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엄흥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흥도
嚴興道
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비
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비
영월 호장
이름
시호 충의(忠毅)
신상정보
출생일 1404년
사망일 1474년 2월 26일
국적 조선
성별 남성
본관 영월 엄씨
부친 엄한저(嚴漢箸)
모친 원주 원씨(原州原氏)[1]
자녀 3남[2]
묘소 군위 의흥

엄흥도(嚴興道, 1404년~1474년 2월 26일)[3]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사사된 단종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현종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생애

[편집]

엄흥도는 영월 호장으로 당시 영월에 안치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의 사약을 받고 사사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에서 장사를 지냈다.[4] 이는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어명[5]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후 그는 영남으로 가 은신했다. 그의 묘지는 군위 의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6]

사후

[편집]
엄흥도를 모신 사당 문경 충절사, 1900년 재건되었다.

1516년(중종 11년) 단종의 무덤이 발견되어 봉분이 세워졌다.[7] 1698년(숙종 24년)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가 만든 무덤은 장릉이 되었다.[8]

엄흥도는 사육신과 함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9] 1698년(숙종 2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증직되었다. 1726년(영조 19년)에 증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1833년(순조 33년)에는 다시 증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증직되었다.[10] 1876년(고종 13년)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았다.[11]

엄흥도의 후손은 송시열의 건의로 등용되었다.[12] 1773년에 병조에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후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완문(完文)을 발급했다.[13]

관련 작품

[편집]

드라마

[편집]

영화

[편집]

각주

[편집]
  1.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41쪽.
  2.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75쪽.
  3.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40쪽.
  4. 차용걸 (1995). 엄흥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최성욱 (2019년 11월 26일). 영월엄씨 종친회, 병조가 엄흥도 후손에 내린 공문서 국가기탁. 서울경제.
  6.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37쪽.
  7. 장릉. 국립문화유산연구원.
  8. 영월 장릉. 국가유산포털.
  9. 《영조실록》 권92, 영조 34년(1758년) 10월 4일(정사) 3번째 기사
  10. 《승정원일기》 2290책, 순조 33년(1833년) 5월 29일(기해) 12번째 기사
  11. 《승정원일기》 2832책, 고종 13년(1876년) 11월 27일(갑신) 13번째 기사
  12. 《현종실록》 권16,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기해) 1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권20,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기해) 1번째 기사
  13. '단종과 엄흥도' 특별전 5주 연장 운영. 국립중앙도서관. 2026년 4월 18일.
  14. 장형은 (2026년 3월 9일). [단독] ‘왕사남’ 엄흥도 실제 직계후손 출연했다. 한겨레.

참고 논문

[편집]

관련 자료

[편집]
  • 윤봉구, 《병계집》 권60, 호장 엄흥도전
  • 신광수, 《석북집》 권15, 엄 참판 비음기
  • 이민보, 《풍서집》 권12, 엄 호장 묘표
  • 이채, 《화천집》 권14, 영월군 호장 증 참판 엄 공 묘지명
  • 한운성, 《입헌집》 권15, 증 공조참판 행 영월 호장 엄 공 시장
  • 황윤석, 《이재유고》 권23, 기 엄호장 사략

같이 보기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