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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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2월 3일 ~ 1898년 1월 8일/1897년 음력 12월 16일)는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어머니이다. 민치구의 딸로, 헌의대원왕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는 12촌간이다.

1863년 12월 둘째 아들 이재황의 즉위 이후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모계로는 덕흥대원군 가문의 외손이기도 하며,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6대손녀이기도 하다. 헌의대원왕에게 명성황후를 천거하여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다. 또한 부대부인은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시호는 순목(純穆)으로, 1907년 왕비로 추증되어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순목대원왕비, 순목왕비 등으로도 부른다.

경력[편집]

생애 초기[편집]

1818년(순조 18) 2월 3일 공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지낸 민치구와 덕흥대원군가문 출신인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딸로 한성부 양덕방(陽德坊) 사제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5대 대고모로, 6대조 민유중의 딸이다. 그는 민유중의 아들들 중 민진영(鎭永)의 5대손이 된다. 친정어머니 이씨부인은 덕흥대원군가의 종손 이하전의 고모였다. 어머니 전주이씨 부인은 상서로운 봉황을 만나보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 한다.

13세에 남연군의 넷째 아들 이하응과 결혼했다. 그 뒤 이하응이 흥선정과 도정에 봉해지면서 신인(慎人:정3품 종친처)과 신부인(慎夫人: 정3품 당상 종친처)으로 봉작되고, 흥선군으로 승격되면서 민씨 역시 현부인으로 진봉된다. 남편에게서 딸 1명과 흥친왕, 이명복의 두 아들을 연이어 얻는다.

시어머니인 여흥군부인 여흥민씨는 그의 친정 6대조 민유중의 형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로, 친정쪽으로는 11촌 아주머니가 된다. 그는 시집온지 얼마 안되어 시어머니 군부인 민씨가 병을 얻자 직접 한약을 시탕하여 달여올리고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 병수발을 들었지만 얼마못가 사망하였다. 시어머니 사후에는 시아버지 남연군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한다.

명성황후와의 관계[편집]

그녀와 고종의 후비(后妃)인 명성황후는 본래 12촌 자매 사이로, 명성황후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생부인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장남 민진후의 5대손이고 여흥부대부인은 민유중의 삼남 민진영의 5대손이다.[1]

철종 9년(1858년),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대 종손(宗孫)인 민치록(閔致祿)이 종통을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녀의 남동생인 민승호가 11촌 아저씨인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하여 1861년 여양부원군의 봉사손이 되었다.[2] 민승호의 양부인 민치록의 무남독녀가 훗날 고종의 후비(后妃)가 되는 명성황후 민씨이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그녀의 둘째 아들 명복이 익종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 6년(1866년), 현왕의 외숙부로서 당상관에까지 오른 민승호[3]의 양 누이동생 민씨가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책봉된다.[4]

흥선대원군이준용 등이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할 때, 음과 양으로 명성황후에게 사람을 보내 이들의 계획을 알림으로서 명성황후의 목숨을 구원하게 된다. 임오군란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사람을 보내 기별을 넣어 명성황후를 암살자들의 출입계획을 알려서 피신케 했다.[출처 필요]

임오군란 전후[편집]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5]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민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민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6]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6]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민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마침 이를 본 어떤 궁인이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6]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6] 훗날 홍계훈으로 개명했다.)가 '그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소리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7] 여흥부대부인은 자신을 의심하는 흥선대원군을 겨우 설득하여 추격을 막아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흥선대원군은 심히 분개하여 그녀를 멀리하기도 했다.

천주교 신앙[편집]

천주교 신자인 민씨는 일과문(日課文)을 읽었으며, 1863년 둘째 아들 재황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다 전해진다.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1896년 10월 불란서의 천주교 선교회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 고종의 유모이며 자신과 같은 천주교 신자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의 천주교 주교인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8년 1월 8일(1897년 음력 12월 16일)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사후 1907년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할 때 왕비(王妃)로 추존되어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 순목대원왕후(純穆大院王后)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중정화순왈순 포덕집의왈목(中正和粹曰純。布德執義曰穆)이라 하여 순목으로 정해진 것이다.

가계[편집]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TV 시리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민진후, 민진원, 인현왕후민유중의 둘째 부인인 송씨(송준길의 딸)가 낳은 자식이고, 민진영민유중이 송씨의 사후 말년에 맞이한 조씨(진사 조귀중의 딸)이다. 조씨와 민진영은 사후 민유중의 묘산에조차 묻히지 못했을 만큼 차별을 받았다.
  2. 민승호가 철종 12년(1861년) 5월 이전에 여양부원군의 종손 자격으로써 음안으로 여양부원군사손의입승전에 올랐으니 명성황후 모녀가 아들 대신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상경한 1860년부터 1861년 5월 사이에 민치록에게 입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 음안기록
  3. 민승호명성황후의 뒷배로 출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민승호는 철종 시대엔 여양부원군의 봉사손 자격으로 음보직을 받은 9품 미관말직자에 불과하였으나 친조카인 고종이 즉위한 후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해 고종 3년에 부제조(정3품 당상), 이조참의(정3품 당상), 대사성(정2품), 대제학(정3품 당상)을 역임했으며, 고종 4년에는 참판(종2품), 고종 5년에는 규장각 직제학(종2품~정3품 당상)을 역임하였다. 고종 6년에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어 고종 11년에 민승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역임한 최고 지위는 정2품 판서였다.
  4. 고종실록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3월 6일(을축) 2번째기사
  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쪽.
  6. 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55페이지
  7. 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56페이지
전임
철인왕후
조선 역대 왕후
(추존)
후임
명성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