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30번째 줄: 130번째 줄:
*** 8남 : [[청구]](靑丘)
*** 8남 : [[청구]](靑丘)
*** 9남 : [[능예]]
*** 9남 : [[능예]]
*** 10녀 : [[국대부인]]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 (후백제)|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 10녀 :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 (후백제)|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 후궁 : [[고비녀]]
** 후궁 : [[고비녀]]
*** 4남 : [[금강 (왕자)|금강]](金剛)
*** 4남 : [[금강 (왕자)|금강]](金剛)

2013년 12월 13일 (금) 19:50 판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후백제의 1대 국왕
재위 892년 ~ 935년 음력 3월
전임 (초대 군주)
후임 신검
신상정보
출생일 867년
사망일 936년 (70세)
부친 아자개
모친 상원부인
배우자 왕후 박씨
종교 불교

견훤(甄萱, 867년 ~ 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 892년 또는 900년~935년 음력 3월)은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이다.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

조선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견훤의 거병을 기록하면서 「남해(南海)의 수졸(戍卒)인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고 적고, 견훤의 이름에서 「견(甄)의 음은 진(眞)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1]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 질그릇장인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설이다.

생애

출생 및 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하며, 견훤 자신의 성도 원래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 대해 《이제가기》라는 책을 인용하여, "신라 진흥대왕의 비(妃) 사도의 시호는 백융부인이며,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인 파진간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가 아자개이다"라고 적고, "아자개의 제1처는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제2처는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니 다섯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 큰 아들이 상보(尙父) 견훤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계보에 대해서 오늘날 신뢰하는 연구자는 적다. 다만 아자개가 거병했다는 광계 연간은 서기로 885년에서 887년에 해당하며, 889년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시기와 겹치며, 아자개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호족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2]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견훤이 아직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는데, 그 사이 범이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이곤 했다는 설화적인 이야기만을 수록하고 있다.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아채) 마을로, 문경에는 오늘날에도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제왕운기》는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고 읊고 있는데, 실제로 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주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생설화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 조에 다음과 같은 견훤의 출생담을 적고 있다.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어느 부호에게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의 방에 와서 동침하고 새벽이 되면 사라졌다. 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딸에게 밤에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남자의 옷에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두라고 당부했고,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아버지는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 보았는데,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밤마다 딸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는 바로 지렁이였던 것이다). 이후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이었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 당(唐)은 소종(昭宗) 경복(景福) 1년이었다.

이러한 류의 설화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까지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의 함경북도 회령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를 비롯해, 일본 《고사기》의 오호타나네코(意富多多泥古), 《일본서기》의 오오모노누시 신(大物主神) 신화, 서구의 에로스 프시케 신화가 대표적인 야래자형 설화로 꼽힌다.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이 지렁이의 자식으로 묘사한 《삼국유사》의 설화와 관련해서 금하굴(金霞窟)이라는 이름의 동굴이 남아 있다.

신라군 생활

견훤은 장성하여 군을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서남해(西南海)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늘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렸다"고 적었다. 그리고 곧 그 자질을 인정받아 비장(裨將)이 되었다.

견훤이 임명된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거병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朴英規),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지금의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신라 시대에는 승평(昇平)이라고도 불리며 남단 내륙교통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으며, 광주 및 나주, 목포 지역과 지금의 경상남도 연안을 연결하는 위치로 무진주(광주)에서 서라벌(경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땅이기도 했다.

거병과 후백제 개창

견훤의 거병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에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889년이라고도 적고 있다. 이 해는 신라에서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난 때로, 이 기록을 따른다면 견훤은 원종 애노의 난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군사적인 독립을 이룬 뒤,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서 본격적으로 신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가 처음 거병한 지 열흘 만에 5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자칭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이 궁예(弓裔)를 휘하에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어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完山州)에 입성한 견훤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비로소 백제왕을 칭하였다[3],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

후고구려(고려)와의 전쟁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수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금성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됨과 동시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사신을 주고받던 후백제로서는 자칫 사신 통교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후백제로서는 큰 손해였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기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하기도 했다. 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사위였던 지훤에게 막혀 물러나야 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王建)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겨우 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한편 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5]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한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을 전사시켰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농성으로 성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왕건측이 먼저 화친을 청했고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서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고려와의 전쟁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 전투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로 송환하였다. 3월에 고려는 다시 운주성주 긍준(兢俊)의 군을 격파하고 이로부터 사흘 뒤에 근암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죽령의 길뿐 아니라 계립령의 길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고 있다. 이 순행에서 또한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비롯해 흥달을 감시하기 위해 견훤이 현지에 파견했던 후백제 관리들까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사갈이성의 고려 귀부는 고려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수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적었다. 또한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왕건)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의 표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되시는 분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니, 위태로운 나라가 다시 세워졌고 없던 임금이 다시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7]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전승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 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를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 뒤 저자에서 처형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김훤, 애식, 한장 등에게 청주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유금필에게 패하였다(《고려사》 유금필열전).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대회전이 있었고, 이 회전에서 견훤은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와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8]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결코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7월에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성은 11월에야 함락되었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 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대광 만세를 패퇴시키기도 했는데, 이들은 당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몇몇 지점에서 저지당했다. 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군이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하였지만 거꾸로 유금필에게 격파당했다(《고려사》).

934년 9월,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으로 운주로 진군해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는 대장군 유금필이 나서서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패배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 시랑 김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마저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생애 후반

신검의 정변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9]

고려 망명

4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6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이 해 4월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자신이 견훤보다 10여 세가 어리다고 하여 견훤을 상보(尙父)로 불렀으며, 남궁을 주었으며 직위를 백관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10]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한 데 이어,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도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6월에는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태자 (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3군을 이끌고 9월에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고려사》)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과 견훤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본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후백제 장수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 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저희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권유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죽음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매우 심하게 되어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 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그가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가족 관계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장남 견훤 외에도 능애(能哀), 용개(龍盖), 보개(寶盖), 소개(小盖)의 아들과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삼남 용개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이들은 남원부인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능애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견훤 자신은 10여 명(《삼국유사》에는 8남 1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11], 그리고 고려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8남 1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12].

  • 어머니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 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가

현전하는 견훤 관련 기록 대부분은 그와 적대했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견훤을 가리켜 원래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견훤

  • 이환경이 극본을 썼던 KBS1 태조 왕건에서 서인석이 연기한 견훤은 초반에는 참모 최승우의 합리적 지적을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하다가 많은 실패를 맛보는 군주로 묘사되었으며, 후반에는 현실적 힘을 중시하는 군주로 묘사되었다.

관련 작품

드라마

주석

  1. 동사강목 제5상, 임자년, 진성 여주 6년, 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892년)
  2. 견훤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가은읍 아차마을은 아자개의 이름을 따서 아개동(阿介洞)으로도 불리는데, 한편 견훤의 집안은 실제로 문경 농암면 서쪽 끝에 있는 궁기리(宮基里)의 '궁터'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아차리는 견훤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정개(政開)'라는 연호까지 정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4. 《동사강목》에는 영암군 북쪽 5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병도에 따르면, 웅주 비풍군 적오현 또는 덕진현이라 하였다.(《삼국사기》잡지제5, 지리3 신라) 912년의 전투는 나주 지역을 두고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충남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 보긴 힘들고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영암군 덕진면 일대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대대로 덕진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5. 이때 항복한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6. 고려사》제1권 세가 제1 태조세가 태조 9년.
  7. 팔공산 인근의 지명 및 대구지하철 1호선역의 역명을 참조하라.
  8. 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음력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9.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데,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0. 경순왕에게는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식읍으로 양주를 택한 것은 초기 백제가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11. 924년 조물성을 공격할 때 군을 이끌었던 수미강(須彌强)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12. 이병도의 《삼국사기》주석에 이러한 주장이 등장한다.

같이 보기

바깥고리

전 대
초대 군주
제1대 후백제 국왕
892년 ~ 935년 3월
후 대
신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