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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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이사쿠

출생 1928년 1월 2일(1928-01-02) (86세)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도쿄 부 에바라 군 이리아라이 정(현 도쿄 도 오타 구 오모리키타)
국적 일본 일본
학력 도쿄 후지 대학, 300여 개의 명예박사, 명예교수 등 명예학술칭호 수여. (한국내에서도 경희대학교, 국립제주대학교, 동아대학교, 국립창원대학교 등 11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명예교수 학위 수여.
직업 종교인, 시인, 작가, 불교학자
종교 창가학회
배우자 부인 이케다 가네코
자녀 장남 이케다 히로마사, 차남 이케다 시로히사(사망), 삼남 이케다 다카히로
상훈

UN평화상, 제1회 타고르 평화상을 비롯 프랑스 예술 문학훈장, 오스트리아 학술 예술 최고훈위 영예장, 브라질 남십자국가훈장, 러시아 우호훈장 등 세계 27개 나라로부터 훈장수여

계관시인(1982년),세계계관시인(1996년),세계민중시인(2007년)칭호 수상
웹사이트 http://www.daisakuikeda.org/

이케다 다이사쿠(일본어: 池田大作 (いけだ だいさく), 지전대작, 1928년 1월 2일 ~ )는 일본의 종교인, 작가이다.

종교법인 창가학회의 명예회장,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다. 야마모토 신이치(일본어: 山本伸一 (やまもと しんいち)), 법오공(法悟空)의 필명으로 작가 활동도 하고 있다.

이력[편집]

입교 이전[편집]

1월 2일 도쿄 부 에바라 군 이리아라이 정(현 도쿄 도 오타 구 오모리키타)의 아버지 네노키치(子之吉)와 어머니 이치(一)의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3월 심상소학교 졸업 후, 형이 근무하는 '니가타 철공소'(新潟鐵工所)에 취직.
8월 늑막염이라는 병을 앓아 이바라키 현의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 종전을 맞이하였다.
9월 신바시(新橋)에 있는 '쇼분도 인쇄'(昭文堂印刷)에서 문선공을 함과 동시에 사립 '도요 상업고등학교'(東洋商業高等學校)(현 도요 고등학교)에 편입했다.
도쿄 도 오타 구 모리가자키에 있는 '협우회'(協友會)에 가입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쇼분도 인쇄를 퇴사. 반년 후, 게이큐 가마타 역 안에 있는 중소기업 조합 '가마타 공업회'(蒲田工業會)(현 가마타 공업 협동 조합)에 근무했다.

창가학회 입회 이후[편집]

일본 패전 이후 2년째 해당되던 해, 1947년 8월 14일 친구와 함께 가마타 부근의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도다죠세이라는 스승을 만났다. 10일 경과 후(1947.8.24) 창가학회에 입회하였다.

1948년 1월1일부터는 다니던 협동조합의 일을 그만두고 도다죠세이가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하여 출판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이후 도다(당시 창가학회 이사장) 이사장의 출판 사업은 극심한 불황으로 악화 되었고, 이의 타개를 위해 설립한 대동상호신용금고(금융업)도 대장성의 감독에 따라 폐쇄하기에 이르렀으며 도다죠세이 이사장은 급기야 1950년 말 경에 창가학회 이사장 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케다 다이사쿠는 약 6개월간 급여를 못받고 직원들이 모두 직장을 떠나는 와중에도 끝까지 남아서 도다죠세이와 함께 한다. 한편, 1948년 경 부터 도다죠세이는 이케다다이사쿠에게 개인교수를 시작하여 경제, 정치,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개인교수를 하였으며 이 개인교수는 도다죠세이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약 10여년간 지속 되었다.

1951년 이케다다이사쿠의 구명운동 및 서명운동에 힘입어 도다죠세이는 1951년 5월 3일 제2대 창가학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취임식에서 도다죠세이는 일본내에서 75만 세대의 포교를 이루어 내겠다고 공약한다. 이 당시 창가학회의 회원수는 약 5천여명이었고 이 공약을 믿지 못해서 당시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세이쿄신문(창가학회 기관지)에서도 이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창가학회 참모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가마타지부에서 지부간사로(보조역할) 창가학회 첫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201세대 포교라는 실적을 이루었다. 이후 창가학회의 핵심역할을 수행하면서 도다죠세이가 공약했던 75만세대 포교 달성의 핵심역할을 하였다. 특히 1956년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창가학회는 오사카에 전직 야구선수를 후보로 공천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케다 다이사쿠는 오사카에서 전무후무한 11,111세대 포교실적을 이루어 낸다. 이후 야마구치, 삿포로 등지에서도 포교확대의 핵심역할을 하였다.

1957년 말부로 공약했던 75만세대 포교를 달성한 도다죠세이 2대회장은 1958년 3월, 당시 다이세키사(사원) 총등산회를 실시 했고 이 행사 일체의 운영, 총괄을 이케다다이사쿠가 담당했으며, 3월16일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후계를 의탁하는 의식을 개최하였다. 이후 1958년 4월2일 스승 도다죠세이는 서거하였고 3년째에 해당되는 1960년 거듭되는 회장취임의 요청에 부응하여 창가학회 제3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5월 3일, 이케다 다이사쿠는 창가학회의 제3대 회장에 취임하고, 같은 해 10월, 국제활동을 하는 회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처음으로 하와이 방문을 필두로 북ㆍ남미를 방문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세계적인 냉전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1972년 중국(당시 중공이라 했음)을 방문, 주은래 총리와 회담하고 연달아 소련의 후루시쵸프 서기관도 방문하여 냉전의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놀드 토인비 박사와 대담(대담집:21세기를 여는 대화, Dialogue)을 했으며 이후 고르바쵸프(전소련 대통령), 라이너스 폴링(노벨상 2회수상)박사, 마가릿 대처(전 영국 총리), 후진타오(중국 국가주석), 저우언라이(전 중국 총리), 코피 아난(전 유엔사무총장), 넬슨 만델라(전 남아공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전 체코 대통령) 등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 대담을 통해 대담집을 발간하였다.

1975년 1월 26일에는 세계 51개국 지역의 멤버가 에 모여 국제창가학회(SGI)가 창립되었으며, 이케다는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현재까지 전 세계 각국의 교육 기관 및 법인, 단체에서 명예학위 및 휘호를 258개(2009년 8월 24일 현재)를 가지고 있다.

창가학회는 2012년 현재 전 세계 192개 국가 및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케이에스지아이(KSGI)로 2000년 4월 15일에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한국케이에스지아이(KSGI) 산하에는 화광신문사(발행부수 50만부 이상), 행복유치원, 제주한일우호연수센터, 진천연수센터 이천 평화묘원 등의 기관이 있고 전국 각지에 100개 이상의 문화회관이 있다.

저서[편집]

기타 활동[편집]

  • 창가교육의 학사(學舍)인 소카가쿠인(중ㆍ고등학교)을 도쿄와 간사이에 설립하였다.
  • 명예시민증 339개. 각종감사패 1500여개를 받기도 했다.
  • 하버드 대학, 모스크바 대학 등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1983년 이후 매년 '국제창가학회의 날'인 1월 26일에 기념제언을 발표해 UN에 제출하고 있다.
  • 2010년 6월에는 자연과의 대화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1]

상훈[편집]

  • 대한민국 문화훈장[2]

학위[편집]

  • 경희대학교 명예철학박사
  • 제주대학교 명예문학박사
  • 2002년 부산 동아대학교 명예철학박사[3]
  • 2009년 9월 홍익대학교 명예문학박사[3]

가족[편집]

  • 부인 : 이케다 가네코

주석[편집]

  1. 1000만이 본 이케다 사진전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2. ‘일 평화운동가’ 이케다 박사, 문화훈장 수상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3. Internet 화광신문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