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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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개인 정보
본명 Edison Arantes do Nascimento
로마자 표기 Pele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1940-10-23)(83세)
출생지 브라질의 기 브라질 트레스코라송스
173cm
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
청소년 구단 기록
1952-1956 브라질 바우루 AC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56-1974
1975-1977
통산
브라질 산투스
미국 뉴욕 코스모스 (1971년)
6050(589) [1]
560(31)
661 (620)
국가대표팀 기록
1957-1971 브라질 920(77)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에지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포르투갈어: Edison Arantes do Nascimento, 1940년 10월 23일 ~ )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며, 선수명인 펠레 (포르투갈어: Pelé)라는 애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라고 믿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축구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브라질 정부에 의해 국보(national treasure)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축구 선수로서의 위업도 대단하지만[2], 공식적으로 FIFA에 의해 세계 축구 대사로 임명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서민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그의 1000번째 골은 브라질의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해 헌정되었다).[3]

펠레의 저주

펠레가 발언한 거의 모든 내용은 실제로는 그 내용과 정 반대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1966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였던 펠레가 "우리는 우승하기 위해 여기(잉글랜드)에 왔다."고 발언했지만 브라질은 졸전을 거듭한 끝에 탈락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펠레의 저주가 탄생되었으며,[4]

일화

  • 1970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스포츠 신문인 「우 에스포르테」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인간이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 콜롬비아에서는 펠레가 심판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와 주심이 경찰에 보호를 받아야 했고,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펠레를 다시 경기에 투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유럽의 많은 스포츠 클럽은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투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미 축구 리그에서 뛰기도 했다.)
  • 1970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를 마크했던 이탈리아 대표팀 수비수 타르키시오 부르니치의 회고: “난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뼈와 가죽으로 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더라.”
  • 2003년 초에 아나스타샤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받은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사람들은 이를 펠레의 저주 중 최악의 사건이라 칭하고 있다.
  • 2010년 FIFA 월드컵 그는 나이지리아, 스페인, 브라질을 우승후보로 삼았으나, 나이지리아는 예선에서 탈락하고 화가난 나이지리아 대통령에 의해 2년간 국제 경기 출장 불가를 당하게 된다. 브라질은 8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나 자책골과 주장의 퇴장 등 으로 탈락하였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펠레의 저주를 깨었다.

커리어

같이보기

주석

  1. 펠레가 산투스와 뉴욕 코스모스 클럽에서 뛰는 동안 통산 몇 골을 넣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가 넣었다는 1281골(보통 이것이 회자된다.)는 친선 경기에서의 골을 포함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것을 축구 선수의 공식 기록으로 쳐주지 않는다. 이 중 몇몇 골은 그가 브라질 군대에 있을 때 넣을 것이기도 하다. 펠레는 정확히 클럽 매치에서 647골을 기록하였다. 브라질 리그 산투스 팀에서 대략 589골을 기록하였다. [1][2][3][4].
  2. “Pele, King of Futbol”. 2006년 10월 1일에 확인함. 
  3. "Dedico este gol às criancinhas" (포르투갈어). 2007년 3월 24일에 확인함. 
  4. Sportsseoul.com - 축구 - 기사내용 - 펠레의 저주 주목 '뭐가 있었나'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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