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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1965년 7월 19일 서거,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 후 안장
* [[이승만]] 대통령: 1965년 7월 19일 서거,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 후 안장
** [[프란체스카 도너]] 영부인: 1992년 3월 19일 서거, 같은 해 3월 23일 가족장 후 안장
** [[프란체스카 도너]] 영부인: 1992년 3월 19일 서거, 같은 해 3월 23일 가족장 후 안장
* [[박정희]]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서거, 같은 해 11월 3일 국장 후 안장
* [[박정희]]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서거, 같은 해 11월 3일 국장 후 안장/문경에서 소학교 훈도를 하던 중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입교한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졸업했다. 이후 관동군 장교(중위)로 팔로군과의 전투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
** [[육영수]] 영부인: 1974년 8월 15일 서거, 같은 해 8월 19일 국민장 후 안장
** [[육영수]] 영부인: 1974년 8월 15일 서거, 같은 해 8월 19일 국민장 후 안장
* [[김대중]] 대통령: 2009년 8월 18일 서거, 같은 해 8월 23일 국장 후 안장
* [[김대중]] 대통령: 2009년 8월 18일 서거, 같은 해 8월 23일 국장 후 안장

2019년 8월 25일 (일) 14:33 판

국립서울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설립일 1996년 6월 1일
전신 국립묘지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직원 수 74명[1]
상급기관 대한민국 국방부
웹사이트 http://www.snmb.mil.kr/
  1. 군인 제외.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Seoul National Cemetery)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소속기관[1]이다. 1996년 6월 1일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에 위치하고 있다. 원장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설립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치로 전사한 장병들은 서울 장충단공원장충사에 안치되었으나 전사자의 수가 많아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육군묘지의 창설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논의는 중단되었고 한국 전쟁의 전사자는 그 영령을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범어사금정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안 안치소를 설치하여 봉안하였다.

한국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사자 수가 늘어 다시 육군묘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1952년 5월 6일, 대한민국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육군묘지를 따로 설치하면 관리상의 문제나 영현 관리의 통일성이 제고되지 않는다며 국군 통합묘지의 설치를 추진하도록 하였고 그 명칭을 국군묘지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년 5월 26일에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해 국방부 주관으로 편성된 3군 합동 답사반은 1952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해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 결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일대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재가를 받았다.

1954년 3월 1일 착공하였으며, 1955년 7월 15일에는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하고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 등 국가의 발전을 위해 명예로운 일들을 한 사람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을 기리는 장소로 서울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으로 보전 필요성이 높기에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특별시가 2012년 6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서울 미래유산 보전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근ㆍ현대 유산 가운데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는 유ㆍ무형의 유산에 대해 서울시가 현황 조사를 실시한 후 5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미래유산보존위원회가 선정한다.

역사

  • 1952년 05월 06일: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국립묘지 설치 결의.
  • 1952년 11월 03일: 군묘지설치위원회 구성.
  • 1955년 07월 15일: 국군묘지관리소 발족.
  • 1956년 01월 16일: 무명용사가 최초로 안장.
  • 1957년 04월 02일: 신분이 확인된 용사 최초로 안장.
  • 1965년 07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묘 안장됨.
  • 1967년 09월 30일: 현충탑 건립.
  • 1969년 04월 30일: 현충문 건립.
  • 1979년 11월 03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묘 안장됨.
  • 1980년 06월 22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진압경찰 4명과 군인 22명 안장됨.
  • 1980년 12월 31일: 현충관 건립.
  • 1996년 06월 01일: 국립현충원으로 개편.
  • 2009년 05월 19일: 공작 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 12명이 재일동포 북송국가 임무수행 순직자로서 전몰자로 인정받아 안장.[2]
  • 2009년 08월 23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묘 안장됨.[3]
  • 2015년 11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 묘 안장됨.

안장 대상

서울특별시 119특수구조단 故 장복수, 故 권용각 대원 3주기 추모식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다음의 사항에 따른 사람의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한다.[4]

  •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서 사망한 사람
  • 현역군인과 소집 중인 군인 및 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또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제1항제3호나목과 제5호나목에 해당하는 사람
  • 「상훈법」 제13조에 따른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 장성급(將星級)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
  •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였거나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예비군대원 또는 경찰관
  • 군인·군무원 또는 경찰관으로 전투나 공무 수행 중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제1항제4호, 제6호 또는 제12호에 따른 상이(傷痍)를 입고 전역·퇴역·면역 또는 퇴직한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 화재 진압, 인명 구조, 재난·재해 구조, 구급 업무의 수행 또는 그 현장 상황을 가상한 실습훈련과 「소방기본법」 제16조의2제1항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소방지원활동 및 제16조의3제1항의 생활안전활동 중 순직한 소방공무원과 상이를 입고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6조의4에 따른 상이등급을 받은 소방공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제1항제9호에 따른 6·25참전재일학도의용군인으로서 사망한 사람
  •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제2호 및 제3호에 따른 의사자(義死者) 및 의상자(義傷者)로서 사망한 사람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
  • 산불진화·교정업무 등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에 해당하는 직무 수행 중 사망하여 관계 기관의 장이 순직공무원으로 안장을 요청한 사람
  •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제1항제13호 및 제14호에 따른 순직공무원과 공상공무원으로서 카목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의 직무에 준하는 위험한 직무수행 중 사망 또는 부상하였다고 인정하여 제10조에 따른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안장 대상자로 결정한 사람
  •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외국인을 포함) 중 사망한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
  •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제2조제1호에 따른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주요 묘역

국가원수묘역

  • 이승만 대통령: 1965년 7월 19일 서거,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 후 안장
  • 박정희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서거, 같은 해 11월 3일 국장 후 안장/문경에서 소학교 훈도를 하던 중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입교한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졸업했다. 이후 관동군 장교(중위)로 팔로군과의 전투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
    • 육영수 영부인: 1974년 8월 15일 서거, 같은 해 8월 19일 국민장 후 안장
  • 김대중 대통령: 2009년 8월 18일 서거, 같은 해 8월 23일 국장 후 안장
    • 이희호 영부인 : 2019년 6월 10일 서거, 같은 해 6월 14일 사회장 후 안장
  • 김영삼 대통령: 2015년 11월 22일 서거, 같은 해 11월 26일 국가장 후 안장

장군묘역

국립현충원 '장군 제1묘역'의 채병덕, 김백일, 신응균

'장군 제1묘역'에는 일본육사 49기로 일본군 포병 소좌였던 채병덕(1914~1950),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였던 김백일, 일본육사 53기로 일본 육군 소좌였던 신응균(1921~1996) 등 대표적인 친일 군인이 묻혀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총참모장이기도 했던 채병덕은 193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에 졸업한 후 사관후보생으로 6개월간 근무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37년 12월 4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됐다. 1940년에는 포병학교를 수료하고 해방 직전에는 포병소좌로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채병덕의 장인 백홍석도 일본육사 27기 출신으로 일본군 중좌까지 올랐다.

신응균은 1940년 일본육사 53기로 졸업한 후 육군과학학교 포병과를 수료하고 일본군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했다. 1944년 6월부터는 오키나와로 판견돼 중포 중대장으로 근무했는데, 1945년 4월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오키나와 북부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부상을 입고 산속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는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에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을 듣고 귀순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미군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귀국했다. 일제의 패망직전 계급은 포병소좌였다.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간도특설대에 참여한 인물이다.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제압한다'는 모토 아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7기까지 모집해 운영한 간도특설대는 총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김백일은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간도특설대의 창설요원이었다. 상위 계급에까지 오르며 간도특설대의 핵심요원으로 활동한 그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중국군으로부터 들은 8월 20일까지 작전을 수행하다 부하들을 이끌고 8월 26일 진저우(錦州)로 이동해 부대 해체식까지 참석했다.

간도특설대가 해체된 이후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에 머물던 김백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같은 간도특설대 요원이었던 백선엽,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장교가 됐다.

'장군 제2묘역'의 이응준, 임충식, 신태영 '장군 제2묘역'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육군 중장, 197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육군 대장, 한국전쟁 당시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육군 대장(1921~1966), 해군 창설의 주역이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손원일 해군 중장(1909~1980),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육군 중장(1891~1959), 제12대 합참의장을 역임한 심흥선 육군 대장(1925~1976) 등 6기의 무덤이 있다.

6명의 장군 중 2/3에 해당하는 4명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였다. 김종오 장군이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에 오른 인물이라 제외하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발을 들인 군인은 6명 중 1/2인 3명이 된다.

이응준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 직전까지 일본군 대좌로 있었다. 191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갑(1877~1917)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3.1혁명 직후 나중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지청천(1888~1957), 1920년대 만주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맹위를 떨친 김경천(1888~1942) 등 일본육사 동기들과 중국 망명을 모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둘이 만주로 탈출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과 달리 이응준은 끝내 일본군에 남아 해방을 맞는다.

한국군 '군번 1번'이자 19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1920~2002)도 1942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로 있던 인물인데, 이응준의 사위다.

신태영 역시 일본육사 출신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까지 일본군 중좌로 있다가 이후 예비역 중좌로 해주 육군병사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징병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강연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장군 제1묘역'의 신응균은 바로 신태영의 아들이다. 부자가 함께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셈이다.

신태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1943. 11. 17.)에 1918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할 때 자신의 첫 출진의 목표가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는 것"이었다고 회고해 일찍이 일본화된 인물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자신의 행태가 너무 부끄러웠는지 해방 이후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를 핑계로 군에 입대했으며, 이승만 정권시절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임충식은 간도특설대의 3기로 자원입대해 준위까지 올랐다. 간도특설대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국방부장관과 국회의원(공화당)을 지냈다.

이응준과 신태영은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돼 있고, 임충식은 당사자의 구체적인 개별 행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장군 제3묘역'의 정일권과 이종찬 정일권(1917~1994)은 한국전쟁 직후 미국 참모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무총리와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만주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동기생 김석범과 함께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1940년 55기로 졸업했고, 이후 만주군 헌병 상위(대위)에 올라 간도헌병대 대장을 지냈다.

이종찬(1916~1983)은 을사늑약 당시 법부대신이었던 이하영(1858~1929, 자작 작위 받음)의 손자이자 자작 이규원(1890~1945)의 아들로 3대째 친일의 길을 걸은 집안의 인물이다.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1952년 이승만이 벌인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동원 요구를 거부해 해임되면서 '참군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의 친일행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졸업한 후, 중일전쟁에도 참여한 이종찬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6등의 금치훈장(金?勳章)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이종찬이 유일했다.

이종찬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뉴기니에서 육군공병 소좌로 있었는데, 종전 후 현지에 한동안 억류됐다가 1946년 6월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종찬의 묘비에는 드물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호국의 큰별 이종찬 장군은 (중략) 조(祖)는 정2품 정헌대부 외부대신 법부대신 휘 하영 공이며, 부(父)는 종2품 가선대부 대종원 대종이었던 휘 규원 공이니라, 명문의 혈통으로 지인용을 겸비한 품질(稟質)로서 일찍이 건군의 포부를 지녀(생략)"라고 적혀 있다. 친일파 집안의 역사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해놓은 것.

이들 일본군 장교 출신을 비롯한 친일파의 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장 이장이 불가능하다면 거제에서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운 전례에 따라 이들의 친일행적을 담은 비를 묘 옆에 나란히 세워둬야 어린 학생부터 어른까지 현충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장군묘역 아닌 다른 곳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으니

서울현충원에는 장군묘역 이외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다.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김홍준(1915~1946)은 2015년에 뒤늦게 서울현충원에 위패로 안치돼 있다. 문제는 김홍준의 서울현충원 위패 안치 시점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한 대통령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발표한 이후라는 점이다.

정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과 현충원 안장이 별개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이다.

국가보훈처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5] [6]

조직

원장

사건·사고 및 논란

현충문 폭파 사건

1970년 6월 22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현충원의 정문인 현충문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9] 공작원들이 설치한 폭약은 주요 참배객들을 노리고 설치 되었으나 미리 폭파되는 바람에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다. 공비들은 이후 도주하였으나 추적조에 추격 당해 모두 사살 되었다.[10]

북한 대표단 참배

2005년 8월 14일, 김기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등 북측대표단 일행이 현충원에 참배했다. 1985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비트부르크 참배와 비슷한, 전면전 상대국 군인 국립묘지에 대한 참배였다.[11]

이후 북한은 남측 인사들도 북한에 와서 혁명열사능이나 애국열사능을 참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한국은 국가보안법상 찬양죄라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상 찬양죄로 상대국 국립묘지 참배를 처벌할 것이라면, 상대국 대표단의 현충원 참배도 거부했어야 국제예양상 타당하다. 국제법 질서는 신의칙에 기초한 상호주의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상 찬양죄는 찬양행위로 인해 대한민국이 멸망할 만한 중대하고 명백한 실질적 위험이 발생해야만 합헌이라고 하여, 사실상 위헌취지의 판시를 했으나, 정부는 계속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고, 사실상 모조리 찬양죄로 처벌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 대표단은 헌화, 분향은 하지 않고, 6초간 묵념만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북한이 계속 주장하여, 한국 정부는 이를 적화통일의 시도로 보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기는 하나, 한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최고의 예우인 의장대 사열을 받은 데 비해서,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북한 최고통치자를 반국가단체 구성죄의 수괴로 규정해, 사형, 무기징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러한 국가보안법에 대한 현실에 맞는 손질이 모두 북한의 공작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하여, 일체 거부하고 있다. 역시 상호주의에 문제가 있다.

친일 논란 백선엽 사후 안치 특혜 시비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해 사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내 묘역 안치를 약속했다. 현재 동작동 서울현충원의 장군 묘역은 안치 공간이 없어 장군들은 사망 후 예외 없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고 있다. 백씨가 사후 대전이 아닌 서울에 묻히게 되면 이례적인 일로, 특혜로 볼 수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백씨가 국립묘지 안장 조건 중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국가유공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작동의 장군 묘역은 공간이 없지만 국가유공자 묘역은 일부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백씨는 한국 전쟁 때 전공을 세웠지만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2005년 발표한 친일 인사 3,059명에 포함된 인사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2009년에 발간한 < 친일규명 보고서 > (4-7권, 820~835쪽)에 따르면 백씨는 1940년 봉천군관학교 제9기생으로 입학해 이듬해 12월 졸업했으며 항일 무장 세력 토벌 부대이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백 씨도 1993년 일본에서 펴낸 < 대게릴라전 > 에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을 것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12]

전직 대통령 서울현충원 안장 특례 논란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대전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되기로 결정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는 유가족들이 "국민과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모시고 싶다."고 청원한 것이 발단으로, 대전에 이미 부지를 확보해 둔 점과 다른 안장 대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그리고 서울 현충원 안장시 부지 확보를 위해 추가적으로 공사 비용이 들어가는 점 등으로 인해 관계 당국이 난색을 표했으나,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유가족 의사를 존중할 것을 지시해 성사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015년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도 유가족들의 특례 요구가 인정되어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미 2004년부터 서울현충원의 포화 상태로 대전에 8위의 묘소를 위한 국가원수 묘역을 만들어 뒀고, 다른 안장 대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거나 서울 안장 희망시 봉분없이 현충원 내 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치되는데, 국가원수가 모범을 보이기는 커녕 특례를 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인 것이다.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은 2006년 서거한 최규하 대통령이 유일하다.[13][14]

같이 보기

각주

  1.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립묘지 6개소 중 유일하게 국가보훈처로 이관되지 않은 묘지이다.
  2. 이민호 (2010년 1월 1일). “[발굴 비화] 1959년 '북송저지대'의 진실”. 《신동아》. 2010년 12월 17일에 확인함. 
  3. 김명원 (2009년 8월 21일). “<김대중전대통령서거> 묘역 공사 한창인 동작동 현충원”. 《뉴시스》. 2010년 10월 31일에 확인함. 
  4.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제1항
  5. “가짜 독립유공자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다”. 시사IN. 2019.01.12. 
  6. “현충원 속 친일파 묘... 이장 어렵다면 '이렇게'. 오마이뉴스. 2019.06.02. 
  7. 부이사관 또는 서기관으로 보한다.
  8. 서기관으로 보한다.
  9. “武裝공비 2~3명 國立묘지 爆破기도”. 《경향신문》. 1970년 6월 22일. 2014년 10월 4일에 확인함. 
  10. 오창욱 (2013년 6월 4일). “[기획특집] 북괴 대남 도발사 ⑦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블루투데이》. 2014년 10월 4일에 확인함. 
  11. 이수경 (2005년 8월 12일). “북한 대표단, 8.15때 남한 국립 현충원 방문”. 《자유아시아방송》. 2017년 9월 5일에 확인함. 
  12. 박성진 (2011년 8월 10일).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백선엽 "사후 서울현충원 안치" 특혜”. 《경향신문》. 2011년 8월 10일에 확인함. 
  13. 정충신 (2009년 8월 20일). “서울현충원 국가원수 묘역 빈자리 없어”. 《문화일보》. 2017년 5월 3일에 확인함. 
  14. 임병안 (2015년 11월 23일).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 채워주오'. 《중도일보》. 2017년 5월 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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