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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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5·16 군사 혁명 틀 5·16 군사 혁명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인천, 포천 등에서 일어난 군사 정변을 말한다. 주체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었으며 십수명의 장성 및 수십 명의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 회의를 거쳐 군정을 수립하였다. 참여 병력으로는 공수특전단 1,000여 명, 해병대 제1여단 1,300여 명, 6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 1,700 명,[1] 제6군단 포병단 5개 대대 3,000여 명과 제5사단(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이끌고 서울 진주), 제12사단(사단장 박춘신 준장과 부사단장 및 작전참모가 이끌고 춘천 진주), 제30사단(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이 사단 이끌고 서울 진주), 제33사단(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이끌고 서울 진주),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원인[편집]

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5.16의 원인은 장면 정권을 퇴출코자 계획된 운동이었다.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민주당 세력을 제거해 군정을 수립키 위해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군 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며 부관감실에서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특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2] 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하였다.[3]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 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4]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정변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정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5]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6]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7]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8] 실상은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4.19혁명 이후의 정치권과 사회의 불안정함, 기득권과 이익집단 및 군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개[편집]

정변 초기[편집]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성공과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성한 혁명선언문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는 의원내각제이었던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소장 2012-08-23}}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출처 필요]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정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행동[편집]

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9]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 쿠데타 주모자를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10]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10]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 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11]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12]

금번 군사쿠테타가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12][13]

윤보선의 사임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박정희장도영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임을 만류했다.[14]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윤보선의 사임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14] 이때 사임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14]"라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14]"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장도영,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14][15][16]

결국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 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14][15][16]"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결과[편집]

박정희
1주년 기념우표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17]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이 초대 총재로 있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수도사단이 수도방위사령부가 되고, 그 해 10월 2일에는 출국과 입국 관리 기관의 직제가 외무부에서 법무부로 바뀐다.[18] 1962년 6월 1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 직을 겸임하게 된다.[19] 박정희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는 것이 기존의 인식이며 통설이었으나,[20][21] 그와 상반되게 1962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권한 대행은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이 이승만에게 거금 2만달러를 직접 전달토록 한다.[22]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편집]

정군운동의 폭동진압계획 역이용 봉쇄[편집]

1961년 5월 12일 검찰총장 이태희가 서울지구 방첩대장실에서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의 허락이 필요한 박정희 장군의 체포를 제촉하며 성화를 부렸으나, 참모총장 공관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조금더 살펴보겠다고 답한다.[23]

5월 15일 오후 30예비사단이 사단장 몰래 쿠데타군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들은 서울지구방첩대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행팀을 붙인다.[24]

육군본부 헌병감실에서 진압군 6관구 사령관은 진압군 측으로 오해하며 반란군 측의 6관구 사령부 참모장실에 있던 참모장 김재춘 대령에게 전화 통화로 사령부에 곧 도착하게 되는 육군본부 헌병 중대의 지휘권을 위임한다.[25]

9시반 쯔음 자택을 나서던 박정희 소장에게 거사 본부로 정해놓은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은 30사단 밀고, 33사단 출동 불능, 육군본부 헌병대의 6관구 사령부에 배치 사실을 전화로 보고한다.[26]

밤 10시까지 6관구 사령부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자택을 떠나서는 술자리를 가진 박정희 소장 일행이,[26] 6관구 사령부 쪽으로 한강 인도교를 건널 때에도 뒤따르던 미행팀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23]

박정희 내란음모[편집]

국가재건최고회의 군사정부에 시작[편집]

5월 16일 새벽 4시25분경 장면 총리의 숙소 반도 호텔에서 총리를 체포하려던 박정희 2야전군 부사령관의 부관이 이끌던 공수단 체포조에서 발포가 일어난다.[27]

이른 아침,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5월 16일 직후 박정희는 혁명 초기 상황이 유동적일 때 혁명 주체들에게는 든든한 의지처였고 反혁명세력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치하한 공수특전단덕수궁에 주둔시킨다.[28]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17일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박정희 소장은 육군방첩부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육군본부에서 군 수사기관을 동원해서 용공분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하여, 이철희 준장은 '위험인물 예비검속계획'을 입안하여 계엄사령관 등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얻는다.[29]

5월 18일 쿠데타 발생 이후로 생도들의 외출도 금지시키던 육군사관학교장은 육군본부 회의실에 강금을 당하다시피 하고 사관생도들은 모두 강제로 트럭에 태워져서 서울대학교 학군단 교관 전두환 대위가 앞장서며 동대문에서 국회 앞(현재의 서울시청 앞)을 지나는 시가 행진을 하였다.[30] 쿠데타 후반에 저명한 군인은 아니었던 박정희가 대표자로 나타났다는 이유 등으로 쿠데타가 군부로부터 거의 저지를 당했던 상황이었으나, 이 퍼레이드는 쿠데타가 군부에 지지를 충분히 받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31]

혁명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이 날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진압군으로 출동하려던 강원도 원주시 1야전군 사령관은 박정희 친위조직으로써 위관급 장교로 구성된 공수단 GD팀에 연행되어 와서 덕수궁에 강금된다.[30]

5월 19일 '위험인물 예비검속계획'에 이어서 장도영 계엄사령관은 포고령 18호를 발표하여, 전국적으로 군과 경찰이 반국가단체에 찬양, 동조가 우려되는 대상자들을 체포하여 구금 한다.[29]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폐지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로 중앙정보부를 설립하고 김종필 정보부장이 취임한다. 이 중앙정보부는 육군 첩보부대, 방첩부대 등에서 기간요원을 차출해 가며 육군방첩부대에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다.[23]

5월 26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유엔군사령부와의 합의하에 전방으로부터 5개 헌병 중대를 배속 받는다.[32]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편집]

5·16 군사 혁명 이후 구악일소(舊惡一消)의 일환으로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조리돌림되는 이정재 外 폭력조직원

정변 당시 수많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제3공화국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33]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34]

박정희는 정변 직후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35]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35]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35] 또한 1962년 3월 1일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평가와 비판[편집]

  • 장도영 전육군참모총장은 방첩대의 거짓 보고로 사전에 대비하지 못해서, 쿠데타 사건 하루 전에야 쿠데타 세력의 음모를 파악 하였다고 회고했다.[24] 다 넘어가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쿠데타를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24] 그리고 한강 다리로 헌병 50여명만 보낸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전투를 하지말고 교통 통제만 하고 싶었다고 한다.[36]
  • 이철희 전방첩부대장은 육군참모총장에게 쿠데타 음모를 보고한 이후 방첩부대장도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8.26 이상국 준장의 반혁명사건 재판에서 증언하였다.[29]
  • 백선엽 전육군참모총장은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는 쉽게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적, 개인적 자유는 앞으로 오랜 기간동안 심각하게 축소될 것이고, 박정희 등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 공산당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미국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다.
  • 정변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박정희는 정변 직후 민정이양과 이른바 혁명과업 수행을 약속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후문[편집]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국제연합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38]'고 주장했다.

정변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국제연합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사정변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으나 군사정변은 성공해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38] 정변 직후 허정장면 총리윤보선 대통령에게 연락하였으나 모두 연락이 불통이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정변의 저지를 위해 국제연합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정변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38]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38] 허정1963년 초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이 점을 문제삼아 윤보선을 공격하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쿠데타를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측근 윤치영을 통하여 지원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북한의 예측[편집]

북한은 이전부터 한국에서 군사 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 혁명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공 측에 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군사혁명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이며,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39][40]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41]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p.184 "이른바 혁명장교들이 인솔하는 해병대 1,300명, 공수특전단 1,000여 명 및 6관구 병력 등 도합 4,000여 명이었다."
  2. 혁명과 우상 1권 61~63쪽
  3. 혁명과 우상 1권 63쪽
  4. 혁명과 우상 1권 80~81쪽 & 망향 283쪽
  5. 1961년 4월24일 미 CIA 극동과가 서울 지부로부터 받은 정보 보고,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8893, 4월 24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쿠데타 모의에 대한 견해. 장 장군은 박정희를 체포하고 싶어도 증거가 없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의 체포는 쿠데타를 촉발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또 이범석과 족청계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월26일: 장면 총리는 불만을 품은 군부 내의 한 집단이 어떤 종류의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요지의 소문들을 알고 있다. 그는 이런 說(설)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상황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면은 참모총장의 업무 자세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다. 그는 장도영이 박력 있고 유능하며 미군 측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장 장군을 2년간 데리고 있을 계획이다>
  6. 이것이 4번째의 정보였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내가 입수한 정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어느 중국 음식점에 몇몇이 모여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도 알았다. … 나는 그에게 엄밀히 조사할 것을 단단히 부탁해두는 한편, 이 사건에 관련된 민간이도 확인해보라고 검찰에 명했다. 검찰로 말하더라도 그 무렵 2·3차나 그와 비슷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해본 일이 있었다. 이렇다 할 단서가 잡히지 않아 정보 사기꾼에 속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지시가 있은 지 며칠 후에 쿠데타 관련 민간인 혐의자 한 명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심문해본 결과 끝내 만족할 만한 자백을 듣지 못했다 하여 결국 또 하나의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었다. -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92~93쪽
  7. "(5.16 5~6일전) 그의 보고는 결론적으로 박정희 소장 지휘하에 쿠데타를 하려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 그 세부방법과 조직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략… "증거라고는 박소장이 잘 다니는 중국요리집과 청수장이란 한식집에서 장교들과 식사를 하는 것 뿐인데 어떻게 합니까"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 망향 287쪽
  8.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년 9월 5일. 172~188쪽. ISBN 978-89-7090-136-7. 
  9. 《김대중 자서전 1》. (주)도서출판 삼인. 141쪽. 
  1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273페이지
  11.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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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