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드 체페슈
블라드 3세(Vlad III, 1431년 11월 10일 - 1476년), 통칭 블라드 체페슈(Vlad Ţepeş)는 15세기 루마니아 지방의 왈라키아 공작이다. ‘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가시 혹은 꼬챙이라는 뜻으로, 블라드 체페슈는 번역하면 블라드 가시 공(公)이 된다.
그가 생존할 당시에는 체페슈보다는 ‘드라큘라’(Drăculea)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었으며, 본인 역시도 그 별명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의 필적으로 보이는 서명에도 ‘블라드 드라큘라’[1]라고 쓰여 있다.
이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모델 삼아 우리가 흔히 아는 흡혈귀의 대명사 드라큘라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루마니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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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블라드는 1431년(혹은 1430년) 11월 10일, 트란실바니아 지방 시기쇼아라의 브란 성에서 루마니아의 원류인 왈라키아(발라히아) 공국의 영주 블라드 2세 드라쿨(악마공이라고도 불림)과 몰다비아 공녀 크네아지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블라드가 태어난 그 해,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로부터 용의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받는다. 블라드 2세의 별명인 드라쿨은 루마니아어로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으로 그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그로 인해 블라드 3세 역시 용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라큘라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블라드 2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미르체아라고 명명했고 둘째 아들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블라드, 막내는 라두라 불렀다.
1436년, 블라드 2세 드라쿨은 이복동생인 알렉산드루 알루아를 공격하여 찬탈당한 왕권을 되찾았지만, 바르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과 연합했음에도 오스만 제국에 굴복하였다.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강화협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블라드 2세는 오스만과 동맹을 맺기로 결단을 내리고 1437년에 술탄 무라드 2세와 만났다. 당시에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블라드 2세가 오스만군에 합류하였음에도 무라드 2세는 그를 믿을 수 없다며 1441년 그를 체포한다.
이때 블라드 2세는 왕자인 블라드 3세와 라두와 함께 있었는데 그들도 함께 체포된다. 추후에 블라드 2세는 두 아들을 인질로 남긴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두 왕자는 오스만의 에그리고즈에서 16년을 보낸다.[2]
1447년, 블라드 2세와 맏아들 미르체아는 야노시 후녀디에게 바르나 전투의 패배 책임을 물었다는 이유로 그의 지시에 의해 생매장을 당한다. 야노시 후녀디는 블라드의 육촌인 다네스티 가문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후원하여 그를 새로운 왈라키아 공이 되게 하였다. 블라드는 왈라키아의 지배권을 노린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아 블라디슬라프 2세로부터 왕권을 도로 빼앗아 왈라키아 공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2개월 만에 야노시 후녀디가 이끈 헝가리군에 패배하여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한다.
1451년, 블라드 3세는 몰다비아 공이 암살당하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와 야노시 후녀디의 보호를 받는다. 야노시 후녀디는 헝가리를 소홀히 대하고 오스만에 친밀한 태도를 보이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분개하여 블라드 3세를 지원하며 그를 다시 왈라키아 공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두 번째로 권력을 장악한 블라드 3세는 1459년 공작 직할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에 공납을 바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오스만은 왈라키아로 사절들을 파견하여 공납을 바칠 것을 재차 요구하였으며, 블라드는 사절들을 산 채로 꼬챙이에 끼워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이후,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오스만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며 그 때마다 승리하였다.
블라드는 외세의 잦은 간섭과 침략으로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흩어진 힘을 모으고 강력한 군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잔인한 처형 방법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는 피를 많이 보았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 특히 꼬챙이에 꿰는 형벌로 유명하다.[3] 그가 가장 즐겨한 꼬챙이 형벌은 나무를 깎아 만든 날카롭고 긴 꼬챙이로 몸통을 꿰뚫는 것이었는데, 때로는 꼬챙이에 꽂기 전에 희생자의 몸을 토막내기도 하였다.
대개 남자는 항문(여자의 경우 질)에 꼬챙이를 찔러넣은 후 일으켜 세우도록 했다. 그러면 무게 때문에 꼬챙이가 입이나 머리(어떤 이들은 배나 등)를 뚫고 나왔다. 그는 수천수만의 튀르크 포로들을 꼬챙이나 말뚝에 꽂아서 서서히 죽였다.
포로가 서서히 말뚝에 박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당시 블라드는 여흥 삼아 식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때 그가 즐겨 사용한 처형도구인 꼬챙이가 루마니아어로는 체페쉬인데, 여기서 그의 이름이 유래했다.[4]
1462년, 오스만 제국은 블라드의 남동생이자 친 오스만 노선으로 돌아선 라두(미남공)를 앞세워 블라드 3세를 추방하는 데 성공한다. 동생과 귀족들로부터 배신당한 블라드는 트란실바니아로 무사히 도망쳤으나, 야노시 후녀디의 아들인 헝가리의 왕 마차시에게 사로잡혀 유폐 신세가 된다. 이때, 그의 첫째 부인이 포에나리의 성탑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참고로, 프랜시스 F.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1992)》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드라큘라가 반(反)기독교적 성향의 흡혈귀로 전락한 계기로 표현하였다.
1474년, 블라드 3세는 석방 조건으로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마차시 왕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정교회를 믿는 왈라키아 공국민들의 인심을 잃고 만다.
1476년, 블라드는 정적 바사라브를 물리치고 세 번째로 복권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쿠레슈티 근교에서 오스만 군대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일간에서는 블라드에게 반감을 품은 왈라키아 귀족이 암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스만군은 블라드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인 후, 이스탄불로 가지고 돌아가 햇볕에 쬐게 하였다고 한다. 블라드의 사체는 스나고프의 수도원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훗날 사람들이 무덤을 파보니 관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세간에서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야기가 부풀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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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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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olitics of Dracula
- Vlad l'impalatore it
- Vlad Tepes — Dracula Between Hero and Vampire
- Vlad III Dracula
- Vlad's Biography
- The Real Dracula
- The Tale of Dracula Russian manuscript circa 1490, with English translation (MS Word format).
- The Real Life of Dracula
- Dark Prince: The True Story of Dracula (2000) (TV)
- Coins attributed to Vlad III Tepes
[편집] 주석
- ↑ 정확하게는 블라디슬라우스 드라쿨리야 (Wladislaus Drakulya)
- ↑ 이종호, 《세계의 불가사의 21가지》, 새로운사람들, 서울 2000. 336쪽
- ↑ 장 마리니, 드라큘라(피귀르 미틱 총서 13) Dracula, 이룸, 173쪽
- ↑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히스토리언 (1)》, 김영사, 서울 2005. 268쪽
- ↑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히스토리언 (1)》, 김영사, 서울 2005.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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