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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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風水地理) 한자어의 뜻을 풀이한 그림 자연(風水)이 땅(地)의 모든 기운을 다스림(理)
한양의 명당 입지

풍수(風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과 ‘’이라는 뜻으로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아시아의 고유 사상이다.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조경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이다. 풍수라는 말은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인 장풍 득수(藏風 得水)를 줄인 말로, 생명을 불어 넣는 지기(地氣:땅 기운)을 살피는 것이다. 자연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물로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

바람과 물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지리적인 조건에 맞춰 해석하는데 산세(山勢), 지세(地勢), 수세(水勢) 즉 산의 모양과 기, 땅의 모양과 기, 물의 흐름과 기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켰고 이것에 의해서 생활하는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풍수이다.[1]

풍수 사상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한국에는 삼국 시대 이전에 전래되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는 주로 묘지 풍수나 주택 풍수, 명당과 같은 터 잡기로 생각하기도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최창조 교수(지리학)가 ‘자생풍수’(自生風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접근을 모색하면서 장례문화를 비롯하여 생태계에 의한 환경과 건축같은 학문적인 방법의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분석하고 있는 풍수는 미개한 토속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풍수에 좌향등을 정하는 데 사용하는 패쳘에서 내반 중반 외반의 삼반이 존재하는데 그 중 외반은 물의 방향으로 측정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외반의 방향은 지구 자전 운동에 따른 각가속에 의한 관성을 보정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7.5도 편서되게 방향을 보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수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산수, 좌향,운기 등으로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판단된다. 첫 번째 산수는 산과 물의 주어진 형상에 대한 분류이다. 이렇게 주어진 산수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진후에 좌향을 결정하여 그 산수와 좌향의 조합에 따른 기운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산수와 좌향에 대한 기운이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나타나는 운기에 의하여 기운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가 하는 것을 본다.

연원[편집]

풍수는 산천(山川)·수로(水流)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사상으로, 이것을 체계화한 학설이 풍수설 또는 풍수지리설이다. 근대 지리학이 들어오기 전에는 지리설로도 불렸다.

이러한 풍우(風雨) 등의 자연 현상의 변화가 인간 생활의 화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전국 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됐으나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서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의 예언설을 만들어내고(음양지리(陰陽地理) 및 풍수도참(風水圖讖)), 그것은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다시 교리로 체계화되었다. 이 설은 그러한 사상으로서, 이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주요 내용[편집]

이 설의 중심은 분묘·사찰·도관(道觀)·주거·촌락·도성을 축조하는 데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기 위하여 지상(地相)을 생각하는 데 있다(풍수상지(風水相地)). 그것은 감여(堪輿)·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 또는 감여가·지리가·음양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방위를 청룡(靑龍 : 동)·주작(朱雀 : 남)·백호(白虎 : 서)·현무(玄武 : 북)의 4가지로 나누어 바람(‘風’)이나 물(‘水’)의 양상(樣相)을 보고 구축물(構築物)의 위치를 정한다. 산천·언덕·당탑(堂塔)·가옥 등은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나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다.

큰 건축물을 예를 들면 대개 청룡을 중요시하여 남으로 향해서 백호를 우(右)로, 청룡을 좌로, 현무를 뒤로, 주작을 앞으로 하고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일지라도 지점이나 산천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다른 상황이 나타나므로 그 배당은 다만 풍수가만이 아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설에는 옛날부터 비판이 있는데, 특히 송나라 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 등에 그것이 엿보인다.[1]

한국의 풍수[편집]

한국에는 이 설이 신라 시대에 전래되었으며 한국 전통의 대지모 사상과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라 말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대가가 나왔다. 그는 대개 중국에서 기원하여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지리소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하였다.

곧 지리(地理)는 곳에 따라 쇠왕이 있고 순역이 있으므로, 왕처(旺處)·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처(衰處)·역처(逆處)를 인위적으로 비보(裨補 : 도와서 더하는 것)할 것을 말하여, 일종의 비기도참서(秘記圖讖書)를 남겼다.

뒷날 고려시대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秘記) 등은 내용 전체가 도선의 문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상에 연원(淵源)을 받은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비기라고 칭하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로부터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인심을 현혹시킨 일이 많았다.

고려 태조와 같은 이도 도선의 설(說)을 고려하여 자손을 경계하는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우는 데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 것을 유훈(遺訓)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후세의 절을 함부로 짓는 것을 방지하려는 정책적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 설은 정치적인 면과 합하여 문제되곤 하였다. 묘청(妙淸)의 천도 운동도 고려 태조 이래 서경(西京 : 평양)의 중시와 그 시설에 한 원인이 있겠지만 서경은 서북의 가장 중추요, 부강임수(負江臨水)해서 ‘兩水來處是眞龍’의 빼어난 땅이며,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우물을 못 파고, 산이 낮아서 연료가 부족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개경(開京 : 개성)도 풍수상에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 궁예전(弓裔傳),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고 있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많고 내기불예(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첩첩이 둘러 있어서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 들어서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보하기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웠다.

한편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나라의 정통성을 구변지국(九變之局)에서 찾았다. 구변지국(九變之局)은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구변도국(九變圖局)’·‘구변도(九變圖)’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한민족은 지금까지 9천여년 동안 9번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다.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는 아홉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 일종의 도참서로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의 구변(九變)은 국도(國都)의 변천(變遷)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서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書雲觀)에 전하던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있는데 ‘나무를 세워 열매(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자(木子)는 이(李)씨를 파자한 것으로 역시 개국한다는 뜻이다. ‘구변진단도’란 ‘아홉 번 변하는 진단(震檀, 단군조선)의 그림’이란 일종의 도참서(圖讖書)로, 천문(天文)·역수(曆數)·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 서운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이야기다.

1445년(조선 세종 27년) 4월에 편찬되어 1447년(조선 세종 29년) 5월에 간행된《용비어천가》 3권 15장에는 “揚子江南(양자강남) 리샤 使者(사자) 보내신 七代之王(칠대지왕) 뉘마리가 / 公州江南(공주강남) 저샤 子孫(자손) 치신 九變之局(구변지국)이 사디리잇가”라고 ‘구변진단도’에 대한 언급을 기록하고 있다. [2]

풀이해보면 “중국 진시황이 양자강 강남(금릉)을 꺼리시어 사자(使者)를 보내신들 (이미 하늘에서 정한) 칠대의 왕을 누가 막겠습니까. / (고려 태조가) 공주의 강남(전주지역)을 두려워하시어 그 자손을 가르치신들, 아홉 번 바뀌리란 이 나라 판국이 사람의 뜻이겠습니까.”

또한 “공주강 남 저샤 자손 치신 구변지국이 사디리잇가(公州江南, 畏且訓嗣, 九變之局 豈是人意).”라는 노래가 보이는데, 이는 이씨 건국이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밝혀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고려시대 말에 쓰인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라는 설이 퍼지자, 한양 삼각산 아래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이곳의 오얏나무를 베기위해 벌리사를 보냈다는데서 나왔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번동을 "벌리(伐李)"라고 칭하였고 후에 "번리(樊里)"가 되었다. 당시 번동의 자연 마을은 위치에 따라 윗벌리・가운데벌리・아랫벌리로 불렀다고 한다.[3]

이상에서 대강 보아 온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은 왕가(王家)에서는 물론 민간에게도 신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날도 《정감록》(鄭鑑綠)을 믿고, 한때 계룡산(鷄龍山)이 서울이 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직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니 하여 산소(山所)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1]

미신으로서의 풍수[편집]

지리적 입지에 따라 득실이 생기는 경험적 지혜에서 출발하였으나, 인간과 혈족과 국가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고 믿으면서 점차 미신화하였다. 현재 중국정부에서는 풍수를 "봉건시대의 미신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미국 및 서구지역의 심리학과, 의학, 출판물, 뉴스, 보도자료 등을 안내하는 '회의적 조사 위원회'(Committee for Skeptical Inquiry, 약칭 CSI)에서 발행된 기행문에서는 풍수를 "우주적 조화에 대한 미신적 신앙"으로 결론지었고 미국의 'Bullshit!'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모순되며 양립할 수 없는 경우를 들어 일관성 없음을 평가하기도 하였다.[1]

미국에서 풍수는 1990년대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CNN 등 주요 언론에 풍수에 관한 기사가 실리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풍수의 개념을 중국인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풍수의 중국어 발음인 ‘펑슈에이’(Feng Shui)라고 말하며, 상당수의 사람들이 집과 사무실, 가구 등의 방향과 위치에 있어 풍수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4] [5]

산수(山水)[편집]

동북아시아 한,중,일에서는 풍수에 대한 과학적 또는 학문적으로 첫 번째로 살펴보는 것이 산수인데 산과 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으로 산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의 좌향을 살펴보고 물은 흘러가는 입출구를 따져 뒤쪽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곡구나 산록 사면의 입지를 말하는 것으로,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명당으로 보는 것이 풍수의 기본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산임수 지형은 대한민국의 지형 계절풍 기후 조건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1]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최창조 (2009.11.27).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 이론》. 민음사. ISBN 9788937426735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변지국(九變之局), 한국학중앙연구원(1998년)
  3. 1936년 8월 7일 동아일보 7면 사회 기사(가십)에는 벌리(伐李)와 왕심리(枉尋里)라는 제목으로 '惠化門外(혜화문외) 十餘里(십여리)쯤 되는곳인데 그 本名(본명)은 伐李(벌리)였다. 高麗(고려)의 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에 "李王都漢陽(이왕도한양)"이란 說(설)이 있는 故(고)로 高麗忠肅王(고려충숙왕)이 크게 걱정하야 漢陽(한양)에 南京府(남경부)를 設立(설립)하고 李姓(이성)을 가진사람으로 府尹(부윤)을 삼으며 三角山下(삼각산하)에 李樹(이수)를 많이 심어서 그것이 茂盛(무성)하면 문득 斫伐(작벌)하야 地氣(지기)를 누르고 地名(지명)을 伐李(벌리)라 했드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강북구 번동에 대한 얘기이다.
  4. 미국에 “풍수열풍이 불고 있다!”뉴스코리아, 2010년 8월 6일
  5.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실제로 자미원국의 형상으로 풍수가 빼어나다는 평가이다.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