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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中華民國)은 1912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던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통치 시기를 제외해, 국내외의 요인으로부터 국내가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같은 시기에 2개 존재하는 시기도 있었다.

중화민국은 중앙 정부가 태평양 전쟁 후의 국공 내전에 패배하여, 1949년 타이완 섬과 그 인근 섬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수도 역시 타이완 섬의 타이베이 시로 옮겼다.

민국 초기(1912년~1916년)[편집]

청나라 말기, 혁명파의 혁명운동[편집]

청나라는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통해 압도적 다수인 한족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나, 19세기 후반의 잇따른 실패를 거치면서 이러한 충성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반(半)식민지'으로 전락한 청조가 국가 위기를 대처할 수 없으니 이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강산을 되찾아야만 부강이 가능하다는 논리에서 출발한 '반만'(反滿) 혁명의 구호는 이런 데서 힘을 얻었다.

이러한 논리를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바로 쑨원이였다. 그는 청일전쟁 무렵부터 하와이,홍콩흥중회를 세워 무장봉기에 의한 청조 타도와 공화제 국가의 설립을 가장 먼저 제기하고 실천하였다. 그리고 1903년 거아(拒俄)운동을 통해 반제(反帝)운동을 탄압하는 청조에 분격한 국내외 학생(특히 중국인 일본 유학생)들이 가담하면서 혁명운동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중국 국내에서도 화흥회나 광복회 등의 혁명 단체가 세워졌다. 결국 1905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전국 차원의 비밀 정당인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다.

혁명파는 기관지 《민보》를 통해 점진적 입헌개혁을 지지하는 입헌파 기관지 《신민총보》와 논쟁하면서 이론을 정비했고, 아울러 1911년까지 중국 남부 변경 지대에서 수십여 차례에 걸친 무장 봉기를 통해 청조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화교에게서 자금을 모집해 무길르 구입하고 지방의 비밀결사를 동원하여 봉기를 시도한 쑨원 주도의 '변경 혁명'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쑨원의 동맹회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은 계속 실패했지만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고 있었다. 청조의 신정으로 늘어난 신식군대, 신식 지식인들은 유학을 통한 새로운 학문과의 접촉으로 청조의 낙후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입헌운동과 철도이권회수운동 과정에서 급진적 입헌파 신사는 청조에 대한 환멸감을 더욱 키워갔다. 한편 의화단운동으로 인해 지불해야 할 배상금과 신정추진에 필요한 비용으로 인해 세금이 증액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하층 민중의 폭동이 잦아졌다. 민중폭동은 그 자체가 혁명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건국[편집]

신해혁명 기간 동안 사용된 깃발들. 혁명 초기엔 3가지 깃발이 사용되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건국 기념으로 출간된 달력.

1911년 10월 10일 호북 성 중심도시 우창에서 신군 일부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성공을 거둔 뒤 이어 한양(漢陽),한커우가 혁명군에게 장악되었다. 우창에서는 청조의 고위 장교 출신인 리위안훙이 도독으로 추대되어 호북군정부가 수립되었다. 우창 봉기의 성공은 동맹회 지도자들과 연락이 닿지 않은 채 이루어졌고 사후 동맹회 중부총회 인물들이 리위안훙을 인정했다. 호북군정부는 한커우에 있는 각국 영사관으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 단순한 폭동이 아닌 정치적 혁명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청조의 진압군에게 한커우와 한양이 진압되어 우창이 한때 위기에 처했지만 혁명군이 상하이난징을 점령하고 24성 가운데 14성이 혁명에 가담하는 식으로 혁명에 동조하는 성들이 늘어났다.

혁명을 일으킨 각 성에는 입헌을 추진하던 신사층의 권력의 중추를 차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일된 중앙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에서 각 성 대표가 모여 1911년 12월 3일 《중화민국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난징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12월 25일 귀국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중화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포스터

난징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쑨원은 각 성의 대표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총통 중심제의 '중화민국 임시 정부 조직 대강'을 내각책임제의 《임시 약법》으로 개정했다. 그런데 청조는 혁명 진압군 장교에 영향력이 큰 데다 열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해 전권을 위임한 터였다. 위안스카이는 무력 진압보다는 혁명군과의 타협을 통한 해결을 추진했다. 호북군정부나 혁명에 가담한 각 성 대표는 위안스카이가 공화정 수립에 가담하면 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므로 쑨원 역시 남북 간의 협상을 통한 해결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상하이에서 남북 대표 간의 회의가 열리는 동안 청조의 장교들이 공화정을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시를 하면서 청조 내부의 강경론이 수구러들고 황제 퇴위 이후의 예우조건이 확정되자 1912년 2월 12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다. 한편, 난징 임시정부 임시대총통 쑨원위안스카이에게 난징에 정부를 둘 것과 난징에 와서 취임하고 임시 약법의 준수를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참의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위안스카이를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추대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베이징 정변'을 일으켜 난징으로 가지 않았다. 참의원에서 새로운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 위안스카이3월 10일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민국초기[편집]

제2차 혁명과 실패[편집]

민중이 그토록 고대하던 청나라의 멸망을 달성했음에도 중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군사적 기반을 잃은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따라 쑹자오런의 주도로 중국동맹회가 개조되어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이 창설되었다.

국민당은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내각의 형성을 꺼린 위안스카이는 암살자를 사주해 3월 20일 국무총리로 예정된 쑹자오런을 저격, 3월 22일에는 쑹자오런이 사망함으로써 암살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이어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4월 27일 5개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러시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재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

1913년 6월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계열 도독 3인을 파면하자, 국민당을 비롯한 쑨원진기미 등은 '공화정 수호'를 위해 봉기를 벌였는데 이를 제2차 혁명이라 한다. 봉기는 6월 9일~7월 12일 양쯔 강 하류와 중류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진압됐고,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결국 봉기는 9월이 되서야 완전 진압되어 실패했다. 당시 중국 국내에서의 여론은 크게 호응을 못받았는데, 전란의 재발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와 중국 부르주아 세력 역시 실권 없는 민주세력보다 강력한 인물을 더 선호했던 탓이 컸다.

10월 국회는 '공민단'이라 자칭하는 정치깡패 폭도들로부터 협박을 받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곧 이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의 해산을 명하고 대총통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킨 '신약법'(新約法)을 제정했다. 그리고 대총통은 임기 10년에 연임할 수 있도록 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가 되려는 공작을 꾸몄다.

한편, 국민당이 강제 해체되어 일본에 망명중이던 쑨원은 1914년 7월 8일 중국 혁명당을 결성해 위안스카이 정권에 저항했다.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호국전쟁[편집]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 그는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독재정치를 폈다. 사진은 1915년의 위안스카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일본의 막대한 군사력과 재력을 탐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독일군 축출을 명분으로 하는 중국대륙으로의 개입 진행을 위해 위안스카이 정권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이해가 일치하여 결국 1915년 5월, 이른바 '중국판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21개조의 요구가 체결된다.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일본이라는 든든한 힘을 얻은 위안스카이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중국에는 공화정이 맞지 않고 제정(帝政)이 좋다.'라는 여론을 조성하고 국체(國體)를 바꾸자는 '관제 청원단'을 조직하였다. 그 결과 1915년 12월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국민대표 전원의 찬성 아래 '제제'(帝制)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추대하여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다음 해인 1916년 1월에 '홍헌'(洪憲) 원년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이를 '홍원 제제'(洪憲 帝制)라고 한다.

1915년, 중국에서 제제(帝制) 운동이 노골화되었을 때 중국 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위안스카이 토벌군'을 조직해 봉기를 일으켰으며, 운남 성에서는 1915년 말에 채악,당계요가 독립을 선포하고 '호국군'(護國軍)을 일으켰으니 이를 '호국 전쟁'혹은 '제3차 혁명'이라 한다. 이 봉기에는 위안스카이 편에 섰던 사람들마저도 호국전에 참가하여 전국적으로 '반 위안스카이 운동'이 확대되고 각기 중앙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제제(帝制)를 취소하고 총통 자리만이라도 보전하려고 하였으나, 호국군이 계속 그의 하야를 요구하여 그는 실의 속에 화병으로 1916년 6월 병사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이 총통직을 승계하였고, 독립을 선포하였던 각 성도 이를 취소하여 전국은 재차 통일되었다.

혼란의 시대(1916년~1928년)[편집]

군벌 시대[편집]

군벌이란, 독립된 군대를 갖고 한 지역을 차지하여 독립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군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국가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열강인 제국주의 세력과도 야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였으며, 문제의 해결을 군사력에 의존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사후, 그의 기반 조직이었던 북양군벌은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베이징을 중심으로 권력 암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 그간 위안스카이 밑에서 숨죽이고 지내던 지방의 군벌들까지 대거 발호, 이런 기회를 이용해먹으려는 일본까지 가세하면서 중국대륙은 혼란의 시대로 돌입했다.

베이징 정부[편집]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 북양 군벌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돤치루이를 영수로 하는 안휘파와 펑궈장이 장악한 직예파로 갈라진 것이다. 펑궈장1919년 12월에 사망한 뒤에는 오패부차오쿤이 직예파의 수령이 되었다.

북양군벌의 분열을 가져온 파벌은 대체로 위안스카이가 집권중이던 시기에 이루어진 북양 군대의 지리적 배치에서 비롯되었다. 직예파와 안휘파는 서로 암투를 벌이면서 베이징 정부를 유지해 나갔으나 전국을 지배할 역량은 갖고 있지 못했다. 베이징 정부는 명목상의 중앙정부일뿐이었다.

지역별로 군벌세력들을 보면, 만주에는 일본과 연계된 장쭤린, 산서성에는 옌시산, 운남 성에는 당계요, 광서 성에는 육영정, 쓰촨 성에는 웅극무, 호남 성에는 담연개, 광둥 성에는 진형명 등이 진을 치고 베이징 정부와 대립했다.

이러한 지방 군벌세력들의 할거로 중국 민중에 대한 착취는 청나라말기와 위안스카이 독재정권때보다 훨씬 더 가혹해졌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 국회가 회복되고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실권은 안휘파의 영수이자 국무총리인 돤치루이가 쥐고 있엇다. 당시 베이징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對)독일 선전포고 문제'로 내부갈등을 빚고 있었다. 돤치루이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독일과 전쟁하는 데 찬성하는 돤치루이는 참전군 편성을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그것으로 자신의 무력기반을 확장하려고 했다. 일본은 돤치루이를 적극 지원하면서 그를 통해 중국을 지배하기로 했다.

1917년 5월에 대총통 리위안훙은 국회를 끌어들여 참전에 반대하고 돤치루이를 파면했다. 이에 돤치루이는 각 성의 독군(督軍)들을 동원해 리위안훙]을 협박했다. 그런데, 독군의 한 사람으로 신해혁명을 부정하던 장쉰1917년 7월에 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들어와 쿠테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를 옹립하고, 청조의 부활을 선언했다. 이를 '장쉰의 복벽'이라 부른다. 이 복벽 운동은 돤치루이펑궈장의 반대에 부닥쳐 1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돤치루이가 다시 국무총리가 됐고, 8월 14일에 중국 정부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중국은 참전의 대가로 관세의 인상, 의화단 배상금의 지불 연기, 의화단 사건에 관한 조약 규정의 일부 변경 등에 대해 연합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제1차 광둥 군정부[편집]

일본 도쿄에 망명중이던 쑨원1917년에 중국 광저우로 귀국해 서남 군벌세력과 손을 잡고 광저우에 임시정부 '광둥 군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이어 쑨원은 8월에 광저우에서 국회의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군정부 조직 대강'을 통과시키고, 쑨원이 대원수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쑨원위안스카이 제제(帝制)에 반대하였던 서남 군벌세력과 연합하여 호법(護法, 위안스카이가 수정하기 이전의 '임시 약법'을 회복)을 위한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광둥 군정부는 서남 군벌세력내에 운남군벌인 당계요와 계(桂)계 군벌인 육영정 사이의 대립으로 군정부가 내세운 호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쑨원을 대원수로 하였던 군정부가 총재 합의제인 총재 정부로 개조되고 7명의 총재를 선출하였다.

한편, 총재 정부는 계계와 전계, 즉 서남 군벌과 이들을 따르는 정파인 정학회(政學會)가 지배하여 호법은 이름뿐이었다. 여기서 쑨원은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광둥 군정부 내에서는 반혁명,반개혁,반진보의 보수적 군벌과 정치 세력은 끝내 쑨원을 배척시켰다. 결국 쑨원은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여겨 1918년 5월 총재직을 사임하고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가게된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쑨원은 저술활동에 몰두하면서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광둥 군정부는 쑨원의 사임 이후 서남군벌간의 제휴도 깨지게 되면서 광둥 군정부는 광서 성 군벌 육영정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5.4운동과 중국 국민당 재건[편집]

5.4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

일본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이권을 얻었다. 1915년에는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대어 방대한 이권을 얻어냈고, 1917년 초에는 지중해에 해군을 파견하면서도 적도 이북의 독일 식민지와 산둥반도에서 독일이 갖고 있었던 이권을 넘겨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전승국에 이와 같은 전쟁 중 합의사항의 실천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일본의 요구는 물론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8년 연두교서에서 밝힌 14개 항의 평화교섭 조건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영국은 전쟁 중에는 영국의 이권이 침해되는 것까지 묵인하며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는 이른바 '번복평결'(Adverse verdict)를 추구하면서 일본에 산둥반도에서 얻은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윌슨도 일본의 요구에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반서양, 특히 반미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다. 베르사유에서 동아시아 문제가 논의되는 동안에 중국에서도 반서양, 반미 감정이 크게 일어났다. 일본 신문들은 매일같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왜곡해 전하고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미국영국은 일본이 회의에 불참하겠다고 위협하자 결국 양보했다. 4월 21일 이탈리아를 제외한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의 4대국 회의는 중국의 요구를 물리치고 일본의 요구를 거의 전면적으로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5월 1일 중국의 외교적 패배에 관한 뉴스가 베이징에 전해지자 중국내 반일 여론이 끓어올랐고 4일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외교교섭을 담당한 베이징정부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곧 전국적으로 퍼져간다. 이를 5.4 운동이라 한다. 6월 10일 베이징 정부는 마침내 굴복하고 그동안 '매국노'로 지목되어온 3명의 고위관리를 파면한 데 이어 6월 28일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승인을 거부했다.

5.4 운동 이후 중국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세력들과 군벌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커져가고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5.4운동 당시 상하이에 있던 쑨원은 이 사건에 커다란 자극을 받아 1919년 10월 10일중화 혁명당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안직전쟁[편집]

중국에서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베이징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돤치루이의 안휘파가 대일추종 외교와 남방에 대한 무력통일 정책을 펴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아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미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던 직예파 군벌은 장쭤린의 봉천파와 제휴해 '반(反) 안휘파 8성 동맹'을 맺고 남북 화평과 대일타협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고 안휘파에 대항했다.

결국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안휘파가 직예파에 패배해 베이징에서 밀려났다. 이후 직예파와 봉천파가 베이징 정부를 구성했다.

제2차 광둥정부 수립[편집]

한편, 남방에서 광둥 성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진형명(陳炯明)은 1920년 10월 광저우를 점령하고 있던 육영정을 축출했고, 11월에는 쑨원을 광둥 정부 수반으로 추대한다고 발표했다. 쑨원1921년 4월 비상대총통으로 선출됐다. 축출된 군벌 육영정베이징 정부와 모의하여 광둥 정부를 붕괴시키려 하였으나, 쑨원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쿠테타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쑨원광서 성 계림으로 참모본부를 전진시키는 등 북벌을 준비해 나갔다. 그러나 광저우에 남아 보급을 담당키로 했던 진형명이 쿠테타를 일으켰다. 쑨원은 간발의 차이로 반란군의 손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망명했다.

군벌들간의 내전과 국민당의 대응[편집]

중국에서 직예파는 영국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봉천파는 일본의 후원을 얻고 있었다. 두 군벌이 서로 양자 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깊어졌다. 전국적인 판도는 직예파와 이에 대항하는 안휘파, 봉천파, 쑨원의 연합세력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1922년 4월에 제1차 직봉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직예파가 승리했다. 패배한 봉천파의 군벌 장쭤린산해관 밖으로 후퇴해 만주에서 자치를 선포했다.

제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파는 베이징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직예파는 6월에 리위안훙을 총통에 복귀시키고 해산된 국회를 회복시켜 법통 문제를 둘러싼 시비를 무마했다. 그리하여 한때 베이징 정부에 의한 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일어났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직예파는 오패부차오쿤의 2개 세력으로 분열됐다. 직예파 군벌 내부에서 오패부와 차오쿤의 갈등이 심화되고, 1923년 6월에 차오쿤이 정변을 일으켜 총통 리위안훙을 몰아냈다.(제1차 베이징 정변) 차오쿤은 이어 국회의원을 매수하여 10월에 총통선거를 실시해 총통이 되었다. 이 부정선거로 인해 베이징 정부의 법통상 기반은 완전히 명분을 잃었고, 여타 군벌은 무력으로 직예파를 몰아내려고 했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1922년 무렵에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소련 지도자 레닌이 파견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마링(Hendricus Josephus Maring)을 만나 혁명 수행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쑨원은 공산당원의 개별 입당을 허용하는 등 중국 국민당을 대중 정당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국민당의 북벌[편집]

국민혁명군병사들의 호북 성 진군
1926년장제스

난징 국민정부 시대(1928년~1937년)[편집]

중일전쟁(1937년~1945년)[편집]

국공내전(1945년~1949년)[편집]

대만 피난 후 (1949년-현재)[편집]

장제스의 복직과 삼민주의로의 대만 개조[편집]

국민당 일당 독재와 반공대륙 표방[편집]

경제발전[편집]

외교 차질[편집]

장징궈의 권력 승계와 본토화[편집]

당외세력의 대두와 계엄의 해제(민주화)[편집]

대만의 민주화와 총통 직선제[편집]

대만의 정권교체[편집]

함께 보기[편집]

중국의 역사
이전 시대 중화민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베이징·난징 정부기)
1912~1949
다음 시대
청나라의 기 청나라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중화민국 타이완 국민정부

주해[편집]


주석[편집]


참고서적[편집]

  • 이윤섭.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ISBN 978899107182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ISBN 978895275892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제국의 몰락에서 강대국의 탄생까지》. 책과함께. ISBN 978899122172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박한제,김형종,김병준,이근명,이준갑 공저.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ISBN 9788958282365.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신승하.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미래엔(대한교과서). ISBN 9788937830792.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아사히신문 취재반 저/백영서,김항 공역.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창비. ISBN 9788936482398.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