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문화유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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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문화유산 목록이다.

영구 소실[편집]

이름 제작/건립 설명
법천사 신라 말기 정확한 중건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최초의 언급은 928년 (경순왕 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에 번성하였으나 허균에 따르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755년 (경덕왕 14년) 신라 경덕왕 대에 최대 규모 불상으로 주조되어 봉안되었으나 소실되었다. 1774년 (영조 51년)에 다시 만들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실록 1034년 (덕종 3년) ~ 고려 왕조의 실록으로 총 36권이 편찬되었으며, 1227년 편찬된 해인사의 외사고본이 조선 건국 후 고려사 편찬과 더불어 한양의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춘추관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승정원일기 1392년~ 조선 개국 이래 태조부터 선조까지의 매월 일기가 보존되어 왔으나 소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춘추관본
충주사고본
성주사고본
1413년~ (한양·충주)
1445년~ (성주)
본래 한양, 충주, 성주, 전주의 4사고에 각각 보관되었으나,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3사고가 불타면서 소실되었다.
실록은 1413년 태조실록, 1426년 정종실록, 1431년 태종실록이 편찬되어 한양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처음 보관되었으며, 1445년 상기한 실록을 성주사고에도 보관하였다. 이후 1571년 명종실록까지 13실록이 세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보신각보신각종 1413년 (종루)
1458년 (종)
통운교 인근에 자리했던 2층 종루였으나 종루와 종 모두 파괴되었다. 이후 1층 종각을 다시 짓고 명례동 고개에 있던 원각사 종을 옮겨와 썼다. 현재의 종루는 1979년에 세워진 것이며, 종은 19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되어 쓰고 있다.
대자암 1418년 성녕대군 이종이 요절하면서 태종이 무덤 옆에 지은 재암이었으며, 대자사라는 사당이 함께 지어졌다. 계유정난 이래 안평대군의 걸작 몽유도원도가 보관된 곳이었으나 소실되었다.
한양궁궐도 1506년 (명종 15년) 임진왜란 이전의 한양도성과 궁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은 그림으로 전해지나 소실되었다.[1]
비변사등록 1517년~ 비변사가 설치된 이래 매년 최소 1책씩 작성된 기록이었으나 소실되었다. 1617년 (광해군 9년) 이후의 것만 현존한다.

소실 후 복원[편집]

이름 제작/건립 복원 설명
통도사 대웅전 646년 (선덕 15년) 1645년 (인조 23년)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가 처음 통도사를 세웠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다가 소실되었다.
화엄사 장육전 670년 (문무왕 10년) 1643년 (인조 12년) 신라 문무왕대 의상대사가 건립,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전해지나 소실되었다.
범어사 678년 (문무왕 18년) 1602년 (선조 35년) 신라 문무왕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소실, 선조 대에 중건하여 광해군 5년에 중수하였다.
불국사 774년 (혜공왕 10년) 1604년~1805년 751년 김대성에 의해 대규모 중창되기 시작하였으며 774년에 마무리되었다. 2,000여칸 규모의 대사찰이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건국 후 임진왜란 직전까지 1,000여칸이 남아 있었다.
1593년 제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가 방화, 파괴를 저질러 대가람이 전소되었다. 이후 선조 대부터 복구와 중건을 시작해 1765년에는 대웅전이 재건되고, 1779년에는 경주 유림의 지원으로 부분중수가 이어졌다.
직지사 936년 (태조 19년) 1610년 (광해군 2년) 신라 눌지왕 2년 (418년)에 창건되었고, 이후 고려 태조대에 능여대사가 중건하였으나 소실되었다.
진주 촉석루 1241년 (고종 28년) 1618년 (광해군 10년) 고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충광이 창건하였으며, 왜군의 진주성 공격 당시 김천일, 최경회 등이 모여 결사항전한 곳이었다. 의암의 논개 설화로 유명하다. 1618년 병사 남이흥이 재건했다.
종묘
정전
영녕전
1395년 (정전)
1421년 (영녕전)
1608년 (광해군 원년) 태조 이래 정전은 11칸 규모의 건물, 영녕전은 6칸 규모로 증축되었으나 소실되었다. 정전은 소실 전 모습으로, 영녕전은 10칸 규모로 늘려 중건됐다.
경복궁 1395년 (태조 4년)
1554년 (명종 9년)
1868년 (고종 5년) 광화문을 비롯한 경복궁 4문과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는 1395년 태조의 한양 천도와 함께 지어졌고, 1554년 경복궁 대화재로 상기한 건물을 제외한 대다수 건물이 소실됨에 따라 이들을 재건하였다.
1592년 5월 왜군 한성 입성 당시의 경복궁에 관한 묘사가 문헌으로 남아 있고, 이후 경복궁의 파괴가 확인된 것은 조명 연합군이 한양을 탈환한 1594년 4월로, 그 사이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파괴의 주체는 실록에서는 난민의 소행으로 밝히고 있으나 논란이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창경궁 1418년 (세종 원년)
1484년 (성종 15년)
1616년 (광해군 8년) 세종 대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수강궁이란 이름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성종 대 수강궁을 확장하여 별궁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 초부터 중수에 들어가 1616년에 복되었다.
순천향교 1550년 (명종 5년) 1610년 (광해군 2년) 1407년 (태종 7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1550년에 자리를 옮겨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현재의 건물은 1801년 (순조 원년)에 지어진 것이다.
달성 도동서원 1568년 (선조 1년) 1605년 (선조 38년)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뜻으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으나 소실되었다. 이후 달성군 구지면의 지금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일부 피해[편집]

이름 제작/건립 복원 설명
분황사 모전석탑 634년경 (선덕여왕 3년) - 분황사 창건과 함께 세워진 석탑으로 본래 9층~7층 규모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절반이 파괴되어 3층만 남아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 석탑이다.
미황사 749년 (경덕왕 8년) 1601년 신라 경덕왕대 창건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이듬해 1598년부터 재건에 들어가 1601년에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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