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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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출생 1964년 4월 1일(1964-04-01)
대한민국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망 1987년 1월 14일 (22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 고문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직업 민주운동가, 대학생
부모 박정기, 정차순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1]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생애[편집]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사망[편집]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박종철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2]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폭로[편집]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3][4]

전기고문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5]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6]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추모 활동[편집]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세운 그의 추모비와 흉상은 학내 ‘민주화의 길’ 가운데 한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다.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박종철 열사의 꿈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이 사업회는 2007년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들과 대학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모금으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로 되었으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고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등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도서[편집]

  • 김태호 (2002). 《박종철 평전》. 박종철출판사. ISBN 898502213X
  • 김윤영 (2004). 《박종철 시대의 불꽃 11》. 박종철기념사업회. ISBN 8991057233
  • 안상수 (2011).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 광일문화사. ISBN 9788986752403

주석[편집]

  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 고 박종철열사 25주기 추모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년 12월 29일).
  3. 부검 통해 드러난 고문사…경찰은 회유·협박 / 박정기. 한겨레 (2011년 12월 21일).
  4. 조국 “안상수가 박종철 고문은폐 막았다? 사실 아냐”. 한겨레 (2012년 1월 13일).
  5. 박종철 사건 1억 주고 덮으려해 분노가 치밀어…. 중앙일보 (2012년 1월 31일).
  6. 한홍구 (2001년 5월 22일).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한겨레21》 (제360호). 2007년 12월 9일에 확인.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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