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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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Trot)는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장르이다. 트로트는 일본 엔카 음악이 한국에서 현지화한 음악이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구미 춤곡의 하나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본 토속 음악에 접목 돼 엔카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에서 전해오던 세 박자 또는 다섯 박자(3+2)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트로트》라고 부르고, 빠른 두 박자(쿵짝, 쿵짝…)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뽕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뽕짝》은 속어로 보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역사[편집]

일제 강점기[편집]

트로트의 탄생기/ 정립기[편집]

1920년 이전 일본에서는 일본 고유의 민속음악에 서구의 폭스트로트을 접목한 엔카[演歌]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 음악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1920년대 한국의 들어와 한국식 트로트풍(風)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보통 빠르기의 템포를 가진 엔카를 안단테 트롯트(Andante Trot), 조금 느린 템포의 엔카는 미디엄 트롯트(Medium Trot)라고 표기하는데, 엔카(演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 트롯트(Trot) 리듬이 다름 아닌 1914년 ~ 1917년 사이에 미국에서 생겨난 댄스리듬인 폭스 트롯트(Fox Trot) 리듬이라는 사실은, 이 시기의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의 음악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일본이 미국과의 음악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아본다.

1903년 일본의 천상당(天賞堂)이란 상사에서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의 평원반 레코드를 최초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을 계기로, 1908년에는 미국의 빅타레코드를 수입하고, 1910년에는 일본 축음기회사(日蓄:닛지꾸)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신식가요가 어떤 경로와 기술적인 영향밑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음악은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사를 통해 바로 바로 수입되었고, 이 형식을 빌려 일본의 가요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레코드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위에서 언급한 폭스 트롯트뿐만 아니라, 모든 재즈, 폴카(Polka), 마치(March), 월츠(Waltz), 그리고 라틴(Latin) 리듬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제적인 예이다.

1914년 닛지꾸(日蓄)회사는 일본 최초의 유행가라 할 수 있는 松聲과 카츄사의 노래(復活唱歌)를 松井須磨子의 노래로 취입하고, 1915년에는 《곤도라의 노래》, 1918년에는 《사스라히노 우타》를, 그리고 1919년에는 한국에서 주인공을 조중환의 소설 《장한몽》의 등장 인물인 이수일과 심순애를 등장시켜 장한몽가로 옮겨놓은 《금색월차(金色月叉)》를 취입하여 드디어 자국 가수 취입시대로 접어 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엔카의 형식을 가진 노래가 아니라 서양곡에 가사를 따로붙여 노래한 번안곡이거나, 일본의 민속음악인 부시(節) 형식의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인 엔카(演歌)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노래는 1921년에 발표된 나까야마 신요우(中山晉平)작곡의 센도코우타(船頭小唄)이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923년까지 《카레루 스스키》라는 제목으로 일본 전역에 유행했다. 그러나 이후 1930년까지는 이렇다할 노래가 발표되지 않았다.

1922년1930년 사이에 일본 가수의 노래가 거의 발표되지 않은 대신, 닛지꾸(日蓄)회사와 콜럼비아 빅타레코드 등은 한국 가수들을 대거 취입시키는데, 《사의 찬미》의 윤심덕을 비롯해 《낙화유수》(김서정 작사/작곡)의 이정숙과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작곡)의 채규엽 및 세동무의 채동원, 그리고 《암로(暗路)》의 김연실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엔카의 비조(鼻祖)로 삼는 고가마사오의 1931년 작품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淚 溜息 )》가 발표되기 한 해 전까지, 이미 한국의 가수들은 한국 작곡가가 작곡한 신식가요(유행가)를 레코드로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트롯트와 일본의 엔카는 같은 시기에 같은 궤적을 따라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흡사한 모양으로 태동하고 또 발전해 온 것이다.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음반산업과 라디오 방송으로 대표되던 거대 매체가 자리잡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30년대 중후반 트로트의 주류화를 결정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이래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이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등이 있다.

광복 이후 ~ 1950년대[편집]

1947년에 데뷔한 현인은 《신라의 달밤》을 크게 히트시켰다. 이후 195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통해 많은 명곡을 발표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기간 동안 현인의《전우여 잘 자라》, 신세영의《전선야곡》과 같은 전쟁가요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휴전 이후에는 전쟁의 아픔과 실향민의 비애를 그린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같은 곡이 유행했다. 특히 1954년이해연이 발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한국 전쟁의 아픔을 깊이 담아냈다는 평가를 얻어 크게 히트했다.

한국 전쟁 전후에 월북한 작가들의 작품은 발행금지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는데, 작곡가·작사가나 가수의 곡 또한 많은 곡이 발행금지 처분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재홍의 《유정 천리》와 같은 곡을 비롯해 많은 곡이 1988년까지 발행되지는 않았으나, 인기를 끌어 노래는 불리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의 대표 가수 이미자가 데뷔했으며, 1959년경부터 LP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고학력의 가수가 등장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출처 필요] 또한 트로트는 왈츠, 블루스, 탱고, 맘보, 룸바, 부기우기 등과 더불어 ‘리듬’의 하나로 간주돼 악보 앞에 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에 발표된 《늴리리 맘보》, 《비의 탱고》, 《기타 부기》와 같은 곡들은 트로트 리듬을 기초로 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1950년대까지 트로트를 하나의 형식이나 장르로 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1960년대 ~ 1970년대[편집]

트로트는 196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이 장르가 뽕짝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1960년대 중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고, 이 가운데 뽕짝은 비칭(卑稱)의 성격이 강해서 점차 트로트라는 말로 대체됐음을 알 수 있다. LP판의 시대가 접어들면서 트로트는 한층 더 발전되어갔다. 특히 1959년에 데뷔한 이미자는 1960년 대에 왕성한 활동을 하는 가수 중 하나로 선꼽하며 이 시기에 정상에 올라 트로트의 중심에 서 있던 가수이다. 그리고 최희준, 김상희 등 고학력의 가수가 등장하면서 학사 출신 가수들이 주목을 받았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데뷔한 현미의 《밤안개》가 인기를 끌었다. 또한 1961년에는 한명숙이 발표한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일본하마무라 미치코 등이 리메이크하면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권까지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1]. 1966년에는 《동숙의 노래》로 데뷔한 문주란이 있었는데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가수로 손꼽혔다.

1967년에는 남진이 부른 《가슴 아프게》가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에는 그의 라이벌이자 후일 국민가수로 불리는 나훈아가 데뷔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신인가수가 등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매 가수들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워싱턴 광장》, 《울릉도 트위스트》등을 부른 정씨스터즈를 비롯해 《남성 금지구역》,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등을 부른 이씨스터즈, 《마포종점》, 《삼천포 아가씨》등을 부른 은방울 자매가 유명하다.

1970년 대에는 신인 가수였던 남진, 나훈아가 라이벌 2인 체제를 이루어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이 시기에는 통기타 가수, 포크송 가수 등 여러 장르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지만 트로트 가수였던 남진, 나훈아의 인기가 더 많았기 때문에 트로트가 아직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남진은 팝 스타일과 빠른 템포의 트로트를 선보였으며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를 주로 노래하였기에 이 때부터 트로트는 정통과 정통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악적 요소로 세분화되어가고 있었다. 문주란은 〈공항의 이별〉, 〈공항의 부는 바람〉, 〈공항 대합실〉등 공항 시리즈가 인기를 얻었다. 1975년에는 송대관이 직접 작사한 《해뜰날》이 많은 사랑을 받아 가수왕에 등극하기도 하였고 1976년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트로트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7년에는 그룹사운드 '히식스', '최헌과 검은나비' 등을 결성해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최헌의 《오동잎》이 후반에 히트하였고 이성애일본에서 데뷔하면서 트로트를 소개했다. 이후 조용필이나 김연자, 계은숙 등의 가수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트로트 곡이 히트하기도 했다.

1980년대[편집]

1970년 대 말에 조용필이라는 대형 가수가 등장하여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등의 트로트 가요를 히트시켰다. 이 시기에도 다양한 국내 음악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무엇보다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트로트계 여성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김수희, 심수봉, 주현미가 대표적이다.

김수희는 작곡가 출신으로 미8군 부대에서 '블랙켓츠'의 보컬로 활동하여 《남포동 부르스》, 《멍에》, 《잃어버린 정》등 느린 곡조의 트로트를 히트시켰고 다양한 창법을 트로트에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1986년에 대한민국의 국민가요이자 응원가로 유명한 《남행열차》로 많은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심수봉은 제 2회 대학가요제에서 처음으로 트로트로 출전해 입상한 계기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였고 《당신은 누구시길래》, 《무궁화》, 《사랑밖엔 난 몰라》등 자작곡들을 히트시켰는데 1984년,《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2만 여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주현미는 약사 출신으로 제 2회 강변가요제로 데뷔하여 《비내리는 영동교》, 《울면서 후회하네》,《눈물의 부르스》등을 히트시켜 1988년, 《신사동 그 사람》으로 MBC 10대 가수상, 제18회 KBS 가요대상 대상, 제 3회 골든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 대 후반에는 트로트의 최고 정점을 찍는 시기였다. 1987년에는 당시 여고생이던 문희옥이 《사투리 디스코 메들리》로 360만 장을 판매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데뷔했으며, 1989년에는 당시에 새로운 도시로 떠오르던 남서울 영동을 노래한 《사랑의 거리》를 발표했다.

문주란이 남편과 아내의 삶을 표현한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를 히트시키면서 여러 세대층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엔카 가수로 크게 성공한 김연자의 《수은등》, 미8군 부대에서 활동하던 김지애의 《물레야》가 히트되어 트로트를 활성화시켜주었다.

문성재1982년에 《부산 갈매기》를 불렀고 이 노래는 롯데 자이언츠 야구대표팀의 응원가로 쓰이면서 더욱 히트하였다. 그 해 설운도는 KBS 신인탄생으로 데뷔하였고 데뷔곡 《잃어버린 30년》이 이산가족찾기운동의 주제가로 쓰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철1989년에 《봉선화 연정》으로 KBS 가요대상 본상을 수상하면서 트로트의 황제의 위력을 전국에 전파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태진아는 임종수가 작곡한 《옥경이》로 가수로서의 두 번째 데뷔를 하였고 가요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990년대[편집]

1980년대 말에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성공을 이뤄낸 송대관태진아는 트로트 신예로 급상승한 설운도,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인기를 얻은 현철 (가수)와 함께 트로트 사국시대를 형성하여 트로트 음악의 부활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는 방식과는 약간의 다른 음악적 요소를 접미시켜 새로운 방식의 트로트를 대중들에게 선보이기도 하였다. 배일호는 농민 출신의 가수로 《신토불이》를 불러 한국산 농산물을 홍보하는 계기가 되어 한동안 코리아 드림 열풍이 불기도 했다.

한편, 여성 가수들 중에서 서울 시스터즈로 데뷔했던 방실이가 솔로 가수로 전향하여 음반을 낸 《서울탱고》가 가요계 정상권을 차지하며 트로트의 위상을 떨쳤다. 또한 최유나의 《흔적》, 한혜진의 《갈색추억》, 박윤경의 《부초》등 서정적이고 단조로운 분위기의 트로트들이 주로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 ,발라드.댄스 팝,R&B,힙합 한국 가요계를 주도하면서 트로트는 상당히 소외되었고 트로트를 고집하던 가수들은 한동안 침체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댄스가수였던 김혜연이 등장하여 기존의 정통 트로트에 여러 음악적 요소를 가미시킨 세미 트로트를 선보였다. 김혜연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으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열풍" 을 일으켜 젊은 층들을 확보하며 신세대 트로트 가수로 자리잡았다.

2000년대 이후[편집]

김혜연이 새로운 세미 트로트를 시도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들은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나 트로트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목시킨 세미 트로트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트로트의 다변화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트로트 음악은 아직까지 어른들의 노래 (일명: 성인가요),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 등으로 인식되어 중견층들에게 국한되어 왔다. 하지만 2004년장윤정이 데뷔함과 동시에 《어머나》로 "어머나 열풍" 을 일으키면서 점점 트로트가 신세대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 여파로 트로트 음악은 계속 정통이 아니라 퓨전으로 대중에 널리 보급화되었다. 그리고 2005년박상철이 발표한 《무조건》은 남성들이 노래방에서 아님 회식 자리 등 여러 행사에서 선곡되는 트로트곡 1위로 자리잡았다. 2006년에는 박현빈이 《곤드레만드레》로 트로트계 신예로 부상하면서 이 세 가수는 트로트계 새로운 3인자로 급부상했다. 이들의 탄생으로 많은 젊은 가수들이 트로트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데 윙크, 홍진영, 김수찬 등 젊은 트로트가수들이 배출되고 있다.

특히 정통 트로트에 장르의 음악과 결합시켜 트로트를 재조명하는 음악 프로그램 〈트로트 엑스〉가 2014년 3월부터 방송되고 있고 현재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난 세미 트로트가 보급화되고 있다. 하지만 정통 트로트 계보도 이어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주현미, 문희옥, 김용임, 유지나 등이 있다.

기타[편집]

트로트와 비슷한(같은) 음악에는 대만의 타이위거, 인도네시아의 (Ngebor)[2], 태국의 룩퉁(Luktung)[3], 터키의 (Uskudar)[4] 등이 있다.

연대별 히트곡[편집]

일제강점기 ~ 1950년 대[편집]

1960년 대[편집]

1970년 대[편집]

1980년 대[편집]

1990년 대[편집]

2000년 대 이후[편집]

주석[편집]

  1. 〈박성서의 7080가요 X파일〉佛 샹송가수, 한국가요 부르다, 서울신문, 2007년 2월 8일자.
  2. "Ngebor".
  3. "Luktung".
  4. "Uskud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