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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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 晉, 眞, 秦)씨는 한국의 성씨 및 중국의 성씨다.

베풀 진 陳[편집]

중국 / 베트남[편집]

(陳, 병음: Chen)씨는 중국 성씨 인구 1~5위로 나타나는 성씨이다. 첸(陳), 유(劉), 백(白), 사(謝)씨 계통이 많으며, 그 외 여러 소수 민족이 사용하는 성씨로 10가지 정도의 계통이 있다. 춘추시대 진(陳)나라 공족 (嬀)성 후손들이 국명을 따서 (陳)성이 되었다.(종성은 규성 설/문/차/전/은성) 한나라 때 광릉 진씨는 사위 유(劉)씨가 대를 이었고 당대에도 인구수가 많았다고 한다. 한나라 때 백영귀(白永貴)의 자손이 진(陳)씨가 되었다고 한다. 사령운(謝靈運)의 자손이 진(陳)씨로 변경했는데, 그 후예들이 베트남 리 왕조 때 공족이었다가 베트남 쩐 왕조를 세웠다고 전한다. 중국의 유명 인물로 진패선(陳覇先)은 중국 남조 진(陳)의 개국자이다.

한국[편집]

진(陳)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42,496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48위이다. 본관은 여양 진씨 등 47본이 있다.

중국 송(宋)나라 복주(福州) 사람인 진수(陳秀)가 우윤(右尹) 벼슬을 지내다가 요금(遼金)의 난을 피해 고려에 건너와 여양현(驪陽縣) 덕양산(德陽山) 아래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 여양 진씨(驪陽 陳氏)의 시조 진총후(陳寵厚)는 고려 예종 때 호분위대장군(虎賁衛大將軍)을 역임했으며, 1126년(고려 인종 4)에는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오르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1] 여양은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일대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여양 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기준 인구는 97,372명이다.
  • 삼척 진씨(三陟 秦氏)의 시조 진충귀(秦忠貴)가 고려조(高麗朝)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의 벼슬을 역임했다고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 및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2] 삼척 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기준 인구는 7,198명이다.
  • 광동 진씨(廣東陳氏)의 시조(始祖) 진린(陳璘)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도총관(都摠管)‧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功)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그의 손자 진영소(陳泳溸)가 조선에 들어와 전라도 해남현 내해리에 정착하였다.[3] 2000년 기준 인구는 2,320명이다.

나라 진 秦[편집]

중국[편집]

(秦, 병음: Qin)씨는 중국 성씨순위 74위로 4가지 계통이 있다고 한다. 기원전 8세기 무렵 로마인이 창성한 진씨, 전욱/백익 후예 영성 조씨 계통의 진씨, 주문왕 희성 진씨, 임금 때 래(来)성에서 개성한 진씨, 등이 있다고 한다. 시안/장안은 주나라 초기 수도 있었던 곳으로 주문왕 계열의 본관이다. 그 외 소수 다른 계열도 있다고 한다.

유명 인물로는, 기원전 2세기 경,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경략하여 각종 무덤과 성벽을 쌓아서 연의 영토를 현재의 압록강 지역까지 확대하였는데,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다링허(대릉하) 길목의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의 '적석목곽분'에서 청동단검과 연나라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조사국은 진개, 또는 연나라 사람들의 관련된 유물로 추정하였다. 진개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은 진시황제 암살하려고 하였던 형가(荊軻)의 부장이다. 이들 부자의 정확한 출신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편집]

한반도에 백제/신라에 토착 진(秦)씨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 때 열도 제후국 남제에서 백제로 동래한 (神)씨들이 있었는데, 당대 진/신은 혼용 발음이이서 진(秦)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무렵 근초고왕은 강원도를 정벌해서 영토로 삼았는데 진(秦)씨들이 강원도 지역 일대에 살다가 6세기 남하하였다고 한다. 진(秦)씨들은 신라에도 있어, 신라 문무왕(701년)의 명령에 따라 진기촌도리(秦忌寸都理)가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는 사찰 건축 기술 등의 뛰어나 기술을 전수하였으며, 7세기 이후에는 대거 이주하여 신라계 호족이 일본에서 왕실을 견제하는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秦)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1,16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87위이다. 진(秦)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 1926)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에 54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풍기와 진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유래와 세계는 알 수 없다.

  • 풍기 진씨(豊基 秦氏)의 시조 진필명(秦弼明)은 당 고종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올랐으며, 660년(태종무열왕 7)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소정방(蘇定方) 등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태원백(太原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15세손 진질명(秦礩溟)은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기주부원군(基州府院君)에 봉해졌다. 진질명의 형 진질직(秦礩直)과 진질황(秦礩晃)의 후대에서 삼척파(三陟派)과 영춘파(永春派)로 분적되었다. 풍기 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4] 2000년 기준 인구는 11,046명이다.
  • 진주 진씨(晋州 秦氏)의 시조 진욱(秦郁)이 고려시대 박사보리공신(博士輔理功臣)으로 진주군(晋州君)에 봉해졌다. 진욱(秦郁)의 둘째 아들 진계백은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贊成事)로서 홍윤‧최만생 등과 정사(政事)를 논하다가 그들이 모반을 계획하자 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피거함으로써 제주 입향조가 되었다. 진주 진씨는 찬성사 진계백이 제주도에 발을 처음 들여 놓은 후부터 애월읍‧한림읍 등지에 집중 세거하였으므로 오늘날 진주 진씨의 대부분이 제주도에 살고 있다.[5] 2000년 기준 인구는 1,582명이다.

나아갈 진 晉[편집]

한국[편집]

(晉)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73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남원, 진주 2본이다.

남원 진씨(南原晉氏)의 시조 진함조(晋含祚)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했는데 그의 후손인 진석(晉錫)이 고려 고종 때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6] 남원 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기준 인구는 5,084명이다.

중국[편집]

(晉, 병음: Jin)씨는 주나라 때 제후국 진(晉)나라 호족의 성씨다. 주나라 무왕의 아들 당숙우(唐叔虞)가 진(晉)나라에 봉분되고 자손들이 진(晉), 한(韓), 위(魏)씨로 나뉘었다고 전한다.

참 진 眞[편집]

진(眞)씨는 백제 8대 귀족 성씨의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헌에 따르면 진고도(眞高道)는 백제 근구수왕조 내신좌평(內臣佐平)이다. 진무(眞武)는 백제 아신왕조 병관좌평이다. 진가모(眞嘉謨)는 백제 근초고왕조 병관좌평(兵官佐平)이다. 진정(眞淨)은 백제 근초고왕조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진공(眞功)은 신라 신문왕조 대아찬이다. 진복(眞福)은 신라 신문왕조 상대등이다. 진호(眞虎)는 후백제 견훤(甄萱) 때 관료이다.

(眞)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579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서산 진씨(瑞山 眞氏) 단본이다.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