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hldnjsckd/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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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작가 정보
출생1821년 10월 30일(1821-10-30)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사망1881년 1월 28일(1881-01-28)(59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러시아 제국
민족러시아인
언어러시아어
직업작가, 출판업자
종교러시아 정교회
등단1846년 가난한 사람들
장르사실주의
부모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배우자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주요 작품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러시아어: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년 10월 30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1881년 1월 2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작가, 철학자, 출판업자이다. 1877년부터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의 주요 회원이었다.

작품 창작의 초기 시절은 물론, 페트라솁스키 클럽 활동에 따른 4년간의 유형과 뒤이은 추방 이후에 꽃핀 본격적인 창작 활동의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는 전통적인 러시아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르는 작가로, 당대인들로부터는 응당 받았어야 할 평가를 받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 이후 그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또 러시아의 고전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러시아에 최초로 인격주의를 들여온 작가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은 세계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이후 제정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들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실존주의정신분석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스토옙스키의 탄생, 어린 시절[편집]

도스토옙스키 가문[편집]

르티셰프 가문의 문장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문장

도스토옙스키라는 성(姓)은 1506년 10월 6일, 폴란드 왕국에서 귀족이었던 다닐 이바노비치 이르티셰프(러시아어: Данил Иванович Иртищев)에게, 핀스크 근방의 마을 도스토예프(러시아어: Достоев)의 이름을 따 새로운 성을 하사한 데서 유래한다. 연구자들은 도스토옙스키 성을 쓰는 모든 사람이 다닐 이르티셰프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현지에서 전해져오는 전설에 따르면, 도스토예프라는 이름은 폴란드어 dostoinik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당시 리투아니아-폴란드 공국의 봉신으로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약간의 경멸조로 이들이 '왕궁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사람이라서 도스토예프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폴란드어 dostoin은 러시아어로 '충분한'을 의미한다) 오늘날 벨로루시 브레스트 주에는 도스토예프 마을이 남아있다.

연구에 따르면, 다닐 이르디셰프의 조상은 사료에서 여러차례 언급되는 타타르인 아슬란 첼레비 무르자(러시아어: Аслан-Челеби-Мурза)로 추정되는데, 그는 1389년에 킵차크 칸국을 떠나 정교회로 개종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봉신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시로키 로트(러시아어: Широкий Рот, '큰 입'이라는 뜻)라 불렸는데, 그의 자손들이 르티셰프(러시아어: Ртищев)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르티셰프 가문의 문장(紋章)에는 반달, 육각성과 두 명의 타타르인 전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르티셰프 가문이 원래 정교회 계통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닐 이바노비치의 자손은 번성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며 이들은 폴란드 왕국의 전형적인 귀족 슐라흐타가 되었다. 핀스크에 남은 도스토옙스키 가문은 2세기 이상 사료에서 언급되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흡수되면서 귀족의 지위를 잃는다. 17세기 후반,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일부가 우크라이나로 이주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사료에서 도스토옙스키 가문이 언급되는 횟수가 크게 줄어든다. 연구자들은 사료의 부족으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다닐 이바노비치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는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은, 도스토옙스키의 직계 선조가 18세기 전반에 우크라이나 볼리나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의 친할아버지인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도 정확한 자료가 없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 그가 1756년경에 태어났으며, 1775년에 아버지 및 형제들과 함께 브라츨라프로 이주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브라츨라프는 제2차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된다. 1782년, 안드레이 도스토옙스키는 보이톱치 마을의 정교회 사제가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부모[편집]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
어머니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러시아어: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Достоевский)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료가 존재한다. 그는 보이톱치 마을에서 1789년에 태어나 1802년 샤르고로드 니콜라이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입학했다. 1809년 8월,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국립 제국 외과 아카데미의 설립에 관한 포고문을 발표하는데, 이 아카데미는 신학교 졸업생 120명 이상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외과의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1809년 11월 14일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 붙어, 국비 장학생으로 모스크바 분과 아카데미 부속 의학부에 입학했다. 1812년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시기에 4학년이었던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근무했으며, 나중에는 티푸스의 유행을 막는데 사력을 기울였다. 1813년 8월 5일에는 보로딘 보병 연대 의과1부 의사가 되었고, 1816년 8월 5일에는 연대 수석 의사의 칭호를 획득했다.

1818년 8월,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군병원의 레지던트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제3 상인 길드 소속 상인 표도르 티모페예비치 네차예프(러시아어: Фёдор Тимофеевич Нечаев)의 딸 마리아 표도로브나 네차예바(러시아어: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Нечаева)와 만나게 된다. 표도르 네차예프는 칼루가 현 보롭스크에서 직물 무역으로 크게 성공했는데, 나폴레옹 전쟁으로 거의 모든 재산을 상실했다. 마리야 네차예바의 언니 알렉산드라 네차예바는 제1 상인 길드 대표 알렉산드르 쿠마닌과 결혼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도스토옙스키의 운명과 복합적으로 얽히게 된다.

1820년 1월 14일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마리야 네차예바는 모스크바 군병원 부속 성당에서 정교회 예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820년 말, 큰아들 미하일이 태어난 후,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군 의무 복무 기간의 만료로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1821년마린스키 빈민 병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이곳은 국가에서도 공식적으로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으며, 개인 및 가족의 생계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하는' 곳으로 인정한 곳이었다. 이 병원의 대원칙은 24시간 아무때나 '빈자는 진료받을 권리를 갖는다'였다. 마린스키 빈민 병원이 있는 보제돔카 거리(오늘날의 노바야 보제돔카 거리. 보제돔카는 빈민 공동묘지라는 뜻)로 이사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두 번째 자녀가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어린 시절[편집]

마린스키 빈민 병원

1821년 10월 30일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보육원 부속 마린스키 빈민 병원의 우측 별관에서 태어났다. 병원 부속 베드로 바울 성당의 '출생 기록 노트'에는 '병원 수석 의사 미하일 안드레이치 도스토옙스키의 아들 표도르가 빈민 병원에서 태어났다. 사제 바실리 일린이 기도를 드렸다'고 적혀있다. 표도르라는 이름은 그의 외할아버지 표도르 네차예프에게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11월 4일 도스토옙스키는 세례를 받았다. 마린스키 빈민 병원의 다른 수석 의사였던 7등 문관 그리고리 파블로비치 마슬로비치와 공작 부인 프라스코비야 트로피모브나 코즐롭스카야, 표도르 네차예프와 알렉산드라 쿠마니나가 도스토옙스키의 대부모가 되었다.

태어나고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 도스토옙스키는 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매우 러시아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나는 부모님의 사랑이 기억난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정교회 전통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집안의 하루 일과는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맞춰졌다.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병원의 환자들을 살펴보았고, 환자들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챙겼다. 12시에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2시부터 다시 진료를 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저녁은 보통 이러했다.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딱 저녁 9시에 저녁상을 차리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성상 앞에서 형과 함께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고 나서 부모님과 헤어져 자러 갔다." 도스토옙스키가 기억할 수 있었던 가장 어린 시절은 1823년에서 1824년 사이로 여겨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오레스트 표도로비치 밀러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앞에 두고, 성상 앞에서 기도문을 외운 것"이었다고 한다. 1822년 말 동생 바르바라가 태어나면서,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알료나 표도로브나를 자녀들의 유모로 들였는데, 도스토옙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그녀는 우리 아이들 모두를 키워주었고 챙겨주었다. 그녀는 마흔다섯 쯤 되었는데 성격은 무척이나 밝고 명랑했으며, 우리에게 재밌는 옛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려주었다." 알료나 표도로브나는 악령의 서적 행상 소피야 마트베예브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1825년 막내아들 안드레이가 태어난 후,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병원의 왼쪽 별채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곳은 안드레이의 기억에 따르면 방 2개와 현관,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관 뒤쪽으로 구분된 '반쯤 어두운 창고'가 아이들 방이 되었다.

어린 시절, 도스토옙스키 형제는 주로 러시아 전래동화 불쌍한 새, 알료샤 포포비치, 파란 턱수염천일야화를 들었다. 부활절에는 포드노프의 서커스단이 병원을 찾아왔는데, 안드레이에 따르면 서커스단에는 "광대, 차력사, 인형극, 코미디언이 있었다." 여름이면 어머니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가 자식들을 데리고 세르기예프포사트성 세르기우스 삼위일체 수도원에 가곤 했으며, 저녁마다 가족끼리 마리나 로샤에서 산책했다. 일요일에는 병원 부속 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여러 친척과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의 동료들이 도스토옙스키 가족을 찾았는데, 친척으로는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의 언니 알렉산드라 쿠마니나 부부와 할아버지 표도르 네차예프, 그의 두 번째 부인 올가 야코블레브나와 아들 미하일 네차예프가 찾아오곤 했다. 동료로는 병원 경리 표도르 마르쿠스, 노의사 쿠지마 시롭스키, 레지던트 아르카디 알폰스키가 방문했다. 이들 인물들은 나중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다양한 형태의 인물로 등장한다.

다로보예 영지, 학습[편집]

파일:Dost pamyatnik.jpg
다로보예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동상

도스토옙스키의 가정 환경은 자녀들이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우게 할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부모님을 "뛰어나고 앞서나가는 사람들"이라 부르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저녁마다 집에선 카람진, 데르자빈, 주콥스키, 푸시킨, 폴레비, 래드클리프의 작품을 소리내어 읽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에게 카람진의 러시아 국가사를 소리내어 읽어주고는 했는데, 이를 통해 "나(도스토옙스키)는 열 살 밖에 안됐을 때 러시아의 거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리야 도스토옙스키는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쳤다. 도스토옙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우리는 네 살이 되자 책상 앞에 앉혀져서는 "공부해라!"는 소리를 반복해서 들었다." 자녀들은 처음에는 전통 민속 판화에서 시작해, 쿨리코보 전투예르마크에 대한 이야기를 공부했다. 자녀들이 처음으로 배운 어렵고, 무거운 내용의 책은 '구약과 신약의 104가지 성스러운 이야기'였다. 반세기가 지나서 도스토옙스키는 어린 시절 읽은 이 책을 찾아냈는데, 그는 "마치 성물(聖物)이라도 되는 양 그 책을 아꼈다." 그러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은 내게 큰 충격을 준 책 중 하나였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갓난애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827년 봄,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8등 문관으로 진급했다. 그는 진급에 대한 보상으로 자녀에게 세습할 수 있는 세습 귀족 신분을 받았다. 1828년 6월 28일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세습 귀족 가문이 되었으며, 모스크바 세습 귀족 명부에 기록되었다. 이는 개인 소유의 영지를 취득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1831년 여름,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저금과 빚을 합쳐 거의 3만 지폐 루블을 주고 모스크바 남쪽 150km에 있는 툴라 현의 다로보예(러시아어: Даровое) 영지를 구입하였다. 이 지역의 토양은 척박했으며, 11개의 농노 마을은 가난했다. 영주의 집은 진흙으로 만든 방 세개짜리 별채에 집으로 울타리를 두른 것이 전부였다. 농노들은 주인이 바뀌자마자 곧바로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했는데, 이 저항은 운명적인 소송으로 넘어가게 된다. 1832년 봄에는 영지의 농노 중 한 명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 그 피해액이 거의 9천 루블에 육박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 첫 번째 공포로 나는 완전한 파괴를 상상하게 되었다." 화재로 부상당한 농노들에게 집과 토지를 분배하는 일은 여름이 다 끝나서야 가능했는데, 그것은 "마을을 완전히 처음부터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1833년, 다로보예 영지를 담보로 말 많은 체레모시냐(러시아어: Черемошня) 영지를 취득했다.

한편 자녀들은 1832년 여름에 처음으로 러시아 농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영주의 집은 낡았지만, 큰 피나무 숲 속,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있는, "나무가 충분히 울창해서 그늘이 지는 곳"에 있었다. 안드레이 도스토옙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부터 자작나무 숲이 페댜 형(표도르의 애칭)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시기의 기억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 악령, 작가 일기에 드러나 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미하일, 표도르 형제는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두 아들을 '모스크바 국립대학 부속 귀족 기숙학교'에 보내고 싶어했지만, 김나지움(당시의 귀족 중등 교육기관)에 체벌이 시범적으로 도입되자 곧 단념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며, 까다로웠던 미하일 도스토옙스키였지만, 도스토옙스키 가정에서는 "언제나 아이들을 매우 인간적으로 대했고 한 번도 체벌을 가한 적이 없었다."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두 형제에게 가정교사를 붙여주었다. 예카테리나 대학의 보제 I.V. 힌콥스키가 두 형제에게 성경, 러시아어, 작문, 산술지리학을 가르쳤다. 또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매일 N.I. 두라슈소프의 개인 학교에 다녔다. 두라슈소프는 두 형제에게 프랑스어 말고도 수학언어학도 가르쳤다. 두라슈소프의 학교에 라틴어 교사가 없어서,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반티셰프 라틴어 문법 교재'를 사서 "가을부터 겨울까지, 매일 저녁 두 형제와 함께 공부했다." 아들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아버지는 매우 선한 분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매우 성미가 급하셨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다혈질이셨다"고 회고했다. 두 형제가 개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이들은 다로보예 영지로는 여름에 한달 반이나 두달밖에 못 가게 되었다. 당시의 토지조사 기록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500 데샤티나(약 5제곱킬로미터)의 땅과 100명 가까운 농노를 소유하고 있었다. 1834년, 도스토옙스키는 영국의 역사 소설가 월터 스콧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나중에 도스토옙스키는 월터 스콧의 작품을 통해 "환상과 인상을 키우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안드레이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역사 소설 쿠엔틴 드워트웨이벌리를 가장 많이 읽었다.

체르마크 기숙 학교, 어머니의 죽음[편집]

1834년 9월, 미하일, 표도르 두 형제는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는 레온티 체르마크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당대 모스크바의 최고 명문 사립 학교로 여겨졌다. 비싼 수업료는 쿠마닌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기숙학교의 일과는 매우 엄격했다. 겨울에는 오전 7시, 그 외의 계절에는 오전 6시에 기상했으며, 아침 기도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사 후 12시까지 공부했으며,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다시 공부했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는 복습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집에는 주말에만 갈 수 있었다. 한 학년은 3개 학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교육 과정은 11개월 분으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수학, 수사학, 지리학, 역사, 물리학, 논리학,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정서법에 회화와 춤까지 배웠다. 레온티 체르마크는 학생들이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자기 자녀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매일 학생들과 함께 식사했으며,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었고, 건강을 챙겼다.

니콜라이 빌레비치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공부했던 어느 동급생에 따르면, 그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진지하고, 사색적인 소년으로, 금발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자유 시간에는 윗학년 학생들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 형제는 기숙학교 교사 중에서도 러시아어 교사였던 니콜라이 빌레비치(러시아어: Николай Билевич)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는 "두 형제의 우상이 되어서, 두 형제의 기억 속에는 그(빌레비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찍혀있을 정도였다." 빌레비치는 고골과 함께 공부했으며, 문학 모임에 참여했고, 시를 썼으며,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을 번역했다. 도스토옙스키 전기 작가의 추정에 따르면, 빌레비치는 학생들이 따끈따끈한 최신 문학계 소식에 관심을 갖고, 고골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만들었으며 특히, 도스토옙스키로 하여금 처음으로 그가 문학을 직업으로써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아마도 1835년부터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잡지 <독서를 위한 도서관>(러시아어: Библиотека за чтения)을 구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잡지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처음으로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 발자크고리오 영감, 위고, 조르주 상드의 작품 등 최신 문학 작품을 다수 접할 수 있었다. 한편,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1835년 겨울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라자레프 공동묘지 부속 교회

1835년 4월,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로보예 영지로 떠났다. 미하일 도스토옙스키가 이 해 4월 29일에 쓴 편지를 보면, 이 즈음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의 병환이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미하일, 표도르, 안드레이 3형제는 기숙학교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숙학교가 방학인 7월과 8월 사이에만 다로보예에 갈 수 있었다. 막내딸이 태어난 직후, 7월에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는 몸져누웠다. 1836년 가을이 되면 아예 일어날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안드레이의 회상에 따르면, "새해, 1837년 초에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2월부터는 아예 드러눕고 말았다." 동료 의사들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2월 27일,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는 37살이 되기 전 사망했다. 3월 1일,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는 모스크바에 있는 라자레프 공동묘지에 묻혔다.

청년 시절[편집]

첫 번째 문학 경험과 페트라솁스키 클럽[편집]

8년간의 유형[편집]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의 사형 집행 장면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법정은 그를 '중요 범죄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는데, 그것은 그가 '종교 및 정부에 대한 작가 벨린스키의 범죄적 편지'를 읽고, 그것이 '확산되는 것에 대해 밀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49년 11월 13일 군사 재판 위원회는 그에게 모든 권리의 박탈과 총살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1849년 11월 19일, 도스토옙스키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는데, 이는 '그가 저지른 범죄는 유형 8년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군사 재판 위원장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1849년 11월 말, 군사 재판 위원장에 의해 준비된,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에 내려진 판결문에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서명함으로써 도스토옙스키에게 내려진 8년간의 유형이 4년간의 징역형과 이후의 병사로의 군 복무로 대체되었다.

1849년 12월 22일,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에게 사형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에페를 높이 쳐들고 판결문을 낭독한 집행인은 곧 사형 집행을 중단하고 사면을 발표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최후의 순간에 사형이 유형 및 노역으로 대체되었다고 발표된 것이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 중 하나였던 니콜라이 그리고리예프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 사형 집행 직전에 도스토옙스키가 느꼈던 감정은 그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의 독백에 표현되어있다.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정치관이, 그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갇혀있던 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의 종교관이 정교회의 세계 인식에 기반하여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폐트라솁스키 클럽 회원이었던 F.N. 르보프는 사형 집행 직전, 도스토옙스키가 스페시네프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있게 될겁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 스페시네프는 이에 대해 "아주 작은 것이지요..."라고 답했다.

유형지인 옴스크로 가기 위해 1850년 1월 9일부터 1월 20일까지 중간 지점인 토볼스크에서 머무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유형보내진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을 통해 다른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Z.A. 무라비요바, P.E. 안넨코바, N.D. 폰비지나였는데, 이들은 유형가는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에게 10루블짜리 지폐를 끼워넣은 신약 성서를 건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 받은 성서를 평생동안 보물처럼 간직했는데, 이 성서가 바로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의 화자가 도둑맞는 그 성서이다. 이은 4년을 도스토옙스키는 옴스크의 감옥에서 보내게 되는데, 19세기에 유형 생활을 했던 작가로는 도스토옙스키를 제외하면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가 유일하다. 감옥의 다른 유형수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그를 따돌렸다. 때문에, 도스토옙스키가 그들과 친해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기 작가 밀러에 따르면, 옴스크에서의 감옥 생활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인민의 진실에 대한 교훈"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형수에게는 서신을 주고받을 권리가 없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감옥 부속 병원에 있는 동안, 그가 <나의 감옥 일기>라 이름붙인 이른바 <시베리아 노트>에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이 시절의 기억은 죽음의 집의 기록에 잘 드러나 있다. 한편, 1850년엔 폴란드 잡지 <바르샤바 도서관>지에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서 발췌한 부분이, 작가에 대한 평론과 함께 실렸다. 한편 유형지에 있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처음으로 뇌전증 진단을 받는데, 이러한 내용은 1858년 의사 예르마크가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낸, 도스토옙스키의 군 제대를 탄원하는 탄원서에 의학적 소견으로 들어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오른쪽)과 발리하노프(왼쪽). 1858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찍은 사진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에서 나오고도 약 한달을 옴스크에서 더 보냈는데, 그는 그곳에서 후일 유명한 여행가이자 민족지학자가 되는 초칸 발리하노프와 알게 되었다.

1854년 2월 말,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을 나와 세미팔라틴스크에 있는 제7시베리아 변경 대대에 이등병으로 보내졌다. 그해 봄, 도스토옙스키는 그곳에서 마리야 이사예바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현지 관리이자 거친 술꾼이었던 알렉산드르 이사예프의 아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알렉산드르 이사예프는 쿠즈네츠크로 전보되었다. 1855년 8월 14일,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에드바르트 토틀레벤
알렉산드르 브란겔

1855년 2월 18일 니콜라이 1세가 죽고 나서, 도스토옙스키는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 바치는 충성스러운 시를 썼다. 1855년 3월 27일,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즉위에 따른 범죄자 사면 포고문에,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보병 군단 장군 G.H. 가스프로트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라, 하사관으로의 진급을 명령하는 군 인사 명령 형식의 포고문에 이름을 올렸다. 도스토옙스키는 알렉산드르 2세에게서 자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세바스토폴 방어 부대에서 장군 부관으로 근무하던 친구 에드바르트 토틀레벤에게, 황제에게 탄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로, 후일 그에 관한 회고록을 출간한 알렉산드르 브란겔 남작이 이 편지를 페테르부르크로 전달했다. 토틀레벤은 알레산드르 2세의 사적인 보좌관으로써, 그에게서 자비를 구할 수 있었다. 1856년 8월 26일,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에서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에 대한 사면령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도스토옙스키의 반정부 성향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비밀리에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1856년 10월 20일, 도스토옙스키는 이등병에서 소위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야 도스토옙스카야
옴스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동상

1857년 2월 6일,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 이사예바와 쿠즈네츠크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세미팔라틴스크를 떠나 나흘 후 바르나울에 있는 P.P. 세묘노프의 집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발작이 재발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작품 출판의 권리를 포함한 완전한 사면 및 복권이 주어진 것은 1857년 4월 17일 발표된 최고 포고문을 통해서였는데, 이 포고를 통해 데카브리스트 및 페트라솁스키 클럽 회원들은 형벌로써 박탈당했던 모든 권리를 되찾았다. 유형 생활은 도스토옙스키에겐 하나의 전기가 되었는데, "인간의 진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기도 전이었던 시절부터 그는 벌써 철저히 종교적인 인간이 되었고, 예수가 그의 유일한 이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가 황제에게 바친 충성스러운 시 세 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사면 이후 처음으로 출판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꼬마 영웅>(<조국 수기>지, 1857년 8호)이었다. 1859년에는 <러시아 언어>지에 <아저씨의 꿈>이, <조국 수기>지에 <스테판치코보 마을 사람들>이 공개되었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다[편집]

전성기[편집]

죄와 벌, 노름꾼[편집]

백치[편집]

악령[편집]

작가 일기[편집]

미성년[편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푸시킨에 대한 연설[편집]

죽음과 장례식[편집]

도스토옙스키의 가족[편집]

정치관[편집]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편집]

비평[편집]

동시대인의 비평[편집]

혁명 이전까지의 비평[편집]

소련 시대의 비평[편집]

현대 러시아에서의 비평[편집]

정신분석학적 비평[편집]

해외로의 소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