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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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管統, ? ~ ?)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생애[편집]

이름 관통(管統)
시대 후한
생몰  ? ~ ?
본관 · 출신
관직 동래태수(東萊太守)〔원담〕
→ 낙안태수(樂安太守)〔원담〕
작위
소속 원담

청주자사(靑州刺史) 원담(袁譚)의 밑에서 동래태수(東萊太守)를 지냈다.

건안(建安) 7년(202년) 5월, 원소(袁紹)가 숨을 거두었다. 심배(審配) 등은 원소의 유명을 날조하여 삼남 원상(袁尙)을 후계자로 추대하였고, 장남[1] 원담은 이에 반발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2] 을 자칭하고 원상과 대립하였다.

이후 원담은 원상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고, 곧 탑음(漯陰)[3] 에서 유순(劉詢)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의 모든 성이 이에 호응하였고, 원담은 크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별가(別駕) 왕수(王脩)는

동래태수 관통은 비록 바닷가 먼 곳에 있지만, 절대 배반하지 않고 이리로 올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10여일 후, 관통은 처자식을 버리고 원담에게 갔다. 관통의 처자식들은 모두 살해당하였고, 원담은 그를 낙안태수(樂安太守)에 임명하였다.

건안 10년(205년), 조조(曹操)는 원담을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낙안에서 원담에게 군량을 보급하던 왕수는 조조에게 투항하였고, 조조는 그를 낙안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원담이 죽은 후 청주의 모든 성들이 조조에게 투항하였으나, 오직 관통만은 낙안을 굳게 지키며 저항하였다. 조조는 왕수로 하여금 그를 물리치고 목을 베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수는 관통을 충신이라고 여겼고, 그를 사로잡은 후 결박을 풀어주고 조조에게 호송하였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관통을 사면하였다.

각주[편집]

  1. 본래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었으나, 생전에 원소에 의해 폐출되어 백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2. 원소가 자칭한 바가 있다.
  3. 평원군(平原郡)의 속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