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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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출생 1947년 2월 11일(1947-02-11) (67세)
미국 미군정 조선 경상남도 부산
(대한민국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활동 영역 가수, 작곡가, 작사가
활동 기간 1966년 ~ 2008년 (잠정 은퇴)
데뷔일 1966년
데뷔작(곡) 〈약속했던 길〉
《천리길》
대표작 사랑은 눈물의 씨앗
배우자 정수경
종교 천주교
웹사이트 http://www.a-risu.com/
대표곡
사랑은 눈물의 씨앗 1968년
강촌에 살고 싶네 1968년
님 그리워 1969년
바보같은 사나이 1970년
가지마오 1971년
찻집의 고독 1971년
머나먼 고향 1972년
고향역 1972년
해변의 여인 1972년
물레방아 도는데 1973년
녹슬은 기찻길 1973년
애정이 꽃피던 시절 1977년
이별의 고속도로 1978년
대동강 편지 1981년
사랑 1983년
18세 순이 1983년
울긴 왜 울어 1984년
잡초 1984년
청춘을 돌려다오 1985년
건배 1989년
무시로 1989년
갈무리 1990년
영영 1990년
어매 1993년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1999년
아담과 이브처럼 (With. 배종옥) 2002년
모르고 2003년
공 (空) 2003년
아리수 2003년
홍시 2005년
고장난 벽시계 2005년
사내 2005년

나훈아 (羅勳兒, 1947년 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아리랑 가수이다. 본명은 최홍기 이다.

생애[편집]

1947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자 무역상이셨던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나훈아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다고 한다.사실 나훈아의 지인들은 나훈아가 악기를 다루는데 능숙하고 그 중에서도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말한다. 이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었던 자신의 형을 따라 1965년서울로 상경하여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나훈아는 처음으로〈약속했던 길〉을 취입하고 1966년에 당시 19세 나이로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훈아는 1968년부터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면서〈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시작으로〈강촌에 살고 싶네〉,〈님 그리워〉가 대중들로 부터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가지마오〉가 크게 히트하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1972년에는〈고향역〉,〈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당시 스타일의 트로트로 사랑받던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서로 경쟁을 벌여 남진 아니면 나훈아가 대한민국의 최고의 가수상이라 할 수 있는 가수왕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사 기록을 보면 남진이 거의 대부분 1위와 동시에 가수왕상을 수상하였으며 나훈아는 2위를 한 것으로 집계했다. 결국 그 시대에는 그 어느 가수라도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수 없었다. 남진전라남도 목포 출신이면서 박진감 넘치는 빠른 템포 스타일의 트로트를 자주 불렀고 반대로 나훈아는 경상도 출신이면서 감미롭고 서정적인 정통 트로트를 자주 불렀기 때문에 서로 다른 차이점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경쟁하면서 대한민국의 가요계를 장악하였는데 이 시기에 침체된 대한민국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어 대중가요 활성화를 이끌었다. 1970년 대에는 나훈아가 주요 히트곡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남진이 발표하는 노래와 한꺼번에 인기를 얻게 되자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다. 그 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남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고 나훈아는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였다. 남진과 나훈아가 동시에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라이벌 경쟁구도에서는 남진이 근소하게 우위를 보였지만 이후에 나훈아가 좀더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남진과 나훈아는 한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관계로 발전하였다.

나훈아는 남진과 달리 대부분 차분하고 조용한 노래를 선곡하였으며 당시 무대에서 다양한 포즈와 꺾기 창법으로 트로트를 맛깔나게 불러 중년층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듯이 삼성그룹 이건희의 연회에 참석할 것을 초청받았으나 나훈아는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노래를 한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전성기를 한창 누비고 있었던 나훈아는 1972년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 나훈아가 공연 중에 피습당해 몇 개월동안 입원해야 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들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듣고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훈아는 이 시기에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가 돼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갔다가 1973년 대한민국 공군에 자원 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1973년 배우 고은아의 사촌관계인 이숙희와 결혼했다가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2년 만인 1975년에 이혼했다.

그것도 잠시, 영화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여배우 김지미1976년에 결혼을 발표하며 국민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훈아의 방송 출연이 점차 줄어들고 남진도 신군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2인 체제가 사라졌다. 1977년에는 심수봉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노래실력에 감탄한 나훈아는 심수봉을 가수로서의 데뷔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결혼과 동시에 방송에서 좀처럼 출연하지 않고 잠잠했던 나훈아는 1981년에《대동강 편지》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하였으며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고 1984년에 대형 가수 중에서는 조용필의 다음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데이지쿠 레코드와 계약해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1986년에는 "20세기 최고의 가수", "대한민국의 가왕" 이라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조용필의 영향이 너무나 커서 나훈아의 인기가 위축되기는 했으나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개인 소속사를 만들며 자신만의 특별한 창법을 고수하면서 끈기를 가지고 음악작업을 하였다. 결국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무시로〉라는 노래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후 나훈아는 일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나훈아의 공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방송에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설과 추석 등 명절의《나훈아 특집 쇼》뿐이기 때문이다. 홍보와 마케팅에 집중하는 젊은 가수들은 위험할 수도 있는 뜸한 방송 활동이라는 일종의 희소 가치는 그의 단독공연에 관객들을 몰려들게 했고 한층 그의 존재감은 전설로 상승했다. 또한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영영〉,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홍시〉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신인 가수들의 등장으로 이전 만큼보다는 활동이 뜸했으나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표 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나훈아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더불어 작곡과 작사 능력으로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로 자리매김했으며 19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약 2,500곡을 취입하고 정규 19개를 포함한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나훈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약 800곡 이상 정도 추정하고 있다. 나훈아가 작곡과 작사를 했던 노래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잡초〉, 〈사랑〉, 〈울긴 왜 울어〉, 〈무시로〉, 〈갈무리〉 , 〈영영〉 ,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사내〉가 있으며 조미미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 〈연락선〉 ,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 인순이의 〈잠깐〉, 강진의 〈땡벌〉(엄연히 말하자면 나훈아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곡)이 있다. 그리고 나훈아 등의 외모를 비슷하게 하고 목소리도 비슷하게 한 모창 가수, 일명 "이미테이션 가수"도 생겼으며, 너훈아, 나운하 등이 활동했다.

가족[편집]

  • 배우자는 1976년 〈여군 일등병〉으로 데뷔한 가수 정수경 (본명: 정해인) 이다.
  • 사촌동생은 현재〈최고의 여자〉로 활동 중인 가수 나진기 (본명: 최진기) 이다.

학력[편집]

  • 서울 서라벌예술고등학교
  • 부산 대동중학교

음반 목록[편집]

정규 음반[편집]

  • 2006년《덤; 40th Anniversary New Album》
  • 2005년《New Free Stlye》
  • 2005년《벗; 40th Anniversary Special Album》
  • 2003년《Feeling Album : 空》
  • 2001년《아담과 이브처럼》
  • 1999년《人生》
  • 1995년《30th ANNIVERSARY '1995' NEW ALBUM》
  • 1993년《2000곡 취입 기념 신곡 앨범》
  • 1992년《92 Newalbum》
  • 1989년《22주년 기념신곡》
  • 1984년《청춘고백》
  • 1981년《`81 나훈아 제 1집》
  • 1977년《님 찾아 가는 길/ 두 손을 잡아요》
  • 1973년《감나무골》
  • 1972년《나훈아 제 7집》
  • 1970년《정훈희/ 나훈아 (omnibus)》
  • 1969년《사랑 흘러 江물 흘러/ 임 그리워 (omnobus)》
  • 1966년《천리길》

출연작[편집]

영화 출연작[편집]

  • 1983년 <3일낮 3일밤>
  • 1983년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1973년 <동반자>
  • 1973년 <어머니의 영광>
  • 1973년 <우정>
  • 1973년 <어머님 생전에>
  • 1973년 <나 혼자 못간다>
  • 1972년 <친구>
  • 1972년 <미움이 변하여>
  • 1971년 <인생 유학생>
  • 1971년 <풋사랑>

주요 수상경력[편집]

  • 2007년 제5회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 가수부문
  • 2001년 MBC 명예의 전당 가수부문
  • 1998년 MBC 가요제전 본상
  • 1996년 건국이후 가요 베스트50 3위
  • 1996년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상
  • 1988년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
  • 1972년 KBS 음악대상

일화[편집]

1. 1976년 7월 9일, 나훈아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톱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하여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하지만 각종 루머에 휩쓸려 7년만에 이혼하였고 이혼 당시, 나훈아는 이 한마디를 남기면서 자신의 전재산을 몽땅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2. 실제로 나훈아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자주 초대를 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보통 다른 가수들이 그런 류의 파티에서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가량을 받는다는 것인데, 나훈아는 실제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을 정도라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이 에피소드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등장하며, 김용철은 이 일화를 얘기하며 나훈아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3. 2006년, 2월 20일, 노래반주기 생산업체 TJ미디어가 자사 반주기를 통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나훈아는 ‘노래방 수록곡 순위’에서 153곡을 등재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2위 (110곡)과는 무려 40여곡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위는 조용필(98곡)이 차지했으며 4위는 이미자(84곡) , 5위는 이승환(82곡)이 뒤를 이었다. 6위 ~ 10위에는 보아(72곡) , 김건모(71곡) , 김경호(67곡) , 임창정(66곡) , 조성모(66곡)가 각각 올랐다. 당시 일본에 진출에 성공한 신승훈이승철은 62곡으로 공동 11위에 랭크됐다.

사건[편집]

나훈아 피습 사건[편집]

1972년 7월 4일, 나훈아는 서울시민회관 (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는 한 정신이상자가 리사이틀 공연 도중, 무대에 뛰어올라 깨진 사이다병 파편으로 나훈아를 습격했다. 갑작스런 습격으로 나훈아는 왼쪽 얼굴에 5cm 가량의 상처를 입어 큰 부상을 입었고 나훈아는 72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언론매체들은 용의자가 김 씨인 것을 감안해 당시 라이벌이었던 남진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몰고 갔지만 남진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이 때 남진의 팬과 나훈아 팬들이 크게 대립해 긴장감이 조성되었었다. 나훈아 측은 용의자 김 씨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계획된 테러집단의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나훈아 루머설과 이혼 소송[편집]

2008년 1월, 모 스포츠 기자가 블로그에 '중견가수가 가슴 큰 젊은여배우와 스캔들이 나서 야쿠자에게 보복당했다'는 글을 올렸고 이것이 부풀려져 나훈아 쪽으로 몰아갔고 결국 나훈아가 직접 기자회견을 마련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으며 이 사건 이후로 현재 약 4년간 잠적한 상태이다. 당시 기자회견 때 " 벗어야 믿겠습니까? " 라는 말과 함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으려는 행동을 보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기자회견 이후 잠정 은퇴하였다. 잠정 은퇴 중에도 팬들을 위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기자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칩거 중이다. 칩거 생활 와중에도 나훈아는 가수로 복직하려고 여러 시도하였으나 칩거 생활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져 결국 2011년 8월, 아내 정수경이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가수로의 복직은 불분명해졌다.

아리랑 소리꾼[편집]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가요 이름을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비속어나 외래어를 쓰지말고 아리랑이라고 하자고 주장하고, 스스로 전통 가요를 부르는 가수라는 뜻으로 아리랑 가수, 아리랑 소리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1]

나훈아의 근황[편집]

2011년 8월 부인 정수경이 이혼 및 재산분할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3년 9월 대법원에서 기각되었으며,[2]지난 여름 뇌경색 증세를 보여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칩거중에 있다. 최근 뉴스기사에 2013년 5월 23일, 나훈아는 분당에 위치한 뇌질환 전문병원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현재 나훈아는 한동안 말을 어눌하게 하는 등 뇌경색 증상을 보였지만 양·한방 치료를 받으며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쾌유한 것으로 밝혔다. [출처 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21&newsid=01138166602811872&DCD=A10202]

주석[편집]

  1. "42년 아리랑 인생...국민가수 나훈아를 말하다", 《스타in》, 2008년 1월 25일 작성. 2011년 10월 19일 확인.
  2. 김명신 기자. "나훈아, 이혼소송 승소 확정 "세 번째 이혼 없다"", 《데일리안》, 2013년 9월 12일 작성. 2013년 9월 13일 확인.

바깥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