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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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리수
신상정보
본명 이음전
출생 1910년 1월 1일(1910-01-01)
경기도 개성
사망 2009년 3월 31일(2009-03-31)(99세)
분야 연극, 대중 가요
주요 작품
황성의 적
영향
대표작
황성의 적〉(荒城의 跡) 1932년

이애리수(李愛利秀, 1910년 1월 1일 ~ 2009년 3월 31일)는 일제강점기의 연극배우 겸 가수이다.

생애[편집]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이음전(李音全)이다. 한때 본명이 이보전(李普全)으로 알려졌으나 잘못된 것이다.[1] '애리수'라는 예명은 서양 이름 '앨리스'를 음차한 것이라 이애리스라고 표기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9세 때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삼촌이 연극배우라 순회 극단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애리수는 신극좌, 민중극단, 취성좌 등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면서 점차 유명한 여배우로 성장했고,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등 흥행극단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는 대중가요 시장이 성숙하지 않아 배우가 가수를 겸하던 때였다. 인기 배우였던 이애리수도 막간 가수로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음반을 취입하였다. 1931년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부른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 번안곡이 정식 데뷔곡이다.

1932년빅타레코드로 옮긴 뒤 발표한 전수린 작곡의 〈황성의 적〉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대중가요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애리수의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를 소재로 삼아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린 이 노래는 1920년대에 만들어져 이애리수가 연극 공연 중 막간에 부르면서 크게 유행하였고, 이때 정식으로 발매된 것이었다. 이 노래는 〈황성옛터〉로 제목이 변경되어 오랫동안 불리고 있다.

이애리수는 전문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성의 소박한 가창법으로 노래하였고, 193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전문 여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수그러들었다. 이 무렵 두 번이나 음독자살 소동을 벌인 끝에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2][3] 2009년 3월 31일 100세에 단 1년만을 남겨두고 노환으로 별세했다.[4]

참고자료[편집]

  • 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2006년 12월 15일).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서울: 소도. 265~266쪽쪽. ISBN 9788990626264. 

각주[편집]

  1. 정홍택 (2008년 11월 4일). '80년 은둔' 女가수, 그동안 세상과 소통 안한 이유는…”. 한국일보. 2008년 12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1월 8일에 확인함. 
  2. 이동순 (2013년 12월 29일).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이애리수”. 조선일보. 2018년 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3. 정홍택 (2008년 10월 28일). “80년간 과거 숨기고 산 '전설의 女가수'. 한국일보. 2008년 10월 3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28일에 확인함. 
  4. 이은정 (2009년 4월 1일). '황성옛터' 가수 이애리수 씨 별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