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 당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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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관향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시조홍천하(洪天河)
중시조홍은열(洪殷悅)
주요 인물홍대순, 홍복원, 홍다구, 홍규, 공원왕후, 홍언박, 홍길민, 홍달손, 홍응, 홍성민, 홍적, 홍서봉, 홍명하, 홍치중, 홍계희, 홍순목, 홍영식, 홍범도, 홍진기, 홍우준, 홍문표, 홍준표, 홍영표, 홍문종, 홍정욱
인구(2000년)379,708명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는 홍천하(洪天河)를 시조로 하고,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편집]

고구려 영류왕 때 시조 홍천하(洪天河)가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펼치다가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해 신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선덕여왕 재위시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신무왕 때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편집]

홍은열의 손자대에서 재신공파(宰臣公派)가 나뉘고, 증손대에서 다시 예사공파(禮史公派)가 나뉜다. 그 후 6세손에서 중랑장파(中郞將派)가 나뉘고, 13대손에서 13파로 갈리고, 그 외에 3파가 있어 모두 16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가 남양군파(南陽君派, 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 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 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 파조 홍복·洪復), 중랑공파(中郞公派, 파조 홍후·洪厚) 등이다. 홍주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가 특히 번창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본관[편집]

남양(南陽)은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남양읍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이다. 신라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고려가 옛 지명으로 복구하여 940년(태조 23)에 당성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의 관할에 들었고, 후에 인주(仁州)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의 정동행성 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었다가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으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도 남양도호부의 토성(土姓)으로 홍(洪)·(宋)·(房)·박(朴)·최(崔)·(徐) 6성이 기록되어 있다.[1]

1896년에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 1914년 수원군에 병합되었다가 1949년 수원시가 분리되면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시청 소재지는 남양읍이다.

항렬자[편집]

  • 대동항렬(중시조로 1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병(秉) 口섭(燮) 재(在) 종(鍾) 순(淳) 口표(杓)
口식(植)
성(性)
지(志)
口기(基)
口의(義)
석(錫)
진(鎭)
口택(澤)
口락(洛)
근(根)
주(柱)
口환(煥)
口희(熙)
시(時)
중(重)
口용(鎔)
口수(銖)
연(演)
홍(洪)
口영(榮)
口동(東)
사(思)
연(然)
口균(均)
口철(喆)
경(庚)
상(商)
口태(泰)
口구(求)
정(禎)
낙(樂)
口형(炯)
口욱(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