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 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역모로도 부른다.[1]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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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사건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1583년 수찬이 된 후 서인을 비판하다가 귀향하였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재령 군수, 안악 군수, 신천 군수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정여립은 토굴에서 자결하고,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옥사는 1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정철은 정여립의 도주를 예견하였고, 자원하여 입궐하였다.[3]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다가 동인이었기에 물러 나온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4]정언신은 체포 후, 정언신의 아들 율의 상소와 성혼의 권고로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에서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음이 드러나, 유배형이 내려졌다.
[편집] 영향
이발의 노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죽음, 처사 최영경의 죽음을 비롯한 1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여 이후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옥사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했는데, 유성룡은 남인의 초대 당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편집] 평가 및 복권 노력
이후 동인과 그 후신인 북인, 남인이 집권했을 시 정여립의 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광해군 퇴출 후 북인이 숙청당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마저 숙청당하면서 옥사,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정여립의 난이 서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현재는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정철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이 조작했다는 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공존하나, 정설은 없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