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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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의 주나라 일족의 제후국 오(吳)나라에 부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고 한다. 초나라 성씨에도 오(吳)씨가 있다. 중국 오씨도 3가지 정도의 계통이 있다.
한국 오씨의 유래 [편집]
한국 오씨의 시조는 오첨(吳瞻)으로, 신라 지증왕 원년(500년)에 신라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서 21년을 살았다. 둘째 오응(吳應)의 11세손 오희(吳禧)는 3남 1녀을 두었는데, 딸은 고려 태조 왕건의 비가 되어 혜종을 낳았고, 세아들 중 1남 오상(吳相)은 금성백, 2남 오환(吳桓)은 수양백, 3남 오검(吳檢)은 천령백에 봉해졌다. 한국 오씨는 164본 이상이 문헌으로 전해지는데 16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시조와 유래는 알 수 없다. 토착 오씨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본관 [편집]
본관 분리 흐름 [편집]
| 해주 오씨 | 울산 오씨 | 낙안 오씨 | 고창 오씨 | 함평 오씨 | 나주 오씨 | 평해 오씨 |
| 동복 오씨 | 군위 오씨 | |||||
| 보성 오씨 | 장흥 오씨 | 흥양 오씨 | 화순 오씨 | 함양 오씨 | ||
해주 오씨 (海州吳氏) 해주오씨1 해주오씨2 해주오씨3 해주오씨4
1> 시조 : 오현보[吳賢輔]. 오인유[吳仁裕]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연릉 사람인 태백이 세운 오(吳)나라에 부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 우리나라 오씨의 비조(鼻祖)는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초나라 제상)의 45세손이 신라 지증왕 1년(서기 500년)에 중국에서 신라국으로 건너온 오첨(吳瞻, 武惠公)으로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사시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때 두아드님 중에 둘째 아들 응(應)이 그대로 함양에 남아서 살았다. 그후 첨의 11孫인 吳禧는 3남1녀를 두셨는데 따님께서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禧는 國舅(국구)가 되어 다련군에 봉해졌으며, 장화왕후는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의 모후가 되신다. 또한 다련군의 아드님은 각각 금성백(錦城伯) 수양백(首陽伯) 천령백(天嶺伯)에 봉해져 고려시대에는 수양오씨로 부르게 되었으며 문양공을 중시조로 여겼다. 그후 첨의 14世孫 광우가 족질 우경과 980년에 宋나라에 들어가 성도임앙(現 泗川省 內)에 살았는데 후손 오연총(吳延寵:오첨의 18세손)이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다시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 예종때 원수 윤관과 부원수로써 여진을 정벌하였으며 중서시랑평장사 이르렀고, 시호는 문양공(文襄公)으로 文武에 걸쳐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또한 해주오씨의 가문을 가장 드높였다. 문양공과 윤관 선생의 우정에서 사돈(査頓)이라는 한국의 고사성어가 생겼다. 오연총(문양공)의 6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의 세 아드님인 현보(字:應夫), 현좌(字:應儒) 현필(字:應男) 3형제가 1216년(고종3) 거란을 토평한 공으로 현보는 해주군, 현좌는 동복군, 현필은 보성군에 봉해져 각각 해주, 동복, 보성오씨로 분적하였으며 이후 오씨의 많은 분적이 이루어졌다.
해주군 현보는 비조 오첨으로부터 24世孫이며 관직은 1199년에 낭장으로 명주민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뒤 상장군에 올랐으며 1224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참지정사(종2품)로 卒하셨다.
오씨의 분파 중 해주오씨라고하는 분파는 두 파가 있다. 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오연총(문양공)의 6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의 세 아드님인 현보(字:應夫), 현좌(字:應儒) 현필(字:應男) 3형제가 1216년(고종3) 거란을 토평한 공으로 현보는 해주군, 현좌는 동복군, 현필은 보성군에 봉해져 각각 해주, 동복, 보성오씨로 분적하였다. 또 하나는 비교적 나중에 황해도 해주에 정착한 오인유를 시조로하는 해주오씨이다. 지금 확인할수 있는 오씨대동보에서는 위의 내용은 공통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족보는 수양오씨 족보이다. 수양(首陽)이란 고려 제2대 황제인 혜종의 세 외삼촌 세 분이 각각 금성백(錦城伯) 수양백(首陽伯) 천령백(天嶺伯)에 봉해진 뒤 수양백의 12대손 삼형제가 나란히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졌지만 그들 보두 수양백의 후예이기 때문에 수양오씨 족보라고 되어 있다.
(자료출처: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병감 수양(首陽)오씨족보 동복오씨족보 오씨삼십세계도 해주오씨족보)
※ 비교적 나중에 한국에 정착한 또 한파는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해주오씨이다.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 송나라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로, 984년 고려에 들어와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였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찬성사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廷)이 공조전서를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에는 선공감역 희문(希文)의 아들인 윤겸(允謙)은 관찰사와 좌부승지를 지내고 인조반정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뒤 우위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때 청과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으로 이송되어 윤집, 홍익한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던 윤겸의 손자 도일(道一)은 숙종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은 병조판서를 역임한후 분무일등공신에 올라 해은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형조판서를 지낸 두인(斗寅)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태주(太周)가 현종의 부마(駙馬)로서 해창위에 봉해졌고, 문명이 높았던 손자 원(瑗)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특히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 하였고 옳다고 믿은 일은 직언을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원(瑗)의 아들 재순(載純)도 학문으로 당대에 뛰어났고 양관대제학을 역임하여 부자 대제학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 인물로는 조선말 개화의 선각자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에 일가를 이룬경석(慶錫)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의 아들 세창(世昌)이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여 가문을 더욱 빛낸 자랑스런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오씨(海州吳氏)는 남한에 총 90,842가구, 377,0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학일리, 죽능리
전북 정읍군 정우면 대치리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충남 금산군 추부면 일원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매곡리
전북 순창군 쌍치면 용전리
황해도 벽성군 월록면 상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