 25주기…음원 등으로 재조명. 연합뉴스. 2015년 5월 28일.
  2. 이투데이 (2013년 3월 16일).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 2013년 4월 14일에 확인함. 
  3. 아궁이 65회 - 파란만장 가족사 "MBN 2014년 7월 11일 방송 참조"
  4. 이상열 앵커 가수 장덕,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 《MBC 뉴스데스크》, 1990년 2월 4일 작성, 1990년 2월 4일 확인.
  5. 이투데이 (2013년 3월 16일).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 2013년 4월 14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