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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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李睟光, 1563년 ~ 1628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문신이자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이다. 그는 실학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남인실학의 토대이기도 하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1]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3]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울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이수광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추증이희검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서자로 효빈김씨(孝嬪金氏) 소생 경녕군 이비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모양군 직이고, 증조부는 선사군이며 증조부 선사군은 할아버지 하동군 이유와 양 할아버지 신당군 이정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신당군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하동군의 아들들 중 한사람인 이희검이 신당군의 양자가 되었다.

왕족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의 외증손이기도 했다. 류관은 정승의 신분임에도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희검명종문과에 급제하여 선조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

어려서 한성부 동대문 근처에 살았고 17세에 아버지 이희검을 여의었다. 그는 붕당에 거리를 두고 당색에는 초연하였으나 후일 그의 제자들과 그의 아들 이민구의 제자들은 대체로 남인북인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과거 급제와 임진왜란[편집]

1585년(선조 1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성균관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지제교(知製敎), 병조좌랑지제교를 지냈다.

그 뒤 승문원의 관리가 되었고, 1590년(선조 2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4] 1591년 음력 6월 23일 수찬에 임명되었다.[5]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에서 패하였다.[4]

그 뒤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6]

그 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해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파천한 조정을 따라 활동하며 1593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등 삼사의 언관직을 거쳐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역임했다.

관료 생활과 외교, 저술 활동[편집]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그해 정유재란의 종결을 보았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7]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8]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9] 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그해 12월 예조참판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언제?]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10] (→조선의 대외 관계) 귀국 후에는 대사간·대사헌 등의 언관직(言官職)과 지방 행정직을 맡았다.[4]

생애 후반[편집]

1613년 대북 강경파의 건의로 인목대비 폐모론이 주청되자 그는 폐모론이 옳지 못함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수광은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11]: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고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4]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4]

사후[편집]

아들 이성구는 후에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한다. 그의 사상은 성리학자 겸 실학자였던 또다른 아들 이민구허목을 통해 윤휴, 유형원(柳馨遠), 이서우, 이익(李瀷), 채제공, 정약용(丁若鏞) 등에게로 이어졌고 남인 실학자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채신잡록》·《병촉잡기》·《찬록군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1]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저서[편집]

그의 저서 중 지봉유설은 사물의 이치를 설명한 일종의 백과사전 형태의 저작이다.

  • 지봉유설》(芝峰類說):백과서적
  • 《지봉집》(芝峰集)
  • 《채신잡록》(採薪雜錄)
  • 《병촉잡기》(秉燭雜記)
  • 《찬록군서》(纂錄群書)
  •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
  • 《잉설여편》(剩說餘篇)
  • 《승평지》(昇平志)

가족 관계[편집]

이수광의 사상과 철학[편집]

본래 총민강기(聰敏强記)하여 기억력이 뛰어났던 이수광은 그 때 중국에 들어가서 주자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체계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천주실의를 처음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12] 이수광의 철학적 특성은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어서,[1]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3]

또한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이 제 소임을 못하고 권신, 재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질타,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차때를 말하며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은 남달리 청빈해야 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평가[편집]

당대에 단아하고 염정하며, 또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14] 는 평가가 있다.

그는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의 존재는 사대부와 지식인 이외에는 모르는 이도 많았으나 그와 조완벽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조선사회에 월남(베트남)이라는 국가를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타[편집]

그의 상소문 중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12조목의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 상소는 당시 상소문 중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어만주어에 능했고 한학과 고전 지식도 밝았다. 또한 일본어베트남어 역시 구사하고 통역, 번역할 수 있었다.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2. 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2006) 119쪽 ISBN 895862096X
  3.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03쪽 ISBN 9788991221284
  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수광
  5. 선조실록 1616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 병진 3번째기사
  6.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7.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어떤 자료[출처 필요]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
  8.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 9788991221284
  9. 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
  10. 이은직 저, 정홍준 역, 《조선명인전 3》 일빛 (2005) 407쪽ISBN 8956450889
  11. 송건호, 《송건호 전집1 - 민족 통일을 위하여 1》 한길사 (2002) ISBN 8935655015
  12. 이준구, 강호성 공저, 《조선의 선비》 스타북스(2006) 203쪽 ISBN 899243300X
  13.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동아일보. 2007년 2월 10일.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 
  14. 광해군일기 36권, 광해군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2월 22일(계사) 11번째기사 "이수광·장만·유공량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실학의 발생"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