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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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 昔)씨는 한국의 성씨 및 중국의 성씨다.

돌 석 石[편집]

(石)씨는 주나라의 제후국 위나라, 정나라 계출된 희성과 흉노족 성씨가 있다. 전국시대 천문학자 석신(石申)이 있다. 5호 16국후조(後趙)을 세운 석륵흉노 갈족으로, 갈이 돌을 뜻하므로 석(石)씨가 되었다. 중국에는 석륵 계통의 석씨 성본들이 다수 존재한다. 석경당은 후진 (오대)의 건국자이다. 석고내(石土门)는 금사(진사)의 함보 기사에 여진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나라(진나라) 금 세종여진족 오림답부(烏林荅部)의 수장 석토흑(石土黒)은 금 세종의 장인이었다.

한국 석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46,066명이다. 본관으로는 경주, 성주, 성산, 밀양, 대구 광주, 전주 등 21본이 전하고 있는데, 연원을 전하는 본관은 충주, 해주, 조주 3본이다.

한국에는 토착 성씨가 있다. 조선 시대 많이 사용하는 성으로 일원화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중국 도래 석씨들은 조선 시대 들어왔다. 따라서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석씨들은 연원이 불분명한 토착계이다. 신라에는 석(昔)씨가 있었으나, 고려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충주 석씨[편집]

충주 석씨는 고려 의종, 명종 때 인물 석린(石隣)이다. 그는 고려 명종 6년(1176년)에 두경승(杜慶升)을 따라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여, 상장군, 동서북면병마사에 오르고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석린의 7대손 석천의 1남 석수명은 본관을 홍주로 하였고, 2남 석여명은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해주 석씨[편집]

해주 석씨의 시조 석성(石星)은 중국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신종(神宗) 병부상서을 지냈는데, 명나라의 간신의 참소을 입어 옥사하였다. 이후 맏아들 석담(石潭)은 어머니 유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 수양군(首陽君)에 봉하여 관향을 해주로 하였다.

조주 석씨[편집]

조주 석씨의 시조는 명나라 병부상서을 지낸 석성(石星)으로, 자는 공진(拱辰), 호는 동천(東泉) 또는 동명관(東明官)이다. 그는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게 되자, 후손 석재금(石在錦)이 숙부인 참정공(參政公) 석규(石奎)와 그의 손자 석계조(石繼祖)와 함께 조선에 귀화하였다.

광주 석씨[편집]

시조(始祖) 석함(石涵)은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근대 인물은 석주명(石宙明)이 있다.

옛날 석 昔[편집]

(昔)씨의 시조는 신라 4대 왕 탈해 이사금으로,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고려 시대 교서랑을 지낸, 석탈해의 22세손 석재흥(昔載興)을 1세조로 계대하고 있다. 본관은 월성(月城 : 경주 월성) 단본이며, 인구수는 2000년 기준 9,544명이다.

1962년 이전까지는 석재흥(昔載興)이 시조로 알려졌으나, 공주(公州) 석덕경(昔德經) 집안에서 발견된 구보(舊譜)로 인해 탈해왕이 시조임이 밝혀졌다.[1],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이 해양 세력으로 바다를 건너 왔는데, 용성국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 석탈해는 대마도, 거제도를 항해하다가 처음 정착한 곳은 김해 지역이었고, 가야 김씨와 다투다가 신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가야 신화에는 석탈해와의 갈등 관계가 묘사되어 있고, 신라에 김씨들이 집권하면서 내물왕에게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무덤을 이장하라고 하여 석탈해의 무덤을 파서 이장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문무왕이 석씨 세력을 숙청했다고 해석한다. 2011년에 박씨 400만 명, 김씨 1000만 명에 비해서 석씨는 9천 명 정도로 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유사한 성이나, 다른 성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