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누마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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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누마 겐
(長沼 健)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Ken Naganuma
출생일 1930년 9월 5일
출생지 일본의 기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사망일 2008년 6월 2일(2008-06-02)(77세)
포지션 공격수
청소년 구단 기록
1946–1948
1949–1953
1953–1955
히로시마 보통학교
간세이 가쿠인 대학
주오 대학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55–1967 제프 유나이티드 019 00(8)
국가대표팀 기록
1954–1961 일본 004 00(1)
지도자 기록
1958–1961
1962–1969
1972–1976
제프 유나이티드
일본
일본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나가누마 겐(일본어: 長沼 健, 1930년 9월 5일 ~ 2008년 6월 2일)은 일본의 전 축구인으로 일본 축구 협회의 전 회장을 지냈으며 히로시마시 출신으로 14세 때 히로시마의 원자 폭탄 투하 당시 피해를 입었다.[1]

선수 경력[편집]

1955년부터 1967년까지 후루카와 전기에서 공격수로 활동했으며, 1956년 하계 올림픽 당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또한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했으며 1954년 3월 7일 열린 대한민국과의 첫 한일전이자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1차전에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8년부터 1961년까지 팀의 선수 겸 코치를 맡았으며, 일왕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2연패(1960년, 1961년) 및 1961년 전일본 실업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 도시 대항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등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도자 경력[편집]

이후 1962년부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에 올라 1964년 하계 올림픽 당시 국가대표팀을 지도했으며, 1967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있으면서 1968년 하계 올림픽에서 팀이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1] 또한 1965년 일본 사커 리그의 출범에 관여했으며, 1966년 독일에 머물던 중 아디다스에 국가대표팀의 축구용품 지원을 요청하면서 아디다스가 일본 축구 협회를 후원하게 되는 초석을 닦기도 했다.

그 뒤 1970년 오카노 슌이치로에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넘겨주고 물러났다가 1972년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에 복귀했으며, 이 때 일본 축구 협회의 기술위원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1974년 일본 축구 협회의 이사로 승진했으며, 1976년까지 역대 최장기간인 11년동안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가 그 해 일본 축구 협회의 전무 이사에 임명되어 니노미야 히로시에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물려주고 본격적으로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1]

행정가 결력[편집]

이후 일본 축구 협회의 실질적인 1인자로 활동하면서 일본 축구 협회의 조직 개편 및 재정 확보에 기여했으며, 1980년 기린 맥주가 일본 축구 협회를 후원하도록 설득해 기린컵의 창설에 공헌했다. 또한 인터콘티넨털컵의 일본 개최와 일본 풋살 연맹의 출범 등을 이끌어내는 등 행정가로서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그 뒤 1987년 일본 축구 협회의 부회장에 올랐으며,[1] 1993년 J리그의 출범에 기여하였다. 이후 1994년 일본 축구 협회의 회장을 맡았으며,[1] 오카다 다케시를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해 국가대표팀이 199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어 사상 첫 FIFA 월드컵 출전을 이루어낸 것과 1996년 당시 논의되었던 2002년 FIFA 월드컵의 공동개최를 성사시켜 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FIFA 월드컵 개최를 하게 된 것 등에 공헌하였다.[1] 그 뒤 1998년 일본 축구 협회의 회장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되었으며,[1] 2002년 1선에서 물러난 뒤 일본 축구 협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2007년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08년 6월 2일 사망했다.[1]

각주[편집]

  1. 이홍기 (2008년 6월 3일). “한일월드컵 유치 주역 日축구협회장 타계”. 2008년 6월 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