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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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趙思義-亂)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1]


발단[편집]

조사의는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芳碩)이 희생되자 벼르고 있다가 태종(이방원) 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하였다.

명분은 죽어서도 학대받은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도 참여하였다. [1]

배경[편집]

신덕왕후(神德王后,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친척으로 1393년 형조에서 의랑(議郞)을 지냈고 1397년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하지만 1398년 이방원의 난이 일어나면서 직위에서 쫓겨났으며 서인으로 전락하여 전라도 수군에 배치되어 노역에 종사하였다.

이후 풀려나 1402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북권되었다. 그가 안변부사로 보임을 받은 것은 이성계의 영향이었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친척이라고 아꼈는데 태종 이방원은 이점을 알고 그를 풀어주고 안변부사로 보냈던 것이다. 부임지인 안변에 당도하여 지방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하였고 이성계는 조사의를 지지하였다. [1]

경과[편집]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였으나 그 후 관군이 군을 재정비하고 재공격을 가하자 반군은 무너졌고 조사의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되었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병사를 평안도 덕천(德川)·안주(安州) 방면으로 이동시켰으며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1402년 11월 27일 청천강에서 진압군과 싸움이 벌어졌으나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이산하자 안변에 돌아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다가 18일 참형되었다. [1]

주석[편집]

  1. 《문화원형 용어사전》, 조사의(趙思義), 문화콘텐츠닷컴 편집, 한국콘텐츠진흥원(2012년)

참고 자료[편집]

  • 「모반의 역사」, 태종에게 화살을 겨냥하다/조사의, 한국역사연구회 저, 세종서적(2001년, 176~183p)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태종시대의 주요 사건, 박영규 저, 웅진닷컴(2004년, 71~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