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찬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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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찬 (승려)
출생?년
입적606년
속명사마(司馬)씨
칭호선종 4대 조사
선불기적 6권 승찬대사 삽화

승찬(僧璨, ?년~606년)는 수나라의 승려이며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이다.[1]

승찬은 40살이 넘어서야 2대 조사인 혜가를 만날 수 있었고, 그때 문둥병까지 앓고 있었다.[2]

생애[편집]

승찬은 속인의 신분으로 혜가를 처음 만났다. 이때, 혜가에게 문둥병의 원인이 된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하였다.[3]

혜가는 승찬에게 참회시켜 줄 죄를 가져오라고 했다. 승찬은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혜가는 승찬에게 죄는 모두 참회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했다. 승찬은 승보는 큰 스님인 줄 알겠으나, 불보와 법보는 모른다고 하였다.[4]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라고 하면서,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고 승보도 또한 그렇다고 했다. 승찬은 비로소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 밖, 중간 어디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음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며 스님들의 구슬보배라는 의미로 구슬 찬(璨)을 써서 승찬이라는 법명도 내려주었다.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6]

혜가의 명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숨어 살았다. 이때, 4대조사인 도신에게 불법을 전했다. 이후, 나부산(羅浮山) 숨어살다가 다시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7]

606년 법회하다가 큰 나무 밑에 서서 합장하고 임종하였다.[8]

게송[편집]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9]

각주[편집]

  1.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중국 선종 제3조 승찬스님(僧璨大師, ?∼606) 
  2.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승찬은 이때 이미 세속의 나이로 40을 넘은 데다 문둥병까지 앓고 있는 몸이었다. 승찬은 혜가스님을 찾아가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 저의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십시오.” 
  3.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승찬은 이때 이미 세속의 나이로 40을 넘은 데다 문둥병까지 앓고 있는 몸이었다. 승찬은 혜가스님을 찾아가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 저의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십시오.” 
  4.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승찬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다. 앞으로는 불·법·승 삼보(三寶)에 의지해서 안주하라.” “지금 화상을 뵈옵고 승보(僧寶)임은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법보(法寶)라 합니까.” 
  5.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6.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혜가스님께서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곧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써서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해 3월 18일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스님을 시봉할 수 있었다. 
  7.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어느 날 혜가스님은 승찬에게 옷과 법을 전한 뒤에 다시 말했다. “그대는 내 법을 받고는 깊은 산속에 들어앉아 얼른 교화에 나서지 말라. 머지않아 국난이 있으리라.” 승찬스님은 대법을 계승한 뒤 몸을 숨겨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들어가 깊이 은거했다. 승찬스님은 이후 도신스님(道信, 580∼651)을 만나 그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옷과 법을 전해주고는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은둔하다가는 다시 옛터로 돌아와서 
  8. 창원전문대 교수, 창원전문대 교수 (2003년 6월 18일).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21일에 확인함. 대중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널리 연설한 뒤에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서서 합장하고 임종(606년)하였다. 
  9. 혜능, 혜능. 《육조단경》. 29. 傳偈 - 게송을 전함. 
전임
혜가
제3대 중국 선종조사
?년 ~ 606년
후임
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