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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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진(Kökejin, ? ~ 1300년 3월 1일)은, 몽골 제국(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황태자 친김의 비로, 테무르 칸의 어머니이다. 한자 표기는 闊闊真으로, 다른 이름은 바이람에게치(伯藍也怯赤)였다. 중국식 시호는 휘인유성황후(徽仁裕聖皇后)이다.

생애[편집]

곤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대칸 쿠빌라이가 사냥 나갔을 때 그의 눈에 띄어 쿠빌라이의 차남 친김의 처가 되었다. 중통(中統) 4년(1263년)에서 지원(至元) 2년(1265년)까지 3년간 아들 카말라, 다르마발라, 테무르를 얻었다. 현명한 부인으로써도 알려져 황태자의 칭호를 받고 쿠빌라이의 가장 유력한 후사가 된 친김의 궁정(오르도)를 잘 지켜내는 동시에 친김의 어머니와 같은 곤기라트 부족 출신 황후 차브이를 가까이서 섬겼다.

지원 18년(1281년)에 차브이가 사망하자, 군주의 후비의 궁정(오르도)과 그 영지, 재산은 같은 부족 출신의 후비에게 상속되는 몽골의 전통을 따라 생전의 차브이가 모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였다. 남편 친김은 지원 22년(1285년)에 대칸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었지만, 차브이의 보호와 친김의 권세 아래 원 왕조에서 으뜸가는 권력과 재산을 소유했던 황태자부의 관리 권한이 코코진에게 상속되었다. 친김이 죽는 뒤에도 코코진의 세 아들은 쿠빌라이의 가장 유력한 후사 후보로써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원 31년(1294년)에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대칸의 미망인이 주최하게 되어 있는 차기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코코진이 주도해 개최하였는데, 쿠릴타이에 참석한 요인 중에는 대칸 쿠빌라이의 부마(駙馬) 자격으로써 고려의 군주가 된 충렬왕(忠烈王)도 있었다. 이 쿠릴타이에서 카말라와 테무르 두 사람이 후보로 거론되었고(타르마달라는 요절) 코코진은 대신 바얀 등의 대신들의 도움으로 쿠빌라이가 생전 황태자 칭호를 주었던 테무르 올제이투를 차기 대칸으로 삼았다. 테무르가 즉위하자 그 어머니인 코코진은 황태후가 되었고, 황태자부는 융복궁(隆福宮)으로 개칭되었다. 코코진은 융복궁 세력을 배경삼아 테무르의 후견인으로써 활약하다 대덕(大德) 4년(1300년)에 사망하였다.

코코진의 소유였던 융복궁은 테무르의 황후로 바야우트 부족 출신의 불루간과 다르마달라의 미망인으로 코코진과 같은 곤기라트 출신의 다기에게 상속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대덕 11년(1307년) 테무르가 죽자 정변이 일어나 다기의 소유로 넘어갔다. 테무르가 사후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테무르 사후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현되고, 대칸(황제)의 자리를 놓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되었다.

곤기라트는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어머니 코코진 등을 배출하며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부족으로써 권력 다툼의 중심에 있었다. 곤기라트 출신이 아니었던 불루간은 궁정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불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 뒤 융복궁은 흥성궁(興聖宮)에 합쳐져 다기가 거느린 곤기라트파의 중신들의 아성이 되었고, 코코진의 유산은 부얀투 칸(원 인종)에게서 게게엔 칸(원 영종)에 걸치는 시대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코코진의 재산 가운데 들은 《고려사》(高麗史)에는 코코진이 사망한 해인 대덕 4년(1300년)에 몽골 제국의 주요 목장(아막)이 설치되어 있던 탐라(耽羅)에 방목되었고, 이 해에 원은 탐라에 다시 총관부(摠管府)를 두어 제주도를 몽골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테무르가 즉위하였을 때 충렬왕이 원 조정에 요청해 제주도를 반환받은 지 6년만의 일이었다.

가족관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