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조선

문서 내용이 다른 언어로는 지원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 고대사 한자 모양 뜻과 알타이어족 한국어 말소리 뜻과 지명, 설화, 역사서 내용 참고 사항[편집]

내용이 많아서 본문엔 안쓰고 여기다 알고 있는 내용만 남길 께요.

긴 설명 쓰면 책을 내야할만큼 너무 많아서, 그냥 관련 글자만 남기니 알아서 풀어보세요. 한자(漢字)? ^^;; 한자(韓字) = 봉자(丰字)가 정답 한자 본뜻을 알려면, 음양(陰陽) 오행(五行) 오성취루(五星聚婁)를 이해하고 기초 한자부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천자문을 봐야해요. 알타이어족 한국어 말소리 뜻과 기초글자 뜻 일치 함께 봐야 본 뜻이 보입니다.

예를들면, 산소(山所 = 酸素) 숨쉬는 산소로 쓰이죠? 교수란 사람들이 이걸 풀어 쓴걸보면, 유(酉)닭 준(俊)준걸, 간지까진 아는데, 술병같이 생긴건 알겠는데, 왜 준걸이 산에서 술안주로 닭먹나? 그게 뭔지 알려면 1~10까지 한자 모양과 숫자를 읽는 한국어 소리와 뜻 보면 금방 알게됩니다.

1. 일(一)한, 하늘과 땅과 사이, 곳, 저승과 이승과 사이 2. 이(二)두, 두(斗)말 = 마을(嬤乙) 줄임말, 십(十)열반(半) 주(丶)해, 혼(魂)얼 = 운주(云丶)따뜻한 큰 뜻 + 귀주(鬼丶)차갑고 섬세한 뜻, 2개가 저승에선 나뉘고, 이승에선 혼(魂)얼로 어린이 뇌에 육감으로 의사 결정합니다. 얼이란,이승 어른이 죽으면 저승 어린이로 서고, 저승 어른이 죽으면 이승 어린이로 서는, 어른과 어린이 합친말이 설얼(薛蘖), 설날 설, 얼굴 얼, 어원입니다. 둥(㪳)우리, 나 너 우리, 뇌둥우리, 두(亠)머리, 위에 있죠? 저승과 이승이 함께 있는 것이 뇌둥우리 2차원 다른 차원과 겹쳐 공존하는 한둥우리 혼(魂)얼 온전히 담겨야 정상인입니다.

3.삼(三蔘)석, 둥우리가 다차원인걸 이해못할까봐, 분리 보여준, 이승과 저승, 하늘끝과 땅끝과 사이를 표현, 석(夕)저녁이 되면 사(死)죽(竹)나무(奈戊)목(木)이 되고, 십(十)열반(搬)되면 인(人)사람(思籃)뇌에 혼(魂)얼 육감으로 환생합니다. 사(思)밭 먹거리 원래 글자는 사(恖)정수리죠? 인삼(人三)천지인, 대(大)자연 상상력 황(凰)새가 태(太)부모와 자녀, 죽음(竹陰)그늘 언덕(焉德)달(達)통(申)신기(氣)한(一)곳에서 아내(娥乃)가 양(羊)삶 주내는 곳이, 석(三)삼(麻)마루(婁)황(凰)새(鳥)조(朝)아사달(阿𣩠達)은 귀주(鬼丶)가 열반되는 곳이고, 태백산(太白山三酸)은 이승 열반에 든 어른 묻는 산소(酸素)에 닭을 묻었을까요? 높은 산에 묻어야 혼(魂)얼이 빨리 분리된다 생각해서, 빨리 어른되서 환생하라고 산에 묻은겁니다. 설날, 해마다 산마루(山嬤㟺)에서 루황(婁凰) 옥황(玉凰)상제(商帝) 주관 산제사(山第瓕)로 아우(䳗=丫友)벗=부(夫)사내-우리알, 궁(弓)활 부릴, 서열(序列) 차례(差㸚) 집(雧)둥우리 나라 밖(伯)맏(寸)촌장~막내(莫嬭)까지 옥석 엄(奄)가리는 엄마(㛪嬤) 옥(玉)푸른구슬처럼 냉정하게 가려진 이(爾)너=네 아우들과 백(白)엄지(俺指) 설날, 나라 오(五)다섯 질서가 서는 날, 경쟁 결과에 따라 내리는 옥봉작(玉丰=鳳爵)은 3관작, 봉(鳳)사냥새 = 공(䲲)송골매 = 지휘새, 후(䳧)독수리 = 공격새, 백(珀)박새는 공무원이 아닌, 점령지역 호족(豪族)이나, 안정된 후방 지역에 배치한 아우들이라, 인(人)사람 아닌 민(民)노예들 스스로 서울(西蔚) 조(朝)아사달로 조공(朝貢)바치는 걸 주관하고, 정(正)바르지 않는 족읍(族邑)은 복(攵)칠(七)숨어있는 곳까지 찾아서 몰살시키는 조정(朝政)했기 때문에, 환웅단군 후세 상조(商朝)단군 상구(商九丘)언덕(焉德)조(朝)아사달로 조공을 바치는 길이 뻣어나가는 모습이 열반으로 사람이 태어나는 목(木)나무가 무성하게 성장하는 모습 상업(商業)이다.

남방민 화하족 머리위 북(北)북녘 천(天)하늘 옥황(玉凰)상제(商帝) 상양(商羊)새는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음양오행 이치 글자로 보면, 나라 루(婁)중심, 별(丿)삐침은 같은 공간 다른 차원을 뜻하고, 일(一)한곳과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견(𡿨)도랑이란 뜻 녀(女)여자다.

위서로 생각하는 환단고기에서 BC1733년 단군은 오성취루(五星聚婁) 천문현상을 언급했고, 오성취루가 나라 중심에 여자 루황(婁凰)이 궁(弓)활에 화살을 감고 밖(伯)맏에 경쟁 도전하는 제(弟)아우들 사이 설(卨薛齧偰=契)글로 쓴 죽간(竹簡) = 봉(丰)학식과 도(刀)무예가 대(大)큰 아우로 서열 정리, 오(㐅)싸움을 멈추고 오(五)다섯 질서있는 나라 경영했다고 글자 모양 뜻으로 구성된 한자들이 한국어 말소리 뜻과 맞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음양오행 한자 뜻 글자에서 나타난 환웅을 보낸 옥황상제 루황마(婁凰麻)가 있던 곳은 둔황(屯皇)=돈황(敦凰)이다, 돈(㬿)달지는, 돈(暾)해뜨는 돈(弴)활, 돈 = 해와 달이 돈, 십(十)열반에 들어 태어나는 아사달이란 뜻이다.

서울, 서(𠧜=西)글자 모양을 보면, 루황은 막사안에 있고, 경(冂)멀다 경(冋)들, 경(冏)빛날 + 장(章)글(契)계약하는 설(偰)사람들은 분명하게 맑다. 서울 줄임말이 설이다.

서울 = 서(𠧜鳦), 황(凰)새 + 일(一)한곳 + 정(丁)시작, + 을(乙)새마을, 써야 정확하지만, 글자 지원안되고, 제비 을에 다른 차원을 뜻하는 별(丿)삐침이 붙어있기 때문에, 황새란 표현으로 충분하다. 연(燕)제비(齊卑)일 수 있고, 북(北)북방인 나라와 경계에 걸쳐있는 밑에 점 네개는 기마가 발달한 나라를 뜻한다. 조랑말(鳥랑馬) 가운데 랑은 남녀가 사랑(思良)받침한다는 뜻, 너郞사내 나娘아가씨 너랑나랑 사랑(思良)한다는 것은 부양(負良)하겠다는 뜻이므로, 조랑말이 뭔진, 고구려 벽화 수렵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우관을 쓴 기마궁수 = 조랑말, 봉(鳳)사냥새와 마(馬)말이 한묶음인 것이고, 그럼 조(鳥)새가 어원일까? 마(馬)말이 어원일까? 생각해야 하는데, 복합적이긴 한데, 음양오행, 음양 황(凰)새 엄마(㛪嬤)가 있는 마을(嬤乙) 중심 루황(婁凰)새가 옥작봉(玉爵鳳)사냥새기 때문에, 새(鳥)조가 먼저, 마(馬)말은 마을(嬤乙)줄임말, 나중이다. 봉(鳳)기마궁수 사냥새에서, 사냥꾼 백(百)을 빼고, 황새가 봉(丰)한 새가 타고 다니는 현생이라 삼(三)이승과 저승에서 저승을 빼고 이승만 표시한게 마(馬)말이다.

조(鳥)새(新)신세계와 연결됐다는 뜻으로, 별(丿)삐침을 찍고, 주(丶)해 3개를 찍은 뜻은, 저승 운주(云丶)+귀주(鬼丶)가 이승 혼(魂)얼 = 육감으로 뇌에 담겼다는 뜻이다.

그럼 고구려 벽화 수렵도에 있는 새가 삼족오 까마귀일까? 황(凰)새가 쏜 봉(鳳)사냥새는 까마귀가 될 수 없다. 개풀뜯어먹는 소리 출처를 쓴 선조가 누군진 몰라도, 음양오행을 고민해서 한땀한땀 우리말 뜻을 수천년동안 쓴 선조 고민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마천은 선조(鮮朝)단군을 고죽국(孤竹國)으로 썼다. 백이(伯夷) 숙제(叔弟) 엉터리 형제 이름을 글자 뜻도 모르고 작명,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개인 이름과 사람들 단수 복수 구분도, 방향 구분도 없이 소설을 썼지만, 그래도 이름 글자에 사용된 주어는 명확하다.

삼(三)석(夕)저넉(四)사(死)죽(竹鬻)대(大)큰 상(商)나라를 뜻하는 연결되는 한국어 말소리 뜻과 같은 글자들 곳곳에 숨어있다.

죽음에서 삶을 주내는 곳이 아사달, 음양오행은 옥황상제 오행성 서열 결정 주관하는 루황 서황마가 서쪽 방향에서 동쪽으로 온 것을 뜻하고, 상조(商朝)단군 선대가 설(偰=契)련(輦)하(河) = 셀렝게강 바이칼호 남쪽에 지명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바이칼호까지 하(夏)나라 선대 황제(黃帝)가 통치했다면 모를까, 그 후손일 수 없는 지리적 차이가 너무 크다. 사마천이 쓰면 모두 진실인가? 그 바이칼호 설련하 근거지 천을(天乙)에서 쏜 화살 봉(鳳)사냥새 리(履)신(辛) 성탕(成湯)을 이룬 상구(商九丘)언덕 아사달(達)조(朝)단군, 상양(商羊)새가 황(凰)새라는건, 음양오행 연결되는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화하족 하(夏)나라 신수(神獸)는 제사(祭祀) 사탄(㐶歎)은 하늘과 사이 경계에 걸쳐있는 남방민 한(漢)나라까지 바다를 품고 승천하는 용(龍)이 현재 중국 국호 화(華), 화하족(華夏族) 선조. 화하족 머리위 북방인 천국(天國)이 황하(黃河)이북부터 몽골과 러시아 한반도가 북녘 사람들이다.

돈황(敦凰), 서안(西安), 설련(偰輦)하, 상구(商朝), 조양(鮮朝), 만주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음양오행 옥황상제(玉凰商第) 서황마루(西凰麻婁) 흐름, 산마루(山麻㟺) 산소(酸素) = 고려장, 모계 사회 흔적이 신라 여왕들에도 있고, 조우관에서 사슴으로 바뀌는건, 만주 지역에 순록 사냥하는 고구려 벽화 수렵도 사슴 영향, 사슴뿔 모양도 어차피 출(出)산2개를 겹친 모양으로 음양오행 태산(太山) 산소(酸素)에 묻힌 현실적인 봉황새 닭 이름도, 달 그늘, 줄임말, 음양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상양새로 삶과 죽음 주내던 상나라가 정말 중국 화하족 역사인가? 뱀을 숭배하던 화하족 역사가 될 수 없고, 음양오행 한자 개념에선 절대 곰이 사람이 될 순 없다. 왜? 한자들을 보면 사람뇌는 혼(魂)얼, 운주와 귀주 2개가 들어있는데, 짐승은 뇌가 작아 운주나 귀주 둘중 하나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 뇌가 큰 사람 챔팬지 오랑우탄과 인간 공통점은 혼(魂)얼이 들어갈순있지만, 오감으로 감지한 뇌에 담긴 정보에 대응하는 유전자 정보 정답노트 본능에 충실한게 유인원이라면, 인간은 운(云)따뜻한 뜻, 다른 사람과 사이를 고려 내 뜻을 낮추는 감수성을 갖고 본능을 다스리는 이성(理性) 규범을 지키고, 규범에 없더라도, 언덕(焉德)을 쌓고 열반에 들어야 온전한 혼(魂)얼로 빨리 환생한다 생각했고, 유전자 정답노트 호르몬 영향 유인원 보다 덜 받는 덕(德)을 갖고 있다.

루황(婁凰)새가 설날 서열을 정한 옥봉작(玉鳳爵)대로 남녁 땅으로 쏜 화살 봉(鳳)사냥새는 3종류, 봉작(鳳爵)왕(王)임금, 공작(䲲)송골매 = 지휘새, 후작(䳧)독수리 공격 점령새, 백작(珀)박새 = 지역 토착 호족(豪族) 사실상 민간인으로 '박'관련 한자 뜻 보면, 어깨쭉지, 포박, 조롱박, 핍박할박, 칠박, 박수칠박, 두드릴박, 벗길박, 묶을박, 불쌍하다.

그래도 집(集)밖(伯)맏이라 박으로 읽고, 두뇌는 안(安)에 있는 유(酉)닭은 흰달걀을 낳고 희기 때문에, 백(白)흰 산소(酸素) 나라 황(凰)새와 같은 대접 받는게 닭이다.

음양오행 중심에 있는 루황(婁凰)은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 아래 넓은 지역에서 시작됐고, 특징이 그 지역에서 높은 태백산(太白山)을 태산(太山)으로 삼아, 선조들의 운주(云丶)를 받고, 언덕에 곳간 세운 마을에서 귀주(鬼丶)를 받아 열달동안 품어 사(死)죽(竹)대(大)태(太)양(羊)삶아(丫)가락 돋아나는 죽삶, 죽(竹)대나무는 음양과 오행을 상징하는 글자, 그 글자를 사마천은 고죽(孤竹=鬻)국, 죽삶아(阿)파태(太)내는 동지팥죽, 동지(冬至)는 북녘 찬기운이 땅밑끝에 이를 때, 적두(赤豆)팥은 땅밑 다른 차원에 있는 운주(云丶)와 귀주(鬼丶)를 모아 혼(魂)얼이 든 아이를 만든다는 뜻, 즉, 오성취루가 깨지면 아우들이 오(㐅)싸움에 외세를 끌어들여 배반, 중원 패권을 잃고 북(北)북녁 하늘로 패주했다는 뜻으로 북(北)방향이 쓰이고, 패주해서 남녘 뱀 음(陰)기가 왕성한 동지(冬至)겨울 = 집(集)둥(㪳)울 곁에 있는 짝과 아사달(阿𣩠達) 죽삶아 열심히 나라를 키우고, 남녁 귀신을 쫓아낸다는 뜻이다. 한국은 지엄미(指㛪彌) 마누라(嬤屢邏) 며누리(㢱=彌屢籬) 엄마(㛪嬤) 많은 루황(婁凰) = 교황, 성모마리아들이 존재한다.

중앙아시아 엄(㚧)산바위 집들에서 루황(婁凰) 엄마(㛪麻) 어원 알타이어족 BC3200년~BC2400년쯤 분화했고, 동쪽으로 진행된 것이 돈황(敦凰) 융적(娀狄) 서황마루(𠧜凰麻婁) 옥황상제(玉凰商第) 축융으로도 부르는데, 글자가 고죽국 고(孤)외롭게 굶어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것처럼, 상나라 왕실 성 자(子)맏 따라 800여 성씨가 과(瓜)오이처럼 줄줄이 형을 따라가 다 굶어죽었다는 뜻이, 백이숙제 고(孤)외로울 뜻인데, 사마천은 백이(伯夷) = 백적(伯狄) 같은 북방계 이(夷)라는 것 알리지도 않았고, 가짜 백(伯)맏이 강태공(姜太公)을 날조, 여씨(呂氏) 상(尙) 숙제(叔齊) = 제나라 왕실 선대조 강(姜)이 백이(伯夷)맏였고, 아우들을 데리고 화하족 하(夏)나라를 섬겨 여씨(呂氏)가 된 것처럼, 강태공(姜太公) 형을 따라 다른 아우들도 화하족 주(周)나라 섬기는게 낫다는 뜻으로, 가상 인물 백이 숙제를 창조 소설을 섰고, 진짜 백이(伯夷)는 백적(伯狄)이라고, 지명, 태행산(太行山)들 위치나, 종가집(宗家雧)있었다 증명하는 백석산(白石山)지명이 남아있고, 그 아래 살던 사람들이 백적(伯狄) = 백이(伯夷)들 루황(婁凰)은 글자만 봐도 모계 사회란걸 알 수 있는, 가돈(家豚)경제권을 쥐고 있고, 서황(𠧜=西凰) 들판 막사 안에 있고, 봉작(鳳爵)된 왕(王)임금은 바지사장 사냥꾼이라고 음양오행 오성취루 BC1733년 단군이 천문현상으로 중요성 언급했는데, 황(凰)새가 쏜 웅(雄)오른팔뚝 봉(鳳)사냥새가 죽었는데, 피난 가는게 상식, 그 지명이 조양(朝陽=羊)아사달로 남아있고, 상조(商朝) 상양(商羊)새 황(凰)새 잇는 선조(鮮朝) 글자들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 이름 기자(箕子) 서여(胥餘)는 마차 영화배우 한사람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글자 뜻을 보면, 사람 개인이라기보단,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하는 뜻만 담고있다. 고죽국에 언급된 자성(子姓) = 백적(伯狄) = 백이(伯夷), 적(狄)은 견(犭)사냥개와 다니는 수렵, 설(䝟)맹수사냥꾼인걸 고구려 벽화에서 알 수 있고, 아우들이 옥석 가리는 경쟁 통해 왕이 서므로, 화(火)불이 많고, 설(偰) 봉(丰)문명과 도(刀)무예가 대(大)큰 사람들을 봉양(奉養) 조공(朝貢)바치던 화하족 힘들었던건 알겠지만, 죽(竹)대로 짠 곡식껍질 바람에 날려 까부릴 때 쓰는 기(箕)키 농사를 짓고 사냥하며 어(魚)물고기까지 포식하던 선조(鮮朝)가 외롭게 굶어죽었다 뻥치면서, 글자도 못읽는지, 식(食)밥이 여(余)남아 여(餘)남아돌아 서(胥)서로 줬다고 써있는 글자도 못읽은 것 같다. 이게 사마천이 쓴 사기에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일까요? 고대 국가나 사람 이름은 개인은 없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만 명시합니다.

고구려 벽화 수렵도를 보고 정말 많은 글자 뜻 이해된게, 음양오행 사상을 그대로 그림에 담았기 때문.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한 것은 만년 역사 맥을 끊고 2천년 한반도 역사에 갇히는 꼴, 선조 단군을 중국 화하족 중국사로 넘겨주는 꼴이다.

루(婁)별자리 루성(婁星)처럼 중심에서 나라를 시작하고 경쟁하는 사람들 사이를 경영하는 나라 중심에 있는 황새가 여황. 성모마리아 = 엄마들의 시조 마(麻)삼(三蔘鷄湯)이 몸에 좋은 이유는, 성탕(成湯)을 이룬 상구(商九)는 구주(九州)천하를 통일한 중심에 있다는 뜻, 가장 번창했을 때기 때문이다.

한자에 쓰여있는 모양 글자 뜻과 알타이어족 한국어 말소리 뜻이 모두 상조(商朝)는 환웅단군 후세로 나타나는데, 글자 뜻을 못보면 모를까, 학술, 주류, 그런 학술지는 틀림없어야 되는데, 사마천이 쓴 사기 내용부터 창작 소설 왜곡 투성이, 상나라는 중국사가 맞지만, 화하족 중국사가 아닌, 한국인 중국사다.

옥황상제가 돈황에서 쏜 환웅, 태백산 서안(西安)서남쪽에 있고, 보계시(寶鷄市)가 환웅단군 첫 아사달. 글자에 봉왕(鳳王)있고, 둔(屯)=돈(敦)=태양태음력 + 십(十)인(人)=목(木)양(羊)삶 주내는 패(貝)별보배고둥 조개 돈이 넘치고, 계(鷄)닭 = 루황(婁凰)이 머물던 서울(𠧜鳦) - 서안(西安)으로 이동하면서 글자가 서쪽에 있는 국(囗)나라를 올(兀)우뚝세운 인(儿)어진사람이 집(集)둥(㪳)우리 안(安)편안히 있다는 뜻 동진해서 황하 중류 유웅(有熊)곰나라까지 평정 구주를 통치하다 황제 반란에 북방으로 패주했고, 뱀 사탄을 추종하는 하(夏)나라를 섬겼던 것이 백이(伯夷) 강(姜)태공 여씨(呂氏) 선조라는데, 단군왕검(儉), 첨(僉)다 = 여러사람이 돌아가면서 능력있는 아우를 옥황상제가 옥석을 가려 왕을 결정하는 구조라, 농경 정주민 화하족처럼 봉(鳳)사냥새 하나 사라진다고 멸망하는 구조가 아니다.

우리 선조와 관련있는 글자와 소리, 궁(弓)활(猾)사냥개, 활(活)죽고 싶지않으면 도망가야 산다는 뜻. 활(𧽌)사냥감, 모(母) 몸에 주(丶)해 2개를 품어 혼(魂)얼을 만드는 모습, 지엄미(指㛪彌)= 수(手)손 일(日)나라 비(匕)숨어있는 비수 = 아(丫)가락 오(㐅)싸움 서열 옥(玉)석 엄(奄)가릴, 궁(弓)활 부리는 맏~막 마지막까지 서열 정리된 이(爾)너 = 넷, 밖(伯)엄지로 나라를 이끌 맏 왕(王)임금을 봉(鳳丰鴌峰俸琫奉封)해서 서는 날이 설날, 한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가 아니죠? 설날은 매년 밤새 산꼭대기에 올라 문무를 경쟁하는 날, 설(薛卨齧偰) 날은 나라 줄임말, 한번 백이는 영원한 백이가 아닌게 초원의 루(婁)Rule 규칙, 한국어 소리 뜻과 기초 한자 모양들 뜻이 모두 설날 산꼭대기에서 그렇게 왕을 뽑았는데, 내 선조가 팔레스타인에서 살았으니 내땅이라고 하면, 중앙아시아부터 한국까지 아시아땅은 모두 한국땅이다.

상조 단군 정통성 계승한 나라가 선조 단군. 왜? 중국에 남아있던 환웅단군 후손들은 강태공을 따라 화하족 주나라 뱀=용을 섬기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㐶歎) 섬기길 거부하고 루황(婁凰) 백적(伯狄) 맏이를 따라 조양(朝陽) 요하에 정착한 선조 단군에 정통성있는 것이고, 850년후 요하를 뺏기고 여러 나라로 갈라졌지만, 조선(朝鮮) 정통성을 이어 받은 부여 고구려 삼한으로 다시 합쳐졌고, 탁발선비가 수나라 당나라 중국 통치 더 큰 나라 이루긴했는데, 화하족과 패권 주고 받으면서 한몸이 됐고, 2천년동안 만주와 한반도에 갇혔어도, 단군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있는게 한국 청와대 봉황새 옥황상제 상징물, 옥황상제가 있는 천국 수도 이름 서울(𠧜鳦)아사달 이름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환,단 = 모계사회 여황, 서쪽에서 온 북방 유목민, 봉황새, 음양오행, 문명과 무예, 신앙, 3박자 갖춘 삼계탕(蔘鷄湯) 꿈꾸는 동지팥죽(冬至赤鬻) 설(楔,偰, 薛蘖)얼 = 다차원 어른과 어린이

화하족 주(周)나라 건국이후 중국에서 작성된 역사는 오염된 역사, 예를 들면, 적(嫡)정실(正室)이렇게 정주민 화하족 개념으로 해석하면, 주(主)주인이 남자가 되고, 삼계를 연결하는 도랑 녀(女)여자는 그에 딸린 남존여비가 되는데, 주나라 이전 북방인 상(商)나라 관점에서 보면, 적(嫡)정실(正酸)산소(素)흴, 누워있는 존재가 누구냐? 생각해야 하는 것이 적(啇)밑둥은 고(古)운명하신 상(商)나라죠? 산소(酸素)에 누워있는 흰닭은 황(凰)새 루(婁)나라 중심 주(主)주인이고, 그럼 앞에, 적(嫡)정실은 상(商)나라는 녀(女)모계 중심 사회였다는 뜻이 된다. 부계 관점에서 적(嫡)정실을 해석하면, 제(帝)임금 제삿상 'ㅂ'밥그릇 준비하는 여자로 달라진다. 복(攵)칠(七)숨어있는 것도 찾아서 찌른다는 뜻, 적(敵)원수 상나라가 화하족이 통치중인 중국사가 될 순 없겠죠? 그래도 우리가 버리면 중국사가 되고, 우리 역사는 2,000년 이전은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

음력 설(楔)은 상나라 선조 설(偰) 선조 간적(簡狄)과 그 선조 융적(娀狄)황(凰)새 사이에서 태산과 아사달 음양오행 개념있었고, 음양 오행 다차원 삶과 죽음 이해하려면, 반드시 태양태음력 섣달그믐 설날 이해하게 된다. 간적(簡狄)은 글자에 분명하게, 죽간(竹間,簡) 시(時)때와 때 사이, 시간을 기록했다는 뜻이 된다. 주문왕이 역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역사 날조. 그는 죽국(竹國) 죽(鬻)세발 굽은 다리 솥쓰는 상나라 사람아닌 조공 바치다 눈에 들어 공직얻어 아들이 반란일으킨 노예국민이다.

이글은 근거와 출처가 없는 독자 연구로 보입니다. 그리고 고조선 문서와 관련이 없는 글 같습니다. --έλαιας κλάδος (συζήτηση) 2022년 2월 8일 (화) 22:16 (KST)[답변]

기자조선의 삭제[편집]

기자 조선은 삭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 조선'이 나타나는 사서史書는 차이나의 '상서대전尙書大典'에만 서술되어 있는데, 이 책은 차이나 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는 인식을 대표하는 글입니다. 다시 말해,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이 기록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현 한일 사학계에서는 '기자동래설은 허구'라고 결론 지은 상태입니다(고구려연구재단/조법종 논문). 이런 상태에서 우리 스스로 중국 측이 동북공정의 한 근거로 삼고 있는 '기자동래설'을 마치 사실인 양 서술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사람살이(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1. 이곳은 한국 위키백과가 아니라 "한국어"위키백과입니다. "우리 스스로"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이곳은 한국인이 다수가 되어 운영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운 외국인들도 얼마든지 참여하고 있습니다. 2. 기자조선의 존재는 이미 여러 현대의 사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예 빼버리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위키백과에 대한 오해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위키백과는 사적인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곳이 아닙니다." Caffelice 2006년 12월 23일 (토) 01:01 (KST)[답변]
1. 아 '우리 스스로'라는 부분과 서명을 달지 않은 부분은 앞으로 정정하겠습니다. 2.'기자동래설은 허구'라는 연구결과를 단지 '사적 연구성과'라고 폄하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미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에서 인정한 내용입니다. 언급하신 '여러 현대의 사서'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살이 2006년 12월 23일 (토) 02:02 (KST)[답변]

기자동래설을 인정하는 학파가 존재함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중국이든 한국이든. 그런 의미에서 기자조선을 완전히 위키백과에서 제거하는 것은 중립적 시각에 어긋납니다. 이 문서에는 "기자조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정도의 코멘트가 붙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미 기자조선의 진위 논란에 대한 양쪽의 주장이 기자조선에 실려 있습니다. Caffelice 2006년 12월 23일 (토) 02:21 (KST)[답변]

--Tol6560 (토론) 2019년 3월 6일 (수) 21:14 (KST) 기자 조선 존재를 차이나 민족 우월성 강조 국가주의적 측면 한가지만 보는 것은 사실과 100% 부합 할 수 없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현재 국가 경계일 뿐이고, 역사는 부계 혈통 왕가 역사만 논하는 것으로 이 지역 전체를 표현하진 못합니다. 아시아 패권 경쟁은 주周족族과 상商족이 하고 있고, 상商족은 요하 만주 일대 북쪽에 활동 기반을 갖고 유목하던 조朝선鮮족이 유목민족 특성상 수도를 여러번 이동하다 북경과 요하 사이 산맥을 경계, 동북지역에 옥기시대 요하문명을 형성했고, 단군 조朝선鮮족 일부가 앞선 문명을 바탕으로 BC1600경에 남하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하夏나라를 치고 상商나라를 세웠습니다. 하夏나라는 황하 동쪽 지역을 기반으로 하던 종족으로 생각되고, 현재 한족은 아닙니다. 상商나라 중원을 장악했고, 복양 근처 조가에 수도를 형성하고 500년 이상 중원을 통치할 때, 주周족族은 황하 서북쪽 화북=오르도스에서 농경생활하던 부족였는데, 유목민족 침략으로 농사 지은것을 뺏기는 것이 반복되자, 현재 장안성 서북쪽 기산으로 도망가서 주周나라를 형성했고,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강대국 상商나라 영향력 서백 벼슬하던 제후국 마을 형태 국가 였습니다. 상商나라가 유목하던 북쪽 조朝선鮮족에 기반 둔 국가라, 농경민족 보단 거칠 수 밖에 없죠? 국가 지도층이지만, 그런 영향 때문인지, 마지막 왕 제신=주왕 때, 사기에 기록된 내용은 제신 숙부급 왕족인 비간 간언에 심장을 꺼냈다는 기록, 숙부급 왕족인 기箕자子 미微자子, 자子성姓은 상商나라 황실 성姓입니다. 기箕는 상商나라 왕족이 통치하던 지역 명입니다. 자子성姓 기箕씨氏 이름은 서여胥餘, 조朝선鮮족 상商나라 사람이, 제후 국 주周 태자 무왕 역성 혁명 반란으로, 상商나라가 망했고, 기箕자子는 본향인 평平양壤=양壤평平=넓고 평평한 땅, 후한 삼국지에서 표시되는 공손 일가 영역으로 표시되는 지역으로, 현재 동북3성 랴오닝 성=요하, 요동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북한 평양이 아닙니다. 이 흐름에서, 기자가 5천 상商나라 유민을 이끌고 조朝선鮮 본향으로 돌아간 것은 분봉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중원을 장악했다가 밀려 난 것을 봉했다고 할 수 있나요? 더구나 단군조선 같은 조朝선鮮족이 살고 있었고, 기록에 조선을 치고 나라를 세웠다 표현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냥 자기 조상 살던 곳으로 돌아 온겁니다. 같은 조朝선鮮족 한뿌리지만, 무려 500년 넘게 떨어져 살았고, 중원을 통치하던 큰 위상이고, 농토가 많은 중원 농업 기술이 선진 기술이고, 그로 인한 경제적 지도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재 결합으로, 현재 남북한처럼 적대적 관계가 아닌겁니다.[답변]

기자 조선이 주무왕이 봉한 제후국 위상이 아닌것은, 주周나라는 황제국이 되면서 희嬉성姓 혈족들을 50개 지역에 분봉했고, 20개 지역은 공신과 토착 호족을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상商나라 왕족 미微자子 계啓는 삼감의 난 때 주공 단을 도와 반란을 함께 평정한 공로가 있어, 상商나라 지역을 남북 2개로 나눴고, 남쪽 송씨 송宋나라 왕으로 봉했습니다. 기箕자子는 주周 무왕 희발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어떤 공적을 세웠죠? 사기 기록엔 비간처럼 죽기 싫어서, 미친척하고 일부러 감옥에 갇힌것 외엔 아무것도 한것이 없습니다. 주周 무왕은 최초 상商나라 태자 무경에게 상商나라 조상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 했습니다. 그 이상 상商나라 왕족에게 특혜를 줄 이유가 전혀 없는, 건국 공신과 믿을 수 있는 희嬉성姓 혈족들을 왕으로 임명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周 무왕 희발 동복 동생 위卫강康숙 희봉, 둘째 아들 아명 중모, 주周 무왕 조카는 강康후侯로 불렸습니다. 아버지 희봉 관작명이 강康후侯, 후侯는 관작명 5등급중 2번째 등급으로, 장남인 위卫=위衛나라 2대군주 백모, 관작이 후보다 낮은 백인데, 동생이 더 높은 후侯 관작명으로 불린 이유는, 기箕자子조朝선鮮 관직 체계가 주周나라 관작 체계와 별도 독립적 국가임을 증명합니다. 주周 무왕 희발 조카, 희嬉후=강康후 기箕자子조朝선鮮 왕으로 임명했어야, 다른 희성 혈족들 제후국 왕으로 분봉한 것을 참고하면 맞는 일인데, 기箕자子 서여胥餘가 조朝선鮮의 왕으로 41대 1000년 넘게 이었던 것은, 독립국가란 명백한 증거고, 주周 무왕 조카 아명 중모, 관작명 강康후侯로 조朝선鮮왕 서여胥餘가 임명한 것은, 중국 중원을 장악한 주周나라와 공연히 전쟁하면 결과가 뻔하지 않나요? 강康후侯를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고, 기箕자子조朝선鮮-마馬한韓 망할 때까지, 거의 1500년 이상 군신관계를 함께 했고, 기자 조선 망할 때 위만에 전사, 마한 망할 때 온조왕에 조상 전사했다는 기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희嬉성姓강康씨 대大종宗은 신천강康씨, 황해도 곡산 신천 재령 토착 호족 신라 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대장군으로 함께 참전했던 조상 후손들로 생각되고, 집성촌이 그곳에 주로 있는데,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를 보면, 진주 강康씨 집성촌도 생각 외로 많습니다. 기箕자子조朝선鮮 마지막 왕 기箕준準이 위만 반란에 나라를 뺏기고, 1만 유민을 이끌고 요하에서 해로를 통해 청주에 정착 마馬한韓을 세우고 새 나라를 세울 때 성씨가 바뀌기 때문에, 1대왕 한韓준準으로 청주 한韓씨 시조가 됐습니다. 이 때, 대대로 군신관계였던 강康씨도 함께 내려왔고, 마馬한韓이 백제 온조왕에 망한 후 강康씨 조상은 백제가 아닌 신라에서 주로 관직을 하면서 진주에 집성촌을 이루고, 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북상한 강康씨 일족은 신라 때는 성골 귀족으로, 신라가 망할 땐, 신성=신천 지역 호족으로, 태봉국 궁예 관심법에 죽은 정비 강康씨였고, 왕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죠? 지역 힘있는 토착 호족일 때 가능한 것으로, 신라 성골 귀족 강康씨 일가는 태봉국 왕비를 배출할만큼 힘있는 지역 호족였고, 고려 태조 왕건, 첫 배경이 되는 중심 호족으로 고려 내내 군신관계, 조선 태조 이성계 첫번째 정비 역시 강康씨 젊은 이성계가 힘을 갖는 호족였고, 이방원 압박으로 인해 제주 강康씨 까지 생겼습니다. 청주 한韓성姓에서 갈라진 기성용奇誠庸 기奇씨, 조朝선鮮왕 서여 동생 선우鮮于씨 까지 상商족에서 이어 내려온 성씨 문중 계보가 있고, 주周족族에서 이어 내려온 성씨 문중 계보가 있는데, 할 수 있는, 유전자 계통 확인 작업도 없이, 기箕자子조朝선鮮 존재를 주족 후손인 한족을 의미하는 차이나 우월성 사대주의 운운 삭제하는 것이 최선인가요? 그것은 수천년 된 문중 역사를 삭제하자는 뜻이고, 문중역사를 못 믿겠다면, 광범위한 유전자 조사를 통해 진실 여부 확인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나는 상고하건대, 기자의 뒤를 이어온 임금에 대해서는 동사(東史)에서 전혀 상고할 수가 없는데, 새로 간행(刊行)된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족보(族譜)에 의하면 기자 이후의 세서(世序)를 자세히 열록(列錄)하고는,

“우리 기씨(奇氏)로 말하면, 호남(湖南) 광주(光州)에서 도랑을 파다가 비석(碑石)을 얻었는데, 거기에 기자 이후 기씨의 세계(世系)가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였고, 기자의 후손(後孫)이 실국(失國)한 후에 다시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던 그 이후의 세계도도 매우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에 지금 채록(采錄)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린 내용입니다. 대놓고 “땅 파다가 우연히 기씨 족보가 적힌 비석을 발견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네요. 이런 걸 수천년 된 문중 역사라고 하면 창세기도 그대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역사학은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기자조선은 혹독한 사료 비판을 넘지 못하는 과거의 신화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3월 7일 (목) 08:54 (KST)[답변]

규원사화 인용 관련[편집]

규원사화에서 남국이 중국에 진출했다는 내용과, 기자조선은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 그 내용은 차라리 '열국시대'라는 항목을 만들어 따로 기술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규원사화의 내용을 긍정하더라도, 중국의 동이족은 후에 서국에 의해 관리되었고, 서국도 춘추시대 중반에 주나라에 멸망했습니다. 규원사화의 내용을 신뢰한다면, 북애자가 남긴 '만설'에 기자조선의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불가합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4:06 (KST)[답변]

전조선, 후조선 명칭 관련[편집]

전조선, 후조선은 기자를 칭하기 위해 임금과 신하가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 김종서와 정인지는 그에 따랐을 뿐입니다.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18:28 (KST)[답변]

제왕운기의 원문을 확인한 바 없으니 엠파스한국학백과사전에 근거하여 제왕운기에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눈다고 나오는군요.[1]

이의가 있으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네요. 어쨌거나, 이승휴가 그렇게 분류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의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화) 22:32 (KST)[답변]

공식적으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대왕과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후조선이라고 부르는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후조선이라고 불렀을것이라고는 짐작이 됩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8:33 (KST)[답변]

직접 확인해 보세요. '전조선'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라는 것은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jtm71 2007년 1월 3일 (목) 21:29 (KST)[답변]

북애노인의 생각 ...[편집]

당사자가 아닌 이상 북애노인의 생각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추측성 내용은 자제합시다. jtm71 2007년 1월 3일 (목) 21:19 (KST)[답변]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내용 관련 ...[편집]

출처가 제시되지 않는 내용들이 몇 가지 있는데, 당분간 지켜보다가 삭제하겠습니다. jtm71 2007년 4월 17일 (화) 11:48 (KST)[답변]

저작권 관련[편집]

변경 내용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인데,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의 저작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인용에 문제가 없습니까 ... jtm71 2007년 7월 20일 (금) 21:01 (KST)[답변]

그리고, 중요성에 비해 자료가 너무 길어서 굳이 인용해야 한다면 위키인용집이나 위키자료집을 이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jtm71 2007년 7월 20일 (금) 21:08 (KST)[답변]

저작권에 대한 소명이 없어 해당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jtm71 2007년 7월 25일 (수) 05:14 (KST)[답변]

'쥬신'이라는 표현...[편집]

'쥬신'이라는 표현은 대쥬신제국사라는 소설에서 처음 나온 말이기에 삭제합니다.

황윤석의 주장에 대한 출처[편집]

출처는 현재의 주석 3번째입니다.

[2]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뭉게구름 2007년 12월 18일 (화) 08:09 (KST)[답변]

주석 3번째를 참고문헌 1번째 항목으로 이동했습니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뭉게구름 2007년 12월 18일 (화) 08:16 (KST)[답변]

참고문헌으로 뭉뚱그려 표시하면, 개별 문장에 대한 출처가 궁금할 때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어떤 내용을 참고해서 글을 썼다면 해당 문장 바로 옆에 ref로 출처를 밝히는 편이 낫습니다. :) --정안영민 2007년 12월 18일 (화) 08:20 (KST)[답변]


[3]에서는 ref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편집이 되면서 분할되고 다른 내용들이 추가되었으니 ref로 명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황윤석의 주장 부분은 삭제하셔도 이의 없습니다. --뭉게구름 2007년 12월 18일 (화) 08:44 (KST)[답변]

출처 없는 문장 삭제[편집]

{{출처}}가 달린 채로 오랬동안 방치된 출처가 없는 아래 문장

  • 기타 자료《태원선우씨세보》에서는 기자조선의 36세 가덕왕 이전의 왕은 실제로 왕이 아니었으며 가덕왕의 조상을 왕으로 지칭한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를 삭제합니다. 위 문장에 출처를 제시하면 언제든지 저 문장을 다시 추가할 수 있습니다. -- 66 Quotation Marks. 99 2008년 2월 10일 (일) 13:53 (KST)[답변]

출처가 제시되지 않은 다음의 문장들을 토론란으로 옮깁니다. jtm71 (토론) 2008년 6월 28일 (토) 11:05 (KST)[답변]

'*조선이 순수한 음차라면, 당시 중국사람들은 "뎨욱디엔" (한자상고음, *dieugdien) 또는 "닥단" 비슷한 소리를 적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소리값이 조선(중세, 됴션) 또는 숙신이 된 것으로, "달단" 또는 "타타르"의 소리값과도 이론상 관련지을 수 있다. 肅愼 또는 朝鮮 등의 명칭은 춘추나 산해경 또는 사기에 나오지만, 女眞의 중고한자음에서 나온 珠申이라는 명칭은 滿洲源流考 등의 후대문헌에서야 찾아볼 수 있다.{{출처}}'
'*조선의 朝와 "아사달"의 아사가 훈차로 설정되면, 조선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아침녘의 땅/사람 등등을 가리킨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조선은 중국인들이 당시의 동이족의 나라중 한 세력(아사달)을 가리킨 것이 될 수도 있다. {{출처}}'
이때 1048년은 《제왕운기》의 1028년이 오류임을 밝힌다는 의견이 있다.{{출처}}

글로벌 세계대백과 내용.[편집]

글로벌 세계대백과 틀이 삭제된 적이 있어서 글 남깁니다.

참고하여 {{글로벌세계대백과}} 틀이 삭제되지 않게 해 주세요. --Knight2000 (토론) 2008년 11월 22일 (토) 20:07 (KST)[답변]

211.48.25.169의 편집 취소[편집]

목적을 알 수 없는 기이한 편집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편집이 필요한 이유도 알 수 없고 편집된 후의 모양도 기이하여 편집을 모두 취소하였습니다. 혹시 편집의 이유와, 필요성을 말씀해 주신다면 다른 방향으로 편집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3월 16일 (화) 20:37 (KST)[답변]

사용자:Dkssuddksgody의 편집 되돌림[편집]

해당 편집은 명확한 근거가 없이 주요 내용을 삭제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사학계의 일반적인 의견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등, 중립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되돌렸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3월 17일 (수) 16:08 (KST)[답변]

진개 인용문 삭제 요청[편집]

Xakyntos님 안녕하세요. 편집을 한다는게 그만 실수로 본문을 직접 편집해 버렸네요. 위키피디아 원칙을 잘 이해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선 진개와 관련해선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에 연나라 명장 진개 가 동호의 땅을 2000리 빼앗앗다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실제 전국시대 연, 조, 제 나라의 역사서에는 진개의 동호[고조선]에 대한 전투기록이 단 한건도 기록되어 있질 않습니다. 김종서 저서 [단군조선영토연구] 를 인용했습니다. 해당 책에도 진개와 관련된 내용이 왜곡되어 기록된것임을 중국의 역사서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꼭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물찾기 2010년 12월 16일 (목) 17:04 (KST)

다른 사서에 안나왔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요^^.. 위키백과의 원칙상 흉노열전에 이러이러하다~ 라고만 쓰면 되지 왜곡이라고 생각한다라는식으로 쓰시면 독자연구가 됩니다. 위키백과는 의견을 발표하는 장이 아니라 사실을 집적하는 백과사전이라는 점을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adidas (토론) 2010년 12월 16일 (목) 17:12 (KST)[답변]
넵 충분히 숙지했습니다 ^^. 단어 선별을 제가 잘못한것 같습니다. 왜곡보단 '그에 대한 반론' 이란 단어를 채택했어야 했는데, 실수 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전투도 기록되어 있는 당시 역사서에 '진개의 위대한 업적 및 전투' 기록이 없는건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저작권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독립된 주제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만... 현행 국사책 및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고조선에 대한 '특히 연나라에게 광활한 영토를 빼앗겼다' 기록은 전무합니다. 현행 국사책엔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 영토의 일부에 군현을 설치했었다'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행 국사책 및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정론화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위키백과 원칙'을 근거로 적혀져 있어서, 잠시 제가 실수를 범한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현행 국사책에 적혀 있는 내용 그대로 적는것이 맞지 않나 합니다. 제 의견에 잘못된점 있으면 언제든지 지적해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우물찾기 2010년 12월 16일 (목) 17:27 (KST)
김종서 박사의 주장을 비롯하여 진개 관련 내용에 대한 일부 반론은 말 그대로 소수설입니다. 위키백과는 소수설과 정설에 대해서 명백하게 선을 긋도록 하고 있으며, 소수설은 정설을 모두 소개한 뒤에, 이러이러한 소수설도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 이상의 편집은 불가합니다. 관련 소수설이 정설을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정설의 지위를 획득한 뒤에야 비로소 그 자세한 사항을 서술할 가치가 부여됩니다. 소수설의 증명 과정을 모두 서술함으로써 정설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은 명백한 중립성 위반이기 때문에, 소수설은 소수설로서 언급만 될뿐 직접적인 증명은 출처를 통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직접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편집입니다. 이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12월 16일 (목) 17:29 (KST)[답변]
참고로, 교과서는 일부 참고할만한 저서에 불과합니다. 역사학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으며, 관련 논문이나 저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에도 해당 내용은 모두 서술되고 공론화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찾지 못하셨다고 해서 정론화되지 않은 내용인 것은 아닙니다. 하다못해 네이버나 다음의 백과사전에만 보아도 모두 나타나는 내용입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12월 16일 (목) 17:32 (KST)[답변]
제 요점을 논리정련하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좀 난해하네요 ^^;.. 정설이 외국의 백과사전에 '독도가 다케시마'라고 표기되어 있고, '동해가 일본해'식으로 이미 구축되어버린 현황에서의 반론을 말씀드릴려고 한건데요. 저도 일목요연하게 전달해 드릴려면 좀 정리를 해야될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 감사합니다 ^^.
정설이 독도가 다케시마라고 되어 있다면, 위키백과는 원칙상 그에 따라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어디까지나 소수설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물찾기 님은 모르시겠지만, 김종서 박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많은 비판이 이루어져 대부분 잘못되었음이 밝혀진지 오래입니다. 즉, 반론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김종서 박사가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죠. 그렇기에 소수설의 하나로 다뤄줄 뿐, 아마도 영원히 정설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우물찾기 님이 아무리 김종서 박사의 주장을 가져와서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김종서 박사 혼자만의 주장이며, 소수설의 하나로 언급은 될 수 있어도, 그 증명과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위키백과에 실릴 수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12월 16일 (목) 17:51 (KST)[답변]
넵!!! 조언 감사합니다. 위키백과서 소수설에 대한 주제 다루는 부분을 좀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 --우물찾기 2010년 12월 16일 (목) 17:59 (KST)

단군의 연도에 대한 반론[편집]

1.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천황은 기원전 66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것을 사실이라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본에 나라다운 나라가 들어선 것은 2세기 무렵에 고분시대가 되어서부터이며, 그 이전의 기록은 그저 신화로 치부할 뿐입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고대 국가들의 기원이라는 기록들에서 그 연대가 사실로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 중국에서조차도 공화 원년(기원전 842년) 이전의 연도는 부정확하다고 하여 그저 추정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으며, 은나라 이전의 역사는 아예 그냥 신화로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최근에 중국 정부가 이를 부정하고 신화 수준의 기록들에 대해 연대를 비정하는 공정을 수행하였으며, 그 덕분에 역사학계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2.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이야기와 대체 차이가 뭡니까? 애초에 단군신화에서 연도를 추산하는 기준이 되는 요임금조차도 신화 속의 인물입니다. 이미 여러차례 말씀드렸다시피, 헤라클레스가 하늘의 별이 된지 50년 후에 즉위했다는 말과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단군 기원인 기원전 2333년을 사실, 혹은 추정의 영역이라도 해당한다면 일본 천황의 시점도 기원전 6세기가 되는 것이고, 중국의 역사도 삼황오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에서는 아무도 그런 신화에 불과한 기록들에 근거한 연도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3. 역사는 책에 써 있는 것을 그대로 읽고 외우는 학문이 아닙니다. 역사책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부정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전근대 사람들이 그 역사책의 기록을 그대로 믿었다한들,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일개 역사학자보다 역사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일개 과학자보다 성경에 기록된 창조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대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Xakyntos (토론) 2014년 5월 19일 (월) 10:05 (KST)[답변]


[제왕운기는 국조 단군을 사실로 기록해 최초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밝혔고, 발해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포함시켰으며 고조선 이래 영토 분단 등과 관계 없이 한 핏줄 민족으로 구성돼 중국의 역사와는 다른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님의 주장과 전면 반대를 보입니다.]

고기, 위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동국통감 등 역사서들에서 고조선의 연도가 충돌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약간씩 다른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건국 시기는 기원전 24세기~ 23세기 입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5월 19일 (월) 16:29 (KST)[답변]

역사책들이 서로 충돌하건 말건 그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귀하의 토론 문서에 써 놓았듯이 일본서기 자체로도 충돌은 없고, 귀하가 한 말 그 자체가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라는 점에서 귀하의 이중잣대는 명확해집니다. 역사책에 써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고 사람이 알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귀하도 그것을 사실이라 믿지는 않고 있지 않습니까?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 신화적인 코드라면, 요임금 제위 25년 무진년은 대체 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문제가 됩니까? 귀하야말로 해당 연도가 정확한 사실이라 주장하는 역사학계의 공인된 출처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 한, 귀하의 편집은 반달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5월 19일 (월) 16:42 (KST)[답변]


오히려, 해당 연도가 부정확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계의 출처를 가져오시고, 그에 따라 증명하십시오. 저는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와 고기, 위서를 인용한 삼국유사, 동국통감을 기반하여 수정하는 것으로, 한낱 역사학계 특정 학자들의 주장을 초월합니다. 또 저는 단군 시조 설화 모든 것을 역사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연도를 명확하게 표기했음으로, 고려, 조선시대 사관은 우리 민족의 기원은 '단군조선'이며, 이 단군조선은 '기원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토론할 여지가 없습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5월 20일 (화) 19:35 (KST)[답변]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 "많은 사람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이다. 게다가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청동기시대 (서기전 10세기)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고조선의 실제 성립시기는 선진의 문헌인 관자의 기록에 나오는 서기전 8~7세기로 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일보)

→ 만주 지역에서 가장 이른 청동기문화는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이다.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지주산 유적은 서기전 2015+(-)90년으로, 교정연대는 2410+(-)140년으로서 이 연대는 지금까지 확인된 하가점하층문화 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이 문화가 실제로 개시된 것은 유적의 연대보다는 다소 앞설 것이므로 서기전 2500년 경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은 길림성 서부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도 서기전 25세기로 올라가는 청동기 유적이 두 곳이나 발굴되었다.

  • 문화재관리국 발굴단에 의하여 발굴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

다섯 기의 고인돌이 발견된 이 유적에서 채집한 숯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는 서기전 1950+(-)200년으로 나왔는데 교정연대는 서기전 2325년경이 된다. 이 유적에서 청동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유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므로, 이 연대를 청동기시대 연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된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적

이 청동기시대 유적은 수집된 숯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전 2190+(-)120년으로 나왔고 교정연대는 2630~2364년 경이 된다.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 개시가 황하유역보다 앞섰다면 다른 문화수준도 그만큼 앞섰을 가능성이 있으며, 국가사회로의 진입도 그만큼 빨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3, 29쪽)

과연 청동기가 나와야 국가가 성립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집트의 고대왕국과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은 청동기 시대에 성립한 국가가 아님에도 국가로서 인정받습니다. 중남미의 경우도 석기시대였고,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청동제품도 북방에서 온 교역품으로 분석됩니다. 인도 문명도 청동기의 영향으로 번성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청동기가 나와야 국가가 성립한다는 학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설입니다.

제대로 된 학설을 들고와서 위에 대한 반박을 해 보십시오. 고고학적 지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Xakyntos 님의 주장은 논파된 송호정 교수의 논문과 일치합니다. 실제로 송호정 교수의 틀린 주장은 학계에서 정설로 취급하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학계가 항상 정확하고 옳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학계의 정설은 수많은 학자들과 토론과 반박을 이겨내고 난 뒤에야 확립되는 것입니다. 반발하는 학자들까지도 모두 인정하게 된 이후에야 정설이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즉, 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교수들이 정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아예 일어날 수도 없는, 자칭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허구 속의 강단사학일 뿐입니다." 라고 주장한 Xakyntos 사용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위 내용은 고조선의 연대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에 관한 언급을 모조리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며, 여러분들께서는 '정설'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5월 20일 (화) 20:25 (KST)[답변]

  • 참고로, 한국에 있어 '고조선'은 고고학·역사적인 면과 신화·설화적인 면이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 그 이후에서도 변화를 겪어 왔다고 여겨집니다. 실증적으로 검증된 정치 세력으로서의 고조선은 점차 그 연대가 당겨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기원전 2,333년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상태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신화나 설화, 조선 시대 이전의 고조선에 대한 설명에서는 해당 연도를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된 고조선의 건국 연대들은 고조선#건국 연대 및 치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jtm71 (토론) 2014년 5월 20일 (화) 21:32 (KST)[답변]

'건국 연도 미상'과 '역사서의 건국 연도' 병기 제안[편집]

가장 먼저 이것은 독자 연구가 아님을 말씀드리며, 저는 다음을 고려하여 두 가지 주장의 병기를 제안합니다.

  • 현행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음
  •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적인 상식
  • (고기,위서) 를 참고한 《삼국유사》, 《동국통감》과 《제왕운기》등의 역사서에도 서기전 24~23세기에 건국되었다고 표기

- 학계에서 논의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주제가 반드시 거부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 다른 정책과 지침을 충족하여 기술하였더라도 일부의 시각만이 과도하게 반영된 경우에는 다른 방향의 관점의 내용이 균형있게 보태지기 전에는 중립적 시각의 위배가 될 수 있습니다.

라는 위키백과 : 비주류 이론의 내용과 위키백과 : 중립성의 요건에 근거하여, 일부의 시각만이 반영된 '건국 연도 미상'만을 표기하는 것은 중립적 시각에 위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류 학설을 존중하여, 아래와 같이 건국 연도 미상을 가장 먼저 표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고조선 ?(기원전 24세기) ~ 기원전 108년

이 토론에서 절충안을 낼 때까지 편집을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이에 대한 의견 부탁드립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5월 20일 (화) 23:06 (KST)[답변]

1. 귀하는 윤내현을 비롯한 소수설을 근거로 주류학설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귀하의 그 발언은 완벽하게 틀렸습니다. 윤내현을 비롯한 소수설은 주류학설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공인된 출처를 통해 검토를 받아야 하며 그러한 검토를 할 수 있는 곳은 역사학계라고 하는 학문의 전당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윤내현의 주장은 역사학계의 검토를 통과하지 못하여 전혀 인정받지 않고 있습니다. 귀하의 머리 속에서는 윤내현의 주장이 옳고 주류학설이 잘못된 것일지 몰라도, 학문의 세계에서는 윤내현의 주장이 틀렸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귀하가 인용한 윤내현의 주장은 주류 학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아니라 주류학설에 대항하는 소수설일 뿐입니다.
2. 이에 대해서 귀하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류학설이 단합해서 윤내현의 주장을 묵살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니, 식민사학의 후계자들이 민족사학을 하는 윤내현을 탄압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물론 윤내현 본인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키백과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침으로서 바로 위와 같은 주장을 경계하고 철저하게 검증해야 할 사안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가 수차례나 인용한 바로 이 구절 말입니다.
'지지를 얻지 못하는 주장이나, 관련 학계의 주요 관점과 대치되는 주장. 지지자들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특별히 주의할 것
3. 즉, 귀하나 윤내현이 아무리 자신들이 옳고 식민사학계가 밥그릇 뺏길까 두려워 자신들을 탄압한다고 외쳐봤자 위키백과는 물론이고 학문의 세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을 음모론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음모론을 근거로 주류 학설을 삭제하거나 수정할 것을 주장하고 강행하는 귀하의 행동은 명명백백한 위키백과의 원칙 위반이며, 차단 대상입니다.
4. 위키백과의 중립성의 원칙은 존재하는 모든 주장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문서의 구성이나 설명에서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보다 두드러져서는 안 됩니다.라는 조항을 보시기 바랍니다.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중립은 다수 의견, 즉 정설을 중심으로 삼고, 소수 의견을 비중에 따라 서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위 제안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정설은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도가 사실이 아닌 신화이며, 고조선의 정확한 건국 연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항하는 소수설은 고조선#건국 연대 및 치세 같은 항목에서 별도로 서술되어야 하는 것이 위키백과의 원칙에 부합합니다.
5. 정리하겠습니다. 귀하의 제안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기원전 2333년 혹은 기원전 24세기가 실제 건국 연도라는 주장은 명백한 소수설이며, 이러한 소수설을 위키백과의 메인 표제에 싣는 것은 명백한 중립성 위반입니다. 귀하가 이러한 주장을 싣고 싶으시다면, 본문 중에 별도로 서술하십시오. 아니, 이미 그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5월 21일 (수) 00:19 (KST)[답변]

음모론을 근거로 주류 학설을 삭제하거나 수정할 것을 주장하고 강행하는 귀하의 행동은 명명백백한 위키백과의 원칙 위반이며, 차단 대상입니다.

→저는 음모론을 근거로 하지 않았습니다. 논파된 주장을 옹호하면서 논파한 주장을 '음모론'으로 매도하는 짓 좀 그만하시죠. 위에 국사 교과서, 사람들의 상식, 역사서 등 납득할 만한 근거를 담았습니다. 소수설이 주류설의 의견보다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괄호 안에 한해서 부속되니까요. 제가 두 내용을 동등하게 다루었다는 주장을 논증하십시오.

학계에서 논의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주제가 반드시 거부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해명을 해 보시죠.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가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게 아니라, 인정을 안하는 건뎁쇼? 말 그대로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그렇게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역사학계가 윤내현 학설의 근간이 되는 고고학적 증거을 무시하고, 청동기 문화가 되어야 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송호정의 궤변을 세계 여러 나라를 예로 논파하였는데

인정받지 못한다 = 틀렸다? 아닙니다. 인정하지 않는다 = 맞았다 라는 불문율이 역사학계에서 만연하죠.

님이 그렇게 완벽하다고 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정설 (송호정이 주장하면 주위 교수들이 복창하는)은 한낱 윤내현의 소수설에 논파되었으며, 그것은 결코 음모론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음모론에 근거하여 수정한 것이 아니고, 적절한 근거를 위에서 제시하였으므로, 음모론과는 거리가 멉니다. '매도' 좀 그만하세요.그리고 틀린 학설에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고고학적 기록에 의존할테니.

논파된 학설을 아직도 맞다고 주장하시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고고학적 증거에 따라 잘못된 내용을 수정합니다. 비주류 이론이 아니라, '고고학적 증거'니까요. 역시, 애초에 님은 토론할 의지조차 없고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토론을 악용한 것입니다.

--182.212.6.95 (토론) 2014년 5월 21일 (수) 06:33 (KST)[답변]

1. 귀하가 하는 행동 그 자체가 이미 음모론인데 말입니다. 대체 몇 번이나 이 위키백과의 정책을 보여드려야 합니까? '지지를 얻지 못하는 주장이나, 관련 학계의 주요 관점과 대치되는 주장. 지지자들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특별히 주의할 것 귀하가 주류사학계가 식민사학이라 말씀한 것만 해도 수차례이며, 귀하가 신봉하는 윤내현을 비롯한 소수설의 주장 그 자체에도 이미 “식민사학계가 자신들의 주장을 묵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음모론이 아니면 무엇이 음모론입니까? 귀하 혼자서 이런 주장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음모론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위키백과의 지침 그 자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는 이런 주장을 지금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입니다.
2. 마찬가지로, 귀하가 혼자서 주류학설이 논파되었다 생각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만, 이렇게 위키백과에서 논파되었다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귀하에게 거증의 의무가 있는 사항입니다. 귀하가 아무리 역사서니 뭐니 가져와도 그것이 학계의 연구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서기나 삼황오제를 대체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합니까? 귀하가 윤내현을 비롯한 소수설의 주장을 가져와도 역시 전혀 거증이 되지 않습니다. 윤내현의 주장은 그 자체로 음모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제하더라도 주류 학계에서 반박을 받고 폐기처분된 것이라고 이미 수차례나 말씀드렸습니다. 귀하 혼자 해당 주장이 주류 학설을 논파했다고 생각해봤자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귀하가 가져와야할 증거는 주류 학계의 학설이 확실하게 틀렸고 윤내현이 옳다는 신뢰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윤내현의 주장은 주장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3. 고고학을 말씀하셨습니까? 윤내현이 감추고 있는 사실을 한 번 보여드릴까요?
첫째, 고인돌이 모두 청동기시대 유물이라는 것 자체가 학계의 정설이 아니라는 것. 고인돌에 부장된 유물 및 수습된 탄화물 등을 분석해보면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물론 청동기시대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양평 양수리 고인돌 자체가 고인돌이 신석기 시대 말기에도 축조되었다는 증거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박물관연구회, 1999.7.5, 문예마당)
둘째, 영암 장천리 유적의 편년. 장천리에서 출토된 목탄의 연대 분석 결과가 BP4140년(기원전 2100년대)으로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발굴을 직접 진행한 목포대학교박물관(물론 고고학과)에서는 이 목탄의 연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반 유물들의 양식과 분포가 모두 송국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기원전 5~3세기와 일치하기 때문이죠. 발굴된 유물, 특히 탄화물과 같은 종류는 외부 혼입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그 단독으로는 신뢰성을 판단하기 어렵고 공반 유물이나 기타 다른 연대 측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은 고고학의 상식입니다.(목포대학교박물관, 《영암 장천리 주거지 Ⅱ》, 1986, 보고서 링크이니 직접 확인하시길)
윤내현이라는 학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기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로군요. 고고학을 말씀하셨으니 고고학계의 정설 및 실제 발굴을 진행한 당사자의 보고서를 찾아 봤습니다. 그러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자, 과연 학계의 정설이 논파되었습니까? 고고학 운운하려거든 윤내현 같은 이의 책 말고 실제 고고학 저서나 발굴 보고서를 보십시오. 그럼 이렇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4. 이상과 같이 귀하가 논파되었다는 증거로 가져온 내용 그 자체가 거짓임을 명백한 증거를 통해 밝혔습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일일히 찾아서 밝히지 않아도 귀하가 가져온 내용은 정설을 논파한 것이 아니라 논파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소수설일 뿐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만, 귀하가 하도 강짜를 부리니 한 번 확인해봤습니다. 이제 뭐라고 반박하실 것입니까?--Xakyntos (토론) 2014년 5월 21일 (수) 10:53 (KST)[답변]

단군 왕검을 고조선 왕 재위 목록에 추가[편집]

추가합니다. 이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조선이라는 국가는 관자와 사기 등의 문헌과 한사군이라는 존재를 통해 실존하였음이 입증되었고, 그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단군이라는 사람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말하고 있죠. 이것을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단군 신화를 부정한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는 않습니다만 단군의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단군의 존재에 대해서 학계에서 왈가왈부하여도 단군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댈 수 없습니다. 단군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단군은 실존한 인물로 취급되어야죠.

삼국사기에서도 단군은 '선인 왕검'으로, 고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제왕운기 등에서도 단군이 등장하며 강화도에서도 삼랑산성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설화가 있으며 조선시대 때도 단군과 관련된 기록이 넘쳐나며 단군의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죠.

  • 위키백과 : 고조선의 내용입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위키백과 : 고조선의 내용입니다.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 기대합니다. 조선사편수회가 악의적으로 훼손한 역사와 그것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계승한 학설을. 그리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토론을 한다기 보다는 생각을 정당화시키는 자리가 되어버리니까요.

--182.212.6.95 (토론) 2014년 6월 4일 (수) 15:37 (KST)[답변]

바로 여기서 단군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기존 학계의 입장 (후략) - 118p

단군조선시대에 단군이라는 고유한 인물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다. 단지 여러 명의 단군(제사장)이 여러 지역에서 부족 국가를 이끌었던 것이 초기 국가를 형성하던 단계의 우리 역사 모습인 것이다. - 125p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도서출판 산처럼, 2004

1. 원하시는 기존 학계의 입장입니다. 됐습니까?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귀하의 주장이 아니라 제 편집입니다.
2. “조선사편수회가 악의적으로 훼손한 역사와 그것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계승한 학설을”이라 쓰셨군요. 귀하는 또 다시 인신공격을 하셨습니다. 차단을 신청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6월 4일 (수) 21:12 (KST)[답변]

누가 기존 학계의 입장입니까? 송호정이? 2004년에??? 딴나라에서 사는 것은 아니고요?

이병도는 이렇게 말년에 참회하였지만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용어의 뜻부터 알자. 1. 단군 : 檀君의 뜻이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모르면 이야기 하지 말 것. 2. 신화라고 하는 정의가 무엇인가? 삼국유사 및 제왕운기는 신화집인가? 3.인간을 널리 이롭게(홍익인간[弘益人間])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하니 이로부터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善),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에 살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 홍익인간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뜻인가? 弘

4.천부인이 없는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단군조선을 부정한다면, 단군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 것. 안다면 서술하시오. 5. 신단수는 기독경의 생명수, 석가모니의 보리수, 미륵의 용화수와 같은 뜻이라고 한다. 신단수는 무슨 뜻인가? 6. 신시(신불)은 천독이라고 하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신시에 대해 서술하시오. 단군조선과는 다른 아사달인가? 7. 환웅은 우리나라 절에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 환웅은 단군전의 임금님으로 아는데 환웅은 환국의 서자로 단국을 설립했다고 하는데,부정하면? 단군은 사생아가 된다 .맞는지 확인요망. 8. 환웅을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많다고 한다. 과연 일본의 신교는 믿을 수 있고 우리나라 고대사는 부정하는 이유는? 그리고 일본의 신교의 신은 가리가미인데 이 천신은 어디에서 갔나? 천손강림은 단군신화고, 천신강림은 환웅신화다. 서로의 연관성을 서술하시오. 9. 환웅이래 단국까지 전부 하늘에 천제를 모셨다는데, 천제를 모시면, 샤머니즘인가? 종교인가? 왜 천왕이 천제를 지낸다는 것은 종교가 되지 못하는가? 10. 환웅천왕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환웅에 천왕이라고 했나? 이름은 빼고 호칭이라고 하였다. 제천장이면 사제? 그럼 종교가 아닌가? 11. 풍백, 운사, 우사는 파람, 구름, 비로 삼국사시 풍류도와 관련이 있는데, 불교, 유교, 도교와의 관계를 설명하시오. 12. 풍백, 운사, 우사는 삼황오제의 삼황과 관련이 있는데 관계를 설명하시오. 13. 풍백, 운사, 우사가 삼정승제도와 같고, 현대의 입법, 행정, 사법제도와 같은 정치제도라고 하는데, 그럼 고등 정치가 아닌가? 14. 곡, 명, 병, 형, 선악. 이것은 3황5제의 5제에 대한 것인데, 아는데도 무슨 제도인지 설명하시오. 참고 윷놀이 도개걸윷모. 5, 참고, 세속오계, 오상 등도 관련이 있슴. 15. 인간의 360가지의 일을 주관했다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술하시오. (예, 8리훈) 16. 인간세상에 살며(??? 천신인가.. 천신이라고 나온다,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단군전 즉 기원전 2,333년전의 일인데, 이렇게 이야기할까? 17. 일본의 천손강림사상은 인정하는가? 천신강림과 천손강림사상, 왜 난생설화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많은가? 서술하시오.

등등등... 삼국유사의 내용이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송호정이 단순하게 단군을 제사장. 부족사회로 만들어진 신화라고 하는데, 내용이 너무 많다. 과연 알고 떠드는지 설명하시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1일 (토) 14:19 (KST)[답변]

문헌 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기록의 신뢰도가 낮다?[편집]

'문헌 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기록의 신뢰도가 낮고'라는 표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고기,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의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도 고조선의 실존을 기록하였고 관자, 산해경, 사기,한서 지리지 등의 중국 사서에서 이 부분은 고조선의 실존을 사실대로 기재하는 것 외에는 왜곡할 가능성이 적은데 '신뢰도'가 낮다 라고 표현한 근거는 무엇인지요? 학계에서 검토되고 수용된 정설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고조선사 전공이며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7세기로 축소시켜버린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도 “학계 시대사 구분에 역사적 실체로 판명된 고조선을 넣어야 한다”라고 하였죠.

고조선이 없었으면 연나라에서 온 위만이 왕위를 빼앗을 수 없었으며 한사군이 생기지도 못했을 겁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6월 4일 (수) 16:06 (KST)[답변]

1. 고조선을 기록한 사료에 대해서 좀 공부라도 하고 오시지요. 현재 학술적으로 인정되는 고조선의 역사 대부분은 《위략》이라는 단 1가지 사료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이 《위략》에 기록된 고조선은 철저하게 기자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자조선이 현재 학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아실런지 모르겠군요. 물론 기자조선을 제외하더라도 《위략》의 문제점은 많죠. 만리장성이 건설되자 부왕이 이를 두려워해서 진나라에 복속했고, 그로부터 적어도 20년 이상이 지난 뒤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리장성은 기원전 214년에 건설되었고, 진승 오광의 난은 기원전 209년의 일입니다. 20년?? 애초에 이렇게 신뢰성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위략》을 비롯한 고조선 관계 사료는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발 이런 기초적인 것은 좀 공부라도 하고 오십시오.
2.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7세기로 축소시켜버린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허위사실 유포 및 인신 공격입니다. 차단을 요청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6월 4일 (수) 21:20 (KST)[답변]

고조선은 어느나라입니까? 처음 듣는 古씨조선인데도 그런데도 있나요? 이씨조선은 아는데 고씨조선은? 기자조선은 기자의 조선이고... 그렇지 않나요? 단군조선을 부정하면 고대사를 할 이유가 없죠. 아는게 없는데. 1. 기자는 은나라에서 왔습니다. 은나라에는 소호금천이 있었고 伊尹은 현재 윤씨의 선조라고 합니다. 이윤은 자부선인의 제자라고 해서 아주 영특하고 대단했다고 하는데요. 소호금천의 한 핏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중국이야긴데, 왜 이야기하나요? 내가 알기에는 은나라는 동이족이라, 모두 동이의 제후국으로 아는데 단군조선이 부족국이라고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2. 은나라의 문자체는 주나라와 다릅니다. 1899년 발견된 금문과 갑골문이 있는데, 금문/갑골문에 대해 해석이 가능하시면, 기자조선의 기자는 어느나라 사람이고 왜 번한조선의 왕이 되었을까요? 3. 아참 번한조선 자체를 부정하시는군요. 번한조선은 위만에게 속아 꼭 왜넘처럼 들어가 번한조선이 위만에게 그리고 한에게 패망했지요? 기자의 성은 무엇이었나요? 상관없는 원시부족국가와 은나라와 더 상관이 없는데, 기자조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삼한조선인데, 마한조선, 진한조선, 번한조선.. 삼한조선이네요. 그럼 하나(한)조선 아닌가요? 조선의 뜻은? 왜 -조선이 이렇게 많은지.. 일일이 관계 자료는 첨부하지 않겠습니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1일 (토) 14:38 (KST)[답변]

보호 기간 종료 후 수정할 내용입니다.[편집]

  •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은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고대 국가이다.
→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은 대한민국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이다.
→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은 대한민국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고대 국가이다.
수정 근거 : [고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2323&cid=40942&categoryId=33374]에서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라는 표현을 인용.[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선 [古朝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시는 분들의 견해는 어떠신지요?--Aubelumiere (토론) 2014년 7월 25일 (금) 20:18 (KST)[답변]
이렇게 논쟁 여부도 없는 단순하고 당연한 내용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25일 (금) 22:09 (KST)[답변]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역사"라고 나눠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요? -- ChongDae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3:55 (KST)[답변]

국사교과서 문제[편집]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6][7] 이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시기도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하였다.

강조한 부분은 사용자:Lhrdrth가 추가한 문장으로, 해당 문장대로 국사교과서가 연대를 단정하였는지 여부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첫째로 해당 문장의 실제 변화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 2007년 이전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 2007년 개정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
보시다시피 핵심적인 개정 부분인 “하였다고 한다”라는 서술어가 목적어로 삼는 부분은 건국 주체(단군왕검이 건국)에 대한 내용이며, 연도는 서술어와 무관하게 괄호를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신문기사 역시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즉, 사용자:Lhrdrth는 교과서 본문은 물론이고 신문기사에서조차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교과서 개정의 중심을 건국 연대로 맞추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둘째,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을 정확하게 명시하여 사실이라 말하는 학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당 연대는 신화적인 연대로, 성경이 말하는 6000년 전에 천지창조가 있었다는 말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국사교과서의 집필진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건국 주체나 건국 연대가 확실한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실이라고 명시하면 국내외 학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모호하게 서술하여 넘어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은 해당 개정에 대한 학계의 비판에서도 여실하게 제시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는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확정지을 수 없다”며 “사료에 바탕해 엄밀해야 써야 할 교과서를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이처럼 학자들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부분을 실제 교과서 원문에서도 유추가 불가능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단정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명백한 독자연구에 해당합니다.

이상과 같은 근거로 사용자:Lhrdrth의 해당 편집은 명백한 오류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용자:Lhrdrth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를 해당 표현 대신 신문기사에 직접적으로 명시된 표현으로 바꾸어 수정한 바 있습니다.

새 교과서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과 관련해 ‘~ 건국하였다고 한다’를 ‘건국하였다’로 더 확정적으로 썼다. - 한겨레 신문 기사 중

보시다시피 단순히 단정하였다는 표현이 아닌 이전보다는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표현으로써 해당 교과서 개정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표현입니다. 참고로 한겨레의 기사 역시 해당 개정의 목적 대상이 건국 연대가 아닌 건국 사실 및 주체임을 확실하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해당 편집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근거를 들어 제시하였습니다. 사용자:Lhrdrth는 이에 대해 해명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25일 (금) 22:29 (KST)[답변]

귀하의 문장 분석 부분은 제가 되도록 잘 이해하려고 자세히 정독했지만 죄송스럽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귀하의 일방적인 주장보다는 이렇게 서술 방식을 변경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을 들어봅시다.

이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은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8쪽

보셨습니까? 분명히 "고조선 건국 시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장득진이라는 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속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발간하고 "국사편찬위원회"와 "국정도서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연구진입니다. 귀하가 무슨 자료로서 주장하고 논리를 펼치든 그렇게 직접 내용을 수정한 측에서 이렇게 밝힌 이상 귀하의 주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동기 유물 발굴 연대가 올라가서 고조선 건국 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확정하였으므로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시기도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하였다."라는 저의 편집은 아무런 오류가 없습니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밝혔듯이 엄연히 명백한 고고학적 성과, 연구 결과로 단정한 부분을 무슨 신화적인 연대, 성경 운운하시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명백한 사실 호도입니다. 한번만 더 이렇게 주장하시면 제재를 요청하겠습니다. 또 자꾸 "단정" 부분을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앞에서 말한대로 국사편찬위원회는 "근거가 뚜렷"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정하고 다를바가 없는 말입니다. 귀하가 제시한 자료에서도 "확정적으로 썼다"라고 했습니다. 확정이 뭡니까? 단정하고 다를바가 없는 말입니다. 제가 제시한 자료는 "공식 편입했다"라고 했습니다. 이도 단정하고 다를바가 없습니다. 귀하가 정 불만이면 "단정했다"대신에 "확정했다",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정도로는 수정에 찬성하지만 귀하의 주장대로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불가합니다. 더라는 수식어때문에 "아직까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약간 더 진전하여 확정적인 것인 마냥 인정했다"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꾸 송호정같은 일부 소고조선론자들의 주장으로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계"운운하시면서 압도적인 다수설로 자꾸 몰아가시는데 일단 국사 교과서 서술을 얘기하는데 송호정같은 제3자의 견해가 끼어들 여지도 없고 제가 예를 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정도서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것입니다. 이런 국가적 공식 기관의 견해야말로 진정한 현재 주류, 다수설입니다. 또한 시기도 가장 최근입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국사 교과서는 2012년 판입니다. 과거에 뭐라고 했던 현재는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확정적으로 보는 것이 엄연히 주류, 다수설입니다. 국사교과서 연구진과 집필진을 보면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육과학기술원, 과학기술부 그외 연세, 전남, 목포, 이화대학교 교수등등 국가적 공식 기관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송호정같은 몇몇 소고조선론자의 주장으로 마치 소수설인양 몰아가는 것은 명백한 귀하의 오류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이에 한가지 더 입장을 밝히자면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 평양설"을 사실상 부정하는 입장으로 서술한 것은 귀하도 잘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방금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귀하가 주장하는 "낙랑군 평양설"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압도적 주류 다수설이라는 주장에 이제는 명백히 반대함을 밝힙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정도서편찬위원회"가 인정하고 앞서 밝힌 수많은 국가적 공식 기관의 견해야말로 진정한 다수설이고 주류설입니다. 그러므로 1달 후 낙랑군 문서가 보호에서 풀리면 낙랑군 토론 문서에 이런 입장을 밝혀 공식적인 근거 자료를 만든 후 낙랑군 문서에 대폭 손질을 가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27일 (일) 16:25 (KST)[답변]
현행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평양을 일절 언급도 하지않지만 이를 부인한다는 명백한 자료는 아래의, 국사 교과서에 삽입된 지도입니다. 위만조선 멸망 후의 각 세력권 지도인데 국내성, 졸본까지 구체적으로 위치를 언급하지만 대동강, 평양 지역에는 낙랑군의 그림자조차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http://histopia.net/kh/data/038.jpg
국사 교과서가 일반적인 주류, 다수설이 아니라고 하면 국가가 앞장서서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친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적어도 국사 교과서가 이렇게 낙랑군 평양설을 부인하는 이상 사용자:Xakyntos가 창조론, 진화론에 비유하면서까지 낙랑군 평양설을 반박하는 이론을 터무니없이 폄하하는 것은 위키백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사실 왜곡이므로 앞으로는 주의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27일 (일) 17:33 (KST)[답변]
교과서명 심사본 내용 수정·보완 권고사항 수정·보완 결과 미반영 사유
(주)금성출판사 29 실제로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관련 문장 재검토 요망 (보완하지 않음)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명확한 논거도 없으며, 특정 견해에 치우칠 우려가 있음. 현재의 문장은 기원전 7세기 전후 성립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임.
(주)리베르스쿨 24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가 명멸하는 가운데 고조선은 2,000년 넘게 존속하였다 재검토 요망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가 명멸하는 가운데 고조선은 2,000년 넘게 존속하였다.’ 삭제

1. 위 표는 2013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에서 각 출판사에 하달된 수정·보완 사항 중 고조선 건국 연대와 관련된 항목들입니다. 이 두 출판사를 제외하면 건국 연대와 관련된 수정 사항은 없습니다. (출처) 보시다시피 두 교과서 모두 기원전 2333년이 실제 연도가 아님을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금성 교과서는 기원전 10세기로 이후로 명시하고 있으며, 리베르스쿨은 2000년이라는 존속 기간을 삭제하여 역시 건국 연대가 불분명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성교과서의 수정 사항에는 더욱 특기할 사항이 있는데, 해당 문장을 수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기원전 7세기설이 명확하지 않다고 들고 있지요. 즉, 2013년도 한국사 교과서의 편집 지침으로 수정하라 하달된 내용이 기원전 7세기경이 실제 성립 연대라는 내용이라는 의미입니다. 2012년 교과서요? 어느 쪽이 최신입니까?

종래 우리 학계에서는 구체적 정치체가 등장하기 위한 전제요소인 農耕 및 靑銅器의 출현, 즉 청동기문화의 개시연대와 연결시켜≪삼국유사≫등에 나타나 있는 단군 관련 연대를 신화적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면 단군 관련 연대는 단순히 신화 차원의 그것이 아니라 보다 실제적인 내용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단군신화의 내용은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를 담당한 고아시아족의 문화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곰숭배적 요소와 아울러 샤먼적 성격을 갖고 있는 단군의 존재는 고아시아족의 문화내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비록 구체적 정치체로 등장한 단계는 아니지만 단군 관련 연대는 결코 신화적 성격의 그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2. 국편위의 역사 편찬 사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도 및 대표성이 있는 통사인 《한국사》 신편의 내용입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한 항목으로서 보시다시피 정치체(=국가)가 실제로 등장한 연도는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에 대해서 그나마 가장 우호적으로 해석한 것이 이 정도입니다. 장득진 실장의 발언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장 실장은 "이전 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밝히면서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최고 기원전 15세기로 잡았다"며 "이 탓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의 역사와 맞지 않아 배우는 학생들이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됐다고 적극적으로 서술되지 못한 이유는 이 시기에 청동기가 보급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성과가 충분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장 실장은 "우리가 만주 등의 유적들에 접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세워진 고조선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관련 연구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이번 교과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반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기원전 2000년쯤까지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세계일보 기사에 훨씬 더 자세한 인터뷰 내용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청동기 보급 시기를 앞당긴 것이며 기원전 2333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서술이라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앞서 말한 한겨레 기사 그대로 조금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것이 본질에 훨씬 가깝습니다. 게다가 한국사학계 일반에서 거세게 반발하였던 사실까지 생각하면 답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송호정:고고학계에서도 전형적인 청동기 유물은 기원전 10세기 위로 안 올라가는 게 주류입니다. 은·주 시대로 올려볼 수 있는 유적들이 있긴 하지만, 더 많은 학계의 논의를 반영하지 않고, 한두 유적만 근거로 교과서를 수정하는 것은 안 됩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 서술 문제는 내용 수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래 어법에 맞는 문장을 틀리게 고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교과서 편찬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죠. ‘…고 한다’를 빼고 그냥 ‘건국하였다’로 했다고 해서 신화를 역사로 만들었다고까지 보는 언론의 호들갑도 사실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3. 경향신문 기사의 관련 대담. 공식편입했다는 문장 자체가 허구인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애초에 학계의 연구 흐름 자체가 단군신화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단군신화에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신화적 코드로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 원래부터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애초에 신화를 신화로만 본 것도 아니요 신화를 그대로 역사라고 보는 것도 아닐진대 이를 두고 전에는 공식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공식편입했다라고 쓰는 언론의 행태는 황색언론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4. 정리하죠. 귀하야말로 단정했다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가져오십시오. 저는 적어도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명확한 소스를 가져왔으며, 귀하가 단정했다는 근거로 가져온 것의 더 자세한 내용을 비롯해서 역사학계 일반의 반박까지 제시했습니다. 국사 교과서 집필진이 미치지 않는 이상 기원전 2333년을 실제 건국 연도로 단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해당 내용은 어디까지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그렇게 적혀있다는 말일 뿐입니다.

5. 귀하가 링크한 지도의 캡션은 이렇습니다. “여러 나라의 성장” 한국사에 해당하는 국가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죠. 그렇기에 한국사라고 보기 어려운 읍루(함경북도 및 연해주 지방)가 없군요. 한국사에 해당하는 국가가 아닌 낙랑군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낙랑군은 말할것도 없고 요동군을 비롯해서 아예 중국에 대한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도에서 낙랑군이 없으니 이게 평양에 낙랑군이 없다는 증거라구요? 그럼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중국과 일본도 없는 국가겠군요.

6. 불행히도 귀하가 아무리 외쳐봤자 국사 교과서에는 멀쩡히 낙랑군(한군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지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낙랑군의 역사와 의의를 축소해서 기록하고 위치를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으려 했을 뿐, 없다고 명시하지도 않았고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 가능한 내용은 아래처럼 멀쩡하게 들어 있습니다. 결국 귀하가 위에 써 놓은 행동을 하는 것은 그저 반달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28일 (월) 17:07 (KST)[답변]

교과서명 관련 내용 비고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47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장하였다. 한강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면 한강에 인접해야 한다.
49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면 낙랑군을 몰아 낸 것이 남쪽으로 진출할 발판이 될 수 없다.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정교과서 36 백제는 성장 과정에서 중국 군현의 압력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백제가 중국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였다. 초기 백제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중국 군현은 낙랑군 밖에 없다.
2013년 금성교과서 32, 36 직접 지도에 낙랑군 위치가 명시 출처는 보완사항에 첨부파일로 들어 있음
교학사 교과서 21 낙랑군은 주변에서 성장한 동예, 삼한 등의 나라들을 통제하여 그 성장을 억제하려고 하였으나, 동예, 삼한 등을 주변으로 둘 수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평양 밖에 없다. 출처 상동
천재교육 교과서 22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던 낙랑군을 몰아내고 한강으로 진출하려면 한강에 인접해야 한다.
귀하가 지금 근거라고 제시한 자료들은 각 출판사가 자신들이 임의로 선정한 사람들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발간한 각 출판사별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의 내용입니다. 제가 근거로 제시한 것은 국가 공인 역사 편찬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국가 기관인 교육과학기술부가 발간한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입니다. 귀하도 잘아시겠지만 이런 각 출판사들이 만든 교과서가 좌편향이니 우편향이니 하여 내용의 신빙성에 문제가 되어 각 학교에서 채택을 두고 실로 엄청난 시비가 일기도 했습니다. 귀하의 말대로라면 금성출판사와 리베르스쿨이 우리나라 국사학설의 주류입니까? 당연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귀하가 제시한 저런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 따위는 아무런 논박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름으로 편찬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발간한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가 당연히 주류 이론입니다. 당연히 이런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 따위가 아닌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가 인정받는 주류고 따라서 고조선 문서에는 바로 이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따라 편집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있는 (주)지학사가 발간한 검정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지학사라는 곳이 특정 학자들에게 집필을 의뢰하고 그 내용을 교육과학기술부도 아니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라는 곳이 검정심사를 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국사편찬위원회같은 국가 공식 기관도 아니고 그냥 내용을 보고 심사해서 출판한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이런 사설 교과서 따위는 그 내용의 신빙성 여부에 앞서 제가 말씀드린대로 전혀 보장이 되지않아 채택 여부를 놓고 그렇게 말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가 아닌 국사편찬위원회의 이름으로 편찬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발간한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것은 틀렸다라고 나온다면 당연히 귀하의 주장에 수긍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판 시기가 앞선다는 귀하의 주장도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이런 여러 검정 사설 국가 교과서 중에는 귀하의 주장에 반대되는 논지로 서술하는 교과서도 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각 출판사별로 다양한 여러개의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가 판을 치는 판국에 그중 귀하의 입맛에 맞는 특정 검정 사설 교과서 2개를 선정해서 이것이 주류 이론이니 수정하라?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귀하가 제시한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명확한 논거도 없으며, 특정 견해에 치우칠 우려가 있음. 현재의 문장은 기원전 7세기 전후 성립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임." 이 자료를 근거라고 내세우시는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는 주제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가 명멸하는 가운데 고조선은 2,000년 넘게 존속하였다."를 왜 삭제시켰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고조선은 길게 존속했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고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다라"는 내용이 검정 교과서에 실리기에는 별 효용이 없는 내용이라 삭제된 것이지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기원전 2333년임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한국사신편의 내용이 언제 발간된 것인지는 모르겠고 그것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가 2012년에 발간한 국사교과서에 실린 사항이 더 영향력이 큽니다. 그 신편이 2012년 이전에 발간된 것이라면 귀하는 그것을 논박 자료로 제출하는데 시기의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가 장득진 실장의 견해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내세운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자충수입니다. "청동기 보급 시기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시기에 미치지못해서 그동안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단정하지 못했는데 기원전 2333년에 육박하는 기원전 2000년까지 청동기 보급 시기가 올라가는 연구 성과를 근거로 건국 시기를 확정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가시면 장실장의 말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적극적으로 서술"은 사실로서 확실하게 서술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단정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송호정과 이형구같은 그야말로 대표적인 소고조론자들간의 대담을 가지고 이것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주장하시는데 송호정과 이형구의 주장이 무조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입니까? 이들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더 공식적이고 인정받는 주류 견해입니다.
그리고 자꾸 제가 알아들으실만큼 자세히 설명을 해드려도 자꾸 "단정"이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시는데 "~ 건국하였다고 한다"를 "건국하였다"로 한 것이 단정이 아니면 뭡니까? 그리고 귀하가 제시한 낙랑군 문제 역시 잘못된 주장입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이문제는 곧 차후에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29일 (화) 14:42 (KST)[답변]
다음은 낙랑군 문제에 있어서 귀하에 대한 반박입니다. 귀하는 부정하실지 모르겠지만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에서 한사군을 비롯한 낙랑군 문제는 아래와 같이 계속 일관적으로 부정하는 쪽으로 개정되어 왔습니다.
  1. 한은 고조선을 넘어뜨린 후 4군을 두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4군의 위치는 ...중략... 고조선의 옛 지역에는 낙랑군을, 그 남쪽 한강 이북 지역에는 진번군을, 그리고 원산만 일대에는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1976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었다.- 1982년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3.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려 하였으나,- 1990년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보시는 바와 같이 애초에는 4군이 식민지라고 명시하고 구체적 군현의 이름은 물론 그 구체적 위치까지 명시하다가 1982년도에는 4군의 이름만 적고 그 위치는 생략했고 1990년도에 이르러서는 아예 이름도 사라지고 거기에다가 "지배하려 하였으나(2012년 판은 "지배하고자 하였으나")"라고 하여 과연 설치가 확실히 됐는지조차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갈수록 한사군 한반도설, 낙랑군 평양설이 근거가 없음이 밝혀지고 이에 국사 교과서에 싣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판단하에 이뤄진 개정들입니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과 교육부 역사 담당 편수관을 지낸 윤종영씨가 지은 "국사 교과서 파동"이라는 책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해당 책에 보면 각 대학교의 교수들이 모여서 국사 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1986년에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단 한사군과 낙랑군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해당 책 116 페이지)
`한사군의 국내 위치를 인정해야 하는가
`낙랑군의 평양 설치를 인정해야 하는가(왕검성의 위치)
그래서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위촉된 교수들이 격렬한 토론을 거친 끝에 1986년 6월5일 국사 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확정 발표되었는데 한사군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해당 책 172 페이지)
`한군현에 대해서는 근래의 학문적 성과를 유의하여 서술하되 그것이 한국사의 주류가 아님을 명확히 한다.
제가 이 과정을 굳이 일일히 설명하는 것은 한사군과 낙랑군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의 토론 결과 국사 교과서에서 부인되는 방향으로 실린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정도면 국사 교과서에서 한사군이 부정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음은 귀하도 인정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앞서 귀하가 제시한 그 내용들은 왜 국사 교과서에 남아있느냐?(물론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다룰 가치가 없으므로 제외합니다.) 일단 아래의 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사군의 기술을 본문에서 삭제키로 했던 시안을 수정, 다시 본문에서 다루기로 한 것은 역시 한사군이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었음을 명확히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학계의 강력한 반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윤종영 저, "국사 교과서 파동" 해당 책 177 페이지

아시겠습니까? 애당초 한사군에 관련된 서술은 일절 모두 삭제하기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합의했다가 일부 학계의 반발로 몇구절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제시한 그내용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서술에서조차 그 어디서도 낙랑군=평양이라는 직접적인 문구는 당연히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사라졌어야할 잔재들이 마지못해 들어 있는 것으로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 평양설을 인정하는 증거로는 당연히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국사 교과서는 아예 한사군 자체에 엄청 부정적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귀하의 주장처럼 낙랑군 평양설이 아무런 이의가 없는 압도적 다수설입니까?--Lhrdrth (토론) 2014년 7월 29일 (화) 17:20 (KST)[답변]
1. 이 출처를 보시지요. 국사편찬위원회가 직접 심의한 것이 7종의 한국사 교과서입니다만. 교과서의 내용에서 국편위의 심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수정하라고 하달한 것이 바로 위 출처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들어 있는 것이 실상입니다. 금성교과서의 수정 사항은 기원전 2333년이 실제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아니라는 서술이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귀하 본인도 잘 알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2. 적어도 한국사에 있어서 국사 교과서는 국편위의 《한국사》신편과는 공신력 면에서 비교조차 불가능합니다. 1권 짜리 국사 교과서와 국편위에서 핵심 사업 중 하나로 수십 년에 걸쳐 편찬되는 《한국사》(전 52권)를 비교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국사 교과서를 만들고 그 검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직접 학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한국사》의 공식 서술에서조차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 가장 우호적으로 서술한 것이 구체적 정치체로 등장한 단계는 아니다라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편찬 연대를 말씀하셔봤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 역시 현재까지도 기원전 2333년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으니까요.
또한 송호정과 이형구같은 그야말로 대표적인 소고조론자들간의 대담을 가지고 이것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주장하시는데 송호정과 이형구의 주장이 무조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입니까? 이들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더 공식적이고 인정받는 주류 견해입니다.
3.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소고조선론자라는 허구의 집단을 설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적어도 학계 일반의 여러 반박 견해를 제시라도 했지요. 물론 국편위의 공식 견해 역시 전혀 다름은 위의 《한국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면 더더욱 확실하지지요.국편위에 지금 현재도 올라와 있는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질문자께서는 상당히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실 한국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답변자로서도 현재의 국사책을 볼 때마다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곤 했습니다. 자칫 모순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또한 오해의 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께서는 이 부분을 바로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의 이와 같은 기술은 현재 학계가 안고 있는 딜레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세계사적으로 볼 때 국가의 형성은 신석기 시대 이후 즉,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 청동기 시대는 BC 1000년을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은 아무리 빨라도 그 시기가 BC 1000년을 넘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신화에는 그 건국 연대가 BC 23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현재 학계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증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고, 또한 그 기록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고고학적 발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진전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며, 이 경우 청동기 시대의 상한은 더욱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고조선사와 관련하여 현재 학계가 안고 있는 하나의 큰 딜레마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사 교과서는 서술되었습니다.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국가가 형성되게 된다는 것과, BC 2333년의 고조선 건국설 모두를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가지 견해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십시오.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관련하여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라고 하여, 단지 단군신화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것을 단정짓지는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했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 실제 여부는 향후의 연구성과에 맡기겠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하는 여전히 국사 교과서, 그리고 학계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소수설 주장자를 제외하면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사실상 유일한 근거인 국사 교과서조차도 위에 써 있다시피 단정짓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귀하 혼자서 단정했다라고 주장해봤자 이를 지지하는 견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 인용문이 2007년 이전의 교과서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이라는 문장 자체가 사실 여부의 판단을 배제한 채 여기에 이렇게 써 있다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문에 대해서 하였다고 한다를 하였다로 바꾼다고 해서 조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여부를 갑자기 판가름 내리는 것 또한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송호정 교수의 말마따나 문법상으로 틀린 개정일 뿐입니다.
3. 귀하와 저의 기나긴 분쟁 중에 개입하셨던 분들은 귀하가 주장하는 교과서와 국편위의 《한국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공신력이 높은 자료인가에 대해서 이미 교과서가 아닌 국편위의 공식 견해를 선택한 바 있습니다. 관련 토론 참조(Jjw 님, 팝저씨 님의 견해) 일개 교과서와 솔직히 이미 수차례나 귀하와 분쟁을 했던 주제 - 교과서의 낙랑군 문제 - 가 여기서 또 언급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낙랑군과 관련해서 귀하가 교과서를 근거로 어떤 편집을 하건 그것은 명백한 반달 행위일 뿐입니다. 그나마 가능한 편집이라면 낙랑군#성격에 교과서가 이러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수준이겠지요.--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16:20 (KST)[답변]
귀하가 보여준 그 출처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자료 그 어디에서 "기원전 2333년이 실제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아니라는 서술이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입니까? 제가 아무리 금성출판사 관련 자료를 찾아봐도 관련해서 나오는 것은 귀하가 앞서 언급한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명확한 논거도 없으며, 특정 견해에 치우칠 우려가 있음. 현재의 문장은 기원전 7세기 전후 성립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임." 이부분인데 이부분은 제가 앞서 지적한대로 이것은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는 주제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귀하가 올려준 그 국편위 질문은 말입니다, 최소한 2001년 이전에 올라온 자료입니다. 그 질문 답변들이 책으로 묶여서 나온 것이 아래의 링크에서 보듯이 2001년입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314
최소한 2001년 이전에 올라온 자료를 가지고 2007년에 새롭게 반영된 자료를 논박하겠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앞서도 그렇고 지금 귀하가 반박 자료라고 올리는 것들이 죄다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것들입니다. 한번만 더 이런 식으로 토론에 임하신다면 부적절한 토론 태도로 제재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 서술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는 솔직히 귀하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은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8쪽

장 실장은 "이전 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밝히면서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최고 기원전 15세기로 잡았다"며 "이 탓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의 역사와 맞지 않아 배우는 학생들이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됐다고 적극적으로 서술되지 못한 이유는 이 시기에 청동기가 보급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성과가 충분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장 실장은 "우리가 만주 등의 유적들에 접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세워진 고조선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관련 연구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이번 교과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반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기원전 2000년쯤까지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앞서서도 제시된 그렇게 수정한 것에 대한 국편위의 입장입니다. 모두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건국시기가 그 주된 핵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설명해드리죠. 저것은 "청동기 보급 시기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시기에 미치지못해서 그동안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단정하지 못했는데 기원전 2333년에 육박하는 기원전 2000년까지 청동기 보급 시기가 올라가는 연구 성과를 근거로 건국 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확정했다"는 말입니다. 자 분명히 이런 근거 자료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시기도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하였다."다는 제 편집에 도대체 무슨 오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남겨주신 답변을 보니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서술됐다는 것은 이제 부인을 못하시는군요.그리고 같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편찬물인데 귀하의 입맛에 따라 "국사 교과서"는 믿을 수 없는데 "한국사"는 믿을 수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인지 저는 납득이 안갑니다. 국사교과서가 그 한국사보다 더 신간이므로 전자가 더 신빙성있는 국편위의 입장임이 순리아닙니까? 그리고 귀하가 링크한 토론에서 팝저씨님도 "국사편찬위원회는 국가가 세운, 한국사에 있어서는 가장 믿을만하고 권위있는 곳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국사 교과서도 바로 그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것입니다. 아마도 팝저씨님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팝저씨님의 논리대로라면 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낙랑군 문서에서 귀하의 주장처럼 낙랑군 평양설이 아무런 이의가 없는 압도적 다수설이라는 주장은 더이상은 통용될 수 없고 앞으로는 그에 적합한 수준의 수정 편집이 이뤄져야만 할 것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19:33 (KST)[답변]

위키백과는 인터넷 공개백과입니다. 따라서 신속한 최신 학설의 반영 또한 위키백과의 가장 큰 장점이자 이점입니다. 귀하는 지금 새로운 최신 학설의 반영을 명백히 방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2007년 개정된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하였습니다. 이는 위키백과의 원칙에도 어긋나고 발전에도 저해되는 행위입니다. 삼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19:53 (KST)[답변]

토론 중에 제가 언급되어 몇 말씀 남깁니다. 우선, 위키백과 내에서 검인정 이전의 국정교과서와 현재의 여러 가지 검인정 교과서 사이에 출처의 권위에 대한 우열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백:출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두고 출처의 우위를 따지는 논쟁은 소모적일 뿐 별다른 실익이 없습니다. 제 생각엔 교과서 원문에 “~임이 확실하다”등의 표현이 없다면 단정하였다는 용어보다는 설명하였다거나 서술하였다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 건국의 해로 보는 것은 모두 《고기》(古記)에 근거한 것입니다. 《고기》 자체는 현존하지 않고 이를 인용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이 전할 뿐입니다. 현재 국사교과서의 서술은 대체로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두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기사를 근거로 이를 서기로 환산하여 단군 조선의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출처를 막론하고 모두 동일한 사료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다른 사료가 없으니까요. 백과사전의 역사 서술에서는 되도록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출처와 근거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바, 현재로서는 삼국사기에 요임금 50년 단군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며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는 설명이 최선입니다. 이것을 특성 교과서가 단정하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백과사전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 Jjw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06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가 출판한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와 개별 출판사가 출판한 검정 사설 교과서는 분명히 전자가 더 명백한 신뢰성과 우위가 있습니다. 팝저씨님의 ""국사편찬위원회는 국가가 세운, 한국사에 있어서는 가장 믿을만하고 권위있는 곳입니다." 라는 의견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에 그렇게 내용이 개정되었으므로 추가된 부분입니다. 국사 교과서의 해당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가 무작정 건국 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한 것도 아니고 해당 토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청동기 발굴 연대의 최신의 고고학적 성과를 반영한 근거가 분명한 개정입니다.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제 개인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개정 자료를 가지고 추가한, 근거가 분명한 편집임을 알려드립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15 (KST)[답변]
현행 교육과정에서 국사 교과서는 모두 검인정 교과서이고 이는 모두 동일하게 동등한 지위를 갖습니다. 이전의 국정 교과서가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검인정이든 국정이든 사료가 하나 뿐이니 이를 어찌 해석하느냐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사료에 따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 학자마다 이에 대한 해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임금 자체가 신화적 인물인지 실존 인물인지가 논란이 있는 마당에 요 임금 즉위 50년이란 사료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서로 해석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좀 더 덧붙이면 에드워드 핼릿 카가 그의 저서에서 말하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며 이 대화는 일률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하나의 권위만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현대 역사학 일반에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당장에 고조선기의 국가 기원에 대해서는 읍락국가설, 군장국가설 등 이론이 있고, 고조선의 강역과 역사에 대해서도 사료 자체가 매우 부실하여 다수의 이견이 존재합니다. 또한 최신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요동반도에는 이미 신석기 시대에 복합적 문화가 존재하였습니다. 단군에 관한 기사에 거울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하면 단군은 명백히 청동기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신석기 문화와 청도기 문화의 이전에 대한 논의도 복잡하게 진행중입니다. 하나의 것만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주세요. 제 의견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나도 오해하는 것 없으니 제 의견을 부디 경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Jjw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26 (KST)[답변]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각 출판사별로 발간하는 검정 사설 국사 교과서들보다는 우리나라의 여러 학자들이 모여서 연구하여 국사를 편찬하는, 국가 공식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는 공식 국찬 국사 교과서가 당연히 주류 이론이고 준거가 됨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논쟁이 되는 부분은 제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200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신 고고학 발굴 성과를 근거로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했으므로 저는 그러한 최신 학설을 반영하여 국사 교과서가 그렇게 개정되었다는 부분을 거기에 적합하게 편집한 것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36 (KST)[답변]
1. 수없이 말씀드렸다시피, 교과서 그 어디에도 확정했다거나 단정했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Lhrdrth 사용자가 가져온 장득진 실장의 발언을 귀하가 혼자 해석한 내용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까지 들어 보여드렸습니다. 현재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귀하입니다.
2. 역시 셀수도 없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물론이고 송호정, 이형구를 비롯한 수많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그 누구도 기원전 2333년을 실제 건국 연도라고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물론 국사교과서의 내용도 위에 인용한 국편위 질문답변란의 답변처럼 단지 단군신화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문장을 하였다고 한다에서 하였다라고 바꾼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귀하 혼자서 달라졌다고 주장해봤자 그걸 입증하지 못하는 한 아무 쓸모 없는 일입니다. 즉, 단정하였다는 말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3.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서술됐다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죠. 하지만 그 방향은 귀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으로 인해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이 국민 교육에 부정적이라고 판단, 그 사실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결단코 없었다고 서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귀하 혼자서 없다고 주장해봤자 교과서 본문 어디에도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아니면 귀하께서 찾아와 보시죠. 교과서 어디에 낙랑군의 위치가 다른 곳이라고 써 있는지.
ps. 낙랑군 이야기를 대체 왜 고조선 문서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추후 낙랑군 관련 내용이 필요하다면 토론:낙랑군을 이용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29 (KST)[답변]
저는 200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신 고고학 발굴 성과를 근거로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했으므로 그렇게 편집했고 이 부분을 그렇게 Xakyntos 귀하에게 지금까지 설명했는데도 귀하께서 제가 억지를 부린다식으로 주장하시는 대해서는 정말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가 그렇게 판단하는데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이 뭐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않는다는 것입니까? 국사편찬위원회는 엄연히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로 이뤄진 기관입니다. 그리고 귀하가 올린 그 국편위 질문은 최소한 2001년 이전의 국편위 입장이고 2007년에 국편위가 입장을 변경한 부분이라고 설명드렸는데 또 이렇게 언급하시니 도대체가 제 답변을 제대로 읽기는 하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 성향으로 한사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제가 자료를 제시한대로 여러 학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거기에 대한 준거안을 마련해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랑군 문제는 말씀하신대로 해당 문서에서 토론을 하도록 하지요. 낙랑군 문서 보호가 풀릴 즈음에 여기서 토론된 내용을 옮기고 해당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낙랑군 토론 문서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0:47 (KST)[답변]
1. 2007년에 편찬된 국사 교과서가 해당 내용을 단정했다는 근거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현재 상황인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귀하가 가져온 근거라고는 장득진 실장의 발언 뿐이고, 그 발언조차도 귀하의 해석과 달리 볼 수 있다는 근거를 저는 이미 제시했습니다. 물론 교과서가 단정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 또한 《한국사》, 국편위의 Q&A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를 든 바 있습니다. 물론 교과서 본문 어디에도 단정했다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인데 대체 누가 억지를 쓰고 있는 겁니까? 어이가 없는 것은 오히려 저입니다만.
2. 저는 적어도 바로 그 국편위가 국사 교과서를 개정한 2006년 당시 송호정을 비롯한 한국사학계의 반대 목소리를 근거로 들었습니다만? 국사 교과서가 잘못된 방향으로 서술되었다는 학계 일반의 반대 목소리가 명백한데 대체 국사 교과서가 한국사학계의 정설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 점부터 해명해 보시지요.--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3:21 (KST)[답변]

근거는 위에서 질리도록 들어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근거를 가져오라고 하시면 도대체 저보고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송호정만 한국 사학계고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 사학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송호정이 주류인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류인지. 뭘 해명을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도 못믿겠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국편위의 Q&A 예를 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2번이나 지적했는데 또 그걸 근거라고 내세우니 도대체 정상적인 토론의 의지 자체가 있으신지 솔직히 의문이 갑니다. 그리고 귀하와 그동안 숱한 논쟁을 했지만 일리가 있고 타당하다면 제가 양보도 서슴치않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귀하의 의견이 명백히 틀렸습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타협의 여지는 없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0일 (수) 23:42 (KST)[답변]

귀하가 질리도록 가져왔다는 근거라고는 장득진 실장 딱 한 사람의 발언 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 대체 무슨 근거를 가져오셨습니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한 가지 말고 근거라고는 없습니다. 다른 근거를 제발 좀 보여라도 주십시오.
반면 저는 적어도 송호정, 이형구의 대담(경향신문 기사)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학자들이 한 반박(한겨레 기사), 국편위의 핵심 사업으로서 교과서 따위와는 권위 면에서 비교조차 불가능한 《한국사》신편, 국편위의 Q&A, 2013년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의 내용까지 수많은 자료를 제시했습니다. 지금 현재 국편위의 의견 자체가 청동기 시대 편년을 기원전 2000년 경까지 끌어올렸다는 것 뿐입니다. 기원전 2000년은 기원전 2333년보다 300년 뒤입니다. 위에 인용한 국편위 Q&A의 상황과 대체 무슨 차이입니까? 연대가 800년 정도 앞당겨졌을 뿐 여전히 300년이나 모자랍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교과서가 2333년을 공식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자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귀하는 국편위가 기원전 2333년을 공식적인 건국 연도로 확정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십시오. 현재 귀하가 제시한 그거라고는 장득진 실장의 발언 하나 밖에 없으며, 그 발언조차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많은 실례를 들어 설명해드렸습니다. 근거라고는 하나도 대지 못하면서 정상적인 반박에 억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하입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귀하는 토론을 할 자격도 없는 겁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09:56 (KST)[답변]
지난 토론들을 살펴보니 두 사용자 분 모두 오래 전부터 이 문제로 토론을 하였고 사용자 관리와 문서 관리 요청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두 분 모두 다른 사용자들의 의견을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당장에는 Lhrdrth님께서 과거 국정으로 사용하였던 국사 교과서가 단군 조선의 건국시기를 단정하였다고 주장하시고 이 문서 본문에 그렇게 편집하신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두 분 사이의 오랜 토론과 이 토론란에서 제출된 모든 자료를 살펴보아도 국정교과서가 그렇게 단정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상고시대의 역사에 있어서 사료가 불충분할 경우 그것이 무엇이건 단정한다고 판단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위에 국사편찬위의 답변도 결코 단정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Lhrdrth 님께 제안드리고 싶은 바는 상대가 지적하는 합리적 부분에 대해서는 수긍을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국정교과서를 그냥 출처로 사용하느니 다른 여러 출처를 병행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요임금 즉위 50년에 단군이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근거로 고조선 건국 년도를 산정하고 있다. ”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동의하신다면 출처와 함께 제안드린 바와 같이 문서의 내용을 편집해 넣겠습니다. 부디 이런 지엽적인 것으로 격한 토론을 계속하지 마시고 문서 자체가 부실한 부분에 눈을 돌려 주시길 바랍니다. -- Jjw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14:13 (KST)[답변]
Xakyntos 귀하의 지금까지의 주장의 요지는 2007년 국사 교과서 고조선 건국 시기 개정 부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건국시기를 단정한 것이 아니고 고조선이 건국된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인데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는지조차 불명확한데 어떻게 세워지지도 않은 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하고 한나라와 전쟁을 합니까? 해당 개정의 요지는 당연한 말이지만 고조선은 당연히 실존한 나라였고 다만 문제되는 부분이 과연 기록대로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것이 진짜였는가 아니였는가 하는 문제인데 최근의 청동기 발굴 연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것을 확실하게 단정했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 편집이 틀린 부분이 뭐가 있습니까? 아래 그렇게 수정한 국편위의 입장을 다시한번 올려드리니 자세히 살펴보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직접 수정한 국편위의 설명만큼 확실한 근거가 도대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자꾸 이런 명백한 근거를 두고 일방적 주장으로 근거가 없다고 하시는데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이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은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8쪽

장 실장은 "이전 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밝히면서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최고 기원전 15세기로 잡았다"며 "이 탓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의 역사와 맞지 않아 배우는 학생들이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됐다고 적극적으로 서술되지 못한 이유는 이 시기에 청동기가 보급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성과가 충분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장 실장은 "우리가 만주 등의 유적들에 접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세워진 고조선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관련 연구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이번 교과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반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기원전 2000년쯤까지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Lhrdrth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18:49 (KST)[답변]
그리고 Jjw님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신의 연구 성과로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한 부분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성과로서 고조선 문서나 토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언론에서도 핫이슈로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사안입니댜. 위키백과라는 공개백과의 특성상 이런 중요한 최신 학술적 성과의 반영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국사교과서가 고조선 건국시기와 관련하여 2007년에 개정된 부분은 삭제될 수 없는 내용이고 그부분은 저와 사용자 Xakyntos와의 편집분쟁 이전에도 이미 올라와있던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을 삭제하자는 의견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죄송합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18:57 (KST)[답변]

제가 또 위에 올려드린 국사 교과서를 그렇게 개편한 국편위 장득진 실장의 의견을 보십시오.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이라고 했습니다. Xakyntos 귀하의 주장대로 건국 사실이나 주체가 아니라 분명히 건국 시기 즉 고조선이 건국됐다는, 기록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에 관련된 문제란 말입니다. 두번째도 "이 탓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의 역사와 맞지 않아 배우는 학생들이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라고 하여 분명히 기원전 2333년 건국 시기 확정과 관련된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한반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기원전 2000년쯤까지 앞당겼으므로 그런 연구 성과에 맞춰서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확정했다는 설명입니다. 저기 어디에 귀하의 주장처럼 건국 사실이나 주체를 단정했다는 말이 나옵니까? 귀하가 올린 대담 기사에서도 이형구는 " 기원전 2333년의 선입견에 맞춰 청동기 상한선도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간 게 아니냐고 하는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렸는데도 이해를 못하시고 계속 근거가 없다고 하면 저로서는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19:23 (KST)[답변]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관련하여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라고 하여, 단지 단군신화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것을 단정짓지는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건국 사실이나 주체 문제는 별개로 친지가 오래인데 말입니다. 지금 논의는 모두 건국 연대만 놓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귀하의 말씀은 전혀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국편위 Q&A의 저 한 문장으로 끝나는 문제입니다. 교과서는 하늘이 두쪽이 나도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 내용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단정했다는 근거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이미 다른 여러 근거와 해석을 통해 장득진 실장의 발언은 단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위에 Jjw 님께서도 귀하의 해석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신 바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귀하가 가져온 증거가 틀렸으니 다른 증거를 가져오라는 말입니다. 근거라고는 하나 뿐인데 그 하나의 근거조차도 틀렸다는 반박이 나왔으면, 다른 근거를 가져오던가 근거가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자신의 해석만을 근거로 억지 주장을 펼치는 것을 가리켜 독자연구라고 합니다. 위키백과에서 금지되어 있는 행위죠. 확실한 근거를 들어 증명하지 않는 한 지금 귀하의 행동은 차단 대상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19:35 (KST)[답변]
제가 도대체 몇번이나 지적해드렸습니까? 귀하가 올린 그 국편위 Q&A는 2001년에 올라온 것입니다. 최소한 2001년 이전에 올라온 자료를 근거랍시고 2007년에 새롭게 국편위가 입장을 변경한 부분을 반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제가 벌써 이 부분을 몇번이나 지적했습니까? 한번만 더 이걸 근거랍시고 인용하면 고의적인 토론 훼방으로 제재를 요청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알아들기 쉽게 풀어드릴까요? 귀하가 지금 근거로 든 국편위 Q&A는 최소한 2001년 이전의 것이고 이후 2007년에 장득진 실장의 말처럼 국편위는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고조선 건국 시기 이 부분이 안보이십니까? 귀하의 이런 행위는 엄연히 2007년에 개정판이 나온 책을 가지고 2001년 이전에 나온 판을 보고 2001년판이 2007년판보다 더 최신판이라고 우기는 행위입니다. 우습지않습니까?
그리고 Jjw님께서도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근거로 고조선 건국 년도를 산정하고 있다."라고 하셔서 기원전 2333년 문제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하가 편집분쟁을 유발한 해당 편집을 볼까요?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고 하여 건국 시기 즉, 기원전 2333년을 쏙 빼먹었습니다. 왜 엄연히 국사 교과서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했는데 그 부분을 생략합니까? 이거야말로 명백한 고의적인 사실왜곡아닙니까? 귀하의 이런 편집태도야말로 차단 대상임을 명백히 인지하십시오. 그리고 자꾸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제가 벌써 몇번이나 국편위 의견으로 입증을 했습니까? 근거없다고만 하지말고 제가 앞서 든 국편위 입장으로 내세운 논리에 대해서 왜 근거가 없는지 구체적으로 반박이나 한번 해보십시오.--Lhrdrth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21:01 (KST)[답변]

또한 지금 당장에는 Lhrdrth님께서 과거 국정으로 사용하였던 국사 교과서가 단군 조선의 건국시기를 단정하였다고 주장하시고 이 문서 본문에 그렇게 편집하신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두 분 사이의 오랜 토론과 이 토론란에서 제출된 모든 자료를 살펴보아도 국정교과서가 그렇게 단정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문장은 읽지 못하신 겁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건국 연도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기록으로서의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귀하가 저 기원전 2333년이 실제 건국 연도라고 국사 교과서가 단정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2007년에 국사 교과서는 청동기 시대의 편년을 상향 조정했을 뿐입니다. 그나마 그렇게 상향 조정한 편년도 기원전 2000년 경입니다. 기원전 2333년보다 300년이나 모자라요. 애초에 편년 자체가 맞지 않는데 대체 누가 어떻게 기원전 2333년을 단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Jjw 님도, 저도 이 토론에 제시된 모든 자료에서 교과서가 건국시기를 단정했다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근거가 그렇다는 Jjw 님의 말씀 안보이십니까? 귀하 혼자 연도가 다르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001년의 답변과 2007년 국사 교과서의 입장에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단지 편년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보는 것이 변했을 뿐,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2001년의 답변만으로도 귀하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충분합니다.
귀하는 국편위 의견으로 입증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다. 귀하 혼자 국편위 실장의 발언을 단정이라 해석하고 있을 뿐이죠. 제3자인 Jjw 님도 귀하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건만, 귀하 혼자 “내 생각에 국편위 실장은 단정이라 말했다”라고 해봤자 그건 독자연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국사교과서가 고조선 건국 연대를 단정했다라는 근거를 가져오십시오. 현재까지 모든 근거는 귀하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7월 31일 (목) 22:20 (KST)[답변]
우선, 현재의 검인정 국사 교과서의 검정 역시 국사편찬위원회가 행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검인정 국사 교과서의 기술 내용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것과 아주 다를 수 있다는 해석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 베이스에서 단군 조선의 건국년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산정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기이1 고조선〉을 출처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군 조선의 건국년도를 서술하고 있는 사료는 이게 유일하거든요. 그러니 그것이 국정이 되었든 검인정이 되었든 원 사료는 모두 같습니다. 이것은 앞서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Xakyntos님의 말과 같이 “단정하고 있다”는 것은 서술에 대한 평가 또는 해석이지 서술 자체를 인용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한 번 이 문제는 이쯤에서 정리하기를 희망합니다. 정히 두 분과 제가 토론을 마무리짓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만, 제 판단엔 백:불보듯 이거든요. -- Jjw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0:18 (KST)[답변]
저는 도대체 이문제로 이렇게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지는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07년 개정 국사 교과서는 분명히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이라고 서술했습니다. Xakyntos 사용자는 연도를 뒤에 괄호로 표시한 부분을 문제삼는데 원래 국사 교과서가 연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라는 서술은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와 동치어입니다. 이렇게 국사 교과서에 명백히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왜 이문제를 자꾸 트집잡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Xakyntos 사용자의 말대로 국사 교과서가 기원전 2333년 건국을 신화라고해서 인정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기원전 2333년 부분이 보시다시피 빠져야하지만 엄연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 편집에 정 불만이면 고조선 문서 보호가 풀리면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그대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고 수정할테니 Xakyntos 사용자는 더이상은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교과서의 서술 그대로 표시하는 것도 문제삼는다면 귀하와 더이상의 토론의 여지는 없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3:23 (KST)[답변]
귀하야말로 논점을 계속 흐리지 마십시오. 현재 논점은 귀하 혼자 주장하고 있는 단정했다는 문장 뿐입니다. 연도가 괄호에 있건 말건 그것은 현재 논점에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토론의 첫머리에 잠시 언급되었을 뿐,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도 없는 것을 본인이 불리한 것 같으니까 뒤늦게 끄집어 내는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국사교과서 어디에도 “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는 문구는 없습니다. 그것은 귀하 혼자만의 해석일 뿐이라고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단정이건 확정이건 국사 교과서는 그런 것을 한 적이 없다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귀하는 지금 위증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편집을 하려면 하십시오. 그럼 귀하는 차단될테니까요.--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3:32 (KST)[답변]
"~하였다고 한다"를 "하였다"라고 바꿨는데 이게 단정적, 확정적 서술 아닙니까? 그리고 국사 교과서가 분명히 기원전 2333년 부분을 넣어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분명히 적고 있는데 무슨 딴 말씀입니까? 위증이라니요? 정말 너무도 어이가 없습니다. 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의 내용도 거부한다면 귀하야말로 차단 대상입니다. 얼마든지 차단 신청해보십시오. 귀하는 분란조장에 의한 차단 남발의 이유로 차단 대상이 될 것이니까요.--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3:51 (KST)[답변]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

위증이지요. 위증이고 말고요. 국사교과서의 문장은 위 인용문에서 끝이니까요. 귀하는 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직접 보십시오. 바로 위 교과서 어디에 “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는 말이 있습니까? 귀하는 또다시 상대 토론자가 명백하게 지적한 논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토론이 제대로 성립될 수 없도록 방해했습니다. 방해 편집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합니다. 경고합니다. 또 다시 이렇게 토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논점을 흐리면 합당한 징계를 요청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3:58 (KST)[답변]
정말 도대체 왜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거듭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하였다고 한다"를 "하였다"라고 바꿨는데 이게 단정적, 확정적 서술 아닙니까? 그리고 국사 교과서가 분명히 기원전 2333년 부분을 넣어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분명히 적고 있는데 무슨 딴 말씀입니까? 여러번 지적했듯이 근거로서 가치가 없는 자료를 거듭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시하는 등 지적한 논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토론이 제대로 성립될 수 없도록 방해한 쪽은 엄연히 귀하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의 내용도 거부한다면 귀하야말로 차단 대상입니다. 얼마든지 차단 신청해보십시오. 귀하는 분란조장에 의한 차단 남발의 이유로 차단 대상이 될 것이니까요.--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4:08 (KST)[답변]
이미 위에서 수도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해당 서술을 가지고 단정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입니다. 귀하는 이번에도 논점 이탈을 하며 방해 편집을 하였습니다. 또한 교과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용을 교과서에 존재한다고 근거로 제시하면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징계를 요청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00 (KST)[답변]
"~하였다고 한다"를 "하였다"라고 바꿨는데 이게 단정적, 확정적 서술이 아니라고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신문 기사 등에서도 "공식 편입"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방해 편집이라고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차단 신청까지 하다니 정말 할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귀하를 명백히 허위 사실에 의한 불순한 목적의, 즉 분란 조장을 목적으로 하는 차단 남발 행위로 차단을 요청하였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30 (KST)[답변]

논문이나 학술 단행본도 아니고 "교과서"가 합당한 근거로 제시될 수 있나요? 그것도 대학 교과서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5:33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최고의 공식 국가 국사 연구 기관에서 편찬한 국사 교과서보다 한국사 해석에 있어서 더한 신뢰있는 자료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논의되는 문제는 2007년에 고조선 건국시기에 대하여 국사 교과서가 개정된 부분을 싣는 문제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41 (KST)[답변]
단정적, 확정적인 서술이라 보기 어렵다는 견해는 저뿐만 아니라 Jjw 님께서도 공통된 의견인데 말입니다. 왜 아니인지에 대해서 여러 근거와 해석을 통해 제시해 드렸고, 해당 근거들로 볼 때 Jjw 님께서도 귀하의 서술이 문제가 있다고까지 하는데 이를 끝까지 부인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명백한 방해 편집에 해당합니다. 합당한 근거를 무시하고 근거와 논리도 없이 자신의 주장만 강요하며 공동체의 합의 과정을 모독하는 행동이니까요. 엄연한 징계 사유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42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최고의 공식 국가 국사 연구 기관에서 편찬한 국사 교과서보다 한국사 해석에 있어서 더한 신뢰있는 자료는 없다고 보는 것”은 귀하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보다 몇 배는 더 공신력있는 자료를 제시했고, 제3자인 Jjw님과 이번에 샐러맨더 님께서도 의문을 표하는데 귀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단정을 하십니까?
ps. 그렇게 귀하가 신뢰하시는 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이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귀하가 과거 주장하던 사항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인데, 이건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47 (KST)[답변]
설사 단정했다고 해도, 그것은 "삼국유사에서 기원전 2333년이라고 했다"는 것을 단정한 것이지,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 는 것을 단정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삼국유사는 역사책도 아니고 설화집이에요. 그것은 "삼국유사의 서술"에 관한 정보는 될 수 있어도, "고조선이라는 실존했던 정치체의 건국 시기"에 관한 정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5:48 (KST)[답변]
그리고 일연이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아서 "기원전 2333년" 이라는 연도를 배정했겠습니까. 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 단군이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즉위했다는 기록을 역산해서 짜맞춘 결과물입니다. 애초에 신화의 영역이지, 역사가 아니라고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5:50 (KST)[답변]
또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라는 물건은 애초에 목적이 "역사적 사실의 전달"보다 "국민 정체성 형성"에 그 기능의 방점이 찍힌 물건입니다만, 그 얘기까지 하는 건 지나치게 삼천포로 새는 것 같으니 그점은 언급만 해두겠습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5:53 (KST)[답변]
Salamander724님께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토론의 논지를 잘못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청동기 보급 연대의 1000년 상승이라는 최신 고고학적 성과 발굴이라는 명백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국사 교과서가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를 2007년 개정으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단정적으로 변경하여 서술한 부분을 싣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토론 내용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56 (KST)[답변]
아니오.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셀수도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해당 서술을 단정했다라고 해석할 수 없다고. 수많은 근거를 들어 드렸고, Jjw 님께서도 직접적으로 귀하의 해석이 무리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지금 논지를 고의로 흐리고 있는 것은 귀하입니다. 명백한 방해 편집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5:59 (KST)[답변]
Xakyntos 사용자는 앞서도 지적했듯이 의도적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부분을 생략한 편집을 강행하여 편집 분쟁을 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 혼자만이 아니고 Aubelumiere님도 함께 지적한 문제입니다. 저 혼자만이 지적한 문제가 아닙니다. 애당초 "기원전 2333년"이라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지만 않았다면 토론이 이렇게 길어지지도 않았을 문제입니다. 국사 교과서에 분명히 실려있는데도 이 부분을 계속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방해 편집은 바로 귀하가 행하고 있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6:19 (KST)[답변]
그리고 "단정" 부분에 대해서는 하도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Jjw 님께서도 중재안을 제안해주셔서 저는 "단정"이라는 표현 대신에 분명히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그대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는 객관적인 변경안을 제시했는데도 Xakyntos 사용자는 거부했습니다. 도대체 방해편집은 누가 하고 있는 것입니까? 기원전 2333년이라는 부분을 삭제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애당초 Xakyntos 사용자도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고 표시한 부분을 그대로 수용하여 변경안을 제시했는데도 거부하니 도대체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겠습니까?--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6:26 (KST)[답변]
또다시 논점을 회피하는 방해 편집을 하셨습니다. 이미 연도 표기 문제는 이 토론의 시작 단계부터 논점에서 제외되었다고 바로 위에서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토론 상대방이 명확하게 지적하고 명시한 사실을 이렇게 계속 무시하고 논점과 관계 없는 것만 공격하는 것이 방해 편집이 아니면 무엇이 방해 편집입니까? 또한 귀하는 Jjw님의 중재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본인의 주장에 따른 허구의 서술을 하고 있다고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는 문장이 교과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귀하는 해당 문장을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그대로라고 말하였는데, 국사 교과서에는 저런 표기 따위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수없이 지적했건만, 귀하는 계속해서 토론 상대방의 논점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방해 편집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6:48 (KST)[답변]

끝도 없는 지루하고 소모적인 토론에 지치기도 하고 국사 교과서의 서술 그대로 표현해서 저는 아래와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확정적으로 서술이라는 부분은 Xakyntos 사용자도 그렇게 이미 표시한 부분이니 이의가 없으시리라 봅니다. 이 변경안마저도 거부한다면 정말이지 귀하와는 그 어떠한 합의의 여지도 없음을 밝혀드리는 바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6:53 (KST)[답변]

샐러맨더입니다. 학교 구내 서점의 컴퓨터로 의견 씁니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삼국유사를 근거로 하여 고조선의 건국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했다고 한들, 그것을 액면 그대로 위키백과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사료(애초에 교과서가 무슨 사료씩이나 되겠습니까마는) 해석의 기본은 교차검증입니다. "교과서에 아무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은 쓸만한 정보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개 이야기는 이러저러하여 참 또는 거짓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도는 되어야 쓸만한 정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교과서에 그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 이야기 자체의 진위를 생각해 보는 것이 백과사전의 컨텐츠 기여를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숫자는 신화의 영역입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자생적 신화조차도 아닙니다. 이것은 고려 ~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다수의 저자들(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등)에 의해, 중국의 신화인 요임금과 끼워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02 (KST)[답변]
삼국유사를 근거로 하여 고조선의 건국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했다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 기사에서도 보듯이 청동기 보급 연대의 1000년 상승이라는 최신 고고학적 성과 발굴이라는 명백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내용을 변경한 것입니다. 말씀하신 신화적 영역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입니다.
http://news.donga.com/3/all/20070223/8410706/1
그리고 지금 주된 논제는 바로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07년 고조선 건국에 대한 표현이 개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삼국유사가 신화다, 고조선이 신화다라는 주제가 아닙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09 (KST)[답변]
논문도 아니고 신문기사 가지고 와서 아전인수 하시네요. 심지어 그 신문기사조차도 "기원전 2333년이 맞다"는 얘기만 하고 있는 기사가 아닙니다.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 “고조선 편입 문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면서 “위만 조선이 과연 정치적 실체로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실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나를 생각하면 상당히 회의적”이라는 한국교원대와 서울대 교수들의 코멘트는 싹 빼놓으셨군요?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18 (KST)[답변]
기원전 2333년이요? 그리고 출처가 한국사 교과서라.... 삼국유사는 설화집입니다.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이런걸 믿으라는 말씀인가요? 이게 역사입니까? 신화입니까? 미국의 한국사 책에서는 이러한 단군 조선 시대를 부정합니다. 한국사 5000년이 아니고 한국사 2000년으로 불러야 한다고요. 교차검증도 불가능하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신뢰하기 매우 힘듭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1일 (금) 17:14 (KST)[답변]
애초에 기원전 2333년라는 숫자 자체가 신화의 인물인 요임금의 즉위년을 근거로 한 역사서가 아닌 설화집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근거로 하여 서거정이 동국통감에서 억지로 끼워맞춰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숫자가 무의미하다는 걸 공공연히 얘기하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국민 감정을 눈치봐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국사 교과서는 교과서 이전에 프로파간다 도구니까요(개천절 날짜인 10월 3일도 마찬가지죠. 근거가 무려 대종교 경전입니다).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22 (KST)[답변]
신문기사가 아니라 아래와 같은 국사 편찬 위원회의 설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은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8쪽

장 실장은 "이전 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밝히면서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최고 기원전 15세기로 잡았다"며 "이 탓에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의 역사와 맞지 않아 배우는 학생들이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됐다고 적극적으로 서술되지 못한 이유는 이 시기에 청동기가 보급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성과가 충분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장 실장은 "우리가 만주 등의 유적들에 접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세워진 고조선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관련 연구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이번 교과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반도 청동기 보급시기를 기원전 2000년쯤까지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주된 논제는 바로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국사 교과서에서 2007년 고조선 건국에 대한 표현이 개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삼국유사가 신화다, 고조선이 신화다라는 주제가 아닙니다. 어쨌든 3분이나 저의 의견에 반대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저로서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고조선 건국 문제에 대한 해당 국사 교과서 변경 표현에 대한 중재안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26 (KST)[답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래와 같은 변경안을 제시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32 (KST)[답변]
3명이 아니라 4명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건국 시기도 기원전 2333년으로 단정하였다"라는 서술은 전형적인 호도 서술입니다. BC 2333이라는 숫자가 신화에 의거한 것임은 누차 말씀드렸고, 이것을 "단정하였다"는 둥 하는 것은 마치 "성경에 따르면 지구 나이가 4000년"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아전인수입니다. 그리고 청동기 유적 발굴 결과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해석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설사 합의에 이른다 하더라도 역사서 독해도 아니고 유물 발굴을 통해 BC 2333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것이 주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계시는데, 반박을 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33 (KST)[답변]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과서에 이렇게 나왔다" 는 것은 백과사전에 실릴 만한 영양가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교과서에 나왔다는 "이렇게" 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져야죠. BC 2333이라는 숫자는 애초에 엉터리로 도출된 숫자입니다.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35 (KST)[답변]
하나 더 주장하죠. 미국에서 한국사를 다룬 책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Micheal J. Seth가 쓴 The History of Korea라는 책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How Old is Korea? The question cannot be answered because it supposes that the modern concept of Korea, of a nation of people with a common heritage and a common destiny living as an autonomous unit within a global community of nations can be connected back in time in linear fashion.
그럼 한국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은 정해져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상은 공동의 문화와 공동의 운명체를 누리며 지구촌의 틀 안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한 한국이란 나라의 현대적 개념을 오래전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왔다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말이 좀 엇나갑니다만 확실한 것은 과연 기원전 2333년에 현대에나 구성될 수 있는 그런 국가적 체계를 완성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기록도 미진하고, 요라는 인물도 일단 반실존, 반허구로 모아지고 있는 상황에다가 하다못해 기원전 660년에 일본을 세웠다는 진무 천황도 허구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학자들도 이렇게 고조선의 존립 날짜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이걸 굳이 그대로 믿고 쓰기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여기 사람들은 고조선이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나라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고조선의 존립 날짜가 신뢰가 가능한가 이걸 묻고 있는겁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1일 (금) 17:46 (KST)[답변]

그렇다면 교과서 개정 문제에 대한 편집을 고조선 토론 문서에서 아예 삭제하자는 이야기이신가요? 이 문제는 Xakyntos 사용자와의 편집 분쟁이전에도 이미 실려있었던 문제이고 토론 중에 아예 이 부분을 삭제하자는 것은 샐러맨더 귀하가 처음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결단으로 교과서 개정으로 고조선 건국에 대한 일련의 서술 방식 변경이 있었던 부분은 분명히 실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데요? 그리고 4분이나 저의 의견에 반대하므로 저로서는 그점을 존중하여 다시 확실히 변경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의견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예 이부분을 삭제하자는 것은 좀 무리한 주장같습니다만? 완전히 삭제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47 (KST)[답변]

어려울 것 없습니다." 삼국유사 등에서의 기록을 따라 기원전 2333년 10월 3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대한민국에선 개천절로 쇠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라는 식으로 정하면 될것입니다. 어쨌든 일본의 건국기념일 예도 있고 하니 아예 지울 수는 없습니다만 공식적으로 고조선의 존망 시기를 논하자면 ? ~ 기원전 108년이 맞다고 봅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1일 (금) 17:49 (KST)[답변]
더 나아가서 BC 2333이 왜 엉터리 숫자인지 서술해 주면 더 좋겠지요.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51 (KST)[답변]
저와 이렇게 토론을 벌인 Xakyntos 사용자도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렇게 편집을 했자 삭제하자고까지는 주장하지 않은 사항인데 아예 그냥 삭제하자는 주장을 하시는 분까지 나오니 저로서는 정말로 심히 당황스럽네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사항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제가 처음 편집한 것도 아닙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53 (KST)[답변]
제가 언제 삭제하자고 했나요. BC 2333이라는 숫자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라고 했을 뿐입니다. "BC 2333이 교과서에 실려 있다~" 는 건 백과사전에 서술될 가치가 없는 정보이지만, "BC 2333은 이러저러해서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는 서술은 가치가 있는 정보겠죠. 왜 남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고 그러세요?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7:56 (KST)[답변]

저로서는 해당 교과서 개정 문제에 대한 언급을 아예 삭제하자는 의견으로 보여서 드린 말씀입니다. 본의가 그렇지않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렇다면 해당 교과서 개정 문제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의견은 이미 위에서 올려드렸고 주된 논쟁의 상대인 Xakyntos 사용자는 위에서 말씀드렷듯이 아래와 같이 편집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 --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00 (KST)[답변]

1.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는 것이 곧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2. 설사 국가가 그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기원전 2333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배정될 이유는 없고, 3. 이러나저러나 BC 2333이라는 숫자의 진위여부는 말하지 않은 채 "교과서에서 BC 2333이라더라~" 라고만 써 놓은 귀하의 편집 내용은 호도 편집입니다.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03 (KST)[답변]
위의 내용은 제 의견이 아니고 저와 반론중인 Xakyntos 사용자의 의견이라니까요? 그리고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는 것이 곧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주류 학설입니다. 그러니까 귀하께서는 국사 교과서 서술 부분을 어떻게 변경하는 것이 좋은지 일단 그 중재안을 제시해주십시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08 (KST)[답변]
주류 학계에서는 BC 2333을 오히려 부정합니다. 은근슬쩍 주객을 전도시키지 마세요. 61.75.1.138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10 (KST)[답변]
셀레맨더 귀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신문기사 가지고 와서 아전인수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슈가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 신문기사를 링크한 것입니다. 또한 저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이 그랬다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주객을 전도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역사에 있어서 귀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올린 편집 내용인지도 구분 못하고 일방적인 주장으로 편집 호도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상당히 불쾌합니다. 앞으로는 토론시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18 (KST)[답변]

퇴근하는 길이라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고조선 문서 본문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사 교과서에 이러이러하게 실렸다는 내용이 서술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과서의 언급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 샐러맨더 님의 말씀처럼,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본문 상단에 중요도를 가지고 실릴 가치가 없는 내용으로, 뒷부분 연도 관련 내용이나 기타 소소한 항목으로나 서술될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13 (KST)[답변]

이 답변은 셀러맨더 귀하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있어서의 국사편찬위원회의 견해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어쨌든 다시 말씀드려서 귀하는 저와 Xakyntos 사용자의 편집 내용 중 어떤 쪽에 찬성하느냐? 둘다에도 찬성하지 못한다면 귀하는 과연 어떤 내용을 주장하는지 그 편집 내용을 밝히시라는 겁니다. 이제는 이문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도출해야하므로 드리는 말씀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16 (KST)[답변]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은 당시에 언론 보도로도 핫이슈가 되었고 그러므로 그 변경 내용이 고조선 문서에 실리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필요한 사항입니다. 애당초 이런 부분에 대한 고조선 문서에서의 서술은 제가 처음 한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되었던 부분이고 다만 그 표현의 수위의 차이에서 편집 분쟁이 발생한 사항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8:25 (KST)[답변]
먼저 고조선의 존망 시기를 논하자면 이미 수 차례의 논쟁이 있었고 결국 사회적 저명성을 고려하여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으로 편집함에 Xakyntos 사용자도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유물 발굴을 통해 BC 2333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가 없다, 이는 억지로 끼워맞춰 만들어진 것, BC 2333이라는 숫자는 애초에 엉터리로 도출된 숫자이며 위키백과에 왜 엉터리인지를 설명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해진 토론 중 일부분을 다루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족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 심지어 북한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무조건 신화로만 취급할 수는 없다고도 하며, 혹은 사실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십시오.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관련하여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라고 하여, 단지 단군신화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것을 단정짓지는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했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 실제 여부는 향후의 연구성과에 맡기겠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확실한 것은 과연 기원전 2333년에 현대에나 구성될 수 있는 그런 국가적 체계를 완성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 연구'등에서 석기를 기반으로 한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의 실례를 들어 꼭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국가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 언급하였습니다.
  • BC 2333은 이러저러해서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는 서술은 가치가 있는 정보겠죠.
→ 서술할 가치가 없는 정보가 될 것입니다. 이하가 근거입니다.

위키백과의 본문과 백과사전적인 콘텐츠는 모두 중립적 시각을 따라야 하며, 신뢰할 만한 출처에 의해 뒷받침되는 모든 의미 있는 시각들이 공정하고 치우침 없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든 문서와 편집자에게 해당합니다. 중립적 시각의 준수를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의견 자체를 피력하지 말고 사실과 의견에 대한 사실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신 것 같아 상기시켜 드립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 기록은 엉터리이며, 엉터리인 이유를 위키백과에 서술해야 한다는 식의 말씀은 위키백과에서 백:중립성의 지침을 위반한 것이 되겠지요.--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07 (KST)[답변]
Aubelumiere님의 말씀에 적극 동의합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13 (KST)[답변]
엉터리를 엉터리라 하는 것 뿐입니다. 백:비주류 이론이나 보고 오시죠.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9:34 (KST)[답변]
일방적으로 이를 비주류 이론이라고 주장하심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저로서는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것이 무조건 사실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만 이미 밝혔듯이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신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근거로 2007년에 고조선 기원전 2333년 건국에 상당히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국사 교과서 개정도 있었고요. "국사편찬위원회는 국가가 세운, 한국사에 있어서는 가장 믿을만하고 권위있는 곳입니다." 이런 곳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견을 따를 수 있습니까? 샐러맨더 귀하가 기원전 2333년에 회의적인 입장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이런 최신 학술적 성과가 나왔다면 무조건 부인하지말고 일단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앞서서 교과서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적어도 국사 부분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는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무조건 부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59 (KST)[답변]

셀레멘더 귀하와 S.H.Yoon님께서는 지금 토론의 논지를 헛갈리시는 것 같아서 따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저는 두분이 주장하시는 바와 같이 고조선 건국 기원전 2333년이 반드시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분께서 기원전 2333년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으시는데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입니다. 분명히 국사편찬 위원회가 최신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근거로 해당 부분에서 여러 부분의 서술을 변경하였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중도에 논쟁에 끼어드실 것이라면 최소한 확실한 논지 파악을 해주시고 개입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만약 이후 이 토론에 개입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점만은 분명히 구분해주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30 (KST)[답변]

귀하의 서술 변경은 마치 BC 2333년이 정설인 양 독해될 소지가 다분한 호도적 서술이라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보상자에 존속기간이 왜 "?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이라고 되어 있나요? 하다못해 "기원전 4세기 이전 ~ 기원전 108년" 이면 이해는 합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19:37 (KST)[답변]
지금까지 있어왔던 토론을 제대로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2007년에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공식 국사 연구 편찬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신 고고학 발굴 성과를 근거로 단군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표현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하였기에 제가 생각하기에는 "~ 건국하였다고 한다"를 "건국하였다"고 바꿨기 때문에 그래서 단정했다고 표현한 것이지 사실을 호도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단정이라는 부분에 이견이 있으므로 저는 이에 반대하는 Xakyntos 사용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해당 사용자가 애초에 "확정적으로 서술"이라는 표현을 썼으므로 그렇게 바꾸자고 변경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자기가 그렇게 주장하고도 지금와서 못받아들인다니 전들 뭘 어떡하겠습니까?--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46 (KST)[답변]
백:비주류 이론에 의거하여 백:중립성을 무시한 채 '엉터리'라 멋대로 규정하여 문서를 편향적으로 편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리고 해당 내용은 사회적 저명성을 고려하여 건국 연도 미상과 기원전 2333년을 병기하여 표기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Xakyntos 사용자와의 토론을 거치기도 했고요. 아니면 기원전 2333년? 이라 표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군요. 중국어 위키백과도 그러하니까요. --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19:58 (KST)[답변]
기원전 2333이라는 숫자가 실제의 역사적 정보로서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근거는 무엇이구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20:04 (KST)[답변]
그것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서 제가 판단 및 언급할 사안이 아닌 듯 합니다만.--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20:07 (KST)[답변]
일단 국사편찬위원회는 최신 고고학 연구 성과에 근거 청동기 보급 연대를 기원전 2000년까지로 상향시킴으로서 기원전 2333이라는 숫자가 실제의 역사적 정보라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위에서 누차 제가 자료로 제사하였으니 샐러맨더 귀하께서는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주장대로 삼국유사에 근거한 신화가 아니고 이런 구체적인 고고학적 성과로 국편위가 기존의 입장을 변경한 부분입니다. 분명히 구분하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20:10 (KST)[답변]
맙소사. 서지학도 아니고 고고학이 1자리수 단위까지의 연도를 "실제의 역사적 정보"로 밝혀낸다고요? 진심이십니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1일 (금) 20:11 (KST)[답변]
지금 이해를 잘못하시는데 제가 또 이 부분을 설명드리면 도대체 몇번을 언급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은 "그 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8쪽"라고 입장을 밝혔고 저는 그 부분을 지적한 것입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20:15 (KST)[답변]

너무 토론이 소모적이고 길어지고 솔직히 저로서도 이제는 정말 피곤하여 지금까지 저와 주로 논쟁한 Xakyntos 사용자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하여 아래와 같이 문제가 되는 편집 부분을 개정하자고 제안합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가감없이 국사 교과서 서술 그대로 표현한 것이므로 향후 별다른 시비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확정적 서술"이라는 부분은 애당초 Xakyntos 사용자가 표현한 부분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20:33 (KST)[답변]

맨 뒤에 “확정적으로”라는 말만 빼면 됩니다. 모든 논쟁이 그것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고집하시면서 다른 시비가 없을 것이라 자신하시진 마시죠. 다른 사람의 의견을 필요한대로 잘라서 인용하시는 것도 좋은 토론 태도는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지적해 둡니다만, 교과서가 서술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의해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는 것 뿐이고 그것을 확정하였다거나 단정하였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앞에 샐러맨더님도 말씀하셨지만 서지학적인 자료를 출처로 하는 서술에 있어서 그 이상의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백:출처백:독자 정책을 명백히 위반하는 서술이고요. -- Jjw (토론) 2014년 8월 1일 (금) 22:22 (KST)[답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확정적 서술"은 제가 붙인 것이 아니고 저와 주로 논쟁을 하던 Xakyntos 사용자가 표현한 부분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서 내놓은 변경안입니다. 그리고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교과서의 서술 변경은 최신 고고학적 성과에 기초한 서술 변경임을 알려드립니다. 어쨌든 이 문제로 너무 많은 지루한 소모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고해서 그러면 Jjw님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변경을 제안합니다. 의견 주십시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00:37 (KST)[답변]

이처럼 학자들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부분을 실제 교과서 원문에서도 유추가 불가능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단정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명백한 독자연구에 해당합니다.(중략)
보시다시피 단순히 단정하였다는 표현이 아닌 이전보다는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표현으로써 해당 교과서 개정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표현입니다.

1. 또 다시 거짓말을 하는군요. 제가 “확정적 서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이 논쟁을 한 이유 자체가 단정, 확정 같은 용어를 쓴 Lhrdrth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하가 방해 편집이나 마찬가지의 억지를 부릴 것이 분명하기에 그나마 서술 방향을 유보해서 제가 제시한 것이 신문기사에서 서술된 표현 그대로 더 확정적으로 썼다는 서술이었습니다. 애초에 확정이라는 말 자체가 써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귀하에게 최대한 양보해서 한 서술이 저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마저도 왜곡해서 귀하 멋대로 써먹는군요. 이렇게 뻔히 바로 위에 써 있는 사람의 말마저 왜곡해서 써먹는 귀하에게 이제 더이상 양보 따위는 없습니다.
2. 이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확정이라는 말 자체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억지를 부리다가 일을 크게 만들었고, 결국 본전도 못찾게 된 겁니다. 이미 위에 수없이 말씀드렸고, 다른 사용자들도 이미 귀하의 주장이 절대 무용함에 대해 사실상의 총의를 모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확정이요? 확정은 커녕 이제 교과서의 서술과 더불어 해당 서술이 학계에서 어떻게 반박을 받았는지까지 서술해야만 형평성에 맞으니까요. 이렇게 말입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08:17 (KST)[답변]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비롯한 각종 역사 공정으로 역사에 대한 국민 의식이 강해지면서, 2007년 7차 교과서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서술이 변화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편년을 기원전 2000년~1500년 경까지 상향 조정하고 고조선의 건국 사실에 대한 서술도 건국하였다고 한다에서 건국하였다라고 개정하였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교과서의 개정에 대해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교과서에 싣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비판하였다.

뭐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였다."라고 해서 "확정적으로 서술'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엄연히 귀하아닙니까? 이게 왜곡입니까? 그리고 뭐가 총의가 모아졌다는 말입니까? 이런 토론에서 사실과 관련없이 단순히 수위상의 우위로 판가름하자는 주장도 우습지만 숫자 상으로 봐도 2대4의 의견에서 Jjw님도 "확정적"이라는 말만 빼면 저의 의견에 동의하신다고 했으니 총의가 모아졌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귀하의 이런 행위야말로 명백한 방해 편집입니다. 저는 보다시피 이제는 합의를 하려고 제안을 했고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면서 다시 토론을 소모적으로 이끌고 가는 것은 귀하입니다. 분명히 방해편집은 귀하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저에게로 몰아가시는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애당초 귀하가 의도적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부분만 삭제하지 않았어도 토론이 이렇게까지 소모적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역사학계라는데 교과서를 그렇게 개정한 "국사편찬위원회"는 역사학계가 아니란 말입니까?--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09:16 (KST)[답변]
그리고 귀하가 인용문에서 주장하는 역사학계는 송호정같은 극단 소고소선론자들의 일부 의견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전체 역사학계의 의견인양 호도하는 것도 우습지만 국사 교과서의 수정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찬성하는 입장도 많습니다.

이에 따라 서강대의 이종욱 교수는 "중국이 고조선 건국 장소인 중국 요동 지역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데,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9쪽

재야 사학계에서는 즉각적으로 정부의 정책 변경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부 강단 사학계에서도 '고조선건국 기사 개선과 국사 교육 강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 답사하고 정립하기 위해 강단과 재야를 아우른 <고조선유적답사회> 등이 발족되기도 하였다. -이종호 이형석 저,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29쪽

이런 역사학계의 입장은 무시하시는 것입니까? 귀하의 주장대로 형평성 운운하면서 찬성하는 기사까지 그럼 고조선 문서에 넣을까요? 도대체 정상적인 문서 편집을 하자는 의지 자체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0:46 (KST)[답변]
반대합니다. 위의 주장은 사실상 기원전 2333년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2일 (토) 13:08 (KST)[답변]

위의 토론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기원전 2333년을 정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핫이슈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따라서 지금 편집분쟁 이전에 이미 고조선 문서에 실려있었습니다. 어쨌든 국사 교과서에는 이전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다만 단정이니 확정적 서술이니 하는 표현에서 이견이 나오고 있으므로 저는 시비의 여지를 없애려고 단정, 확정적 서술이라는 표현 자체를 없애고 교과서 표현 그대로 싣자고 변경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애당초 반대의견을 주시던 Jjw님께서도 저의 변경 제안에 "맨 뒤에 “확정적으로”라는 말만 빼면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을 뺀 변경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은 고조선 문서에 실릴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당 부분을 편집하자는 것인지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22 (KST)[답변]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2007년 개정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존 교과서의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문장을 "건국하였다"라고 변경하여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이렇게 쓴다고 치지요. 근데 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은 삭제합니까?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였으며" 이렇게 된다면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000년 내지 1500년이 되어야지 이러한 설명 이후 기원전 2333년이 나오는 건 매우 엉뚱합니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가 과연 제대로 된 출처인지도 판가름하기 힘듭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2일 (토) 13:26 (KST)[답변]

애당초 귀하가 의도적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부분만 삭제하지 않았어도 토론이 이렇게까지 소모적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삭제한 것이 방해편집이다… 이건 정책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근거라고는 삼국유사와 이를 근거로 편찬된 동국통감, 국사교과서인거 같은데, 애초에 삼국유사를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나요? 요임금도 마찬가지죠. 이양반도 반은 신화적인 인물인데, 이양반과 비슷하게 나라를 세웠다, 이거 신뢰할 수 있는건가요?
사료는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죠. 사료가 진짜냐 가짜냐부터 시작해서 사료가 진짜라면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냐의 문제도 남아있는겁니다. 애시당초 삼국유사가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것도 아니고, 유물로도 증명이 안되고, 대체 뭘 근거로 기원전 2333년이라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를 그렇게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면, 지증왕의 성기에 맞는 여자를 찾기 어려워서 왕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마을에 가봤더니 엄청 큰 똥을 양쪽에서 똥개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그 여자를 찾아 배우자로 삼았다는 말도 어서 지증왕 문서에 삽입해야겠군요. 물론 항문의 크기랑 질의 신축성등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료에 실렸잖아요? --Neoalpha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35 (KST)[답변]
Neoalpha님께서도 오해를 하고 계는데 앞에서도 분명히 제가 논지를 정확히 밝히지않았습니까? 지금 저는 고조선 건국 기원전 2333년이 반드시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하께서 기원전 2333년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으시는데 절대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입니다. 분명히 국사편찬 위원회가 최신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근거로 해당 부분에서 여러 부분의 서술을 변경하였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국사 교과서 어디에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지적해주신 부분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원전 2000년까지 청동기 발굴 연대가 최근에 올라갔으므로 그에 육박하는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가진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위의 토론 자료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은 저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했고 국사편찬위원회는 국가가 세운, 한국사에 있어서는 가장 믿을만하고 권위있는 곳입니다. 충분히 출처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출처의 신뢰여부를 떠나 앞서서 말씀드린대로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을 객관적 그대로 고조선 문서에 싣자는 문제입니다. 기원전 2333년이 정설이냐 아니냐, 국사 교과서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하여간 이부분을 삭제하지 않고 싣는다면, 표현 수위에 있어서 시비가 있으므로 아예 그냥 객관적으로 국사 교과서의 서술 그대로 편집하자는 것이 제 변경안의 요지입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37 (KST)[답변]

대체 Shyoon1님이 제시한 근거는 읽어보신겁니까? 안읽어보셨다면, 아래에 인용문으로 다시 남겨드리죠.

How Old is Korea? The question cannot be answered because it supposes that the modern concept of Korea, of a nation of people with a common heritage and a common destiny living as an autonomous unit within a global community of nations can be connected back in time in linear fashion.
그럼 한국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은 정해져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상은 공동의 문화와 공동의 운명체를 누리며 지구촌의 틀 안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한 한국이란 나라의 현대적 개념을 오래전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왔다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국사교과서만 출처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국사편찬위원회가 권위가 있다는 말을 제가 했으니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건 아닙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논지가 항상 옳은가요? --Neoalpha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46 (KST)[답변]
그렇다면 아예 해당 편집 부분을 삭제하자는 말씀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도 너무 소모적인 논쟁에 시달렸고 고조선 건국 기원전 2333년이 반드시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2007년 국사 교과서 개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서술 변경 부분에 대한 표현 수위를 논하는 것이었는데 자꾸 의견을 주시는 분들이 오해를 하시고 따라서 저는 계속 해명을 해야되고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므로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하여간 저로서는 위키백과의 발전을 위해 이런 국사 교과서 개정 부분이 있었다고 고조선 문서에 싣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고 더구나 이부분은 제가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추가되어 있었던 부분입니다. 만약 삭제해야된다고 하면 삭제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표현을 싣는 것이 타당한가 이제 확실히 결론을 내려야할 것 같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48 (KST)[답변]
우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삭제했다고 방해편집이라고 매도한 행위에 대해 사과부터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제안하겠습니다. --Neoalpha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49 (KST)[답변]
그 부분은 귀하가 방금 한 저의 차단 요청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매도한 적도 없고 따라서 사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반대만 하지마시고 제안을 주십시오. 삭제하자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아니면 계속 싣되 표현을 수위를 조정하자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조정하자는 것인지.--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3:58 (KST)[답변]
아예 삭제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건국 날짜는 사실상 미상으로 놔둬야 옳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국 날짜에 관해선 "사실상 미상이나, 삼국유사 등의 일부 기록에 따라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을 건국한 날짜로도 본며 대한민국에선 이 날을 개천절로 지정하여 기념한다."라는 식으로 해야지 저건 사실상 앞의 장황한 설명을 깔기 때문에 마치 정말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에 건국되었다라는 것으로 착각, 내지는 호도할 수 있습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2일 (토) 14:03 (KST)[답변]
삭제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서술해야 옳을지 S.H.Yoon님께서 직접 문장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로서도 이문제는 이제 더이상 끌지말고 총의에 의한 합의하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4:23 (KST)[답변]

확정적이다라는 문구는 넣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 같으니 내용을 출처와 연결하여 다듬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래와 같이 제안하여 봅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 1] 《동국통감》〈외기〉에서는 “동방에는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 2]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나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 3]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 역시[주해 1]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4]


  1. 《삼국유사》〈기이제일〉 - 壇君王倹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亰)始稱朝鮮. 한글 해석: 단군왕검이 당고(요임금) 50년 경인년에 즉위하여(당요즉위는 무진년으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실제를 알기 어렵다)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2. 《동국통감》〈외기〉-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于檀木下國人立爲君是爲檀君國號朝鮮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後徒都白岳
  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4. 국사편찬위원 한영우는 자신 개인의 저서에서는 고서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사실이라 판단하고 있으나(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공동집필에서는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고조선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본다(한영우 외,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주해

  1. 2007년의 국정교과서와 그 이후의 검인정 교과서 모두 동일한 사료를 쓰고 있으므로 국정인지 검인정인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지금 이 주해의 설명은 본문에선 삽입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6:33 (KST)[답변]

대부분의 내용에 찬성합니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부분에서 위의 토론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최신 고고학 발굴 성과를 근거로도 하였으므로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와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가 기원전 2000년으로 상향된 것을 근거로" 이렇게 수정하면 어떨지 제안드립니다. 그에 대한 출처는 http://news.donga.com/3/all/20070223/8410706/1 이 기사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6:47 (KST)[답변]
흠, 제시하신 출처를 사용하고 싶다면, 뒤쪽의 시점 논란에 덧붙이는 게 좋겠습니다. 맨 뒤를 이렇게 바꾸어보죠.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제가 제시한 출처) 2007년 교육부는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건국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술을 ' ~ 건국하였다'로 바꾸기로 한바 있다.(동아일보의 기사)” -- Jjw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7:12 (KST)[답변]
찬성합니다. 매우 합리적으로 모든 내용이 무리없이 소개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Jjw님께서 제안하신 내용에 대해서 적극 찬성합니다. 다른분들께서도 특별한 이의가 없으시다면 이 내용으로 새롭게 편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17:21 (KST)[답변]
BC 2333 이라는 숫자 배정에 인용되는 문헌들 사이에서도 모순이 발생하고 있음을 밝혀야 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요임금이 무진년에 즉위했고 단군은 50년 뒤인 정사년에 즉위했다고 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요와 똑같이 무진년에 건국했다고 합니다. 동국통감에서는 요임금이 갑진년에 즉위했고 단군은 25년 뒤인 무진년에 즉위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신 고고학으로 밝혀진 것"에 대한 완전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Lhrdrth씨가 제공한 기사만 보더라도 서울대 교수와 한국교원대 교수가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설사 고고학적 발견 성과가 모두 사실이라 가정한다 하더라도 고고학으로는 BC 2333이라는 숫자를 집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BC 2000까지 앞당겨질 수 있다" 는 것은 "고조선은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명제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2일 (토) 20:02 (KST)[답변]
그래서 귀하가 언급한 고고학적 성과에 대한 합의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은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이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고 귀하가 기원전 2333년에 회의적인 입장인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국사편찬 위원회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로 고조선의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인 것은 엄연한 객관적인 사실인데 그부분을 넣지말자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아닙니까?--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20:27 (KST)[답변]
연대 배정에 인용되는 문서들이 역사서도 아니고 설화집, 서사시인데다가 그마저도 서로 모순된다는 건 또 은근슬쩍 언급조차 않고 넘어가려 하시네요. 그러면서 토론 상대측에게만 토론 태도가 불량하니 하는 잣대를 들이미십니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2일 (토) 20:31 (KST)[답변]
넘어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순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반영하십시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20:40 (KST)[답변]
별다른 이견이 없다면 제가 제안한 것을 토대로 내일 중 문서를 수정 보강하겠습니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소문단에 별도로 두어 다음의 내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단군을 실제 인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5차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교과서개편준거안〉 작성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1987년 확정된 이 준거안에서는 상고사에 관한 지침으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서 반영토록 하였고, 고조선은 중심지가 계속 이동함에 따라 영역도 바뀌는 ‘이동국가’가 아니라 확정된 넓은 강역을 유지하는 ‘영역국가’로 기술하며 한사군의 존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결정 과정에는 정치권 및 언론계의 압력이 심하게 작용한 것으로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결정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박광용,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 강만길 외, 《우리 역사를 의심한다》, 서해문집, 2003년, ISBN 89-7483-165-1) -- Jjw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21:42 (KST)[답변]
알겠습니다. 저는 Jjw님의 편집에 찬성합니다.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2일 (토) 21:54 (KST)[답변]

이와 별개로, 정보상자 틀에 있는 존속기간에서는 "기원전 2333년"을 빼야 할 것입니다. "기원전 7세기 이전 ~ 기원전 108년"이라고 해야겠지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3일 (일) 22:56 (KST)[답변]

이는 이미 Xakyntos 사용자와 토론을 거쳐 합의점에 도달한 후 수정한 내용입니다. 사회적 저명성과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적인 상식 등을 고려해서 추가하였습니다.--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3일 (일) 23:05 (KST)[답변]
합의에 이른 내용이 어느 지점인지 좀 찾아서 제시해 주십시오. 읽어보고 납득할 수 있다면 납득하고, 그렇지 않다면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3일 (일) 23:13 (KST)[답변]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회적 저명성"이라는 개념은 애매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상식"은 KPOV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3일 (일) 23:14 (KST)[답변]

새롭게 편집하였습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3일 (일) 23:51 (KST)[답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당 토론은 종결된 것이므로 의견요청 틀도 제거하였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13 (KST)[답변]
그런데 고조선 문서에 보니 "제왕운기"가 연도를 밝히고 있지않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라고 하여 기원전 23333년으로 연도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검토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1:49 (KST)[답변]
네, 수정하겠습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2:47 (KST)[답변]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무진년은 셈하면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요임금이 즉위하였다는 해로 하면기원전 2283년 또는 즉위 60년이 되는 기원전 2323년 입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2:53 (KST)[답변]
저도 다시 살펴보니 그 동안 알고 있던 것 가운데 틀린 게 있네요. 다시 살펴 보아 정리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 기원전 2333년 관련 논의에 정리했습니다. 이후 논의는 밑의 주제에서 하기로 해요.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21:02 (KST)[답변]

정보상자의 "기원전 2333년"[편집]

기원전 2333년(또는 다른 기원전 2XXX년들)은 동국통감,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2차, 3차 기록에 의거한 것이며, 직접적인 실증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고고학적 발굴로 인해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2000년대까지 확장되었다 해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이 곧 고조선의 시작이라 할 수 없으며, 고고학은 본래 범위를 얻어내는 것이지 정확한 연도를 얻어낼 수 있는 수단이 아닙니다. Lhrdrth 씨는 줄곧 "사회적 저명성"이나 "대한민국 국민의 상식"을 논하시는데, 이것은 정책 위반(KPOV)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위에서 보호가 풀린 이후 편집하기로 하신 jjw님의 편집 예정안에서도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결정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보상자의 "기원전 2333년"은 삭제하고,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의 "?" 또는 1차 사료에 고조선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원전 7세기 이전"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3일 (일) 23:27 (KST)[답변]

앞에 ? 가 붙어있으니 그냥 두어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사료에 의한 것인데요. -- Jjw (토론) 2014년 8월 3일 (일) 23:50 (KST)[답변]
Jjw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위키백과의 원칙에 어긋나지않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09 (KST)[답변]
그것이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이라고 서술된 상기 출처는 학자들의 단행본으로, 2차, 3차 자료인 동국통감 등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출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16 (KST)[답변]
기원전 2333년이 건국 연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333년이 건국 연대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삼국유사나 동국통감에서 언급되는 고조선 건국연대는 어디까지나 2차, 3차 서술일 뿐입니다.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자료들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고, 2차, 3차 서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실증적 근거 역시 없습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12 (KST)[답변]
?도 달았습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15 (KST)[답변]
무엇보다 기원전 7세기에는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1차 사료에 나타나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기원전 7세기 이전" 언젠가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원전 2333년?" 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서술인 것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17 (KST)[답변]
이미 널리 통용되는 중요 사료인데, 이를 우리가 2차, 3차 서술인지 판단할 권한이 있나요? 외부에서 그렇게 적혔다면 적는 거 아닌지요. 사실 이번 토론을 보면서 저런 내용을 과연 토론자들이 판단할 내용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RedMosQ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16 (KST)[답변]
그 사료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사학자들의 일이고, 그 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는 것이지,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독자연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도 "박광용은 단군 신화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조선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구전되어 오면서 수 많은 변형이 있었던 불확실한 사료로서,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한다" 라고 되어 있네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18 (KST)[답변]
기원전 2333년이 확실하지 않다는 내용은 ?를 앞에 표기하고, 주해를 붙이는 것이 어떤가요? --RedMosQ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22 (KST)[답변]
기원전 2333년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본문에 이미 충분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상자에는 기원전 2333년을 유지하는 것은 서술상의 모순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23 (KST)[답변]
그리고 불확실한 사료라고 해도 사료는 사료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확실하다는 표시의 ?를 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아예 서술하지 말자는 것인가요? --RedMosQ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26 (KST)[답변]
"기원전 7세기 이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건 "기원전 2333년" 보다는 확실하지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31 (KST)[답변]
?, 즉 미상으로 하는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기원전 7세기 이전이라고 물증이 나오지만, 어쨌든 개천절을 쇠는 단기의 예도 있는 만큼 기원전 2333년도 아니고, 기원전 7세기라고 마찬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미상으로 냅두는게 옳다고 봅니다. -- S.H.Yoon · 기여 · F.A. 2014년 8월 4일 (월) 02:44 (KST)[답변]

샐러맨더 귀하께서 2,3차 사료라고 주장하셔도 동국통감,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다는 의미에서 ?를 붙인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그러시면 2333? 이라고 하시던지요.--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28 (KST)[답변]

제 주장이 아니고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한 거래도요. 그리고 "2, 3차 자료"의 개념을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삼국유사가 근거로 삼고 있다는 "고기"와 세종실록지리지가 근거로 삼고 있다는 "단군고기"가 현대에 남아있지 않으니 이것들이 2차 또는 3차 자료인 것입니다. 제 "주장" 이 아니구요.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32 (KST)[답변]
이에 반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주제는 연도 표기로 알고 있습니다.--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33 (KST)[답변]
모든 역사학자들이 2333년이라고 적으면 안된다고 하나요? 기원전 2333년도 정확한 년도는 아니지만 꽤 통용이 많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예 실으면 안된다는 입장이신지 다시 묻습니다. --RedMosQ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35 (KST)[답변]
"기원전 2333년"보다 "기원전 7세기 이전"이 더 "확실"하다. 그리고 기원전 2333년은 신화 내지 민족기원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연대이지, 실증적으로 밝혀낸 것이 아니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이상이 제 입장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37 (KST)[답변]
샐러맨더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논지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은 그래도 사료상 그런 기록이 있으니 ?를 붙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저는 판단합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39 (KST)[답변]

그리고 그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저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고고학적 성과도 반영하여 기원전 2333년에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저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이 학계의 다수설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tcko_-2333_99_99_0010 --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47 (KST)[답변]

고고학은 범위를 잡는 수단이지 특정 연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고 몇번을 말씀드립니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00:50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도 특정 단체의 의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요. 학계의 다수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2333년이 통용되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틀렸다고 하기도 어려우니까요. --RedMosQ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0:56 (KST)[답변]

고조선이 실재로 언제 건국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본문 편집에도 밝혔듯이 원 사료인 일연도 요임금이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니 50년은 경인년이 아니고 정사년인데?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삼국유사가 유일하고 그것을 조선시대에 연표를 만들면서 단기로 서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확실치는 않으나 사료에서는 기원전 2333년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백과사전에 수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근거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기원전 7세기라는 것은 제나라와 교역 기록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그 때에는 이미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그 때 건국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기원전 2333년 (출처: 삼국유사, 실재인지는 의문이 있음) 이라고 표기하는 게 현재로서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표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 이 논란은 이 쯤에서 마쳤으면 좋겠습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1:40 (KST)[답변]

백:과감의 정신으로 일단 표의 기원전 2333년에 출처를 삼국유사로 달고 많은 이견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만일 논의 결과가 제 편집과 달라진다면 그 때 다시 수정하지요.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01:53 (KST)[답변]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가 아니라 동국통감입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10:11 (KST)[답변]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tcko_-2333_99_99_0010 에 따른 것 입니다.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13:26 (KST)[답변]
"현전하지 않는 미상의 문헌을 인용하여 당요 50년 경인년(기원전 2311년)을 단군의 원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일연이 직접 주석을 통해 당요 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기원전 2284년)이라 정정하고 있다." 라는 본문 내용과 모순됩니다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8월 4일 (월) 13:33 (KST)[답변]
현전하지 않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것이니 미상의 문헌을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일연이 문제 삼은 것은 간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그러나, 서기 기원전 2333년을 비정할 수 있도록 연표를 정리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조선 시대에 연표를 정한 사료를 보충해 넣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있다가 밤에 정리할께요. 시간이 있으면 직접 해주시면 더 고맙고요. :)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14:47 (KST)[답변]

집에 와서 책과 온라인을 뒤져 확인해 보니 지금의 단기 기원은 서거정이 《동국통감》에서 산정한 것으로 원문은 동국통감 외기 단군조선 영인본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臣等按) 古記云, 檀君與堯竝立於戊辰, 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百十八年. 此說可疑今按, 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堯竝立者非也. 가 출전으로 이를 한글로 풀어 쓴 해석은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국역: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요 임금의 원래 즉위년은 갑진년이고, 무진년은 즉위 후 25년으로 보아, 단기 원년은 요 즉위 25년으로 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학원의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네요.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이번 토론으로 그 동안 적당히 알고 지나가던 것을 정확히 알게 된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해요. -- Jjw (토론)

이왕 손 댄 것,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주석을 달아 넣었습니다. 모자란 부분은 계속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문서의 내용 가운데 대부분이 아직도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의 것으로 검증과 보충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 주세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직접 편집해 주시는 것입니다 :) -- Jjw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21:01 (KST)[답변]

비파형동검[편집]

비파형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토기를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유물로 보고 있으나, 비파형동검만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고조선이 아닌 동호의 문화에 속하는 영역이었을 수 있다.[1]

  1. 송호정, 〈중국 내몽고 및 요서 지역 답사를 통해 본 한국 고대문화〉, 청람사학 제6집, 2002
제 관점에서 볼 때 해당 내용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거나 다른 위치로 옮기는 것을 제안합니다. 만약 추가할 적당한 위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고학으로 바라보는 고조선' 과 같은 새로운 토막글을 생성하여 이 부분에 알려진 여러 고고학적 연구와 함께 추가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떠십니까?--Aubelumiere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22:17 (KST)[답변]
저 역시 현재 문장이 있는 부분은 첫머리 소개 부분이고 현재 고조선 문서에 고고학에 관한 단락이 없다고 보여지므로 고고학에 관련된 단락을 하나 따로 만들어서 해당 내용을 수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Lhrdrth (토론) 2014년 8월 4일 (월) 23:47 (KST)[답변]
@Lhrdrth: 해당 내용은 고조선의 영토 범위를 어떻게 비정하는가에 관한 것으로서, 충분히 중요한 내용이니 초록에 서술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4년 9월 13일 (토) 00:10 (KST)[답변]

한국언어도 남퉁구스어의 흉노족 고립어다. 부여어-고구려/백제-일본이라고 하는 이기문. 돟호? "동호(중국어 간체 : 东胡, 정체자 : 東胡, 병음 : DōngHú)는 춘추 시대부터 내몽골의 동부지역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이들은 유목과 수렵생활을 기반으로 살았다.

'동호'의 어원이 '퉁구스'라는 설이 있으며, 선비족, 거란족과 현재의 몽골족, 다우르족, 부랴트족 등이 동호의 후예이다."

뭐만 말하면 단군조선이 대강역이 대제국이 아닌, 소수 원시부족국가로 부족국가형태의 제사장들의 연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무슨.. 부리아트족은 부여와 같고, 흉노/선비도 단군조선이고, 몽골도 마가고.. 거란은 걸족이고.. 다 아우르던 형제부족인데, 그속으로 떼어주면 좋겠네. 그랬으면 좋겠네로 들리니.. 내 참.. 주류 아닙니다. 어울리지 않는게 아니고, 저런 학설을 학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동호는 몰라도, 민족이든 역사든 갈라놓으려는 것은 주류 사학도 아니고 인정될 수 없는 사론입니다.--Canendo (토론) 2015년 4월 11일 (토) 17:05 (KST)[답변]

2019년 7월 22일의 편집 요청[편집]

|지도_그림= Gojoseon's Sphere of Influence.png |지도_설명= 고조선 관련 문화 범위

221.140.133.90 (토론) 2019년 7월 22일 (월) 15:58 (KST)[답변]

각하 지도_그림은 말 그대로 해당 국가의 (영토)지도를 게재해 놓는 것으로, 현재 수록돼있는 이미지를 봤을 때는 제시해주신 이미지로 교체할 필요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더불어 제시해주신 이미지는 문화 관련 문단에 게재하는 편이 나아보입니다. -- 2019년 8월 2일 (금) 14:56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