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뤼브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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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뤼브케
Karl Heinrich Lübke
1959년의 모습
1959년의 모습
독일 독일제2대 대통령
임기 1959년 9월 13일 ~ 1969년 6월 30일
전임: 테오도어 호이스(제1대)
후임: 구스타프 하이네만(제3대)

출생일 1894년 10월 14일
출생지 독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자우어란트
사망일 1972년 4월 6일 (77세)
사망지 독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당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배우자 빌헬미네 뤼브케

칼 하인리히 뤼브케(Karl Heinrich Lübke,1894년 10월 14일 - 1972년 4월 6일)는 독일의 정치가로서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의 농림식품부 장관을 역임하고 1959년부터 1969년까지 서독대통령을 지냈다.

생애[편집]

뤼브케는 자우어란트에서 제화공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미천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전공은 측량사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원 입대하여, 중위까지 진급한다. 1923년부터 베를린에서 소규모 영농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압력단체의 사무관으로 일하다, 1930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 중앙당 당원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32년 4월 프로이센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1933년 나치스의 정권 장악으로 의회가 해산되고, 뤼브케는 공금 횡령으로 기소되어 수감된다. 그러나 정략적 기소를 뒷받침 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하여 20개월의 수감생활 후에 석방된다. 1937년이 되어서 그는 주택조합의 고위직으로 있다가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직전 건축 엔지니어링 회사인 Walter Schlempp로 회사를 옮겨 건설 매니저로 근무한다. 이 시기에 군수장관으로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후원으로 주요 군사시설 공사의 책임자로 통보 받게 된다. V2 로켓 실험 등이 행해진 페네뮌데 연구센터의 무기 실험장 건설도 그가 감독했다.

종전 후 뤼브케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에 입당하면서 정계로 복귀해, 1947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농업 장관을 역임. 1953년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의 농림식품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1959년 사회민주당 카를 슈미트 후보와 자유민주당 막스 베커 후보를 2차 투표 끝에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가 기민당의 대통령 입후보자로 선출된 것은 아데나워 내각의 정권연장을 위한 정략적 성격이 강했다.

1963년 한국이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 했을 때 한국에 1억4천만마르크를 빌려 주기도 하였다.

1966년 동독 언론에서 뤼브케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강제 수용소 건설의 현장 감독이라고 보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