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arantius (토론 | 기여)
잔글 →‎명성황후 암살 가담, 협조: 의미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을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의도로"로 수정
90번째 줄: 90번째 줄:
[[파일:Yoon30.jpg|thumb|left|160px|유길준의 친구 [[윤치호]].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협력자라고 기록해놓았다.]]
[[파일:Yoon30.jpg|thumb|left|160px|유길준의 친구 [[윤치호]].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협력자라고 기록해놓았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자 유길준은 대원군과 함께 낭인들에게 협조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ref name="만찬">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ref>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만찬"/>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자 유길준은 대원군과 함께 낭인들에게 협조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ref name="만찬">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ref>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의도로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만찬"/>


유길준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한국]]인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ref name="정용화">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93페이지</ref>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ref name="정용화"/> [[명성황후]]를 [[폴란드]]의 [[메리 여왕]]([[영국]]의 [[메리 1세]]의 착오이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사악한 여성<ref name="정용화"/>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ref name="정용화"/>
유길준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한국]]인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ref name="정용화">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93페이지</ref>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ref name="정용화"/> [[명성황후]]를 [[폴란드]]의 [[메리 여왕]]([[영국]]의 [[메리 1세]]의 착오이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사악한 여성<ref name="정용화"/>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ref name="정용화"/>

2011년 3월 27일 (일) 20:59 판

유길준

유길준(兪吉濬, 1856년 음력 10월 24일~1914년 양력 9월 30일[1][2])은 조선의 문신이자 구한 말의 정치가·개화 사상가로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천민(天民)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었으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이 되자 한일합방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갑오개혁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뒤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이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을사조약 등을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계몽 등의 활동을 했고,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이후 일본이 주는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3]

그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4]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유길준은 1856년 음력 10월 24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청송부사를 지낸 유치홍(柳致弘)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유진수(柳鎭壽)이며, 어머니는 이경직(李耕稙)의 딸 정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인들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많은 한성부 사람들이 피난을 하자, 그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덕풍리로 피신, 은거했다. 광주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만인 1869년 봄에 한성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 한학 성리학을 배웠다.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외할아버지 이경직은 최종 관직이 정3품임 도정(都正)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한성부 북촌(北村)의 노론 실학파 학자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했고 살림도 넉넉하여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문하에서 한학, 성리학을 배운 뒤 소년기에는 외할아버지 댁에 머무르면서 각종 고전과 서양의 서적을 접하게 됐다.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외조부로부터 소개받은 서구에 미지의 문명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흥미를 품게 된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소년기에 홍대용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서적을 두루 탐독했다.

서구 문물과의 만남

1870년경 그는 외할아버지 이경직을 통해 소개받은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당시 박규수는 청나라의 북학파 사상에도 정통하였으며, 사절(使節)의 대표로 중국에 갔다온 뒤로 새로운 사상, 즉 개화사상을 펴고 있던 경륜가(經綸家)로서, 관직 생활 보다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했고, 또한 다른 개화사상가인 오경석, 유대치, 개화승 이동인 등과도 접촉했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박규수의 집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뒤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윤웅렬(尹雄烈),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 등 뒤에 개화파로 활약했던 인물들과 사귀었다. 이어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도 친분관계를 형성해 두었다.

1870년경부터 그는 과거 시험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했다. 그는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과거에 합격할 길이 있었지만, 당시 뇌물과 배경, 연줄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단념한다.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으로 죽은 뒤 김옥균 등 일부는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던 중인 출신 유홍기(劉鴻基) 밑에서 지도를 받아 급진개화파가 되었으나 그는 김윤식 등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77년 그는 과거제도의 해악을 비판하는 과문폐론(科文弊論)을 지었다.[5]

격물진성(格物盡性)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격물한 바와 진성한 바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본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에 몽매하니 그 용(用)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어찌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안태(安泰)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과문이란 것은 도를 해치는 함정이자 인재를 해치는 그물이며,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자 인민들을 학대하는 기구(機具)이니, 과문이 존재하면 백해(百害)가 있을 뿐이며 없더라도 하나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위로는 조정의 백관에서부터 밑으로는 민간의 글방 서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문으로 부몰(浮沒)하니, 필경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다가 끝내 각성하여 깨닫지 못할 것이다.[5]

지나친 관직열과 과거만능주의는 국익과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지적하는 그의 글이 발표되자 당시 정부와 기득권층은 크게 충격받고 당황해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이 어린 소년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1881년 조선인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 게이오 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5]

유학

일본 유학과 귀국

1882년 일본 유학 중의 유길준

스물 다섯 살 때인 1881년(고종 18년) 봄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 유학,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났다. 그뒤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1년 만인 1882년에 귀국하였다. 후쿠자와는 일본 사회에서 문명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특히 그가 저술한 〈서양사정 西洋事情〉·〈문명논지개략 文明論之槪略〉·〈학문의 권유 學問の勸め〉 같은 책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후쿠자와와의 대화에 감명받은 그는 조선 정치가 썩고 부패했다고 규정, 자신 역시 이러한 책을 써서 조선 국민들을 계몽시켜야겠다고 확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체결한 조선은 1882년 미국 공사 푸트(L. H. Foote)가 방한하자 조선도 미국에 친선사절단(보빙사)을 파견하였고, 후쿠자와는 많은 저작물을 발표함과 동시에 1882년 3월 1일부터 일본에 지지신보(時事新報)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일본의 후쿠자와로부터 편지를 전달받고 원고 요청이 있자 그는 감격, 일본 사회에서 신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그해 4월 21일 '신문의 기력을 논 함'이라는 제목으로 보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명문이라며 자신의 지지신보에 게재했다.

1882년 7월 23일 한성부에서 구식 군인들의 월급으로 주는 쌀에 모래와 돌멩이 및 썩은 쌀을 주자 여기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그는 사태 당시 행동을 삼가하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이 파견될 때, 그도 함께 가겠다고 자청하여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수신사는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일본의 여·야당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 면담하고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한학을 배워 중국어일본어의 기초 실력이 있었던 그는 사절단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1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박영효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한성순보 편찬과 미국 방문

1883년 봄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라는 근대 신문 창간에 기여하였고[5], 이어 외무 낭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일본의 은사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자신의 저서 《문자지교》(文字之敎)를 국,한문으로 혼용, 번역해서 조선에 소개해보라는 부탁을 받는다.

곧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부탁한 문자지교라는 그의 저술을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하였다.[6]

한편 그는 경쟁 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하였다.‘경쟁’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서 1883년에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3] 그 뒤 그는 어윤중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후일 박노자는 박정희의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마치 예견하듯이 경제 발전을 위한 일본의 대규모 차관을 들이려고 한 사람들도 바로 어윤중·유길준 등의 ‘실무 개화파’였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3] 그러나 유길준과 어윤중의 일본 차관 도입 주장은 고종에 의해 거부되면서 실패한다.

파일:1883년조선주미보빙사절단01.jpg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뒷줄 가운데가 유길준), 앞줄 왼쪽 첫번째와 두번째는 홍영식, 민영익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왼쪽 세 번쨰가 유길준), 앞줄 왼쪽 두번째와 세번째는 홍영식, 민영익

외무 낭관을 사퇴한 뒤 유길준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절단은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고 유길준은 홍영식, 서광범, 고영철, 변수, 현흥택·최경석 등과 함께 사절단에 임명되어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보빙사 일행은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사절단은 40여일 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한 후 귀국했다.[7]

미국 유학

박영효의 부탁으로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으나, 재정난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는 1884년 초에 미국에 파견되는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된다고 하자, 그는 자원하여 보빙사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유길준은 미국에 계속 남아서 국비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유길준은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에드워드 모오스 교수의 지도하에 유학준비를 하며 지내다가 1884년 가을학기에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들어간다. 학비가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면서도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8월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건너가 기독교 목회자E. S.모스에게 8개월 간 영어와 미국 문화에 대한 개인과외를 받은 뒤,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학원에 입학했다. 유길준이 유학 중이던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7] 이후 그는 보스턴 대학교를 다녔다.

미국유학 시절 그도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깊이 연구했지만, 윤치호와 달리 전통적 가치관을 폐기하지 않았다.[5] 이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참정권, 시민윤리, 합리주의 등을 보고 조선의 처지를 비관, 좌절한 윤치호와는 대조된다. 그도 양반관료의 횡포로 일반 국민들이 공평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폐단이 있음을 예리하게 비판했지만, 조국이 적절한 개혁만 단행한다면 백인종들의 문명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5]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은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1885년 9월 약 2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된다.[5]

갑신 정변 실패 이후

미국 보스턴에 체류 중 그는 갑신정변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3일 뒤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개화 인사들은 실종되거나 도주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접하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했으나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그는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세계를 견문할 목적으로 배를 타고, 유럽 일주를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였고 하버드대학으로 진학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유학비도 끊어지자 귀국하게 되었다.[7] 1885년 12월 16일 인천부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1885년 그는 미국과 국제정세에 관련된 저서인 중립론(中立論)을 발표한다.[5]

혹자는 말하기를 ‘미국은 우라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니 의지하여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은 멀리 대양(大洋) 건너편에 있으며 우리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더구나 미국이 먼로 독트린(蔓老約, the Monroe Doctrine)을 선포한 후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설사 우리나라가 위급해지더라도 그들이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군대를 동원해서 구원해 줄 수 없다. 옛 말에 천 마디의 말이 한 발의 탄환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의 통상의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5]

정치 활동

귀국과 감금, 정치 활동

귀국 직후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등과 친하다는 죄목이었다. 구금 기간에 기행문 형식의 국가 개혁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시작해 1895년에 탈고했다. 김옥균, 박영효, 윤웅렬,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도피 소식을 접하지 못한 그는 제물포항으로 들어갔고, 개화파의 일당으로 지목된 그는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경성부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감금당하였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의 원고를 썼고, 1895년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석방되었다. 한편 그가 한규설 등의 집에 유폐당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조치[5]라는 설도 있다.

그뒤 1894년 3월 김옥균상하이에서 근왕파인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소식을 접했다. 김옥균의 암살과, 그의 시신이 국내로 압송되어 부관참시되어 토막난 것을 보고 그는 명성황후와 근왕파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품게 된다.

을미사변 전후

대원군파로 전향
파일:Taewongun photo.jpeg
흥선대원군. 대원군은 자신의 손자 이준용을 통해 유길준을 포섭하려 하였다. 명성황후가 일부 급진개화파를 제거하려 하자 그는 대원군에 협조한다.

1894년 4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청나라와 일본군에게 도움을 청하자 청나라 군,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본 그는 전향, 대원군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6월 고종으로부터 외아문주사로 임명되고, 그에게 일본군과 접촉하라는 명령을 했으나, 일본군은 도리어 경복궁을 점령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한 뒤 내정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할 계획을 꾸몄다. 유길준 역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과 함께 대원군을 받들고[8], 12월 17일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와의 연립내각이 성립되었을 때에도 역시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오래 전부터 흥선대원군의 포섭대상으로 지목된 그는 대원군 측으로부터 수시로 교섭 제의를 받았다. 대원군은 군국기무처 내에 자기파인 박준양, 이태용, 이원경을 앉히고 이준용을 중심으로 유길준 등을 끌어들여 세력 확장에 주력하였다.[9] 그 뒤 신(新)관제로 박영효는 내부대신, 그는 내부협판으로 임명되었으나, 1894년 민씨정권의 급진개화파 사살 계획을 접한 뒤, 1895년 7월 반역음모사건으로 박영효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통해 그와 계속 접촉했고 그는 대원군, 이준용과 함께 명성황후 제거를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다.

명성황후 암살 가담, 협조
유길준의 친구 윤치호.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협력자라고 기록해놓았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자 유길준은 대원군과 함께 낭인들에게 협조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4]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의도로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한국인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10]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10] 명성황후폴란드메리 여왕(영국메리 1세의 착오이다.), 프랑스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사악한 여성[10]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10]

그리고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10]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10]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10] 10월 8일 민비 암살사건이 일어난 뒤 친일 내각에 의해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발령을 다시 강행한다.

단발령 공포로 춘천·원주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함에 따라 서울을 지키는 군대가 대부분 지방에 내려가고,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11] 그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1896년 2월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갑오, 을미경장기 활동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그의 부탁을 받은 박영효서재필을 설득하여 귀국하게 한다. 유길준 또한 서재필를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12]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12]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12],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12]는 것이다.

1896년 내무부 대신에 올랐으나, 그해 2월아관파천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 망명과 유배

일본 망명 중 그는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자[5]에 실린 미국을 소개하는 기사를 접한다.

이 나라에서는 의리로 주장을 삼고 정치상과 권리상에 모든 일들을 천리와 인정에 합당하게 만든 풍속과 사업이 많은 고로 천복을 받아 지금 이 나라가 부하기로 세계에 제일이요, 화평한 복을 누리기로 세계에 제일이라.[5]

당시 미국을 공평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영토욕이 없는 정의의 나라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었다.[5] 그러나 그는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이상주의를 경계하였다.

미국은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5]

유길준은 미국은 통상 상대에 불과할 뿐이며[5],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5]”고라 일갈하여, “약자를 돕는 정의의 나라”라는 미국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피상적 인식에 경종을 울렸다.[5] 을사조약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에 대한 그의 의혹은 한층 더해갔다.

일본 체류 중 그는 박영효, 윤치호, 이준용 등과 꾸준히 서신연락을 주고받으며 국내외 정세를 접하였다. 일본으로 망명 중에도 그는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를 작성하고 환국 공작을 펴다가 발각되어, 일본정부에 의해 일본의 남해 고도(孤島)에서 4년간 강제로 유배생활을 했다. 이 때를 틈타 그를 제거하려는 조선인 자객이 나타나기도 했다.

1897년 그는 2년간 집필한 저서 서유견문을 탈고한다. 탈고 후 그는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책은 제가 긴 연금(軟禁) 생활기간에 집필한 것으로서 1895년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바깥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히기 위해 이 책을 무료로 배포하였습니다.

1897년 6월 7일자 미국인 모스에게 보낸 영문서한[5]

1904년 풀려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조선으로 되돌아온 직후, 국내외 정세를 보고 일본이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것과 식민지가 되는 조선을 선뜻 도와줄 나라는 없다는 것을 예상한 그는 교육과 계몽, 산업 시설의 확충 등 부국강병을 역설하며, 국민이 스스로 깨어 있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길준은 사회단체인 국민경제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국내 기업인 경제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의 인수와 운영에 참여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려 노력하였다.

한성부민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계산학교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교육이 시급하다 생각한 그는 노동야학회라는 야간학교를 세워, 농민과 노동자들을 야간에 문자와 글, 숫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근왕파들의 질시와 경계를 받았고, 이후 그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다가 1907년 고종이 퇴위한 뒤에야 완전히 귀국할수 있었다.

생애 후반

을사조약과 계몽 활동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였다. 지일파(知日派)였지만 그는 을사조약에 반발했는데, 대한제국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13]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을사늑약은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일본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미국필리핀 점령을 눈감아주기로 한 조약문을 입수하면서 미국을 의심하게 된다.

1905년 11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됨에 따라 오래 전부터 동지들과 손을 잡고 국권을 확립하고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보려던 것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어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그가 기독교로 귀의하는 데에는 오랜 친구인 윤치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 또 이 시기에 본국으로부터 김정식(金貞植)이라는 사람이 도쿄 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로 부임하여 유길준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설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과 같이 서울의 종로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7년 순종 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후 흥사단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또한 융희학교 설립 준비작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6월 한국이 일제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14] 이에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묻고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외상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신협약을 작성하여 1907년 7월 24일 정식으로 한국정부에 제출했다.[14] 그러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었다.[14] 이완용 내각의 각료들과 대신들은 정미7조약의 체결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정미7조약의 체결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홀로 조약 체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다수의 의견에 의해 묻혀졌다.

유길준이 정미7조약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소식은 한국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동안 그를 친일파로 생각했으나 그가 정미7조약을 반대했음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종이었다.[15] 1907년 8월 16일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유길준을 제외하고 모두들 일본측에서 주는 벼슬을 받았다. 고종은 우선 용용봉정(龍龍鳳亭:흔히 龍鳳亭이라 했으나 유길준은 조호정이라고 불렀음)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교육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15] 그는 교육과 계몽을 통해 뒤늦었지만 조선을 구할수 있다고 내다봤다. 실패를 예상하였지만 그는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야학 사업을 추진했고, 각지의 향촌에서 하는 자생적 야학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길준의 저서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1908년작

또한 그는 국민 개개인을 선비로 만들자는 취지로 흥사단을 창설했다. 흥사단을 통해 유길준은 〈대한문전 大韓文典〉·〈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의 책을 저술·간행했다. 그리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소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다.[15] 1908년 11월 의병장 신돌석이 한국 사람의 밀고로 일본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좌절한다. 신돌석을 밀고한 자는 그의 친척으로 현상금을 노린 형제와, 양반 출신으로 상민의 지휘를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양반들이었다. 신돌석의 체포 소식에 그는 낙망하게 된다.

1908년말 일본 고관들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1908년에 자신이 조직한 한성부민회의 차원에서 일본 고관들의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3]하였다.

한일합병

1909년 12월 20일 상무조합(商務組合)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해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에게 암살되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었다.[3]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행사를 전국적으로 개최하자 일부 지식인들은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그동안 야(野)에서 쌓아 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는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15] 유길준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한때 극비리에 노백린(盧伯麟) 등 몇몇 유지와 합동, 서울 시내의 중학생을 동원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집에 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의 훈 1등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합병이 된 지 40일 가까이 되어 일본당국은 합병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내려 귀족으로 앉히면서 유길준을 회유해보려고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사절했다.[15] 이후 그는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경성부의 자택에 은거하였다.

사망

안창호. 그는 유길준을 애국자, 선각자로 추모하며 흥사단을 재조직하였다.

만년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는 일 이외에 대외활동을 중단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쌓인 지병 역시 그의 대외활동을 제한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15]가 노량진에 있는 자택에서 은거하던 중 지병이었던 신장염으로 1914년 9월 30일 아침에 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는 10월 7일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조문객은 대부분 조선 총독부 관리였으며, 일제는 그들의 관점에서 유길준의 지도력을 평가하려 했다.[2] 그는 임종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그는 사후 안창호[3]윤치호에 의해 애국자로 추모되었다. 특히 안창호는 그의 흥사단에 감화받아, 다시 흥사단을 재건하였다.

사후 독립 유공자로 서훈 대상에 추천 되었으나 훈장은 추서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일본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일본의 호의를 의심하였으며, 을사보호조약한일 합방을 강력 반대했다. 그러나 홀로 이를 막기에는 무리수였다.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점,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의 저격을 받자 전국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한 점 등은 비판,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서 및 번역서

저서

  •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 《영법로토(영국-프랑스-러시아-터키) 제국 가리미아(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 《노동야학독본》
  • 《구당시초(矩堂詩抄)》
  • 《구당선생집》
  • 《세계대세편》
  • 《정치학》
  • 《평화광복책》
  • 《이태리 독립전사》
  • 《파란(波蘭) 쇠망전사》
  • 《구당서간집》
  • 《유길준전서》
  • 서유견문》 등

번역서

기타

  • 《대한문전》(大韓文典) : 국어사전, 문법서

상훈

가족 관계

  • 아버지 : 유진수(兪鎭壽, ? - ?)
  • 어머니 : 한산이씨
  • 부인 : 경주김씨
  • 부인 : 충주이씨

평가와 비판

평가

사후 안창호윤치호에 의해 애국자로 추모되엇다.

그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넉넉히 급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포기한 이른바 ‘선각자[5]’였다는 평가가 있다. 안창호는 그를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3]’로 평가하고, 그의 흥사단을 본따 흥사단을 재건하였다.

비판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거나 그가 1908년에 조직한 한성부민회의 차원에서 일본 고관들의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것 등은 추악한 행각임에 틀림없다.[3]는 비판이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도 일본 망명으로부터의 귀국(1907년) 이후의 기본 방침인 ‘식산흥업과 교육에의 헌신, 정치에의 불참’은 곧 닥쳐올 일제 시대의 토착 엘리트(친일파)의 이데올로기인 현실 순응적인 ‘실력양성론’과 ‘일본 지도하의 몽매한 조선의 문명화’의 청사진이었다는 비판도 있다.[3]

사후 그는 안창호에 의해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로 추앙되었고, 선각자, 계몽의 선구자로 기려져왔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유길준에 대한 ‘선양’ 작업을 시작한 것은, 그를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로 섬기고 그의 흥사단(1907년 설립) 이름까지도 본떠 사용한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 안창호였다.[3]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윤치호 일기>와 같은 사료에서 갑오 내각의 주요 인물이었던 유길준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등 그의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만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교과서에서는 그의 모습을 ‘근대화의 선구자’ ‘국민 계몽의 주역’ 등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3]고 혹평하였다.

사상과 신념

의병에 대한 비판

그는 구한 말의 의병 중, 의병을 사칭한 강도들의 존재와 의병임을 내세워 횡포부리는 자들을 비판하였다. 일본의 한국 병합 예상과, 을미사변,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의병들이 나타났지만 이 중에는 의병의 이름으로 민가를 약탈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유길준은 의병이라면 높이 평가하던 당시 분위기와는 별도로, 의병을 사칭하는 자들, 의병의 이름으로 민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를 지적했다.

그는 노동야학독본의 제42장 용기 편에서 “의병의 이름을 거짓으로 달고 도적의 일을 행하는 것은 충의도 용맹도 아니다[16]”라고 하여 의병을 사칭하는 좀도둑의 무리와 의병의 이름으로 민가를 약탈하고 횡포를 저지르는 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교육의 중요성

그는 일찍부터 교육이 중요하다고 봤다. 교육을 통해 무식과 무지를 깨닭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일관된 신념이었다.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국왕 고종에게 바친 상소문 언사소(言事疏)(1883)에서도 나타난다.[5]

교육의 도(道)가 융성해지지 않으면 인민들의 지식이 넓어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빈약하게 될 터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지식과 기력 양자는 교육에 달려 있으며, 교육의 길은 국가의 시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5]

군국주의적 관점

그는 자신의 저서 노동야학독본의 제1장에서는 인간의 도리와 권리와 의무 등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제1과 사람)는 것은 서두에 실린 훈화이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도리’는 과연 무엇인가. 다름 아닌 “신하와 백성이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국가의 윤리적 기본이며, 귀천·상하의 차례가 있는 것이 사회의 윤리적 기본이다”라는 게 바로 사람과 짐승의 경계선을 긋는 ‘도리’다(제2과 사람의 도리).[3]

노동야학독본의 제4장에서 그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그는 사람의 의무로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람의 의무'에 대한 해석은 결코 공맹의 가르침만을 따르지 않는다. 유길준에 따르면 사람이 가장 신성하게 여겨야 할 두 가지 의무는 효도나 도(道)의 궁리가 아니고 바로 납세의 의무와 ‘징병에 의하여 군사가 되는 의무’라는 것이다.[3]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의무’ 중에서 유길준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군사 되는’ 의무인 듯하다. 그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 죽을 의무’를 강조하고(제9과 내 몸), 부국강병을 실시하는 국가를 위한 맹목적인 희생을 ‘영예’로 (제11과 우리 임금) 규정했다.‘하늘과 같은 국가’와 보잘것없는 개인을 대조시키는(제12과 우리나라)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 애국심을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했다. 후에 박노자는 이를 두고 자신의 동류들이 다스리는 ‘국가’를 위해서 노동자들이 피까지 바치기를 대단히 바라는 모양이었다[3]며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지방자치제와 입헌군주제

유길준은 지방자치제도와 입헌군주제를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를 설치·운영했다.[15] 체제 개혁과 절대군주론에는 반대하였으나 폭력 혁명론이나 공화제보다는 군주가 다스리는 체제를 선호하였다. 유길준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지하고 있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다.[15]

윤치호와는 달리 그는 서구에 대해 극단적 패배의식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버린 윤치호와 달리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 자신의 식견을 동포들과 공유하는 데 힘썼다.

기타

유럽 정치 지도자 소개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를 통해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클라우제비츠를 조선 사회에 처음 소개하였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를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태리 독립전사를 통해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리발디 등 당대의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명성황후 암살 가담

갑신정변김옥균의 암살 이후 그는 명성황후와는 정적으로 변신했다. 같은 개화파이자 오랜 친구인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기록을 남겨, 유길준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음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같이 보기

주석

  1.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유길준".
  2. 김은신.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3쪽쪽. ISBN 978-89-85407-35-9. 
  3. 계몽주의자, 군국주의자!:박노자 - 한겨레 21 [제502호] 2004.04.01일자
  4.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
  5. 윤치호와 유길준: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2> 프레시안 2003-02-17
  6. 황호덕,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소명출판, 2005) 314페이지
  7.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8.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1201b
  9.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출판사 역사비평사 | 2003) 238
  10.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93페이지
  11. 유길준 역시 명성황후 암살의 한국인 협력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를 암살할 자객들이 출몰하기도 했다.
  1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
  13. 이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할 수 있었고, 그는 이 점을 우려했다.
  14.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4h3009a
  15.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1201b
  16.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10654.html

외부 링크

관련 서적

  • 윤병희, 《유길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사상사, 2007)
  •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문학과지성사, 2004)
  • 노동야학독본 - <유길준전서>, 일조각, 1971, 제2권, 260~358쪽.
  • 이훈상, 구한말 노동야학의 성행과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 - <두계 이병도 박사 구순(九旬) 기념 한국사논총>, 지식산업사, 1987, 743~778쪽.
  • 윤병희, 한성부민회에 관한 일고찰 - <동아연구>(서강대 동아연구소 발행), 제17집, 1989, 609~632쪽.
  •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 김도형, 유성준·유만겸·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을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 유동준, 《유길준 전》(일조각, 1987)
  • 유길준, 《유길준논소선》(허동현 편역, 일조각, 1987)
  •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 《유길준전서》 전4권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 1971)
  • 황호덕,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소명출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