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캘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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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제임스 캘러헌
KG, PC

Leonard James Callaghan
1977년
1977년
영국제51대 총리
임기 1976년 4월 5일~1979년 5월 4일
군주 엘리자베스 2세
전임: 해럴드 윌슨(제50대)
후임: 마거릿 대처(제52대)

신상정보
국적 영국
출생일 1912년 3월 27일
출생지 영국 햄프셔 주 포츠머스
사망일 2005년 3월 26일 (92세)
사망지 영국 이스트서식스 주 링머
정당 노동당
종교 무종교 (무신론자)[1]
배우자 오드리 캘러헌

래너드 제임스 캘러헌, 카디프의 캘러헌 남작 (Leonard James Callaghan, Baron Callaghan of Cardiff, KG, PC, 1912년 3월 27일~2005년 3월 26일)은 영국정치가1976년부터 1979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영국 노동당의 대표를 역임하였다. 캘러헌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재무부 장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내무부 장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맡아 총리직을 포함해 오늘날까지 4개의 영국 주요 장관직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제임스 캘러헌은 1912년 3월 27일잉글랜드에 위치한 포츠머스에서 해군 하사관이었던 제임스 캘러헌 (1877~1921)[2] 와 샬롯 캘러헌 (1879~1961)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할머니는 유대인 계통이었다.[3] 그에게는 누나인 도로시 캘러헌 (1904~1982)이 있었다.

캘러헌은 포츠머스 노던 세컨더리 학교에 다녔으며, 1929년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였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행정 시험을 보게 되었다. 17살에 그는 내국세 세무청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세무청 직원들이 결성한 노동 조합 창립에 기여하게 되었다. 1931년에 그는 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1934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세무청으로 직장을 이동하였으며 1936년에 그는 노동 조합에서 중직을 맡으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노동 조합에서 중책을 맡는 동안 캘러헌은 노동당에서 재무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해롤드 라스키와 친분을 맺게 된다. 라스키는 그에게 의회에 진출해 정계에서 일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해군예비대에서 1942년부터 복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부 함대에서 참전하였으며 1944년 4월에는 중위로 진급하게 된다.[4]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는 결핵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포츠머스 인근에 있는 해군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1945년~1964년[편집]

종전 후 캘러헌은 1945년에 치뤄진 영국 총선에서 '카디프 사우스' 지역에 출마한다. 그는 현직 의원이었던 헨리 에반스를 꺽고 60%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이 총선에서 노동당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지도하에 393석을 얻는 큰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 선거가 끝난 후 그의 아들인 마이클 캘러헌이 태어났다.

캘러헌은 1947년에 교통부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높은 업무 실적으로 그는 1951년 후 야당의 된 노동당에서 집권에 맞춰 기획한 그림자 내각에서 주요 장관후보로 거론되었으며, 1961년에 그는 '그림자 재무장관'에 지명된다. 1963년에 노동당 대표였던 휴 게이츠켈이 사망하자 노동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를 선출하게 되는데, 그는 대표 선거에 출마해 17%를 얻는데 그친다. 그는 노동당 내 우파로 여겨지던 조지 브라운을 결선 투표에서 지지하였지만 결선 투표 결과 해럴드 윌슨이 58%를 얻어 새 대표로 선출되게 된다.

정치 생활[편집]

카터 대통령과 캘러헌 총리

캘러헌이 재무부 장관을 맡던 시기의 영국 경제는 불경기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장관직을 맡는 동안 그는 파운드 화의 평가 절하 정책을 결정하는 가의 문제로 크게 논란을 빚었다. 1967년 파운드 화의 평가 절하가 부작용의 위험에도 시행되자 그는 곧바로 재무부 장관직에서 사퇴하게 되었으나, 내무부 장관이었던 로이 젱킨스와 장관직을 바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어 내각에서 쫓겨나는 것은 피하였다.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동안, 그는 북아일랜드 정부의 요구가 있기 전까지 북아일랜드 경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자 그는 1974년 외무부 장관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림자 내각에서 외무장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그가 영국의 EEC 가입 재교섭과 관련된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1975년에 EEC 재가입을 놓고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그는 '찬성'편을 옹호하였다. 1976년해럴드 윌슨이 갑작스럽게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캘러헌은 5명의 후보들을 제치고 노동당 대표에 당선되면서 총리에 취임한다. 그가 총리가 되자마자 노동당은 과반수 의석을 잃어 자유당과 기타 소수 정당과 함께 연정을 하여야 했다. 캘러헌이 총리를 맡는 동안 영국의 재정 위기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를 받아야 했다. 캘러헌은 이로인한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노동계와의 다툼과 전국에서 펼쳐진 총파업으로 생긴 1978년 '불만의 겨울'은 캘러헌 내각의 인기를 하락시켰고, 스코틀랜드 주민투표에서 패배하자 그는 그 영향으로 1979년 선거에서 보수당마거릿 대처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80년에 노동당의 새 대표로 마이클 푸트가 선출될 때까지 캘러헌은 대표를 역임하였고, 1987년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그는 의원직도 내놓았다. 그는 93세 생일 전날인 2005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오늘날까지 가장 장수한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서훈[편집]

각주[편집]

  1. "One of the more enduring marks on British life left by the atheist, Prime Minister Callaghan, was to remove exclusive responsibility for the appointment of bishops from his own office and share it largely with a commission of churchmen. Since 1976, the Prime Minister has been limited to choosing one from two nominees of the commission or, in exceptional cases, sending the list back for the commission to produce a new one."
    Hugo Young, 'A relic of history best left undisturbed', The Guardian (London), 27 March 1990.
  2. Page 1, Callaghan: British Prime-Ministers of the 20th century, Harry Conroy, Haus Publishing 2006
  3. Kenneth O. Morgan, Callaghan: A Life, 1997, p.5 "His father's mother was Elizabeth Bernstein, from Sheffield; he was, therefore, a quarter Jewish as well."
  4. J.N. Houterman. “Royal Naval Volunteer Reserve (RNVR) Officers 1939–1945”. Unithistories.com. 2010년 4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전임
해럴드 윌슨
제50대 영국의 총리
1976년 - 1979년
후임
마거릿 대처
전임
제럴드 포드
G7 의장
1977년
후임
헬무트 슈미트
전임
레지널드 모들링
영국의 재무장관
1964년 - 1967년
후임
로이 젱킨스
전임
로이 젱킨스
영국의 내무장관
1967년 - 1970년
후임
레지널드 모들링
전임
앨릭 더글러스흄
영국의 외무장관
1974년 - 1976년
후임
앤소니 크로스랜드
전임
해럴드 윌슨
노동당 대표
1976년 - 1980년
후임
로이 젱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