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1세 (프랑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프랑수아 1세
FrancisIFrance.jpg
프랑스의 왕
재위 1515년 ~ 1547년
왕비 프랑스의 클로드
오스트리아의 엘리노어
부친 샤를 드 앙굴렘
모친 사보이의 루이즈
이전 왕 루이 12세
다음 왕 앙리 2세
왕가 발루아-앙굴렘

프랑수아 1세(프랑스어: François Ier, 1494년 9월 12일 - 1547년 3월 31일)는 프랑스의 국왕으로 1515년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1547년까지 통치하였다. 발루아 왕가 출신으로는 아홉 번째 군주이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첫 번째 르네상스형 군주로 취급받는다. 그의 치세에 프랑스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그의 강력한 맞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그리고 쉴레이만 대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앙리 4세와 더불어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왕이다.

초기 삶[편집]

프랑수아 1세는 샤렝트 주, 코냑에서 샤를 드 앙굴렘사보이의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샤를은 루이 12세의 사촌이다. 4살 때 프랑수아는 이미 앙굴렘 백작으로 발루아 공작이 되었다. 그는 세 아내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 데 실패한 루이 12세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어린 프랑수아는 왕의 지시에 따라 루이 12세와 브르타뉴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드 프랑스와 약혼한 후, 결혼하였다. 여성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살리카 법 때문에 루이 12세가 서거한 후 다음 왕위는 카페 왕조의 살아남은 남성 혈족에서 가장 나이 많은 후손인 프랑수아 1세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 클로드 드 프랑스왕비가 되었다. 1515년 태어난 첫 딸 루이즈 이후 3남 4녀를 두었다.

젊은 프랑수아가 1515년 왕좌에 올랐을 때, 그는 전례에 없는 인본주의자적인 자질이 있었다. 반면 그의 전왕들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새로운 지적 움직임을 대부분 수용하지 못한 채, 통치기간 내내 오직 이탈리아 영토에만 신경을 썼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행동 방식을 지속하였고, 이는 몇 세기 동안 프랑스를 독점하였다. 그들은 중세 프랑스의 군주 가운데 마지막 군주들로 여겨졌으나 르네상스가 프랑스에 완전히 그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졌다.

어린 프랑수아가 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 샤를과 루이 왕의 치세 동안 전쟁을 비롯하여 이탈리아와의 지속적인 접촉은 프랑스에 새로운 사고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라틴어 문법 교사 데물렝과 크리스토프 드 롱게일과 같은 그의 가정교사들은 프랑수아에게 그와 같이 새로운 생각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프랑수아에게 그것을 불어넣고자 시도하였다. 프랑수아의 어머니는 르네상스 예술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그녀의 아들도 물려받았다. 프랑수아가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의 교사들 대부분은 아직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전의 여느 프랑스 왕보다도 인문주의 쪽을 많이 지향하는 교육을 명석하게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위기간[편집]

예술의 후원자[편집]

프랑수아가 1515년 왕위에 올랐을 때 르네상스는 명백하게 프랑스에 도달하였으며, 프랑수아는 변화의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프랑수아는 예술의 주요한 후원자였다. 그는 훌륭한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해주었고 그들이 프랑스에 오도록 장려하였다. 그를 위하여 일하고자 안드레아 델 사르토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일류를 포함한 사람들이 확신을 하고 이탈리아를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모나리자〉와 같이 대단한 작품을 남겼으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프랑수아가 고용한 다른 일류 예술가는 금세공인 벤베누토 첼리니 그리고 화가 줄리오 로마노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왕실의 여러 궁전을 대단히 충실하게 장식하게끔 하였다. 프랑수아는 이탈리아의 중개상들을 통해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그리고 라파엘로와 같은 이탈리아의 명장들이 그린 예술품을 획득하였으며 배를 통해 프랑스로 조달하였다. 그들 중개상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프랑스로 옮기는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계획마저 성공하는 등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수아가 즉위하였을 때 뛰어난 그림들을 분산시키고 고대나 현대 양쪽의 조각들을 배치하는 등 왕실 궁전을 훌륭하게 꾸몄다. 아직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 왕이 수집한 격조 높은 예술 작품은 정확하게 프랑수아의 통치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문학자[편집]

1515년의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는 또한 문학자로서도 유명했다. 프랑수아는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의 등장인물 가운데 이야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거기에서 전쟁에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에게 문화로서 큰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수아의 후원을 받는 동안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 자신도 시인이었다. 프랑수아는 왕실 도서관을 개선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위대한 프랑스인 인문학자 기욤 뷔데를 도서관장에 임명하고 수집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는 삽화, 정확하게는 희귀본과 원고를 목적으로 찾으려고 이탈리아의 중개상들을 고용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도서관의 규모는 굉장히 커졌다. 프랑수아는 세계 곳곳에서 온 학자들을 위해 자신의 도서관을 개방하여 지식 보급을 촉진하는 등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1537년 프랑수아는 오르도낭스 드 몽펠리에에 서명하여 자신의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의 사본들을 판매할 것을 포고하였다.

프랑수아의 누이인 나바라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또한 뛰어난 저술가로서 고전 작품인 《엡타메롱》을 저술하였다.

건축[편집]

프랑수아는 인상적인 건축자였으며 어마어마한 돈을 새 건축물을 짓는 일에 쏟아부었다. 그는 앙부아즈 성에 대한 선왕들의 작업을 이어갔으며 블루아 성의 개보수를 시작하였다. 더불어 그는 초기 통치기간 동안 장대한 샹보르 성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 성은 명백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영향을 받았으며,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을 수 있다. 프랑수아는 루브르 성을 재건축하여 음울한 중세식 요새에서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파리의 새로운 시청(오트 드 빌) 건물의 설계 관리를 조율하려고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그는 마드리드 성의 건축과 생제르맹 성을 재건축을 지시하였다. 프랑수아가 세운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계획은 퐁텐블로 궁전의 재건축과 확장으로 완공 즉시 그의 공식적인 애첩인 안 에탕프 공작부인의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가 되었다. 프랑수아의 계획에 따라 궁전의 실내와 외부 둘 다 호사스럽게 장식되었다. 예를 들어 퐁텐블로 궁전은 그 야외 지방에 분출하는 분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포도주가 물과 희석되었다.

군사 활동[편집]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프랑수아 1세

군사적 또한 정치적 분야에서 프랑수아의 통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일련의 전쟁을 추구하였다. (이탈리아 전쟁 참조) 프랑수아는 1515년 직접 3만 5천 명의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 군대를 용케 쳐부수었고, 그 덕분에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밀라노를 점령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의 치세 동안 이루어진 군사 활동의 대부분은 그가 적대자로 맹세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초점을 맞추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 더하여 카를이 개인적으로 지배한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와 이웃한 작은 소유지들은 프랑수아의 왕국에 위협적이었다. 프랑수아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의 동맹을 맺는 것을 바랐다. 1520년 그 유명한 금란의 들판에서 협상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프랑수아의 가장 충격적인 패배는 1525년파비아 전투에서 일어났으며, 그는 카를에 의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체사레 헤르콜라니가 그의 말을 공격하였고, 스페인 사람후안 데 우르비에타, 디에고 다빌라, 알론소 피타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체사레 헤르콜라니는 “파비아 전투의 승리”라고 이름 붙였다. 프랑수아는 포로 신세로 마드리드로 호송된 다음 카를에게 여러 가지 주요한 양보를 할 것을 강요당해 결국 1526년 1월 마드리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막상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가자마자 카를과 맺은 조약은 강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약을 수행하기를 거부하였다.

유럽 외교에서 중대한 시기는 프랑수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양해를 이룬 것이다. ‘이교도 제국’과는 정식 조약을 맺을 수 없었으나, 고위급 사이에 만남을 가져 두 나라는 카를 5세에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탁하였다. 1543년 두 나라는 합동으로 니스에 해군에 의한 급습을 단행하였다.

개척[편집]

자크 카르티에캐나다 퀘벡에 파견하였다.

관료정치 개혁[편집]

1539년, 프랑수아는 자신의 성에서 빌레르 코트레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왕국의 행정 언어를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로 바꾸었다. 이 칙령은 필수적으로 성직자들에게 탄생, 결혼 그리고 죽음과 설립을 모든 교구의 호적 등기소에 등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이용할 수 있는 친자 관계와 더불어 인구 유동 통계의 첫 번째 기록을 정착시켰다.

종교[편집]

프랑수아의 통치 기간에 서유럽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방종을 비난하자 이 소식은 곧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에 널리 퍼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형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영향 아래 프랑수아는 새로운 운동에 비교적 관대하였으며, 한층 더 깊이 생각한 후 많은 독일 제후들이 생각을 바꾸어 그의 적 카를 5세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프랑수아의 태도는 1534년 10월 17일 밤에 일어난 ‘벽보 사건’ 후에 바뀌었다. 개신교도들은 파리 시내와 다른 주요 도시의 여러 장소에 미사를 부정하는 격문을 붙이고 다녔으며, 심지어 국왕의 침실문에까지 붙였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개신교의 목사 앙투안 마르코르트였다.

대다수 열렬한 가톨릭교도들은 벽보의 내용을 읽고 격분하였다. 프랑수아도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자신에 반대하는 음모로 보았으며, 프로테스탄티즘 신봉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두 투옥당하고 처형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파괴되었다. 인쇄물은 검열을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를 이끈 칼뱅과 같은 이들은 강제로 국외추방을 당했다.

프랑수아는 1547년에 서거하였다.

픽션에서 프랑수아 1세[편집]

빅토르 위고의 1832년 희곡인 《일락의 왕》은 훗날 1851년 주세페 베르디오페라리골레토에 영감을 주었다.

전 대
루이 12세
프랑스 왕
발렌티누아와 디오의 백작
1515년-1547년
후 대
앙리 2세
전 대
클로드
브르타뉴 공작(결혼으로 인해, 프랑수아 2세로서)
1514년-1524년
후 대
프랑수아 3세
전 대
루이 12세
프로방스와 포카퀴에의 백작
1515년-1547년
후 대
앙리 2세
전 임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밀라노 공작
1515년 - 1521년
후 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전 임
루이 2세
발루아 공작
1498년 - 1515년
후 임
국왕령으로 병합(이후 마가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