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레콩키스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콩키스타
유럽 종교 전쟁의 일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국경의 후퇴
  코르도바 토후국, 750–929
  무라비트 왕조, 1085–1145
  무와히드 칼리파조, 1147–1238
  그라나다 토후국, 1232–1492
날짜711년/722년 - 1492년
장소
결과 포르투갈, 카스티야 연합왕국아라곤 연합왕국이베리아반도 탈환

스페인 제국콩키스타도르의 형성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혼합
교전국
기독교 왕국들
알안달루스
목록
지휘관

엘 시드


타리크 이븐 지야드





레콩키스타 또는 레콘키스타(스페인어: Reconquèsta 레콩키스타[*] 포르투갈어: Reconquista 헤콩키스타[*])[설명 1][설명 2][설명 3]는 '재정복'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설명 4]을 축출하고 영토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코바동가 전투에서 고트족 군대가 승리한 718년(또는 722년)을 보통 시작으로 여기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를 정복한 1492년을 마지막으로 본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은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루면서 승패를 주고받았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국경 역시 항상 변화해왔다. 10세기 후반 코르도바 토후국와지르알 만수르는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에 맞서 30년 동안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알 만수르 사후인 11세기 초에 코르도바 토후국이 해체되고 타이파라고 불리는 군소 제후국들이 생겨나자, 기독교 왕국들은 이를 틈타 알안달루스로 깊숙히 쳐들어가 이슬람 세력들 간에 내분을 조장하고, '보호'와 '지원'을 대가로 공물(파리아스)를 바치도록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탈환했다.[5][6][7][8]

12세기에 들어서 양측 간의 세력 균형은 더욱 팽팽한 양상을 보였는데, 특히 이 시기에 포르투갈레온-카스티야, 아라곤과 같은 여러 기독교 왕국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그랬다. 그들은 레콩키스타를 '고토 수복'뿐만 아니라 자국의 발전을 위한 정치적인 행동으로써 여겼으며, 이를 위해 지방 영주들을 휘하에 복속시키는 한편 재정착한 인구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려 노력했다. 한편 분열되어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타이파들은 모로코 일대에서 발흥한 무라비트 왕조무와히드 칼리파조의 강력한 지도 아래 통일되어 다시금 기독교 세력과 맞섰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기독교 왕국들은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았으며 이후 1236년의 코르도바 공방전과 1248년의 세비야 공방전을 거치면서 최남단의 그라나다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역을 탈환했다. 1491년 1월 그라나다가 항복하면서 마침내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은 비로소 기독교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492년 7월 30일 알함브라 칙령을 통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유대인 20만 명이 추방당한 것을 시작으로, 1499년부터 1609년까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무슬림들이 강제로 개종하거나 추방되었다.[9][10][11] 학자들에 따르면 1492~1610년 사이에 대략 3백만 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떠났다고 추정된다.[12]

19세기까지,[13]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됐었던 옛 서고트 왕국 영토에 대한 수복의 개념으로서만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으나[14][15] 19세기의 후반기 동안 스페인 역사학계에서 주목된 레콩키스타의 개념은 스페인 민족주의 및 낭만주의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이었으며 이전의 그것보다는 더 스페인 민족 정체성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16] 이슬람 제노포비아적인 관점에서 이 개념은 오늘날 21세기 유럽의 극우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17][18]

개념 및 기간

[편집]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서 '레콩키스타'라는 용어가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이 용어는 당대의 사가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도 아니며, 중세 스페인의 역사적인 사건을 지칭하는 목적으로서는 그것이 막을 내린 지 몇 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레콩키스타'는 오늘날에 와서는 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즉, 실제적인 의미가 어떻건 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종교간의 갈등을 무기로 쓰려는 학자들의 의도, 편견, 우려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19]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의 재정복'이라는 의미의 레콩키스타를 구성하는 실지회복주의적 이념은 대략 9세기 말부터 저술에 등장하기 시작한다.[20] 일례로 작자미상의 한 기독교 연대기 「크로니카 프로페티카」(883~884)는 711년에 이슬람에 의해 정복된 서고트 왕국과 그들 아스투리아스 왕국 사이의 역사적인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히스파니아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적·종교적 분열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이들을 몰아내고 점령당한 영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북부 기독교 왕국의 주민들과 남부 이슬람 치하의 엘리트층 사이에는 민족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분열감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20]

레콘키스타의 기존 의미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은 781년에 달하는 이슬람 지배기의 대부분 동안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이 서로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냈다는 것이다.[20][21]

20세기 초의 역사학은 레콩키스타의 기원에 대해 보다 선형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으나, 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20] 학자들은 레콩키스타 후반기로 갈수록 (몇몇 대전투들을 제외하고는) 두 세력이 평화롭게 공존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국경에서 제한적이고 국지적인 교전들만이 더 자주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챘다.[20] 심지어 기독교와 이슬람 군주들은 모두 다른 기독교도 및 무슬림들과도 싸웠으며,[설명 5] 9세기 초의 아리스타 왕조바누 카시와 같이 서로 협력하면서 동맹을 맺은 경우도 존재했다.[20][22] 서로 양측에 고용된 용병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돈을 주는 세력에서 싸웠다.[22] 한편 이들은 자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느정도는 종교적인 관용이나 공존을 베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3] 오늘날 현대 학자들은 새로운 레콩키스타의 개념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24][25]

11세기 후반에 시작된 십자군은 스페인의 기독교 군주들에게 종교적인 대의와 함께 고토 수복 전쟁의 기세를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26][26] 그 과정에서 레콩키스타는 가톨릭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이고 역사적인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무라비트 왕조무와히드 칼리파조 역시 기독교 국가들에 맞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그들의 종교였던 이슬람의 이념을 확고히 지지했다.[25]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종교 선전 기록들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등장했는데, 특히 11세기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는 이베리아의 사라센(무어)과 프랑크군이 맞서 싸운 론세스바예스 전투에 대해 허구적으로, 과장되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수세기가 지난 1870년 프랑스 제2제국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이는 국민들에게 도덕적, 국가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써 프랑스 학제에 도입되었다.[27][28][29]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초상화

레콩키스타의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통합은 19세기 스페인 민족주의의 성장과 뗄레야 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30] 이는 특히 민족주의적, 낭만주의적, 때로는 식민주의적인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중앙집권적이고 카스티야적이며 확고한 기독교(로마 카톨릭)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으며,[16]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한 20세기의 스페인에서 더욱 발전했고,[31] 최종적으로는 국가 가톨릭 주의에 대한 역사적 근거이자 정권의 이념적인 정체성으로서 그들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가장 고전적인 개념에 근거하자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고, 기독교 왕국들의 재정복에 대해 미화하려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32]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는 지역 민족주의/분리주의와 공산주의로 위협받고 있었던 조국 스페인의 기치를 지키고자 했는데, 여기서 무슬림들을 상대로 한 '해방 전쟁'이라는 레콩키스타의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딱 맞았다.[33] 프랑코는 레콩키스타 시기의 유명한 장군들인 펠라기우스엘 시드를 내세우면서 국민파가 분열된 교회와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십자군'이라 선전하였으며,[33] '공산주의에 대한 레콩키스타', '독립을 꿈꾸는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레콩키스타'라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 및 악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고, 이를 위해 심지어는 스스로를 '레콩키스타도르', 즉 재정복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2018년 당시 레콩키스타는 스페인의 우파~극우 정당들이 자신들과 대립하는 진보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34][31][35][36][37]

아이러니하게도 공화파 또한 국민파 중에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군단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국민파가 '외부로부터 온 적'이라면서 레콩키스타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선전했다.[38]

일부 현대 작가들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국가 건설 과정이 과거 무어인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세기에 걸쳐 탈환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정의하는 레콩키스타의 개념에 동의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페인의 건국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국가들이 "재정복"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이념적인 측면으로서는 특징 지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39] 하지만 최근의 다른 역사가들은 레콩키스타의 개념 전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후대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성'을 만들어낸 개념이라 평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레콩키스타 이전에는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슬람이 기술적으로 그들을 '정복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40][41]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는 8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온 '재정복'으로서의 레콩키스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스페인 지식인들 중 한명이었다.[42] 비록 수많은 궁금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오늘날에 와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43]

역사

[편집]

배경

[편집]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편집]
750년 무렵의 이베리아반도.
연두색 지역은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영토이다.

이슬람의 도래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히스파니아)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서고트인들이 세운 서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서고트 왕국은 5~6세기에 수에비, 동로마 등을 제치고 이베리아의 패권을 확고히 장악하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7세기 들어 잦은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 등으로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711년, 우마이야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서고트인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아랍-베르베르 혼성으로 구성된 무어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하였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왕위 계승권을 두고 일어난 내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고, 기병이 부족했으며, 결정적으로 이슬람 군대의 상륙을 막을 해군 전력이 전무한 상태였다.[설명 6] 결국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크 왕이 이끄는 서고트 군대는 이슬람 군대에게 궤멸당했다.[44]

로데리크가 패배한 후, 이프리키야의 우마이야 총독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타리크 이븐 지야드와 합류하여 히스파니아 대부분의 요새와 마을들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다. 특히 712년에는 메리다, 코르도바, 사라고사와 같은 주요 거점들이 이슬람 군대에게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했다. 이로써 피레네산맥 이남의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설명 7] 무슬림들은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토후국을 세워[설명 8] 이베리아를 통치하였다.

이베리아 전역을 정복한 이슬람 군대는 그뒤 피레네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투르까지 진격하였으나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마르텔에게 패배하면서 기세가 둔화되었다. 이후로도 갈리아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몇번인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사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약화

[편집]

우마이야 왕조의 정복이 완료된 뒤, 첫 아미르가 된 알 왈리드 1세 이래로 이슬람의 이베리아 통치는 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우마이야인들은 기독교도들에게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당들을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개조하여 주민들이 미사를 하기 힘들게 했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는데도 종교세(지즈야)를 납부하라고 강요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 직위와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박해를 가한 것이다. 또한 우마이야 왕조는 타민족보다 아랍인을 더욱 우대하는 차별 정책을 취했는데 이는 내부에 여러 불만세력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46] 특히 이슬람 제국의 북아프리카~이베리아 정복에 큰 역할을 했던 베르베르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설명 9] 그들은 같은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로부터 야만인이라면서 무시를 받았으며, 아랍인 대신 기독교와의 전쟁에 나가 피를 흘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보상은 아랍인에 비해 적었다. 심지어 종교세도 강요받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는데, 이는 훗날 이베리아 반도 내의 이슬람뿐만 아니라 우마이야 왕조 전역에서 아랍인들의 차별에 반대하는 타민족들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개

[편집]

초반부

[편집]

코바동가 전투

[편집]
《코바동가의 돈 펠라요 국왕》, 루이스 데 마드라조, 1855년작.

718년, 서고트 왕국의 장군이자 궁정 관료였던 펠라요가 이슬람 지방 영주인 무누자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했는데, 곧 아스투리아스는 이슬람의 팽창에 대응하는 이베리아 기독교 최후의 요새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새롭게 이베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한 안바사 이븐 수하임 알칼비지즈야의 액수를 2배로 인상시키면서 전국에서 반란이 끊이질 않자, 펠라요는 이에 호응하여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이슬람 군대를 몇차례 패배시켰다.

처음 몇년 동안 이슬람 세력은 이 지역의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툴루즈 전투). 이는 남서부 유럽에서 이슬람의 첫번째 패배였으며 앞으로의 정복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이에 원정군을 이끈 알칼비는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722년 여름, 우마이야 군지휘관 알 카마무누자가 진압군을 이끌고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출동했다.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펠라요와 그의 소규모 부대는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다가 코바동가 마을 인근의 좁은 계곡에 은신했다. 그곳은 길이 무척 좁고 지형이 험준해서, 이슬람군이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펠라요는 이곳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슬람군이 협곡에 들어서자, 협곡 양쪽에 숨어 있던 펠라요의 전사들이 화살을 퍼부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슬람군은 급히 퇴각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고트족 군대에 의해 거진 궤멸되었다. 지휘관 알 카마 본인은 퇴각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베르베르 대항거

[편집]
757년 즈음의 이베리아 반도. 아스투리아스 왕국(하늘색)이 남서쪽 방면으로 팽창한 것이 보인다.

그 무렵 아랍인의 차별에 폭발한 베르베르인들은 들고 일어나 739년, 소위 '베르베르 대항거'라 불리는 반란을 이베리아 반도 각지와 마그레브에서 전개한다. 이러한 내전은 743년까지 이어졌고,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를 급격히 촉진시켰다. 아랍 진압군은 베르베르 반군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마그레브이프리키야 지역은 위낙 광범위한데다가 베르베르인들의 본거지인만큼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만다.

이베리아 북서부의 베르베르 귀족들이 반란에 참여하느라 움직인 틈을 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1세는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두에로 강변의 여러 무슬림 마을과 정착지들을 초토화시켰고, 갈리시아 저지대레온 지역을 정복했으며, 그들의 중심지와 알안달루스 사이에 빈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이 지역은 토질이 척박하여 이슬람 세력들이 방치하던 곳이었지만,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곳에 자신들에게 귀순해오는 모사라베들을 정착시킴으로써 점차 인구를 늘려나갔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국경은 이후 몇 세기 동안 북부의 기독교와 남부의 이슬람 사이의 경계로서 대략 자리를 지켰다.

기독교 왕국들의 초기 팽창

[편집]
929년 당시의 이베리아 반도

이후 아스투리아스의 왕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민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거나 전쟁을 벌이면서 차차 그들의 영토를 남쪽으로 넓혀나갔다. 775년에 히스파니아 북서부가 완전히 그들에게 넘어갔고 842년까지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더욱 사방으로 팽창했다. 또한 알폰소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인 야고보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는데, 곧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카롤링거 제국 및 여타 기독교권에서 방문하는 순례객들은 그들 왕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세력들은 수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북부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수도 코르도바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점진적으로 카스티야, 갈리시아, 레온 지역에 위치한 여러 기독교 정착지가 요새화되었으며, 다시 그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으로의 기독교 재인구화를 가속화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이베리아의 기독교 인구는 계속 증가해나갔다.

알폰소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수도를 오비에도에서 레온으로 옮김으로써 아스투리아스 왕국에게서 레온 왕국이 떨어져 나왔다. 이후 여러 유능한 군주들의 통치와 알안달루스의 분열 속에서 기독교 왕국들은 활발히 레콩키스타를 추진했고 이슬람 사이의 국경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코르도바 토후국과 전선의 교착

[편집]
: 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아래: 910년의 이베리아 반도[설명 10]

하지만 756년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이베리아 반도로 피신한 우마이야 황족 아브드 알 라흐만이 혼란스러운 알안달루스를 안정화시키고 코르도바 토후국(후우마이야 왕조)을 설립하면서 한동안 기독교 세력의 남진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두에로 강을 사이에 두고 수백 년 간 대치하였고 이전과 같이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지면서 양측의 국경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따금 이슬람 측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같은 유능한 군주가 등장하여 기독교 왕국들을 수세로 몰아넣기는 하였으나 전황은 변함이 없었다.

이후 10세기경부터 코르도바 토후국이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기독교 세력은 다시 남진을 시작하였으나 이때 코르도바 토후국에 알 하지브 알 만수르라는 걸출한 재상이 등장하였다. 그는 레콩키스타 초기의 이슬람 세력에서 최후의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무너져가던 코르도바 토후국을 일시적이나마 다시 중흥시키는 한편 기독교 세력에 대한 여러 차례의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이베리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알만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이는 마치 8세기경 자신의 조상들이 이교도들에게 이베리아 반도를 내어주는 상황의 재현이었다.

알 만수르의 반격

[편집]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원정로와 그가 수복한 영토(짙은 초록색)을 나타낸 지도. 그가 공격한 주요 도시들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서기 1000년경의 이베리아 반도

알 만수르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977년 기독교도들로부터 살라망카를 탈환했으며 여세를 몰아 쿠에야르, 팜플로나를 습격하고, 979년에는 세고비아를 수복하는 한편 사모라를 공격했다. 981년에 아스트로가를 습격하면서 기독교 세력에게 큰 충격을 준 그는 982년에는 기어코 그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도시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983년, 아스트로가를 재차 공격한 알 만수르는 그 해 말에 바르셀로나를 공격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일대를 초토화시킨 후 톨레도로 귀환하였다. 986년에 아스트로가는 3번째로 함락당했으며 987년에는 기독교 세력이 재정복했던 코임브라를 수복하였다. 심지어 988년에는 레온이 또다시 함락되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이후 5년간 군세를 정비한 알 만수르는 993년부터 재차 레온 왕국의 동부를 공격하였고 995년에 살란다를 함락시켰다. 이에 레온 왕국이 군대를 동쪽에 모아두자 만수르는 돌연 서쪽에 출몰, 997년 이베리아 기독교의 최대 성지이자 레콩키스타의 정신적 지주였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습격하여 도시를 불태우고 유명한 대성당은 대문과 종을 떼어내어 코르도바의 모스크를 장식하거나 녹여서 촛대로 만드는 등 기독교 세력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 3년 뒤인 1000년에 레온 왕국의 제 2의 도시인 부르고스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후우마이야조 말기의 번영과 군사적 성공은 사실상 알 만수르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지탱되던 바, 그가 1002년에 사망하고 쇠락해가는 왕조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코르도바 토후국마저 1031년에 멸망한 이후에 알안달루스는 타이파라고 불리는 소규모 제후국·왕국들로 분열되어 기독교 세력에게 각개격파되기 시작한다.

중반부

[편집]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왕국들의 성장

[편집]
: 1030년의 이베리아 반도
아래: 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설명 11]

코르도바 토후국이 멸망한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하나의 도시와 그 주변 배후지를 기반으로 하는 작은 제후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런 토후국들을 타이파 국가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분파" 혹은 "파당"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 '물라크 알 타이프(mulūk al-ṭawāʾif)'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상황은 고대 말 그리스의 폴리스들의 상황이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각 타이파 국마다 통치자들의 배경도 달랐는데,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 이외에 슬라브계 맘루크 출신의 백인 타이파들도 많았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국력이나 영토 측면에서 이런 무슬림 군소국가들을 압도하면서 이른바 "보호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은 타이파 국가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일 때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혹은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금화를 납부하도록 하여 이슬람 세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또한 타이파 국가끼리 전쟁을 벌일 때는 한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쪽의 영토를 조금씩 점령하는 식으로 이슬람들이 장악하는 전체 영토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톨레도 함락 (1085년)

[편집]
오늘날 톨레도 시가지의 모습

톨레도 함락은 레콩키스타 가속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인 알폰소 6세에 의해 톨레도가 함락된 것은 1061년 코임브라 재정복이 포르투갈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 것처럼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톨레도는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에 위치한 메세타 고원의 핵심적인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기독교 왕국에게 넘어간 건 레콩키스타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는 톨레도 함락과 비슷한 시기에 십자군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레콩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이 이루어진 시대였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알폰소 6세의 초상화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가톨릭 국가들의 연속체로서 '서고트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이어지는 중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으로서 계승성을 표명한 역사적 사료는 9세기의 《알베다 수도원 연대기(Crónica Albedense)》밖에 없었고, 다른 사료들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왕국들의 이베리아 반도 '수복'이란 의식을 딱히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이때는 상호간의 이익과 목적만 맞아 떨어진다면 반도 북부의 기독교 소국들과 분열해가는 알안달루스의 타이파 세력들이 지극히 실리적인 현실정치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교황이 스페인의 기독교도들을 돕는 것은 레반트에서 성전을 치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선전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간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자 레콩키스타는 가톨릭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 역사적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교황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에게 레콩키스타가 곧 십자군 전쟁이므로 따로 군대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톨레도 함락 이후 약 반 세기 뒤 쓰여진 알폰소 7세 시절 쓰여진 《황제 알폰소 연대기(Chronica Adefonsi imperatoris)》를 기점으로 이후의 연대기와 사료들은 강렬한 종교적, 지정학적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원을 아스투리아스를 넘어 서고트 왕국에서 찾으면서 단순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한때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고토의 회복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흔히 불가분의 관계로 말하는 스페인 국가적 민족주의와 전투적 가톨릭 신앙의 일치화가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를 잡게 된 것도 이때이다.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

[편집]
11세기 무라비트 왕조의 팽창

이베리아의 군소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의 맹공을 견디지 못했고 세비야의 통치자 알 무타미드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는 다른 타이파국 지도자들이었던 바다호스의 알 무타와킬과 그라나다압달라 이븐 불루긴의 동의 하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구원을 요청한다.[설명 12]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이 요청을 수락하여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기독교 군세를 대파하고, 레온과 카스티야의 위협으로부터 알안달루스의 타이파들을 방어했다. 이때 유수프는 타이파 세력들의 실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충격의 정체는 4년 후 밝혀지게 된다. 1090년 유수프는 타이파 통치자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해졌으며,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그 휘하의 말리키 법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서 타이파들을 차례대로 합병하기 시작한다.[설명 13] 1106년까지 사라고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타이파들이 무라비트 왕조에게 흡수되었다.

이후 무라비트 왕조는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엘 시드가 단독으로 점령했던 발렌시아도 1102년에 탈환하며 기독교 세력들을 크게 밀어붙였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가까스로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우클레스 전투에서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잃는 바람에 딸 우라카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카스티야-레온의 왕좌가 보르고냐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140년대까지 무라비트 왕조와 가톨릭 국가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초기에는 프라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를 살해하는등 무라비트 왕조가 우세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무와히드 칼리파조에 의해 무라비트 왕조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기독교 세력이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무라비트 왕조의 몰락

[편집]
무라비트 왕조 통치 하인 1144년경의 이베리아 반도

1138년과 1139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의 후계자인 알리 이븐 유수프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에게 잇달아 패배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알안달루스의 주민들은 타민족 왕조인 무라비트 왕조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마침내 무라비트 왕조는 알안달루스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각지에서는 다시 타이파국들이 생겨났다. 기독교 국가들은 이러한 호재에 큰 탄력을 받아 대대적인 남진을 시작했는데, 일례로 아라곤 왕국우에스카(1096), 사라고사(1118), 토르토사(1148), 레리다(1149) 등을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지중해 연안에 걸친 이베리아 반도 동부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런가 하면 포르투갈 왕국은 영국과 독일, 플랑드르에서 온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리스본을 함락시키면서 그들의 영토를 약 2배로 늘렸다. 이로써 마침내 수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 보였다.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

[편집]
12세기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팽창

1147년, 무라비트 왕조는 압드 알 무민의 지도 아래 아틀라스 산맥에서 발흥한 또다른 베르베르계 왕조인 무와히드 칼리파조에 의해 전복되었다. 무와히드인들 역시 그들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레콩키스타의 위협에 직면한 타이파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기독교 왕국들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이베리아 반도로 침입해왔다. 무와히드 칼리파조는 1149년 세비야코르도바를 정복하고, 1172년에는 레콩키스타로 빼앗긴 이베리아 남부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였다. 1184년에 유수프 1세가 기독교 군대와 싸우던 중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아들 야쿱 알 만수르는 부친의 복수를 천명하며 재차 공격을 계속해 나갔다.

무와히드 칼리파조 통치 하인 1195년경의 이베리아 반도

1195년, 야쿱은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모조리 함락시켰다. 이후 야쿱의 군대는 2년 동안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일대를 초토화시켰으며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마퀘다 등을 잇달아 습격했다.

무와히드 칼리파조는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올 때마다 압도적인 군세를 이끌고 와서 기독교 세력을 물리치고 여러 도시와 거점들을 점령했으나, 매번 오래 머무르지 않고 수도인 마라케시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에 따라 칼리파가 이베리아로 건너가면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북아프리카로 귀환하면 기독교 국가들이 쳐들어오는 형세가 반복되었다. 그나마 야쿱 알 만수르는 알라르코스에서 대승을 거두어 레콩키스타의 기세를 한풀 꺾을 수 있었지만,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격멸하지는 못했다. 반면 기독교 국가들은 오히려 무와히드 칼리파조라는 거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오랜 기간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로간의 반목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후반부

[편집]

레콩키스타의 분수령: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편집]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를 묘사한 그림

1211년, 제4대 무와히드 칼리파인 무함마드 나시르는 가톨릭 국가들을 완전히 절멸시키기 위해 역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알안달루스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군은 숫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가톨릭군에게 대패했고, 이 결정적인 전투를 기점으로 무와히드 칼리파조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가톨릭 세력에게 넘어갔다.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

[편집]
: 1150년의 이베리아 반도.
아래: 1212~1492년까지의 이베리아 반도.
알안달루스의 국경이 뒤로 크게 후퇴한 것이 보인다.

그 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1236년 한 때 알안달루스의 중심지였던 코르도바를 함락하고 12년 후인 1248년 여세를 몰아 세비야까지 함락시켰다.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알안달루스 패권 붕괴 이후 또다시 등장한 타이파들은 이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기독교 왕국들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았다. 1228년부터 1248년까지, 레콩키스타는 전례없는 엄청난 진전을 보여주었다.

1249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3세가 포르투갈의 마지막 이슬람 거점이던 파루를 함락시켜 알가르브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의 레콩키스타는 끝을 맺었고, 무르시아니블라와 같은 잔존 타이파들 역시 1270년대까지 모두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에게 정복당하여 그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다만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지는 않았는데, 1232년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카스티야 왕국에 예속되는 것을 조건으로 이베리아 최남단인 그라나다나스르 왕조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나스르 왕조는 이후 1492년까지 존속하여 알안달루스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슬람 세력 최후의 노력: 마린 술탄국

[편집]
14세기 마린 술탄국의 팽창

무와히드 칼리프조를 멸망시킨 마린 술탄국 역시 레콩키스타의 성공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1275년, 마린 술탄국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알헤시라스 지역을 나스르 왕조로부터 양도받은 후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수차례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310년에는 카스티야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했으며 뒤이어 알메리아에 행해진 아라곤 왕국의 공세 역시 격퇴해내는 등 기독교 왕국들의 레콩키스타 저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기독교 세력은 1340년 리오살라도 전투에서 마린 술탄국을 완전히 축출할 때까지 레콩키스타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명목상의 이유 뿐만 아니라 마린 술탄국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측의 반격이 나름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것도 레콩키스타의 종료가 훗날로 미뤄지는데 한몫을 했던 것이다.

그라나다 토후국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설명주

[편집]
  1. 국가별 명칭은 다음과 같다.
    • 한국어: 레콩키스타, 레콘키스타, 국토 회복 운동(전쟁), 국토 수복 운동(전쟁), 재정복 전쟁
    • 일본어: レコンキスタ 레콘키스타[*]
    • 중국어: 收复失地运动 shōufùshīdìyùndòng (소푸쉬디윤동 [수복실지운동])[*]
    • 스페인어: Reconquista 레콩키스타[*]
    • 포르투갈어: Reconquista 헤콩키스타[*]
    • 영어: reconquest 리칸퀘스트[*], 다만 스페인어 명칭을 따라 Reconquista (리콩키스타/리콘키스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2.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철자가 쓰여졌지만, 발음은 이베리아 반도와 그 인근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에 따라 다르다. 종류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3. 가끔씩 알안달루스 재정복이라는 용어도 범용되었는데, 이는 아랍어로 레콩키스타를 가리키는 "알 이스티르다드(아랍어: الاسترداد al-Istirdad[*], '수복', '회복')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로는 "수쿠트 알안달루스(아랍어: سقوط الأندلس suqut al-Andalus[*]), 즉 '알안달루스의 몰락'이 있다.[3][4]
  4. 기독교 측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을 흔히 무어인이라 불렀다.
  5. 무라비트 왕조무와히드 칼리파조에게 공격을 받으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이 한 차례 쇠퇴기를 맞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6. 이베리아 반도는 국토 대부분이 고원 지대였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기병을 갖추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군의 육성은 안정적으로 국경을 방어할 규모의 육군이 갖춰진 다음에야 이루어지는데, 당시 여러 외적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던 서고트 왕국은 해군까지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베르베르인들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누미디아)는 옛 로마 시대부터 이름 높은 말의 산지였으며, 심지어 해적을 기반으로 한 해군 전력 역시 꽤 막강했다. 이는 로마 제국 치하에서 곡창 지대로 탈바꿈했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베르베르인들과 아랍인들이 11세기 이전까지는 관개 수로를 잘 사용하지 못해 농업 기반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가야만 했는데, 훗날의 바르바리 해적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등장했다.
  7. 다만 테오데미르팜플로나는 이슬람에게 복속하는 대가로 일종의 자치령이 되었다.[45]
  8. 우마이야 칼리파가 토후국의 수장(아미르)를 겸했다.
  9. 게다가 아랍인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온화한 스페인 중남부의 영토를 차지하고, 습하고 험한데다가 기독교와의 최전선인 갈리시아 등 북부 지방의 영토만 베르베르 귀족들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10. 코르도바 토후국의 영토는 줄었지만 이베리아 내 이슬람 전체의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
  11. 팜플로나 왕국에게서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이 떨어져 나왔다.
  12. 그들은 무라비트 왕조의 알안달루스 개입과 함께 자신들에게 오는 위협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는 가장 최선이었다고 여겼던 듯 하다. 알 무타미드는 '돼지의 무리가 되는 것보다는 낙타의 목초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도들의 봉신이 되는 것보다 또다른 무슬림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47][48]
  13. 영화 《엘 시드 (El Cid)》에서도 시작부터 유수프가 타이파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는 이를 크게 질타하는 장면이 있다.

인용주

[편집]
  1. 네이버 포르투갈어 사전 Reconquista
  2.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 reconquête
  3. Kabha, M. (2023). “The Fall of Al-Andalus and the Evolution of its Memory in Modern Arab-Muslim Historiography”. 《The Maghreb Review》 48 (3): 289–303. doi:10.1353/tmr.2023.a901468. S2CID 259503095. 
  4. Al-Mallah, M. (2019). “The Afterlife of Al-Andalus: Muslim Iberia in Contemporary Arab and Hispanic Narratives”. 《Comparative Literature Studies》 56 (1): e–22. doi:10.5325/complitstudies.56.1.e-22. S2CID 239092774. 
  5. "parias." Diccionario de la Lengua Española, 22nd ed. (online).
  6. According to Catlos, 83, Arabic authors referred to the parias as a jizya, the equivalent of the Islamic head tax on non-believers.
  7. Fletcher, 7–8.
  8. Reilly, 9.
  9. Mary Elizabeth Perry (2012). 〈8: Morisco Stories and the Complexities of Resistance and Assimilation〉. Kevin Ingram. 《The Conversos and Moriscos in Late Medieval Spain and Beyond: Volume Two: The Morisco Issue》. Brill. 167쪽. ISBN 978-90-04-22860-3. 
  10. Dadson, Trevor J. (2014). 《Tolerance and Coexistence in Early Modern Spain: Old Christians and Moriscos in the Campo de Calatrava》. Boydell & Brewer Ltd. 101쪽. ISBN 978-1855662735. 
  11. Boase, Roger (2002년 4월 4일). “The Muslim Expulsion from Spain”. 《History Today52 (4). The majority of those permanently expelled settling in the Maghreb or Barbary Coast, especially in Oran, Tunis, Tlemcen, Tetuán, Rabat and Salé. Many travelled overland to France, but after the assassination of Henry of Navarre by Ravaillac in May 1610, they were forced to emigrate to Italy, Sicily or Constantinople. 
  12. “Islamic Encounters”. 《www.brown.edu》. Brown University. 2023년 5월 25일에 확인함. Between 1492 and 1610, some 3,000,000 Muslims voluntarily left or were expelled from Spain, resettling in North Africa. 
  13. “La reconquista es un mito”. 《Diario de Burgos》 (스페인어). 2013년 11월 2일. 2019년 9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9월 13일에 확인함. 
  14. Ríos Saloma, Martín. La Reconquista: génesis de un mito historiográfico (PDF) (보고서). Instituto de Investigaciones Históricas/UNAM Departamento de Historia México.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15. Sanjuán, Alejandro García. "Al-Andalus en la historiografía del nacionalismo españolista (siglos xix–xxi). Entre la Reconquista y la España musulmana." A 1300 Años de la conquista de Al-Andalus (711–2011) (2012): 65.
  16. García Fitz 2009, 144–145쪽 "Hay que reconocer que la irrupción de este concepto en la historiografía hispánica del siglo XIX, con su fuerte carga nacionalista, romántica y, en ocasiones, colonialista, tuvo un éxito notable y se transmitió, manteniendo algunos de sus rasgos identitarios más llamativos, a la del siglo XX.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that the emergence of this concept in Iberian historiography of the 19th century, with its strong dual nationalistic, romantic and, at times, colonialist emphasis, had a remarkable success and was transmitted, retaining some of its most striking features, into the 20th century.]"
  17. Silva 2020, 57–65쪽.
  18. Paone, Antony; Thomas, Leigh (2021년 12월 6일). “Far-right French presidential hopeful promises 'reconquest' at rally”. 《Reuters》 (영어). 2022년 6월 22일에 확인함. 
  19. García Fitz 2009, 144–145쪽.
  20. McKitterick, Rosamond; Collins, R. (1990).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9쪽. ISBN 978-0521362924. 2012년 7월 26일에 확인함. By the later ninth century some of the distinctive ideology of the later 'Reconquista' had come into being. Christian writers, such as the anonymous author of the so-called 'Prophetic Chronicle' of 883/4, could look forward to the expulsion of the Arabs from Spain, and a sense of both an ethnic and a religious-cultural divide between the inhabitants of the small northern kingdoms and the dominant elite in the south was marked in the writings of both sides. On the other hand, it is unwise to be too linear in the approach to the origins of the 'Reconquista', as tended to be the way with Spanish historiography in the earlier part of the twentieth century. Periods of peaceful co-existence or of limited and localised frontier disturbances were more frequent than ones of all-out military conflict between al-Andalus and the Christian kingdoms. As has been mentioned, the former never made any serious effort to eliminate the latter. Moreover, as in the case of relations between the Arista dynasty in Pamplona and the Banü Qasi, the mutual interest could be a stronger bond than ideological divisions based on antagonistic creeds. These tendencies were, if anything, to be reinforced in the tenth century. 
  21. Alfonso X, Rey de Castilla (1283). “Libro del axedrez, dados e tablas [Folio 64R (croppped)]”. 《rbdigital.realbiblioteca.es》. Real Biblioteca del Monasterio de San Lorenzo de El Escorial. 2021년 11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6월 24일에 확인함. 
  22. Keefe, Eugene K. (1976). 《Area Handbook for Spain》.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05쪽. ISBN 978-0160015670. 2022년 4월 7일에 확인함. 
  23. Menocal, Maria Rosa (2009). 《The Ornament of the World: How Muslims, Jews, and Christians Created a Culture of Tolerance in Medieval Spain》. Little, Brown. 214, 223쪽. ISBN 978-0-316-09279-1.  (see Golden age of Jewish culture in Spain).
  24. Fernández-Morera, Darío (2016). 《The Myth of the Andalusian Paradise》 (영어). Open Road Media. 50쪽. ISBN 978-1-5040-3469-2. 
  25. O'Callaghan, Joseph F. (2013). 《Reconquest and Crusade in Medieval Spa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8–19쪽. ISBN 978-0-8122-0306-6. 
  26. Black, Jeremy; Brewer, Paul; Shaw, Anthony; Chandler, Malcolm; Cheshire, Gerard; Cranfield, Ingrid; Ralph Lewis, Brenda; Sutherland, Joe; Vint, Robert (2003). 《World History》. Bath, Somerset: Parragon Books. 55쪽. ISBN 0-75258-227-5. 
  27. Kinoshita, Sharon (Winter 2001). “'Pagans are wrong and Christians are right': Alterity, Gender, and Nation in the Chanson de Roland”. 《Journal of Medieval and Early Modern Studies》 31 (1): 79–111. doi:10.1215/10829636-31-1-79. S2CID 143132248. 
  28. DiVanna, Isabel N. (2010). “Politicizing national literature: the scholarly debate around La Chanson de Roland in the nineteenth century”. 《Historical Research》 84 (223): 109–134. doi:10.1111/j.1468-2281.2009.00540.x. 
  29. Lucken, Christopher (2019년 4월 16일), Bähler, Ursula; Cangemi, Valérie; Corbellari, Alain, 편집., “Actualité de la Chanson de Roland: Une épopée populaire au programme d'agrégation”, 《Le savant dans les Lettres》, Interférences (Rennes: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93–106쪽, ISBN 978-2-7535-5783-3, 2022년 11월 18일에 확인함 
  30. García Fitz 2009, 152쪽.
  31. Alejandro García Sanjuán (2018년 12월 5일). “Vox, la Reconquista y la salvación de España”. 《eldiario.es》 (스페인어). 201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32. García Sanjuán, Alejandro (2016). “La persistencia del discurso nacionalcatólico sobre el Medievo peninsular en la historiografía española actual”. 《Historiografías》 (Zaragoza: Prensas de la Universidad de Zaragoza) 12 (12): 133. doi:10.26754/ojs_historiografias/hrht.2016122367. ISSN 2174-4289. 
  33. García Fitz 2009, 146–147쪽.
  34. “¿Por qué Vox rescata ahora el viejo concepto de 'Reconquista'?”. 《www.publico.es》. 2019년 1월 15일. 201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35. “Casado, tras apelar Vox a la Reconquista: El PP ha empezado la reconquista por Andalucía y la acabará en Asturias”. Europa Press. 2019년 1월 11일. 201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36. Bravo, Francisca (2019년 1월 31일). “Vox designa a Toledo como el punto donde comenzar la 'reconquista' del centro de España”. 《eldiario.es》 (스페인어). 201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37. “Casado promete una 'reconquista' para que 'caiga el engaño independentista'. 《ElNacional.cat》. 2018년 7월 21일. 201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2월 15일에 확인함. 
  38. Bolorinos Allard, Elisabeth. "The Crescent and the Dagger: Representations of the Moorish Other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Bulletin of Spanish Studies 93, no. 6 (2016): 965–988.
  39. Purkis, William J. (2010). 《Eleventh- and Twelfth-Century Perspectives on State Building in the Iberian Peninsula》 (PDF). University of Birmingham. 57–58쪽. 2017년 10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0월 15일에 확인함. 
  40. Eugènia de Pagès, "La 'Reconquista', allò que mai no va existir", La Lamentable, 11 July 2014, lamentable.org 보관됨 28 8월 2017 - 웨이백 머신
  41. Martín M. Ríos Saloma, "La Reconquista. Génesis de un mito historiográfico", Historia y Grafía, 30, 2008, pp. 191–216, redalyc.org 보관됨 4 3월 2016 - 웨이백 머신, Retrieved 12 October 2014.
  42. "Yo no entiendo cómo se puede llamar reconquista a una cosa que dura ocho siglos" ("I don't understand how something that lasted eight centuries can be called a reconquest"), in España invertebrada. Quoted by De Pagès, E. 11 July 2014.
  43. Horswell, Mike; Awan, Akil N. (2019). 《The Crusades in the Modern World: Engaging the Crusades, Volume Two》 (영어). Routledge. ISBN 978-1-351-25046-7. 
  44. Nick (2022년 11월 10일). “Battle of Guadalete: 2 Reasons It Changed History”. 《The History Ace》 (미국 영어). 2023년 6월 16일에 확인함. 
  45. Collins 1989, 38–45쪽.
  46.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1, 휴머니스트, 2007, 98쪽, ISBN 89-5862-070-6
  47. Kennedy 1996, 162쪽.
  48. Bennison 2016, 43쪽.

외부 링크

[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레콩키스타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