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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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
Vasnetsov Ioann 4.jpg
러시아의 군주
재위 1533년 ~ 1584년
별명 뇌제(번개제)
공포제
출생일 1530년 8월 25일(1530-08-25)
사망일 1584년 3월 28일 (53세)
황후 아나스타샤
이전 황제 바실리 3세
다음 황제 표도르 1세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러시아어: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1530년 8월 25일 모스크바 ~ 1584년 3월 28일 모스크바)는 1533년부터 1547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으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한 첫 번째 러시아 통치자였다. 3살에 즉위하여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섭정을 하였으나, 모후가 독살된 뒤 17세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이반 4세는 이반 그로즈니(Ива́н Гро́зный)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잔혹한 이반"(혹은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이라는 뜻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는 '그로즈니'를 '뇌제(雷帝)'로 의역해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부른다. 이반 3세의 손자이자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본래 유능한 황제였으나, 신경질이 심하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하며 잔인한 사람이었다. 노년에는 반쯤 미쳐 며느리를 유산하게 하고 아들을 패죽이고 말았다.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영국과 통상·외교 관계를 열었다. 1588년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582년, 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에의 길을 열었다.

생애[편집]

즉위 초기[편집]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공이 되어 주로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이반의 어머니였던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5년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는데,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하였으며 결국 어머니 역시 독살당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독살 당하자 이반을 돌보던 유모까지 수도원에 감금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 이반왕에겐 유리(Yuri)라는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듣지 못하는 농아였다.[1]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도록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짜리 어린 황제 형제를 심문한 뒤 밀실로 끌고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오로지 왕실행사가 있는 날로, 이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깨끗하게 씻겨진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하였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왕실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를 여과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비뚤어지고 포악하게 변모하였다.[1]

이반은 높은 성 꼭대기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 한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거리를 나눠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하였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어뜯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1]

친정과 업적[편집]

1547년에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차르(왕)를 칭하고, 이후 러시아 왕의 공칭(公稱)이 되었다. 이후부터의 모스크바 대공국을 '모스크바 러시아'(Tsardom of Russia)라고 부른다.[2]

1548년 아나스타샤와 결혼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난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아나스타샤 왕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비의 자리를 지키다 30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내가 죽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면서 더욱 포악해져 귀족들을 탄압하였다.[1]

그는 이반 3세가 어느 정도 국가적 통일을 이룩한 러시아에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1565년1572년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고 대귀족을 탄압하여 사족(士族)적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였다. 대귀족 탄압의 공포정치를 행해서 뇌제(雷帝)라는 이름을 얻었다. 밖으로는 사족(士族)에 토지를 주고, 또 서유럽과의 무역을 희망하는 상인층의 이익을 위하여 1552년 카잔 한국, 1556년 아스트라한 한국을 점령 합병하고, 볼가 강의 지배권을 차지하여 동방 및 동남방 진출의 거점을 획득, 1581년에는 카자흐족의 추장 예르마크에 의해서 시베리아 진출도 시도되었다. 나아가서 실패로 끝났다고는 하나 리보니아 전쟁(1558 ~ 1583)에서 폴란드스웨덴과 싸운 것은 서유럽과의 통상을 위해서 발트 해의 진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또한 1550년, 1566년의 두 번에 걸쳐 전국회의를 열어 황제의 뜻을 전국에 철저화시키는 기관으로 삼았다. 또 1553년 처음으로 영국백해(白海)를 통한 통상관계를 가졌으며, 시베리아 정복도 이때에 시작되었다.

노년기의 난폭함[편집]

아들을 지팡이로 패죽이고 자신에게 놀란 이반 뇌제. 일리야 레핀 그림

노년의 차르는 성격이 난폭하게 되어 여러가지 잔인한 일을 저질렀고 이에 반발한 그의 친족이자 군사령관인 쿠르프스키는 폴란드로 귀순했다. 어느날 임신한 며느리가 얇은 옷을 입자 복장이 경박하다고 마구 때려 며느리는 유산되었다. 그러자 아들 바실리 왕자는 왕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 때문에 분노하여 마구 아버지를 저주하고, 화가 난 차르는 부지깽이[3]로 아들을 사정없이 패다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된 아들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은 결국 3일 뒤 죽었고, 이반 역시 고독 끝에 수도자가 되었다가 3년 뒤 죽고 말았다. 1584년 3월 28일. 최초의 차르, 이반 뇌제(雷帝)의 고독 끝 말로였다. [4]

아나스타샤 왕후에게서 여러 아들을 얻었지만 장남 디미트리는 유모의 실수로 익사하였고 그 뒤를 이은 바실리 왕자는 이반 왕에게 맞아죽었다. 뒤를 이은 표도르 2세는 병약하여 요절하였고 막내 아들 드미트리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살해당하였다. 이후 표도르 1세의 장인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 자리를 승계하여 류리크 왕조는 곧 종말하게 된다.[5]

가계[편집]

  • 할아버지 : 이반 3세
  • 부왕 : 바실리 3세
  • 모후 : 엘레나 글린스카야
  • 남동생 : 유리 - 귀머거리였다고 한다.
  • 왕후 : 아나스타샤
  • 장남 : 디미트리 - 유모의 실수로 익사해 요절
  • 왕자 : 바실리 - 아버지에게 맞아 죽음(오른 쪽 그림)
  • 아들 : 드미트리 - 어렸을 때 살해당함. 이를 빙자한 가짜가 3명이 등장함.
  • 아들 : 표도르 1세

주석[편집]

  1. 세계를 뒤흔든 광기의 권력자들 (김상운 저|자음과모음|2005.09.21)참조
  2. '모스크바 러시아'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라쟈노프스키, 《러시아의 역사》, 까치 에서의 표현을 참고하였음
  3. 또는 쇠꼬챙이로
  4. 《제왕열기》, F.E.A.R 저
  5. 이후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를 자칭한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침공 중에 사망한다.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를 자칭한 사람은 총 3명으로, 그 중 첫 번째 가짜는 차르 자리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

전 임
바실리 3세
모스크바 공국대공
1533 - 1547
후 임
'이반 4세'
(차르로 개칭)
전 임
없음 (초대)
러시아 제국차르
1547 - 1583
후 임
표도르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