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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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嚴興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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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비 | |
| 영월 호장 | |
| 이름 | |
| 시호 | 충의(忠毅)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404년 |
| 사망일 | 1474년 2월 26일 |
| 국적 | 조선 |
| 성별 | 남성 |
| 본관 | 영월 엄씨 |
| 부친 | 엄한저(嚴漢箸) |
| 모친 | 원주 원씨(原州原氏)[1] |
| 자녀 | 3남[2] |
| 묘소 | 군위 의흥 |
엄흥도(嚴興道, 1404년~1474년 2월 26일)[3]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사사된 단종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생애
[편집]엄흥도는 영월 호장으로 당시 영월에 안치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의 사약을 받고 사사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에서 장사를 지냈다.[4] 이는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어명[5]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후 그는 영남으로 가 은신했다. 그의 묘지는 군위 의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6]
사후
[편집]
1516년(중종 11년) 단종의 무덤이 발견되어 봉분이 세워졌다.[7] 1698년(숙종 24년)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가 만든 무덤은 장릉이 되었다.[8]
엄흥도는 사육신과 함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9] 1698년(숙종 24년) 증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증직되었다. 1726년(영조 19년)에 증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1833년(순조 33년)에는 다시 증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증직되었다.[10] 1876년(고종 13년)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았다.[11]
엄흥도의 후손은 송시열의 건의로 등용되었다.[12] 1773년에 병조에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후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완문(完文)을 발급했다.[13]
관련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영화
[편집]각주
[편집]- ↑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41쪽.
- ↑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75쪽.
- ↑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40쪽.
- ↑ 차용걸 (1995). “엄흥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최성욱 (2019년 11월 26일). “영월엄씨 종친회, 병조가 엄흥도 후손에 내린 공문서 국가기탁”. 《서울경제》.
- ↑ 김광순, 강영숙 & 배계용 2009, 237쪽.
- ↑ “장릉”.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 “영월 장릉”. 《국가유산포털》.
- ↑ 《영조실록》 권92, 영조 34년(1758년) 10월 4일(정사) 3번째 기사
- ↑ 《승정원일기》 2290책, 순조 33년(1833년) 5월 29일(기해) 12번째 기사
- ↑ 《승정원일기》 2832책, 고종 13년(1876년) 11월 27일(갑신) 13번째 기사
- ↑ 《현종실록》 권16,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기해) 1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권20,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기해) 1번째 기사
- ↑ “'단종과 엄흥도' 특별전 5주 연장 운영”. 《국립중앙도서관》. 2026년 4월 18일.
- ↑ 장형은 (2026년 3월 9일). “[단독] ‘왕사남’ 엄흥도 실제 직계후손 출연했다”. 《한겨레》.
참고 논문
[편집]- 김광순; 강영숙; 배계용 (2009). “충의공 엄흥도의 삶과 묘소 진위에 관한 고찰”. 《국학연구논총》 3.
관련 자료
[편집]- 윤봉구, 《병계집》 권60, 호장 엄흥도전
- 신광수, 《석북집》 권15, 엄 참판 비음기
- 이민보, 《풍서집》 권12, 엄 호장 묘표
- 이채, 《화천집》 권14, 영월군 호장 증 참판 엄 공 묘지명
- 한운성, 《입헌집》 권15, 증 공조참판 행 영월 호장 엄 공 시장
- 황윤석, 《이재유고》 권23, 기 엄호장 사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