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라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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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라 오사무
三原 脩

Osamu Mihara
Osamu Mihara 1938.jpg

도쿄 교진군 내야수 시절(1938년)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11년 11월 21일(1911-11-21)
출신지 가가와현 나카타도군 간노촌(현: 만노정)
사망일 1984년 2월 6일 (72세)
신장 168 cm
체중 64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2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34년
첫 출장 1936년 9월 18일
마지막 경기 1938년 11월 15일
경력

선수 경력

감독 경력

일본 야구 전당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전당 헌액자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선출년 1983년
선출방법 경기자 헌액
미하라 오사무
일본어식 한자 표기: 三原 脩
가나 표기: みはら おさむ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미하라 오사무
통용 표기: 미하라 오사무
로마자: Osamu Mihara

미하라 오사무(일본어: 三原 脩, 1911년 11월 21일 ~ 1984년 2월 6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구단 경영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가가와현 나카타도군 간노촌(현: 만노정)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선수로서는 1934년에 창단한 대일본도쿄야구클럽(이후에는 도쿄 교진군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계약 제1호[주 1]로 알려져 있으며 감독으로서는 선수의 컨디션과 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소유자로 주변의 예상을 훨씬 넘는 선수 기용과 용병술로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해 ‘미하라 마술’(三原魔術)이라는 감탄을 받았고 ‘마술사’, ‘지주’라는 등의 별명을 얻었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일본 야구 연맹, 1950년에 양대 리그로 출범한 센트럴 리그퍼시픽 리그의 정규 시즌, 일본 선수권 시리즈(일본 시리즈) 등 3개 대회에서 우승을 이끈 유일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주 2] 감독으로서 27년 동안 통산 3,248경기 출장은 일본 프로 야구의 신기록이다. 그리고 5개 구단의 지휘봉을 잡은 것도 후지모토 사다요시, 이시모토 슈이치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의 대기록을 남겼다(감독 대리는 포함되지 않음).

기자로서는 호치 신문사요미우리 신문에 근무했던 시기도 있었고 말년에는 닛폰햄 구단 주식회사(닛폰햄 파이터스)의 대표이사 사장 겸 구단 대표 → 상담역을 맡았다.

요미우리 총감독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표기는 ‘三原 修’(동음).

장녀는 나카니시 후토시의 아내이며, 미하라는 나카니시의 의붓아버지에 해당한다.

인물[편집]

프로에 입문하기까지[편집]

지주의 막내 아들로서 무엇하나 부족한거 없을 정도로 자랐었다. 가가와현립 마루가메 중학교(현재의 가가와현립 마루가메 고등학교) 시절 야구에 빠져 사관이 되길 바라던 아버지의 의향으로 가가와현립 다카마쓰 중학교(현재의 가가와현립 다카마쓰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지만 다카마쓰 중학교 교장은 ‘문무양도’(文武両道)를 권하고 있어 야구부에 들어오는 것을 조건으로 전학을 인정했다. 다카마쓰 중학교에서는 유격수로서 투수 가지와라 히데오(후에 도쿄 제국대학)와 함께 제14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하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올라왔지만 강우 콜드로 팀은 패했다. 야구부의 매니저를 맡았던 훗날 일본사회당 위원장을 역임했던 나리타 도모미였다.

졸업 후 제4 고등학교(구제) 진학 시험을 치렀지만 중학교 선배(미즈하라 요시아키)가 있던 와세다 대학에 스카웃 되어 입학,[2] 야구부에서는 1학년 때부터 2루수로서 활약했다. 특히 1931년 춘계 시즌인 소케이센 2차전에서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투수 미즈하라 시게루를 상대로 감행한 홈스틸은 소케이센 역사의 이름을 남겼다.[주 3] 리그 통산 67경기에 출전하여 231타수 68안타, 타율 2할 9푼 4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1933년에 결혼 직후 야구부를 퇴단(당시 와세다 대학 야구부에서는 학생이 결혼하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향했다. 고향에서는 특별한 일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다가 대학 시절 친구의 부름으로 오사카부로 이사가 사회인 야구 팀인 젠오사카에서 야구를 했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종군[편집]

1934년 6월 6일 계약 선수 제1호로서 같은 해 12월 26일에 정식 설립된 대일본도쿄야구클럽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가 됐다. 1935년 1월에는 입영으로 인해 퇴단했지만[3]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로 리그인 일본 직업 야구 연맹(1939년부터는 일본 야구 연맹)이 발족된 1936년 9월에 후신인 도쿄 교진군의 선수 겸 조감독으로서 복귀했다. 준족이고 견수였던 선수였지만 응소에서 다리를 다쳐 1938년에는 입단한 지 3년 만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사이 1937년의 연맹 선수권 경기(당시에는 전·후기 시즌으로 치뤄져 전기와 후기의 우승팀은 연도 최강자를 놓고 대전)인 오사카 타이거스와의 경기가 종료된 후 판정에 불만을 품은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과 함께 심판실에서 항의하던 도중 미하라가 방망이를 들었다는 이유로 연맹에서 출장 정지 처분과 함께 벌금이 부과됐다.

은퇴 후 호치 신문에 기자로서 활동했지만 버마 전선에서 응소돼 종군했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편집]

태평양 전쟁 이후 요미우리 신문(전시 중의 신문 통제로 요미우리와 호치가 합병하면서 전후에 재분리됐지만 이 때 호치 신문으로부터 소속이 옮겨짐)의 운동부 기자로서 근무하여 야구와 관련된 평론을 집필하고 있었고[3] 1947년에는 요미우리 신문사가 구단 경영에 참여하면서 팀 이름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변경, 시즌 도중인 6월 3일 구단이 성적 부진으로 괴롭혀왔던 탓에 감독에 취임하는 것을 구단측과 합의했다. 같은 해 6월 6일에는 대학 시절의 후배였던 감독인 나카지마 하루야스에게 배려하는 차원에서 조감독, 기술 고문으로 취임했다. 9월에는 총감독으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지휘권을 잡았다. 그 해 요미우리는 정규 시즌 5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1948년에는 모든 경기에서 미하라가 팀의 지휘를 잡으면서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949년 경기 중에 상대 팀인 난카이 호크스의 선수를 구타한 사건(일명 ‘미하라 폭행 사건’)을 일으켜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이라는 징계를 받아 이후 구명 운동에 의해서 출장 정지 기간은 100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7월 23일부터 복귀했다(미하라가 출장 정지 기간 동안 감독인 나카지마가 팀을 지휘). 미하라의 중징계로 인해서 팀은 전력 이탈 등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우승을 달성했다(요미우리는 태평양 전쟁 이후 첫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것은 일본 야구 연맹 리그의 마지막 우승으로 기록됐다).

1949년에는 미즈하라 시게루가 시베리아 억류에서 복귀해 팬이나 선수들로부터 미즈하라의 플레이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고조됐지만 미하라 총감독은 미즈하라를 기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즈하라는 요미우리의 업적을 남긴 공로자로 팀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다.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선수들을 중심으로 미하라를 배척한 뒤 미즈하라를 옹립하려고 하는 이른바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이 일어났다. 구단은 이 상황을 지켜본 뒤 ‘총감독 미하라, 감독 미즈하라’라는 인사를 단행해 센트럴 리그에 가맹된 1950년의 지휘권은 미즈하라가 차지하게 됐다.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는 이 때 미하라의 감독 교체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지만 그 한편으로 “미하라는 부대표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하튼 제가 감독이라면 맡겨주십시오” 라며 구단에 제안했다.[주 4] 총감독이 된 미하라에게는 구단으로부터 일이 주어지지 않아서 하루종일 심심풀이로 바둑을 두는 등의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니시테쓰 감독 시절[편집]

1936년 당시의 미하라 오사무
니시테쓰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의 미하라(1951년)

1950년 시즌 종료 후 퍼시픽 리그니시테쓰 클리퍼스에 이적했던 전 요미우리 투수 가와사키 도쿠지니시 마타지로 니시테쓰 구단 사장의 설득으로[4] 이듬해 1951년 1월 30일에 니시닛폰 파이레츠를 흡수 합병한 니시테쓰 클리퍼스(2월 28일부터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변경)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당초 1월 18일에 니시닛폰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됐지만[5] 합병에 의해서 미야자키 가나메의 후임 감독이 됐다. 그 때문에 1952년까지는 연달아 미야자키가 감독을 자칭, 미하라는 총감독으로서 지휘를 맡고 있었다). 이 때 요미우리 총감독 시절의 괴로웠던 기분을 풀기 위해 니시테쓰를 강한 팀으로 이끌어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맞대결해서 이기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미하라는 1952년에 나카니시 후토시나 야구계 굴지의 스타 선수인 오시타 히로시의 영입에 성공했고 도요다 야스미쓰, 이나오 가즈히사 등과 같은 젊은 유망 선수를 잇달아 영입하여 오시타를 중심으로 하는 팀을 만들어 나갔다.

1954년에는 구단 창단 이후 최초로 퍼시픽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센트럴 리그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스가 요미우리를 누르고 리그 우승을 달성,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와의 대결은 무산됐고 주니치와 맞대결을 펼친 끝에 3승 4패의 성적으로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 시리즈 상대는 미즈하라 이끄는 요미우리와의 맞대결이 성사됐다. 양 팀간의 대결은 언론에서도 ‘간류 섬의 대결’이라고 불릴 정도의 주목을 끌어 니시테쓰는 4승 2패의 성적을 기록, 니시테쓰의 염원이던 ‘요미우리를 물리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니시테쓰는 1958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의 맞대결을 펼쳐 모두 승리했다.

특히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니시테쓰가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모두 3연패를 당하면서 마지막 수단을 쓸 수는 있었지만 4차전 이후에는 이나오가 연속 등판하여 마침내 4연승을 기록하는 등의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3차전을 치른 10월 14일 다음날, 미하라 자신이 밤늦도록 마작을 하던 도중에 우천 예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니시 마타지로 구단 사장과 전화 연락을 하는 등 15일에 4차전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4차전 연기에 이나오를 쉬게 한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이자 월드 시리즈에서도 전례 없는 ‘3연패를 당한 이후의 4연승’이었고 1958년 양 팀 간의 대결하는 모습은 일본 프로 야구의 역사에 남는 명승부로 기록됐다.

그러나 미하라는 니시테쓰를 퇴단해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다이요 웨일스가 미하라의 의향을 파악하고 감독 취임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호치 신문(후의 스포츠 호치)이 이것을 특종 취재해서 결국 니시테쓰에 잔류하였다. 그러나 1959년에는 4위로 떨어지며 침체를 겪는 등 결국 시즌 종료 후 니시테쓰를 퇴단, 다이요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다이요 감독 시절[편집]

당시 다이요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6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고 만년 최하위 팀인 다이요에 명장으로 이름높은 미하라가 감독으로 취임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미즈하라가 이끄는 요미우리와 페넌트레이스에서 상대하게 되자, 언론에서는 이를 ‘간류 섬 싸움의 재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부임 첫 해인 1960년에는 팀이 개막전부터 6연패를 당했고 에이스 아키야마 노보루도 갑작스런 전력 이탈로 어수선할 정도의 시즌 개막을 맞이했지만 곧바로 선수 기용이 뛰어나서 요미우리와의 우승 경쟁을 펼치게 됐다. 작년 시즌에 단 한 번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던 곤도 마사토시를 구원 전문 투수로 기용해서 부활을 이뤘고 좌완인 스즈키 다카시를 중간 계투로 교묘하게 이용해서 투수력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타선은 낮은 타율이었지만 2루수에 신인인 곤도 아키히토를 기용하고 주전 유격수였던 아소 사네오는 대타로 중점적으로 기용, 트레이드를 통해 긴테쓰 버펄로스로부터 스즈키 다케시를 영입하여 유격수로 기용하는 등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실행에 옮겼다. 미하라는 이러한 선수들을 ‘초2류 선수’라고 부르고, 이 ‘초2류 선수’들을 교묘하게 조합하는 지휘로 1점차 경기에서 33승 17패라는 성적으로 팀의 승률을 끌어올렸다. 이렇게 해서 요미우리를 잡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미사일 타선’이란 별명을 가진 다이마이 오리온스와의 맞대결이 이뤄졌다. 전문가들 사이에 ‘다이마이가 유리할 것이다’라는 압도적인 평가가 나오면서 ‘다이요가 과연 1승을 올릴 것인가, 2승을 올릴 것인가’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러한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1차전부터 모두 4전 전승(모두 1점차 경기)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포수 도이 기요시가 다이마이의 스퀴즈 간파와 미사일 타선 봉쇄 등의 두뇌 작전으로 수비에서의 기여가 컸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작년도 최하위 구단에 의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냈고 또 감독으로서는 3개 구단에서의 우승 달성도 사상 최초였는데(2014년 현재, 미하라 이외에는 이 때 다이마이의 감독이었던 니시모토 유키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인 호시노 센이치) 미하라에게 있어서도 인생 최고의 시즌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적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아 1961년에 스포츠계에서는 처음으로 기쿠치 간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62년과 1964년에 다이요는 한신 타이거스와의 선두 경쟁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우승 직전까지 갔지만 끝내 우승을 놓쳤다. 1967년을 마지막으로 다이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긴테쓰 감독 시절[편집]

이듬해 1968년에는 4연속 최하위였던 긴테쓰 버펄로스 감독에 취임했다. 부인과 함께 나라현 나라시 사이다이지의 공동 주택에 거주하면서 지도했고 부임 첫 해인 1968년 시즌에는 4위로 끝났지만 이듬해 1969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우승을 놓고 경쟁한 끝에 2위를 기록했다. 3년의 임기 만료에 의해서 1970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나가후치 요조를 투수·야수 겸으로 기용한 후 야수에 전념하도록 해서 수위 타자를 만든 것 외에도 이세 다카오, 오가와 도루 등을 지도했다.

야쿠르트 감독 시절[편집]

긴테쓰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듬해 1971년에 야쿠르트 아톰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우승은 하지 못하고 A클래스(1위 ~ 3위, 상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에도 진입하진 못했지만 취임하기 1년 전인 1970년에는 승률이 2할 6푼 4리를 기록하여 드래프트제 도입 이후 최저 승률을 기록할 정도의 침체된 상태였다. 미하라는 부임 1년째인 1971년에 최하위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승률 4할 1푼 9리, 2년째인 1972년에는 승률 4할 7푼 2리(4위), 3년째인 1973년에는 승률 4할 8푼 8리로 4위를 차지했지만 선두 요미우리와의 4경기 반차로 다가서는 등 팀을 단기간에 고쳐 세웠다. 또 입단한지 얼마 안된 와카마쓰 쓰토무의 타격 센스를 꿰뚫어보고 1년째부터 주전으로 발탁, 미하라와 함께 타격 코치로 야쿠르트에 입단한 나카니시 후토시와의 맨투맨 지도의 효과도 있어서 이듬해인 1972년에 수위 타자가 되는 등 그 후 와카마쓰가 야쿠르트의 간판 타자로 활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닛폰햄 구단 사장 → 만년[편집]

1973년 11월에는 닛폰햄에 의한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매수에 관여해 닛폰햄 파이터스(닛폰햄 구단 주식회사)의 대표이사 사장 겸 구단 대표로 취임했고 사위인 나카니시 후토시를 감독으로 앉혔다. 첫회에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번트 사인을 내는 나카니시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저 친구는 감독 그릇이 아니야”라고 느꼈다고 한다.[6] 하지만 팀이 1974년과 1975년에 2년 연속으로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자 후임 감독으로 오사와 게이지를 초빙했다. 오사와는 B클래스(4위 ~ 6위)로 떨어졌던 닛폰햄을 유력한 우승 후보 팀으로까지 키워냈고 1981년에는 닛폰햄의 전신이었던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대 이래 19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이 무렵에는 상담역에서 물러나 말년까지 이 직위에 있었다). 그 사이 팀의 체질 개선을 도모해 나가면서 도에이 시절(1954년 ~ 1972년)부터 활약했던 주력 선수들을 잇따라 방출시켰고 리그 우승 당시 잔류해 있던 선수는 우다 도쇼쿠, 센도 미키오, 오카지 가즈히코 등 세 명 뿐이었다(시즌 종료 후 우다는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고 센도는 은퇴했다). 1978년에 발생한 에가와 사건 때 요미우리를 제외한 11개 구단은 끝까지 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입단에 반대했으나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1983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이듬해 1984년 2월 6일에 당뇨병 악화에 의한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향년 72세).

에피소드[편집]

미즈하라 시게루와의 관계[편집]

와세다 대학 시절에 있었던 홈스틸 사건의 또다른 주역으로 같은 가가와 현 출신인 미즈하라 시게루와는 미야모토 무사시사사키 고지로에 빗댈 만큼 영원한 라이벌 관계였다. 1951년에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열린 스프링 캠프에서 “나는 언젠가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라고 첫 한 마디를 뱉어냈다. 1956년부터 이어진 일본 시리즈에서의 직접 대결은 ‘간류 섬의 대결’이라고 일컬어졌다.

미하라가 야쿠르트 감독으로 취임한 1971년, 라이벌인 미즈하라는 같은 센트럴 리그의 주니치 드래곤스 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 해 센트럴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9일의 경기가 이 두 사람이 펼치는 최종 대결이 이뤄지면서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주 5] 이 경기에서는 미즈하라가 이끄는 주니치의 승리로 끝났다. 참고로 그 해 야쿠르트와 주니치의 상대 전적은 12승 2무 12패였다.

두 사람과의 견원지간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유니폼을 벗은 뒤에는 서로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미하라가 퍼시픽 리그 회장, 미즈하라가 센트럴 리그 회장으로 선임하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유선형 타선[편집]

니시테쓰 시절의 ‘미하라 매직’을 대표하는 용병술로 유선형 타선이 있다. 번트나 이어지는 타격의 기대감이 큰 2번 타자 자리에 강타자를 배치, 1954년에 리그 우승을 달성할 당시에는 2번 도요다 야스미쓰, 3번 나카니시 후토시, 4번 오시타 히로시로 이어지는 강력 타선을 구성했다. 미하라는 독자적인 타선론을 피력했는데 당시 니시테쓰의 강력 타선은 소위 ‘수폭 타선’으로 불렸다(참고로 수폭 타선의 원조는 쇼치쿠 로빈스였다). 현재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도 이 타선론을 이어받은 부분이 많다.

초2류[편집]

유선형 타선과 함께 미하라의 대명사가 된 것이 ‘초2류’(超二流)였다. 일류는 아니지만 수비나 타격 등 한 가지 재주가 뛰어난 선수를 기꺼이 기용하였다. 니시테쓰에서는 다키우치 야스오를 대주자·수비 요원으로, 고노 아키노부고부치 다이스케를 내야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 많이 사용했다. 또한 다이요 시절에는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서 아소 사네오를 기용, 주포 구와타 다케시에게 “너는 타율 2할 5푼이면 된다. 그 대신 홈런을 때려라”라고 지시하는 등 약소팀이라고 불린 팀내에서 선수들의 특성을 간파해 다채로운 선수 기용을 보여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운’, ‘행운’의 유무를 오더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어 ‘행운’이 있는 선수는 실적에 관계없이 기용해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 시리즈[편집]

니시테쓰 감독 시절의 미하라(1951년)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 당시 선발진은 사전에 공표하도록 돼있었지만 6차전에 사전 공표한 타순과는 다른 선수를 기용했다(다마쓰쿠리 요지에서 하나이 유로 변경). 이것을 미즈하라는 규칙 위반이라고 항의하여 경기 개시가 늦어졌지만 미하라는 사전 공표에 반하는 기용한 것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항의하는 사이에 니시테쓰측은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으면 되는데 수비하는 요미우리측은 투수의 어깨가 식지 않도록 신경을 소모시키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로 기뻐했다.

2년 뒤인 1960년 일본 시리즈 개막 전야에 일본 교육 TV(NET)에서 ‘시리즈 직전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다이마이 감독인 니시모토 유키오와의 대담 프로그램이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이 되면서도 NET의 스튜디오에 나타나지 않았고 니시모토와 당시 사회자였던 사사키 신야(일본 교육 TV 야구 해설가)와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1차전 당일, 사사키와 해당 프로그램 스태프는 감독실에 있던 미하라를 방문하여 항의했는데 미하라는 거기서 NET를 모욕하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에 온후한 성격을 가진 사사키를 크게 격노하게 만들었다.[7]

또한 미하라와 사사키에게는 이전에 복선이 깔린 이야기가 있었는데 시즌 중에 도이 기요시가 했던 스퀴즈에 대해서 사사키는 미하라가 언제 사인을 냈는지[주 6] 결국 알아차리지 못하고 경기 직후 감독실에 들러 갔던 길에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아까 그것은 멋진 스퀴즈였다” 라는 말 밖에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더 나아가 사사키는 도쿄 6대학 리그에서 당시 동기생이었던 도이에게 진상을 물었는데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자신이 내고 있었다. 미하라 감독은 가끔 선수의 판단에 맡겨서 사인을 시키곤 한다”라고 고백했다. 실제로 니시테쓰 시절에도 주로 2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던 도요다 야스미쓰는 히팅, 번트, 히트 앤드 런의 선택을 미하라로부터 위임받아 누상에 있던 주자에게 사인을 냈었던 적이 있다.

니시모토 유키오와의 인연[편집]

앞에서 말한 대담 프로그램 이후에도 니시모토 유키오와는 그 후에도 인연이 계속됐다. 미하라가 긴테쓰를 이끌며 팀의 첫 우승에 도전한 1969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감독으로서 긴테쓰의 독주를 저지한 사람이 니시모토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니시모토가 긴테쓰의 지휘를 맡으면서 미하라가 이룰 수 없었던 긴테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당시 미하라가 상담역을 맡고 있던 닛폰햄이 구단 양도 이래 첫 우승(1980년 후기)에 ‘매직넘버 1’로 점등시킨 시즌 최종전에 니시모토가 이끄는 긴테쓰에게 대패하여 후기 및 시즌 우승을 긴테쓰에게 양보했다.

용병술[편집]

미하라는 ‘아테마’(アテ馬, 정찰 멤버)나 원포인트 릴리프 등 여러가지 용병술을 구사했다. ‘아테마 작전’은 미하라가 니시테쓰 감독직을 맡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난카이 호크스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이 했던 정신없이 투수를 바꾸는 ‘교란 작전’에 속아서 이를 대항하는 차원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8] 1960년 9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한 경기에 26명의 선수를 기용(이 중 정찰 멤버는 2명 뿐이었음)했다. 통상 1군에 등록된 선수 중에서 벤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25명까지였지만 당시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기간 이외에는 45명의 지배하 선수 등록중이면 몇 사람이 출전해도 좋다는 규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 대해서 그 후 미하라 본인 스스로 “이런 이상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제창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 1962년 9월 22일 주니치 드래곤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발표한 선발 명단 중 한창 젊은 주체인 7명을 정찰 멤버로서 내보냈고 경기 개시 후에는 선수 전원을 주력 선수로 교체시켰다.[9] 아래 명단은 다음과 같다.[9]
타순 정찰 멤버 실제로 출전한 선수
선수 수비 위치 선수 수비 위치
1 아오야마 가쓰미 우익수 프랜시스 아그카오일리 3루수
2 마쓰쿠보 미쓰루 좌익수 시마다 유키오 1루수
3 곤도 가즈히코 중견수 곤도 가즈히코 중견수
4 하이지마 히사미 유격수 구와타 다케시 유격수
5 마토바 유고 3루수 앨 그룬 우익수
6 히라야마 요시히로 2루수 오사다 유키오 좌익수
7 우에다 시게오 1루수 스즈키 다케시 2루수
8 야마다 다다오 포수 시마노 마사노부 포수
9 아키야마 노보루 투수 아키야마 노보루 투수

후에 점점 확대돼가던 프로 야구 전체의 큰 문제가 대두된 ‘사인 도둑질’을 퍼시픽 리그에서 최초로 한 것은 니시테쓰 감독 시절의 미하라였으며 난수표의 도입도 긴테쓰 감독 시절의 미하라가 시도를 했다.[10] 난수표는 1983년에 금지됐지만 사인 도둑질은 현재에도 가끔 문제가 되고 있다. 미하라의 회상에 의하면 사인 도둑질은 외야의 스파이가 부채의 방향을 바꾸는 등 선수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1960년 일본 시리즈 1차전의 선발 투수에서는 시즌 중 중간 계투로 활약했던 스즈키 다카시를 기용하고 1회 도중에 에이스 아키야마 노보루로 교체됐다. 시범 경기에서 아키야마로부터 홈런이나 안타를 자주 때렸던 이시카와 스스무와의 대결을 회피할 목적으로 주자가 나왔을 때 교체하기로 결정돼 있었지만 실제 이시카와는 선발 출전하지 않았다.

‘짝수전 필승주의’를 주창했는데 1956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패배할 당시에 첫 경기의 패전은 계산된 것으로 ‘짝수전에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생각은 후의 두 번째 경기 때 중시 주의의 뿌리가 됐는데 야쿠르트 감독 시절 만루 상황에서 대타인 오쓰카 도루에게 ‘모든 공을 간과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무엇인가 공세를 취해올 것이라고 상대가 생각하도록 밀어내기 볼넷을 노린 것이었는데 결과는 그대로 볼넷이 됐다.

다이요 시절에는 앨 그룬, 긴테쓰 시절에는 나가부치 요조, 야쿠르트 시절에는 도야마 요시아키와 투수이면서도 타격이 좋은 선수에게 자주 투수 → 외야수(혹은 그 반대)라는 기용과 대타로 기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외[편집]

1956년 시즌 최종전에서 이미 타격 부문 2관왕은 확정됐고 3관왕의 가능성까지 엿보였던 나카니시 후토시를 굳이 쉬게해 동료인 도요다 야스미쓰를 타율 5모차로 수위 타자에 오르게 했다. “자네는 2관왕을 차지했으니 이만하면 충분하겠지”라는 말로 나카니시를 설득했다고 한다. 나카니시가 3관왕에 등극했다면 양대 리그 출범(센트럴·퍼시픽 탄생) 이래 최초의 3관왕이 됐을 것이다. 다만, 요즘에는 일반적으로도 3관왕이라는 개념은 없었다고도 한다.[11]

다이요 시절에는 한신과 치열한 페넌트레이스 경쟁을 벌이던 와중에 고쿠테쓰 스왈로스에게 패하자 “죽은 말한테 걷어차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고쿠테쓰의 가네다 마사이치는 이 말을 듣고 격분했는데 가네다는 다이요와의 남은 한 경기에 등판해서 완투승을 기록해 승리 투수가 됐다. 이 경기는 다이요가 우승을 놓치는 원인이 됐다. 한편 고쿠테쓰의 세 경기가 남아 있던 한신전에는 가네다를 비롯해 주력 투수인 무라타 겐이치도 등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두고 “고쿠테쓰는 다이요의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도 있었다.

외국인 선수를 둘러싼 문제로 트러블에 시달린 적도 많았다. 야쿠르트 감독 마지막 시즌이었던 1973년에는 조 페핍톤과 관련된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렸고, 닛폰햄 구단 사장으로 갓 취임한 이듬해 1974년에는 발 스노의 실종 소동에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197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는데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마지막 프로 야구 감독이었던 미하라는 메이지 44년(1911년)생이었다. 참고로 1976년에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가 메이지 38년(1905년)생인 리오 더로셔를 초빙해 계약 성사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계약 직후 갑작스런 병환으로 취임이 보류됐다.

닛폰햄 구단 상담역을 맡고 있던 1981년 10월 1일, 인명용 한자에 새로 추가된 54자 중에 미하라의 이름인 ‘’(오사무)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취재를 받았던 적이 있다. 신문 기자 시절에는 야구와 관련한 평론도 집필했고 야구 해설자로서의 활동은 감독 시절 팀이 일본 시리즈 출전에 실패한 시즌에 일본 시리즈 중계 게스트로 출연한 것과 닛폰햄 구단 대표 시절 KBC 라디오 제작 중계의 편성 갯수 계약에 따라 출연한 것 정도에만 그쳤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 후지모토 히데오(1950년 6월 28일), 니시테쓰 시절에 니시무라 사다아키(1958년 7월 19일), 다이요 시절에 시마다 겐타로(1960년 8월 11일)와 사사키 기치로(1966년 5월 1일), 긴테쓰 시절에 사사키 고이치로(1970년 10월 6일) 등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 모습을 자신의 팀 감독으로서 지켜보기도 했다.

오기 아키라로부터 매우 존경받고 있어서 스포츠 라이터로 오기의 전기를 쓴 적이 있던 나가타니 오사무와는 아래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오기는 나가타니에게 친근감을 가졌다고 한다.[12]

명언[편집]

“야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저서에서 한 말로, 미하라의 야구관을 극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야구가 지닌 매력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구심력 야구, 원심력 야구”
선수 개개인의 자주성에 맡겨 그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자신의 방임주의적 야구를 가리켜 ‘원심력 야구’라고 표현했고 감독의 지휘 하에 선수들이 장기말처럼 자기 역할을 완수하는 야구를 ‘구심력 야구’라고 표현했다.
“아직 머릿가죽 한 장으로 연결돼 있다”
일본 시리즈에서 3연패를 당한 뒤 이제는 다 끝난 게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되받아쳤다.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궁지에 몰렸을 때 이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
“풍운의 궤적”
미하라의 저서 제목이다. 미하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총감독 보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라는 변방으로부터의 역습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됐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 가가와현립 마루가메 중학교(현재의 가가와현립 마루가메 고등학교)
  • 가가와현립 다카마쓰 중학교(현재의 가가와현립 다카마쓰 고등학교)
  • 와세다 대학

선수 경력[편집]

사회인 시대
  • 젠오사카
프로팀 경력

지도자 경력[편집]

수상 경력[편집]

등번호[편집]

  • 21(1936년 ~ 1938년)
  • 31(1947년 ~ 1950년)
  • 50(1951년 ~ 1953년)
  • 60(1954년 ~ 1967년)
  • 70(1968년 ~ 1970년)
  • 80(1971년 ~ 1973년)

등록명[편집]

  • 三原 修 (みはら おさむ)(1936년 ~ 1938년, 1947년 ~ 1950년)
  • 三原 脩 (みはら おさむ)(1951년 ~ 1973년)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2

3
































O
P
S
1936년 추계 도쿄 교진군 13 55 43 3 9 2 1 0 13 2 5 -- 1 -- 11 -- 0 8 -- .209 .370 .302 .673
1937년 춘계 47 214 186 31 45 9 1 0 56 24 12 -- 5 -- 23 -- 0 13 -- .242 .325 .301 .626
1938년 춘계 11 44 34 5 7 0 1 0 9 1 1 -- 0 -- 10 -- 0 3 -- .206 .386 .265 .651
1938년 추계 37 172 144 21 31 8 2 0 43 13 9 -- 3 -- 24 -- 1 13 -- .215 .331 .299 .630
통산 : 3년 108 485 407 60 92 19 5 0 121 40 27 -- 9 -- 68 -- 1 37 -- .226 .338 .297 .636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47년 요미우리 5위 119 56 59 4 .487 22.5 27 .242 2.65 36세
1948년 2위 140 83 55 2 .601 5 95 .256 2.27 37세
1949년 1위 134 85 48 1 .639 - 125 .273 3.15 38세
1951년 니시테쓰 2위 105 53 42 10 .558 18.5 63 .242 2.75 40세
1952년 3위 120 67 52 1 .563 8.5 94 .261 3.08 41세
1953년 4위 120 57 61 2 .483 13.5 114 .253 3.05 42세
1954년 1위 140 90 47 3 .657 - 134 .256 2.17 43세
1955년 2위 144 90 50 4 .643 9 140 .259 2.68 44세
1956년 1위 154 96 51 7 .646 - 95 .254 1.87 45세
1957년 1위 132 83 44 5 .648 - 94 .255 2.15 46세
1958년 1위 130 78 47 5 .619 - 83 .243 2.37 47세
1959년 4위 144 66 64 14 .508 22 69 .236 2.66 48세
1960년 다이요 1위 130 70 56 4 .554 - 60 .230 2.32 49세
1961년 6위 130 50 75 5 .404 21.5 76 .236 3.10 50세
1962년 2위 134 71 59 4 .546 4 100 .242 2.73 51세
1963년 5위 140 59 79 2 .428 24 110 .237 3.29 52세
1964년 2위 140 80 58 2 .580 1 134 .255 3.03 53세
1965년 4위 140 68 70 2 .493 23 136 .244 2.81 54세
1966년 5위 130 52 78 0 .400 37 116 .247 3.74 55세
1967년 4위 135 59 71 5 .454 25 130 .245 3.28 56세
1968년 긴테쓰 4위 135 57 73 5 .438 23 84 .234 3.28 57세
1969년 2위 130 73 51 6 .589 2 118 .243 2.78 58세
1970년 3위 130 65 59 6 .524 13.5 108 .233 2.98 59세
1971년 야쿠르트 6위 130 52 72 6 .419 19 .94 234 3.03 60세
1972년 4위 130 60 67 3 .472 14.5 115 .254 3.73 61세
1973년 4위 130 62 65 3 .488 4.5 78 .228 2.60 62세
통산 : 27년 3248 1687 1453 108 .537 A클래스 : 15회, B클래스 : 12회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1. 1949년에는 양대 리그 분립에 의해 6경기, 1951년에는 미일 야구 개최를 위해 15경기를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즌을 종료
  2. 1954년부터 1955년, 1963년부터 1965년까지는 140경기제
  3. 1958년부터 1962년, 1966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각주[편집]

주해[편집]

  1.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계약 선수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지만[1] 1920년대에 일본 운동 협회 등이 발족돼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경우가 있어 엄밀히 보면 거짓이다.
  2.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에서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감독은 미즈하라 시게루히로오카 다쓰로가 있다.
  3. 와세다 대학 시절의 홈스틸은 6회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2대 2로 동점이 된 직후 7회에 2사 만루까지 실행됐다. 앞서고 있던 와세다 대학은 경기의 흐름을 잡아 그 후에도 점수를 따내는 등 6대 3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누르고 승리, 상대 전적을 1승 1패를 기록하여 전년도 1930년 춘계 시즌부터 계속된 소케이센의 5연패를 막아냈다. 이 소케이센을 다테 마사오가 3일 연속 완투승을 달성하면서 ‘다테의 3연투’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홈스틸은 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왔을 때부터 꾸민 일이었는데 타자가 좌타석에 들어서면 3루 주자의 움직임이 상대 포수로서는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고 상대 투수가 우완 투수 미즈하라였고 통상 홈스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국면으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초대 감독이었던 도비타 스이슈는 정석의 벗어난 폭거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미하라는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하면서 후의 편린을 보였다.
  4. 또는 요미우리 선수 전체가 배척에 찬성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당시 ‘미하라파’였으며, “1년 째(1950년)에 미즈하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5. 10월 11일부터의 일본 시리즈에 맞춰 공식전을 빨리 소화할 수 있도록 변칙성 더블헤더가 짜여졌다. 2차전 경기는 가와사키가 연고지인 ‘다이요 - 주니치’, 1차전 경기는 ‘야쿠르트 - 주니치’였다.
  6. 이 때 미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코치 박스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출전[편집]

  1. ‘야구 전당 1959 ~ 2009’, 《고토뱅크》내에 게재된 기사 ‘미하라 오사무’(소스 : 《디지털판 일본인명대사전+Plus》, 《디지털 다이지센》) 외
  2. 真のライバル 3 (もう一人の水原)〈徒然想 2010年4月8日記事〉
  3. 《야구 전당 1959 ~ 2009》, p.77
  4. 《라이온스 60년사》, p.26
  5. 참조 : 미하라 오사무가 감독을 맡았던 시대의 연표 Archived 2011년 11월 7일 - 웨이백 머신 - ※‘라이온스 클래식 2011’(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홈페이지)
  6. 슈칸 겐다이, 2016년 12월 31일호, p.129
  7. NHK 교육 텔레비전 《아는 것을 즐긴다 - ‘개성이 프로 야구를 구한다’》에서 사사키의 발언
  8. 미하라 오사무 (1973). 《勝つ 戦いにおける“ツキ”と“ヨミ”の研究》. 산케이 신문사. 114-116쪽. 
  9. 【9月22日】1962年(昭37) 三原監督、ルール守ってアテ馬7人 エースも三塁守らせる Archived 2012년 4월 21일 - 웨이백 머신 - 스포츠 닛폰, 2007년 9월 22일
  10. 《난카이 호크스가 있었을 무렵》 중에서
  11. 1938년 추계 시즌에서 나카지마 하루야스의 3관왕은 1965년이 돼서야 인정됐다(다마키 마사유키 《프로 야구 대사전》, 신초 분코).
  12. 나가타니 오사무 저 《仰木彬「夢実現」の方程式 野茂、イチローらを育てた男の実像》, 2006년, p.1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