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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와 주나라 관계, 기자와 부여 관계[편집]

기자(箕子)는 성(姓)씨(氏)를 역순으로 쓴 것이고, 상(商)나라는 크고 작은 족읍(族邑)으로 구성된 국가다. 족읍(族邑)은 혈족(血族)인(人)사람과 전쟁에서 잡아온 농민(農民)으로 구성돼있고, 민(民)노예란 뜻이다. 대종(大宗)인 왕족(王族)은 적처(嫡妻)외에 많은 후처(後妻)를 두고 있고, 본처 큰 아들인 적장자(嫡長子) 종(宗) 계승 원칙으로 가업을 잇는다. 아버지 사망 후, 후처(後妻) 아들인 서자(庶子)는 적장자와 사이가 좋으면 함께 지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서 정착하면 불리는 것이 씨(氏)로 새 종가(宗家)를 이루는 것이 소종(小宗)이다. 종(宗)은 자기 죽은 부모와 성씨 혈통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는 적장자 종손(宗孫)의 집을 뜻한다. 상나라 28대 왕 문정(文丁)은 태정(太丁)으로도 불리고 이름은 탁(托)이고, 제을(帝乙), 비간(比干), 기자(箕子)의 아버지다. 상나라 29대 왕 제을(帝乙)은 첫째 미자계(微子啓), 둘째 중연(中衍), 막내 제신(帝辛, 주왕(紂王))의 아버지다. 상나라 30대 마지막 왕 제신(帝辛,?~기원전 1100년 경)은 주(紂), 주신(紂辛), 주왕(紂王)이라 불리며, 은나라의 제30대 왕으로 마지막 군주이다. 기자(箕子)는 상나라 마지막왕 제신 주왕의 숙부 서열인데, 주왕은 숙부급 서열인 비간(比干)을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진짜 그런지 확인하겠다며 비간(比干)의 심장을 꺼냈다 하고, 기자(箕子)는 스스로 미친 척 노예로 갇혔으며, 적장자 형인 미자계(微子啓)는 동생 주왕(紂王) 곁을 떠났다.

이 내용만 보면, 주왕(紂王)이 자기 삼촌도 죽이는 폭군이기 때문에 주나라가 응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주나라와 상나라는 기본적으로 원수지간이다. 죽서기년에 문정(文丁)14년 계력(季歷)은 융족을 예도(翳徒)에서 격퇴하고 세 명의 장수를 사로잡았으며 문정에게 승리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던 문정은 계력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고 새고(塞庫)로 그를 보냈다. 그 후 문정은 계력을 새고에 감금해 죽였다 계력(季歷)은 주(周)문왕 서백 희창의 아버지, 주(周)무왕은 문왕의 둘째 아들, 적장자는 상나라 제후국인 숭나라 후작 호(崇侯虎)가 주(周)나라 문왕이 위험하다는 것을 주왕(紂王)에게 알리면서, 주왕(紂王)은 서백 희창을 잡아와 유리성에 7년 동안 가뒀을 때, 적장자 백읍 희고를 죽이고 죽을 쒀서 희창에게 먹였다. 주 문왕이 죽을 다 먹자, 주왕 제신은 "무슨 성인이 사람을 먹느냐며 비웃었고, 서백 희창은 먹은 것을 다 토해낸 곳에 백읍 고 묘를 나중에 세웠다. 역성 혁명한 주 무왕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를 갚은 것이고, 폭군은 역성혁명 쉽게 하는 요소일 뿐, 폭군이 아니더라도 역성 혁명 해야 할 상황으로, 주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할 때, 왕으로서 정벌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주 문왕 희창 위패를 모시고, 주나라 태자로서 상나라를 정벌했다. 아버지 주 문왕 희창 복수 유훈이 없었다면 태자로서 위패를 모시고 정벌 할 이유가 없다.

이런 원수지간인 상나라와 주나라 상황을 보면,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기족(箕族)을 이끌고 도망가는 것은 당연한 일, 강씨 직계 조상만 간략하게 기록한 상계는 기자와 함께 평양으로 왔다 했고, 다른 문중 성씨 상계엔 800여 성씨가 함께 왔다 기록돼있다. BC1122년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닌, 요하에 있는 양평을 말하는 것이고, 고구려 때는 요동성, 현재는 요양시가 된다. 왕검성은 BC300~249년 연나라 진개 침공으로 잃으면서 현재 평양으로 이전했는데, BC194 위강숙 후손인 위만 위장 귀순 반란에 기씨왕실이 망한것이 후조선이다. 800여 성씨는 한꺼번에 온것이 아닌, 기족 선주, 삼감의난 반란 후에 상민 분할 이주 정책을 피해 도망와 추가된 것이다.

왜 도망? 상나라나 주나라에 대한 기록만 보면, 참 점잖고 사람의 예를 논하고 있지만, 상나라와 주나라 유적지 유물 출토 상황은 어떤가? 주인이 죽을 때, 집을 지을 때, 노예를 산채로 순장했다. 인(人)사람, 민(民)노예, 구분이 분명했던 것이고, 민(民)은 사람이 아닌 물건과 같은 취급됐다.

기자(箕子)는 상나라 왕족으로 상나라는 현재 중국인들이 말하는 화허족과는 무관한 이민족으로, 북적과 동이 지역에서 황하 중류와 상류로 올라가는 황하 본류 오늘쪽 지류까지 하나라가 한반도 만한 크기로 분포한 것을 탕왕 때 공략 평정했고, 주왕 때 망했다. 주나라는 황하 북쪽 오르도스에서 약탈을 피해 큰 강 2개를 건너 장안성 북서쪽 기산에 정착한 황하 주변에 거주하던 씨족으로, 황하 중류 지역에 있던 하나라와 같은 화허족으로 분류 할 수 있지만, 상나라는 그들과 다른, 황하 북부와 산동성 동쪽 태산 지역에 분포해 있었고, 주나라 후손인 정 여공이 약나라에 있던 상나라 단(檀)백(단족 수장)을 약나라 주민들 도움을 받아 죽였다는 내용을 보면, 단(檀)군과 무관 할 수 없는, 상나라가 단(檀)박달나무 자생지가 북경, 요하,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자생하는 것을 고려하면, 상나라가 단(檀)국에서 파생된 성씨일 여지는 있다.

상나라 탕왕 상계 시조 자설(子契) 성(姓) 자(子)는 하나라 제순 임금이 하사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설(契)은 이름이 아닌 원래 혈족을 타칭하는 문자일 수 있고, 맺을 계로도 읽는다. 중국 설(偰, 병음 Hsueh)씨는 중국 성씨 순위 76위로 3가지 계통이 있다. 설(偰)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937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단본이다. 위구르[回鶻] 사람이 설련하(偰輦河)에서 살았기 때문에 설(偰)로 성씨를 삼았다. 설(契)씨 가능성 있고, 성씨 분화에서 문자는 허투루 쓰이는 법이 거의 없다. 설련하(偰輦河)는 초원 지대 북부 바이칼호에 있고, 북방 계통 혈통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내려왔다. 상나라 시조 설씨 존재만 봐도 상나라가 화허족일 가능성 1도 없는 북방계로 시기나 연대를 고려하면 단(檀)과 무관 할 수 없다.

전조선으로 보이는 상나라는 단(檀)과 상관 관계가 있고, 아침해가 뜨는 곳이란 중국인 시각에서 본 조선처럼, 우리가 부르는 한국, 같은 국가를 부르는 자칭과 타칭이 존재하는데, 상나라는 타칭, 단군은 자칭일 수 있다. 단국의 전신인 환국은 만주화련자치현 오녀산성에 있고, 그곳에서 남하해서 세운 단국 신단수는 요하문명지역 일 수 있고, 산동성 태산 지역일 수도 있다. 상나라와 단국이 같은 민족이 아니라면? 주나라에 멸망해서 패잔병도 아닌 상나라 왕족인 기씨 일족에 단군조선 수도를 옮길 이유가 없다. 주나라 무왕은 요하에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기자와 함께 간 것은 군대가 아닌 민간인들이다. 같은 계통 성씨 분화된 것일 때 가능한 얘기다.

기자(箕子) 이름인 서여(胥餘)는 부여(扶餘)에 남아있고, 부여(扶餘)는 여(餘)를 부(扶)돕는다는 뜻이다. 강(康)국 소무구성 왕실 성(姓)인 온(溫)씨는 부여(扶餘)계통 고구려 온달 백제 온조 신라 온군해 한반도에서 활동했고, 강(康)국은 간수성에 있던 중앙아시아로 확장했던 사마르칸트 소그드인, 속특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강(康)국으로 알려져 있고, 요하지역에 선주 해 있던, 기자와 BC 600~500년 경부터 고리국이 남하 길림성 지역에서 상주하면서 기자조선 상나라 일족과 함께 후조선을 형성했고, BC300~249년 경 연나라 진개 침공으로 요하 왕검성이 무너지고 평양으로 옮기면서, 지리적 어려움으로, 여(餘)를 부(扶)돕는다는 부여(扶餘)국이 시작된 것이다. 즉, 부여와 기자는 혈통이 다른 문명 공동체입니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기자(箕子)와 상나라는 북방계로 절대 화허족 중국과 같은 민족일 수 없는 황하 북부, 만주, 산동성 지역에 형성돼있었던 한민족이다. 왜? 한(韓)민족? 한(韓)민족은 삼한(韓)을 말하는 것이고, 삼한(韓)은 진한(韓) 변한(韓) 마한(韓)을 말하고, 기자 후손으로 보이는 청주한(韓)씨 상계는 위만 반란에 나라를 잃은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이 청주에 마한을 세우고 청주한씨 시조 한준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천 서(徐)씨란 얘기도 있지만, 부여 서씨(扶餘 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그는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었는데, 당 고종이 본래의 성씨인 ‘부여(扶餘)’를 ‘서(徐)’씨로 바꾸고 웅진도독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시기나 글자로 볼 때 더 신빙성 있고, 이천 서(徐)씨는 부여 서씨에서 파생된 분파로 보인다.

물론 상나라 후손은 상나라가 망한 은허에 은(殷)씨, 주나라에 협력한 미자 계 후손인 송(宋),미(微)씨, 송(宋)씨 후손인 대(戴)씨, 공(孔)씨, 주나라가 상민 사민정책 실행하면서 중국 전역에 분할 화허족으로 동화됐고, 기자(箕子)후손만 북방인 요하로 이동,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북방계 상나라 정통성 잇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단군과 기자를 민족의 조상으로 숭배한 것이다.

강(康)씨는 대종 위(衛)씨와 함께 위강숙 공통조상을 갖고 있는 위강숙 희 봉 후손으로, 주 무왕 97살 때 아홉째 동생인 위강숙은 강(康)나라에 분봉됐고, 형제들 중에서 젊었기 때문에 활동적이고, 강(康)후(侯)로 불렸고, 후(侯)는 공후백자남 2등급 관작으로, 최근에 강후부(康侯斧)가 출토됐다. 도끼는 군권을 상징하고, 상나라 제신이 주문왕을 풀어주고 주문왕이 주나라 땅 일부를 바쳤을때 부월을 하사, 토벌권을 줬기 때문에 주나라가 성장 상나라가 망한 것이다. 삼감의 난 반란 평정 후, 주 성왕의 섭정인 넷째 주공 단은 상나라 수도 조가, 황하 북쪽 지역에 강나라 보다 큰 위나라를 세웠고, 강고(康誥)=강(康)에게 말한다. 상나라 반란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잘 감시하란 내용을 장황하게 충고했다. 위강숙 적장자 백모는 위나라를 잇고 위씨가 됐고, 둘째 아들을 상민 사민정책 피해서 상나라 유민이 요하에 모여들면서 기자조선을 형인 주공 단의 충고에 따라 감시자로 보냈기 때문에, 대종 희성위씨 소종인 강(康)씨가 된 것입니다. 강(康)씨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희성강씨가 계통이 있고, 온성강씨 계통이 있습니다. 분자인류학 까페에 올라온 부여 계통으로 보이는 강씨 유전자는 온성강씨가 맞을것이고, 희성강씨와는 직계조상 상계를 보면 같을 수 없습니다. 고려태조 외6대조, 조선태조 장인인 강(康)씨는 희성강씨로 온성강씨와 유전자가 같을 수 없습니다. 강(康)씨 상계를 보면, 청주한씨 상계에 언급된 기자조선과 마한 왕들이 기록돼있고, 육하원칙 세밀하지 못한 간략한 내용이지만, 시대와 지리적 수도 상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康)씨로, 이곳 위키에 강호경을 호경으로만 표시하는 논리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호경은 강씨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 유명한 사람도 아닌, 그냥 태조왕건 외 6대 조상이 강씨고 역사에서 확인된 분명한 강씨기 때문에 호경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천강씨 대종회 역시, 태조왕건의 외 6대조란 기록과 아래 세손들 관명이 분명하기 때문에 족보에 강호경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강(康)씨 득성조인 강후를 족보에 시조로 기록하지 않는 것은, 직계 조상만 간략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족보처럼 기록이 상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더구나, 한국사를 최초로 쓴 것은 블과 고려 삼국유사, 삼국사기 연대가 족보 보다 짧기 때문에, 그것을 이중 삼중 검증할 수단이 없는 것입니다. 중국이 5천년전 역사를 논하는 마당에 한국은 고려시대 이전엔 사실상 역사서가 없으므로, 원시시대와 뭐가 다릅니까? 모두 추정적 요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유물 해석, 꿈보단 해몽 될 수 밖에 없는데, 자료가 될 수 있는 족보조차 허위로 유전자 분석 증거도 없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부정하는 수긍할만한 출처가 없습니다. 한국사에서 나오는 강(康)씨는 모두 희성강씨 계열로, 신천강씨 직계 조상 기록인 상계 이동은 기자조선-마한-가락-신라-태봉-고려 흐름이기 때문에, 절대 부여계 온성강씨로 생각되는 고구려 출신일 수 없습니다. 조상이 모두 신라에서 관직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난데 없이 고구려 출신이라니, 김유신 따라서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북상했는데, 부여계 온조와 마한 전투에서 조상이 전사한, 부여계와 함께한 것은 기자조선 때, 이후 부여계 고구려는 적입니다. 성골장군 별호 자체가 신라골품제 귀족을 뜻하는데, 난데없이 고구려 출신은 상충되는 기록입니다. 김관의가 외 6대조 강씨 족보를 직접 쓴 강씨 보다 더 정확한 출처인가요? 조선시대 양반은 5%밖에 없었고, 성씨는 주나라 때 희성친족을 낙하산 왕으로 분봉하면서부터 양반 귀족의 전유물입니다. 조선시대 후기가 되면서 노비도 성씨를 갖게 되면서, 임금 성씨인 김이박최씨 성은 많이 쓸 이유가 되지만, 강씨는 한반도 역사에서 늘 2인자 추구 유명한 성씨도 아니지만, 적어도 태봉 고려 조선 시대 태조와 연결되면서 사회 지도층 성씨가 분명한 혈통 호족입니다. 족보 허위를 논하기 위해선 조선 태조 이성계 강비, 강태주 강조, 고려 태조 외가, 태봉 궁예 강비 모두 삭제해야 합니다.

한국인 주요 유전자는 크게 6가지, 최다인 O1b2-M176 계열은 다수라 해도 50%가 안됩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27일 (목) 20:37 (KST)

강(康)씨 성(姓)[편집]

강(康)씨 성(姓)의 뿌리가 되는 주(周)나라 왕실 성(姓)은 희(姬)다.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 여자로 강원(姜原)이라 하였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원비(元妃)였다.

기(棄)는 농사를 잘 지었다. 제요가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삼았다. 제순은 “기(棄), 인민들이 바야흐로 굶고 있으니 그대가 후직(后稷)이 되어 때에 맞추어 백곡의 씨를 뿌리도록 하라고 했다.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부르는 한편 희씨(姬氏) 성(姓)을 내렸다.

후직(后稷) 희(姬) 기(棄)의 15세(世) 손(孫)은 주(周)나라 문왕(文王), 상(商)나라 제후 서백(西伯) 희(姬) 창(昌)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18명의 아들을 뒀는데, 적처(嫡妻) 태사(太姒)와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뒀고, 강(康)씨 뿌리가 되는 16세손 위강숙 희(姬) 봉(封)은 아홉째 아들이다.

강(康)씨는 주 문왕(周 文王) 희(姬) 창(昌)의 적처(嫡妻) 태사(太姒)의 둘째 아들 주 무왕(周 武王)때 희봉(姬封)의 분봉국은 강(康)나라로, 희봉(姬封)은 주(周)나라 5단계 관작(官爵)인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중에서 후(候) 관작(官爵), 강후(康候)로 불렸고, 신천강씨 대종회 중국 강(康)씨와 교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중국 길림성 금주국사-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된 서주시대 초기 청동기, 군권을 상징하는 강후부(康候斧)가 출토되면서 강후(康候)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희성(姬姓) 강씨(康氏)는 강후(康候)에 뿌리가 있다. 형인 네째 주공 단(周公 旦)이 삼감의 난(三監-亂) 반란 평정 후, 상(商)나라 수도 조가(朝歌)지역에 위(卫=衞)나라를 세웠고, 희봉(姬封)을 위후(衞候)로 분봉하면서, 주 성왕(周 成王)의 숙부, 위강숙(衛康叔)으로 불렸다. 위(卫=衞)나라 왕실 대종(大宗) 성(姓)은 적장자(嫡長子)인 백모(伯牟=伯髦)가 계승 희성(姬姓) 위씨(衛氏) 시조가 됐다. 위강숙(衛康叔)은 형인 주공 단(周公 旦)의 충고인 강고(康誥)에 따라서,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에 대한 반란 예방 감시가 필요했고, 둘째 아들이 기자(箕子)와 함께 평양(平壤)(=양평(壤平),현재 요양시)에 왔고, 기자(箕子)로부터 강씨(康氏) 성(姓)을 하사받았고,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다고 신천강씨 상계에 기록돼있다. 모(髦)는 어릴 때 짓는 아명(兒名)으로, 보통 한 글자만 짓고, 백(伯)중(仲)숙(叔)계(季)현(顯)혜(惠)아(雅達)유(幼)를 순서대로 붙인다. 따라서 둘째 아명은 중모(仲髦)가 되고,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후 관명(冠名)이나 관작(官爵), 또는 별호(別號)로 불리게 된다.

다른 혈통 강씨(康氏)는 강국(康國) 소무구성(昭武九姓)에서 파생된 강씨(康氏)로, 기원전 국가들은 나라가 망하면 국명(國名)을 왕실 성(姓)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국(康國) 왕실 성(姓)인 온(溫)성(姓)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계통이 나라가 망하면서 강씨(康氏) 성(姓)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씨(康氏)는 2가지 이상 다른 혈통(중국의 강성(康姓)참조)존재 할 수 있다. 안록산(安禄山)의 친부는 강씨(康氏)로 언급되고 있고, 후조를 세운 석씨가 강성(康姓)에서 파생된 성씨로 중국에선 분류하고 있는데, 흉노 지배를 받던 갈족은 강국(康國)에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안(安) 석(石)씨는 희성강씨와 혈통이 다르다.

한국의 강(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6대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고, 강후(康候)의 68세손으로, 어릴 때 아명(兒名)은 강기(康騎), 강호경(康虎景)은 관명(冠名)이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작제건(作帝建)의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작제건(作帝建)의 어머니이자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고, 강보육(康寶育)의 조부 강호경(康虎景)을 국조대왕(國祖大王)으로 추존했다. 신천강씨는 강보육(康寶育)의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후손이다. 강보육(康寶育)은 손호술(損乎述)로 불렸고 개명했다. 신천강씨 가계도엔 아버지 강충(康忠)아들은 보전(寶甸) 보육(寶育) 2명으로, 이제건(伊帝建)은 없다.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로 보인다. 고려 태조 22번째 신주원부인 아버지인 7세손 강태주(康泰周)와 둘째 아들 8세손 강조(康兆)가 고려 목종 퇴위, 김치양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세우면서 거란이 세운 요나라 성종이 정변을 구실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 전투에서 패하면서, 처형됐다. 이후 목종 퇴위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몽고 침입으로 고종(高宗)이 강화도로 몽양 할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관력(官力)이 뚜렷한 중시조(中始祖)14세손 강지연(康之淵)공이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신성(信城)=신천(信川)이 본관이 됐다. 평강파(平康派)가 강지연(康之淵)공의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이고, 16세손 강원(康遠)의 세째 아들인 1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득함(康得咸)의 큰 손자 19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서(康庶)를 파조로 모시는 상산(象山)= 곡산파(谷山派)를 이루고, 적장자(嫡長子) 강윤귀(康允貴) 후손인 평양파(平壤派)가 대종(大宗)이다. 강서(康庶)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20세손 강윤성(康允成)의 적장자(嫡長子) 21세손 강득룡(康得龍)이 조선이 개국 되자 불사이군, 고려조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하자, 조선 태조가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21세손 강득룡(康得龍) 후손인 안릉(安陵)=재령파(載寧派)를 이루는 3본은 같은 혈통이고, 57개 분파가 있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는 매년 10월 3일 과천에서 세향제를 지낸다.

신천강씨 시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성(姓)을 뺀, 호경(虎景)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있다. 강씨(康氏) 시조 성씨를 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상계가 불 분명한데다. 외가로 보이는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씨와 시대 상황을 고려 후기와 현대 상황에 꿰 맞추려 하기 때문에, 혈통이 불편해 보이기 때문으로, 2가지 이해 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성(姓)은 나라를 창건하면 소종(小宗)인 씨(氏)로 새 성(姓)을 창성(創姓)하는 것이 성씨(姓氏)란 것으로, 후기 국가로 오면서 분파로 구분 바꾸지 않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강충의 두 아들은 신라 시대 사람으로, 신천강씨 직계 조상 기록인 상계에 따르면, 관작 이동이 마한(馬韓)-강주(康州)-신라(新羅 흐름으로 벼슬이 기록돼있고, 마한이 망하는 시기 강주 지역은 가야가 있었다. 신라에서 벼슬은 이벌찬으로 기록돼있고, 이벌찬은 성골귀족이 받는 벼슬이다. 태봉국 김궁예(金弓裔) 왕후 강비(康妃)의 아버지 강연창(康衍昌)은 강호경(康虎景)의 6세 손이다. 신라가 망할 때부터 태봉국까지, 강호경 후손은 신라에서 관직을 했다. 신라는 사로 6촌장 = 왕이 6명인 형태로, 씨족 권력을 지키기 위한 진골 성골 귀족이 존재했고, 신라가 망할 때 근친 혼인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해 죽은 뒤에 추봉되는 갈문왕(葛文王)이 있었다. 강보육(康寶育)의 부인은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딸인 조카 강덕주(康德州)다. 강보육(康寶育)의 딸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들은 작제건(作帝建)이고,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는 이제건(伊帝建)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엔 어색한 일이 아니였지만, 고려 중기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성씨(姓氏) 족내혼을 금기시 하는 송(宋)나라 문화를 숭상하는 문신들 영향으로 고려 왕조 상계는 불편한 진실이 됐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30일 (일) 15:38 (KST)

성씨, 종교, 국가, 지역 개념[편집]

종교(宗教)에서 앞에 있는 종(宗)을 풀어서 설명하면 宗자는 모든 것의 가장 ‘으뜸’이라는 의미로 종가(宗家)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갓머리 집 면(宀)과 보일 시(示)의 합성어이다. 시(示)는 말뚝에 제물을 걸어 놓은 형상입니다. 이를 미루어보아 종(宗)은 신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으뜸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교(敎)는 ‘가르치다’나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敎)자는 효(爻)효 글자와 자(子)아들 + 복(攵)칠 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爻자는 ‘배움’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敎자는 이렇게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爻자에 子자와 攵자를 결합한 것으로 ‘아이가(子) 공부를(爻) 하도록 하다(攵)’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敎자는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가르친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이것을 ‘가르침’이라 했다. 따라서 종교(宗教)는 으뜸 되는 종가(宗家) 가장(家長)권력을 갖고 있는 적장자(嫡長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초기 혈족(血族)국가에서 성(姓)은 어머니 혈통을 뜻했는데, 농경 정착하는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농작물을 지키는 힘센 아버지가 혈족의 중심이 됐고, 많은 농작물을 소유한 아버지는 많은 후처(後妻) 아내를 둘 수 있었고, 많은 자녀를 출산 힘센 호족이 되면서 성(姓)은 아버지 혈통을 의미하는 문자로 바뀌게 됩니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버지 권한은 본처(本妻) 큰 아들인 적장자 종손(宗孫)이 계승했고, 종손과 사이가 좋은 형제들은 함께 했지만, 그렇지 않은 후처 아들 서자(庶子)는 대종(大宗)인 성(姓)가문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면서, 그 지역 특성에 맞는 다른 성(姓)으로 불린 것이 소종(小宗) 씨(氏)입니다. 이런 성씨(姓氏) 무한 반복되면서, 대종(大宗)인 성(姓)을 중심으로 수많은 소종(小宗) 씨(氏)가 연합한 형태가 초기 국가였고, 대종(大宗)인 성(姓)의 종손(宗孫)은 종(宗)이 의미하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사제, 왕과 같은 존재가 됐고, 제사는 죽은 자기 같은 부모를 확인하면서, 혈족이 갖고 있는 문제를 사이 좋게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 됐습니다. 종손(宗孫) 왕이 똑똑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머니가 다른 먼 핏줄 서자(庶子)의 문제 제기에 종손(宗孫)은 합리적인 답변 할 수 없었고, 문제에 대한 만능 답변으로 창조 된 것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말했어, 귀신 중에서 갑인 신(神)입니다. 신(神)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神)의 권한은 사제인 종손(宗孫) 왕(王)이 갖고 있게 됩니다. 비현실적인 신(神)의 권위로 불만 누르면, 친족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반쪽은 같은 핏줄이라, 새 지역으로 떠나 정착 새 성씨(姓氏) 국가를 창성(創姓)하게 됩니다.

예를 들 수 있는 국가는, 환국(桓國)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단국(檀國)을 세웠고, 동부여 금와왕의 서자 주몽이 졸본부여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의 서자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에서 백제를 시작했습니다.

신(神)은 현실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닌, 신앙(信仰), 믿을 신, 우러를 앙,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무릅 꿇고 우러러 떠 받들어 믿는 노예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는 의미는 적장자(嫡長子)인 종손(宗孫) 왕의 권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믿고 받아들일 땐 한 가족으로 화목하게 지내게 됩니다.

현대 국가에서도 현실적인 힘=군대 + 정신적인 힘=신앙, 2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 국가의 주인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며, 군대로 안되면 신앙으로, 신앙으로 안되면 군대로 다수의 정신과 육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 종교(宗教)는 사실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 해법을 찾는 과정으로 정치(政治)를 의미하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신앙(信仰)과 다른 의미로 출발했지만,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종교를 신앙으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적장자 의 적(嫡)은 녀(女)계집 + 적(啇)밑동 = 합성어로, 적(啇)은 갑골문에서 제(帝)임금 + 제사 용기 ㅂ 를 합성한 문자로, 적(嫡)은 임금에 뿌리가 있는 문자입니다. 교(敎)는 적장자로 혈족의 으뜸인 임금의 가르침입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30일 (일) 15:46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