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김해시민/공장/JN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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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형태공기업
창립1949년 6월 1일
산업 분야철도 수송, 부대 사업
해체1987년 3월 31일
본사 소재지도쿄도 지요다 구 마루노우치 1정목
주요 주주일본 내각
종업원 수
27만 7000명 (1986)
자본금약 89억

일본국유철도(일본어: 日本国有鉄道 니혼코쿠유테쓰도[*], Japanese National Railways)는 일본 국유철도법에 근거하여 일본국유 철도를 운영하던 사업체이다. 경영 형태는 일본 정부가 주식 전체를 소유하는 공공기업체이다. 약칭은 국철(일본어: 国鉄 고쿠테쓰[*])이며, 영문 약칭은 JNR로 현재 JR 그룹 각 회사의 전신이기도 하다.

1872년 최초의 철도 개업이래, 정부 직영으로 운영되던 철도 사업을 계승하여 1949년 6월 1일 발족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정 적자 등으로 인해, 1987년 4월 1일 분할 민영화로 인해 JR 7개사로 나뉘면서 동년 3월 31일 해체되었다. JR이 탄생한 그날, 국철의 청산을 맡을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이 발족하였다.

개요[편집]

일본국유철도(이하 국철)는, 운수성 철도총국의 철도 수송 사업을 승계하여 1949년 6월 1일 발족하였다. 국철 마지막날인 1987년 3월 31일 현재, 총 19,639km의 철도 노선을 소유했고, 30곳의 철도 관리국과 총국에서 이 노선들을 운영하였다. 이 외에도, 총 연장 132km의 해운 사업, 총 연장 11,739km의 버스 사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최고 책임자인 총재는 내각이 임명하였고 임기는 4년이었다. 다음 자리인 부총재는 운수성 대신의 인가를 받아 역시 내각이 임명하였고, 임기도 동일하게 4년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보좌하는 기사장이 있었다. 또한 이사가 있었는데 정원은 11명 이상 17명 이하였고 임기는 3년이었는데, 이 중 국철에 재직하고 있던 이사를 상무 이사라고 칭하였다. 이들이 모인 이사회에서 국철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

본사는 도쿄도 지요다 구 마루노우치에 있었는데, 분할 민영화 이후 JR 동일본에서 1997년까지 본사로 사용하였다.

자본금은 약 89억 엔이었다. 이 중 49억 엔은 발족 당시 승계 자산 총액에서 국유 철도 사업 특별 회계의 부채를 공제한 금액이고, 나머지 40억 엔은 정부가 원조 자금에서 출자한 것이었다. 이후 정부로부터 추가로 출자를 받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는 국철의 자기 자본이나 차입금으로 조달했다.

직원 수는 1980년대까지 40만명 정도였지만, 구조조정 등으로 크게 줄어들어 1986년 현재 27만 7000명이었다. 이 중 20만 1000명이 JR로 이행되었다.

조직[편집]

따로 기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987년 기준이다.

본사[편집]

일본국유철도 본사의 현판

이사회의 결정에 근거해 전국 각지의 철도 관리국과 총국을 관할하였다. 본사 부국으로 14국 3부 5실을 두고, 그 외 공안 본부, 종합 인사 위원회, 감사위원회, 사무국을 두었다. 부속 기관으로 철도기술연구소, 중앙 철도 학원, 해외 사무소(뉴욕, 파리에 소재) 등 9개의 기관을 두었다.

임원조직 본사 부국 부속기관
이사회 총재실 화물국 철도기술연구소
총재 경영기획실 선박관리실 철도노동과학연구소
부총재 지방교통선대책실 자동차국 중앙철도학원
기사장 기술계획실 운전국 구조물설계사무소
상무이사 홍보부 차량국 중앙철도병원
감사위원회 외무부 건설국 중앙보건관리소
정보시스템부 시설국 재외사무소(뉴욕, 파리)
감찰국 전기국 공사적산실
직원국 사업국 중앙정보시스템관리센터
경리국 공안본부
자재국 종합인사위원회
공제사무국 감사위원회사무국
여객국

지방 기관[편집]

소재 지역의 업무를 관리하고, 본사의 지시를 현장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여객 수송 업무의 일부도 처리하였다.

총국은 지역 단위로 철도 관리국을 총 관리했는데,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 신칸센 총국이 있었다. 총국 제도는 지사 제도(1957년 1월 16일에 실시하여 1970년 8월 14일 폐지되었다)를 승계하여 본사와 철도 관리국 사이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1985년 3월 20일의 조직 개편으로 주재 이사실은 폐지되고, 수송 계획실의 업무는 각 철도 관리국으로 인계되었다. 이외에도 수도권 본부, 도호쿠·조에쓰 신칸센 종합 지령 본부가 있었다.

철도 관리국, 지방 부국, 공장 등은 총국이나 수송 계획실 등의 아래에 놓여져 역, 차량 기지등의 현업 기관을 관리했다.

현업 기관[편집]

실제로 수송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전 국철 직원의 약 85%가 속했다. 아래의 47개 종별로 나뉘어 1986년 12월 말 현재 30개 총국·지방관리국에 약 6,300개의 기관이 존재했다. 역장, 구장, 실장을 최고로 중간 관리직과 그 아래에 주임, 직장장 등을 두었다.

영업소 정차장 신호장 차장구 차장소
연락선 선박관리소 선박시설구 부두 선원구 기관구
전차구 기동차구 객차구 객화차구 화차구 운전소
운전구 보선구 보선소 기계궤도구 영림구 레일 센터
건축구 기계구 기계소 전력구 변전구 신호통신구
통신구 신호구 전기구 전기소 전기공사구 약스관리구
철도공안실 공사구 구조물검사센터 승차권관리센터 차량소 CTC센터
관재구 자재센터 경리자재소 요원기동센터 자동차영업소

예산[편집]

국철의 예산안은 운수 대신에게 제출되어 대장성과의 절충을 거쳐 각료회의의 결정을 거친 뒤, 국회에 제출되었다. 또 자기 자금, 차입금, 채권의 발행으로 조달하는 자금 계획을 4반기마다 4반기 개시일 20일 전까지 운수 대신, 대장 대신, 회계 검사원에 제출해야했다.

수입 지출 예산은 손익계정, 자본계산, 공사계산, 특정 채무 정리 특별계산이 있었다.

손익계정에 있어서의 수입은, 운수 수입, 조성금 수입, 기타 수입 등으로 충당되었다. 조성금 수입은 1960년대까지 손익계정 수입의 0.1%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지만, 국철 재정의 악화로 인해 1970년대부터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자본계산으로부터의 수입은 손익계정의 수입 부족의 확대로 인해 1971년 시작되었는데, 1970년까지는 손익계정에서 자본계산으로 계속 내보내 지출하고 있었다. 국철 재건법이 공포되기 이전인 1978년 예산은, 조성금 수입 7%, 자본계산에서의 수입이 15%를 기록해, 손익계정 수입의 4분의 1 가량이 조성금과 차입금으로 채워졌다.

자본계산의 수입은 자산 충당, 채권 및 차입금, 대출금과 보조금 등이 충당되었다. 이중 채권 및 차입금은 1960년대까지 자본계산 수입의 50% 전후였으나, 손익계정의 수입 악화를 보전하기 위해 자본계산에서의 인출을 실시하게 되어 급속히 늘어나 1978년 예산에서는 자본계산 수입의 약 95%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사계산은 철도 시설의 정비 공사나 신칸센 건설비 등을 지출하는 것을 일컫는데, 전액을 자본계산 수입에서 조달했다. 또한 특정 채무 정리 특별계산은 1976년 신설된 것으로, 무이자 대출과 특정 채무를 취급했다.

역사[편집]

발족과 그 직후[편집]

1949년 일어난 미타카 사건. 국철 초기의 3대 사건 중 하나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국유철도는 인플레이션과 기타 악재등으로 인하여 1948년 300억 엔에 이르는 적자를 내게 되었다. 노동 쟁의가 빈번한 가운데, GHQ더글러스 맥아더는 국가 공무원의 파업을 금하는 한편, 공권력의 행사와는 무관한 전매사업이나 국유철도 등을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하는 공공기업체로 넘길 것을 권고했다.

이 권고가 받아들여져, 일본국유철도법이 1948년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당초에는 1949년 4월 1일 발족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운수성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6월 1일로 늦춰졌다.

국철은 발족 직후, 9만 5천명에 달하는 인력을 정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미타카 사건이나 시모야 사건이 일어나는 등 노사 관계가 껄끄러웠다. 경영적 측면에서는, 사쿠라기초 사건 등이 일어났으나, 특급과 급행의 부활 등 수송력 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전시 체제였던 지방 조직도 개편하였다.

5개년 계획[편집]

JNR 로고는 공모로 정해졌다.

전쟁 이전의 수송력을 회복한 국철은 1957년 제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계획에 근거해, 수송력의 증대와 동력의 근대화 등을 추진하였다. 1958년에는 첫 특급열차인 고다마호(こだま号, 151계로 운행)를 신설했는데 차량 전두부에는 공모에서 당선된 로고와 특급 마크를 달았다. 1961년에는 제 2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959년 착공한 도카이도 신칸센1964년 개통시켰다.

한편, 이 시기부터 국철과 타 교통수단과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국철 자문위원회는 1960년 국철의 경영 개선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불필요한 인력에 의해 지출되는 인건비, 정부 정책에 의해 계속되는 로컬선 신설 등이 국철 재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정부는 로컬선 신설을 강행하고 어떠한 대책도 취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철은 1964년 8300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월년의 이익으로 적자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6년부터는 이월년의 이익으로도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국철은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

또한 여러 개의 노동 조합이 정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국철 재건 계획[편집]

통근 5방면 작전에 의해 게이힌 도호쿠 선의 일부 구간이 도호쿠 본선에서 분리되었다.

제 2차 5개년 계획은 국철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으나, 역으로 적자의 발생을 가져와버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입금을 기반으로 하여 제 3차 장기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를 흔히 욘산토오라고 칭한다. 1968년 10월의 다이어 개정에서는 신성능 전동차가 대량 투입되었는데 고도 경제 성장으로 인한 수도권 통근객 급증에 대처하기 위해 통근 5방면 작전도 수립되었다.

그러나 국철의 재정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로 인해 제 3차 장기 계획도 중단되었고, 인력 감축 등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국철 자문위원회는 1968년 9월 경영 개선의 시급함을 강조하고 적자 83선의 폐지를 건의했다. 국철은 이를 받아들여 적자 로컬선을 대거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11월에는 국철 재정 재건 추진 회의도 경영의 합리화, 수송 방식의 정비, 시정촌 납부금의 대폭 삭감 등의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에 1969년 정부는 일본국유철도 재정 재건 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10년 후 흑자 회복을 목표로 재정재건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일본 열도 개조론을 주창한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 의해 적자 83선의 폐지 계획이 좌절되었고, 게다가 새로운 로컬선도 계속 건설되었다. 인건비의 증가와 화물 수송의 침체도 겹쳐, 10개년 계획은 재검토를 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국철과 노조간의 관계는 정치 문제와 경영 합리화로 인해 매우 나쁜 상황이었다. 국철이 진행한 생산성 향상 운동에 의해 발생한 부당 노동 운동 문제는, 1980년대에 걸쳐 현장의 혼란과 규율의 무력화를 초래했다. 파업도 잇따라, 다이어 개정이 연기되거나 심지어 폭동도 불러온 경우도 있었다. 또한 모터리제이션이 진행되어 국철을 이용하는 사람도 줄어들어, 1975년 있었던 파업권 탈환 파업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노조의 힘을 약하게 했다.

민영화와 그 이후[편집]

시라누카 선은 국철 재건법에 의해 폐지되었다.

1978년 운임 법정제가 완화되어 국철은 국회 심의를 거치지 않고 운임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철은 대장성의 압력으로 운임을 매년 꾸준히 올리게 되었다. 1980년 11월에는 일본국유철도 재건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1981년에서 1982년에 걸쳐 정부의 임시 행정 조사회에 의해 현장의 악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철은 여론의 비난을 사게 된다.

임시 행정 조사회는 1982년 5월, 5년 이내에 국철을 혼슈에 4블록 정도와 나머지 3개의 섬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정부는 국철의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신규 채용의 정지, 직원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1983년에는 국철 재건 감리 위원회가 발족하여 민영화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시라누카 선을 시작으로 특정 지방 교통선의 대대적 정리가 시작되었다. 1985년 1월 10일 국철은 비분할 민영화를 포함한 재건안을 제출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고, 니스기 겐 총재는 전격 해임되었다.

후임의 스기 우라교야 총재는 상무 이사등 간부들을 바꾸고, 6분할 민영화를 기본으로 하는 답신을 제출하고, 각 지구에 지구 경영 개혁 실시 준비실을 설치해 민영화를 위한 정지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6년 분할 민영화에 반대하던 국철 동력차 노동조합이 노사 협조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동년 동시에 실시되었던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한 것이 국철 민영화에 순풍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국철의 분할 민영화에 관련된 법률이 성립되었고, 1987년 4월 1일 국철은 종말을 고하고 JR 그룹이 발족했다.

분할 민영화 최대의 이유였던 국철의 경영상황은, 사실 민영화를 이루지 않고도 어느정도 재건된 상황이었다. 당시의 문제점은, 장기 채무의 이자 등이 영업 이익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는 점이지만, 이것에 대해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채무 대부분을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이하 국철 청산사업단)에 넘겨버려 이후 채무 상환 계획의 파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JR화의 준비작업[편집]

1986년 11월 2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일본국유철도 개혁법 등 국철 민영화 관련 8개 법안은 자민당 등의 찬성으로 성립되었다. 국철은 12월 3일 부로 본사 내에 채용 직원이나 민영화 이후의 조직, 체제를 결정하는 설립 준비실과 이행 준비실을 설치했는데, 이 준비실들이 사실상 새 회사의 모체가 되었다. 또 본사에 각 준비실을 총괄하는 신 회사 설립 위원회가 설치되어 12월 11일 첫 회의가 열렸다.

다음은 각 준비실의 목록이다.

  • 홋카이도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동일본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도카이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서일본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시코쿠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규슈 여객회사 설립 준비실
  • 일본 화물회사 설립 준비실
  • 신칸센 보유기구 설립 준비실
  •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 이행 준비실

12월 9일에 분할 민영화의 새 회사 제 1호가 되는 철도 통신 주식회사철도정보 시스템 주식회사의 창립 총회가 국철 본사에서 열렸다. 12월 15일에는 본사 지령을 폐지해, 홋카이도 총국, 수도권 본부, 나고야 철도 관리국, 오사카 철도 관리국, 시코쿠 총국, 규슈 총국에 각각 본사 지령을 설치했다. 이로써 전국적 지령 체계가 소멸됐다. 또한 본사는 정부와 자민당이 작성한 가이드라인에 의해 새 법인이 계승하는 모든 사업, 자산, 채무의 할당량을 정할 승계 실시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신 회사 설립 위원회는 21만 5천명을 채용하는 기본 계획을 정리해 12월 24일 배속처 희망 조사표를 1987년 1월 7일까지 접수했는데, 22만 7600명이 접수했다. 취직 희망자는 21만 9130명으로, 1월 18일까지 3만 1476명이 퇴직 의사를 분명히 했다. 2월 2일에는 노사협력을 노선으로 정한 전일본 철도 노동조합 총연합회가 발족했다. 설립 위원회는 20만 4126명의 채용을 확정하고 2월 16일 채용 통지서를 배부하기 시작했다. 퇴직 희망자로 인한 결원은 민영화 이후의 각 사가 자체 충당하기로 정해졌다.

새 회사로의 이행을 위한 직원들의 이동은 2월 14일 관리직의 이동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이동 대상자는 본사 및 총국, 관리국의 간부 직원, 현장 관리직 등 8천 4백명으로, 본사의 직원 중 3분의 2가 관리국 등으로 전출했다. 2월 17일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운수 대신이 새 회사의 수뇌 인사를 발표했다.

민영화를 한달 앞둔 3월 1일부터 각 설립 준비실이 정한 체제에 맞게 업무 체제가 바뀌었다. 동시에 새 회사의 관할 구역에 맞게 14개 노선의 관리국이 변경되었다. 본사가 작성하던 승계 실시 계획은 3월 4일 운수성에 제출되어 각 법인이 승계하는 노선, 차량, 채무 등이 확정되었다. 3월 16일에는 새 회사의 소속 부서나 직명 통지서가 교부되었고, 3월 23일부터 3월 25일 사이에 새 회사의 창립 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4월 1일 0시부터 새로운 JR 체제로 이행되었다.

채무 상환 계획의 파탄[편집]

매각을 위해 국철 청산사업단에 이관된 국철의 유휴용지. 이곳에 오카야마 돔이 들어섰다.

분할 민영화 이후 처리해야 할 채무는 국철 장기채무 25조 6백억 엔 이외에도, 일본 철도 건설 공단(이하 철건공단)의 채무와 혼슈 시코쿠 연락교 공단의 채무에서 국철이 분담한 부분,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새 회사의 경영 안정 기금 등을 합쳐 총 31조 4500억 엔에 이르렀다. 여기에 민영화로 인한 연금 부담 등의 장래 비용도 5조 6600억 엔을 더한 채무 37조 1100억 엔이 국철 청산사업단, 신칸센 보유기구, JR 그룹(JR 규슈, JR 시코쿠, JR 홋카이도는 승계하지 않았다)에 승계되었다. 이중 JR이 5조 9300억 엔, 신칸센 보유기구가 5조 6300억 엔을 계승하고, 나머지 25조 5200억 엔이 국철 청산사업단에 승계되었다.

국철 청산사업단이 승계한 장기 채무의 상환은 불필요한 국철 용지의 매각이익(예상가 7조 7000억 엔), JR 주식의 매각이익(예상가 1조 1600억 엔), 신칸센 보유기구에서 얻는 대출 수익(예상가 2조 8800억 엔)으로 우선 해결하고, 나머지 13조 7700억 엔은 특별한 계획이 없이, 국민 세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거액의 채무에다가 매년 1조 엔 가까이 이자가 붙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1987년부터 수백억 엔의 보조금을 지출했지만 경제가 침체되면서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이들을 팔아 이자와 원금을 갚는 것은 커녕 수입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 매년 고액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차환의 이자도 매년 증가세를 보여 새로운 이자도 생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채무를 청산하기는 커녕 되려 늘어나버린 28조 3000억 엔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국철 청산사업단은 1998년 해산했다.

결국, 상환하지 못하게 된 정부 보증 채무 24조 2000억 엔의 채무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담배세, 일반회계등을 재원으로 상환하게 되어 국민의 부담이 되어버렸다. 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완전 해결은 민영화 이후 60년 뒤인 2057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민영화 이후 20년이 지난 2007년 3월 현재, 20조 9964억 엔의 채무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또한 연금 등의 부담분 4조 1000억 엔에 대해서는 국철 청산사업단의 토지, 주식 등을 승계한 철건공단이 특례 업무로 부담하게 되었다. 그 뒤 2003년 철건공단이 독립 행정법인이 되어, 현재는 독립 행정법인 철도 건설·운수 시설 정비 지원 기구가 부담하고 있다.

철도 이외의 사업[편집]

자동차 사업[편집]

국철의 보조 역할을 내걸고 버스와 화물 수송 사업을 했다. 민영화 될 때에는, 지방 자동차국(자동차부, 자동차 관리실)이 관할 새 회사로 이속되었다.

선박 사업[편집]

바다로 인해 갈라진 철도노선을 잇기 위해 연락선을 운행했다. 세이칸 연락선, 우다카 연락선, 미야지마 연락선, 히토시 호리 연락선, 오시마 연락선 총 5개의 항로가 존재했다. 이 중 히토시 호리 연락선과 오시마 연락선은 국철 시대에 폐지되고, 나머지는 각각 JR 홋카이도, JR 시코쿠, JR 서일본이 계승했다.

철도 병원[편집]

다이쇼 시대 중반부터 전국 각지에 국유철도 직원을 위한 병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국철 발족 이후 국철에 넘어가게 되었다. 1982년부터 1987년에 걸쳐 일반 환자의 진료도 가능해졌다. 또한, 기관구나 보선구가 있는 역에 철도 진료소가 있기도 하였다.

  • 삿포로 철도 병원(→ JR 삿포로 병원)
  • 쿠시로 철도 병원
  • 아오모리 철도 병원
  • 모리오카 철도 병원(→ 모리오카 철도 건강 진단 센터)
  • 센다이 철도 병원(→ JR 센다이 병원)
  • 아키타 철도 병원(→ 아키타 철도 건강 진단 센터)
  • 야마가타 철도 병원
  • 미토 철도 병원
  • 다카사키 철도 병원
  • 오미야 철도 병원
  • 지바 철도 병원
  • 다바타 철도 병원
  • 중앙 철도 병원(→ JR 도쿄 종합 병원)
  • 니가타 철도 병원(→ 니가타 철도 건강 진단 센터)
  • 가나자와 철도 병원(→ 가나자와 건강 진단 센터)
  • 나가노 철도 병원(→ 나가노 철도 검진 센터)
  • 시즈오카 철도 병원(→ 시즈오카 철도 건강 진단 센터)
  • 나고야 철도 병원(→ 나고야 센트럴 병원)
  • 오사카 철도 병원
  • 오사카 철도 병원 우메다 분실(→ 오사카 철도 병원 오사카 건강 관리부)
  • 오사카 철도 병원 신구 분실
  • 히메지 철도 병원
  • 요나고 철도 병원(→ 요나고 건강 진단 센터)
  • 오카야마 철도 병원(→ 오카야마 건강 진단 센터)
  • 히로시마 철도 병원
  • 시모노세키 철도 병원(→ 히로시마 철도 병원 시모노세키 분실)
  • 도쿠시마 철도 병원
  • 시코쿠 철도 병원(→ 다카마츠 진료소)
  • 모지 철도 병원(→ JR 규슈 병원)
  • 구마모토 철도 병원
  • 오이타 철도 병원
  • 가고시마 철도 병원

프로 야구[편집]

1950년부터 1965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전신인 프로야구 구단 고쿠데쓰 스왈로스를 소유했다. 발족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국철 직원들의 의식 고양을 위해 만들어졌다. 국철법의 제약으로 인해 외부 회사인 국철야구 주식회사가 소유했다. 팀명은 당시 국철의 유일한 특급이었던 쓰바메를 기념해 지었다.

철도 공안[편집]

운수성 시대였던 1947년 창설되었다가 국철 발족에 맞춰 제도가 확립되었다. 국철의 직원 신분으로, 국철의 업무에 대한 범죄, 국철 부지 및 열차 내에서 일어난 범죄를 수사할 권한을 가졌다. 민영화 이후 경찰청 산하로 이전되었다.

일본국유철도 공제조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