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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한반도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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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한반도 진입은 세계 제2차대전 말 소련과 일본 간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소련의 한반도 진입
소련-일본 전쟁의 일부

1945년 8월 청진 상륙 작전 당시
날짜1945년 8월 9일 ~ 1945년 8월 20일
장소
한반도 북부 지역
결과

일본 제국무조건 항복

  • 소련의 승리
  • 한반도 이북 지역 주둔 일본 제국군 항복
교전국
지휘관
군대
병력
일본군
병력 약 150,000 명
소련군
병력 1,577,255 명[3]
야포 27,086 문
방사포 1,152 문
전차 및 자주포 5,556 대
항공기 3,721 대
피해 규모
  • 전사 명
  • 부상 명
  • 포로 약 140,000명
  • 전사 9,780–12,031명
  • 부상 24,425명

개요[편집]

1941년에 체결된 소련-일본 중립 조약이 파기되고, 1945년 소련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일본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면서 소련은 만주 전역, 사할린, 쿠릴 열도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시작하게 된다. 특히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은 일본 제국군이 잔존하고 있었던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게 된다.

상세[편집]

경흥을 시작으로[편집]

함경북도 청진시에 상륙한 소련 병사들

만주와 한반도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의 소련군 집결은 일본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일본 제국은 관동군 제1방면군 제3군을 비롯하여 그리고 제17방면군의 일부 부대가 대동강 이북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만주 지역에서 일본 관동군을 대부분 격파한 소련은 한반도 북부로 눈을 돌렸다.[4] 당시 이들의 목표는 나진과 청진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한반도 북부에 제일 처음으로 진입한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이끌고 있었으며,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양동 작전을 통해서 8월 9일에 만주에서 경흥군으로 진출하였다.

소련은 주로 상륙 작전을 통해서 함경도의 항구 도시를 차례대로 점령해나갔다. 8월 11일부터 20일 간 웅기·나진·청진과 나남을 차례대로 점령하였다.[5][6] 웅기는 11일에, 나진은 12일에, 청진은 13일에 소련군이 상륙하여 16일에 되서야 잔존하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항복시키게 된다.

8월 15일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지만[7][8], 소련군은 점령을 멈추지 않고 파죽지세로 남진하였다.[9][10] 이는 한반도에 잔존하는 일본 제국군이 일본 본토로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소련군은 일본 제국군을 무장 헤제시키며 다양한 군용 노획물을 획득하였다.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에서 38도선까지 진격하며 공장, 농장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약탈을 일삼았다.[11]

한반도에 주둔중인 소련군(1945년 10월)

원산 점령[편집]

8월 21일 상륙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8월 24일과 25일 소련 공수부대들은 산업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원산에 주둔하였던 일본 제국국은 대략 7000명 정도였는데, 이는 6,238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제25군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9월 초에는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점령안에 해당하는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12][13][14]

함흥 점령[편집]

8월 21일 소련군이 함흥에 진주하게 되었다.[15]

개성 점령[편집]

1945년 8월 23일, 개성 또한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16]

평양 도착[편집]

1945년 8월 23일 소련 공수부대가 평양에 보내졌고, 26일 이반 치스차코프평양비행장에 도착하게 된다. 8월말 소련은 한반도 이북 지역을 모두 점령하였으며, 인민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공산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17][18] 8월 25일에는 소련군이 해주에 도착하였으며, 27일에는 신의주 또한 소련군이 도착하였다. 9월 4일에는 동두천까지 소련군이 남하하였으나, 38도선을 넘어가게 됨에 따라 물러나게 된다.

38선 설정 이후[편집]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과 소련의 한반도 북부 진주[편집]

미국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한반도 전역이 소련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19] 이후 소련은 38선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소련의 한반도 진입은 멈추게 되었다. 이후 소련은 한반도 이북 지역에 공산주의 체제를 설립하기 위해서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하였으며,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설치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민정청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될 때까지 잔존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LTC David M. Glantz (1983년 2월). 《August Storm: The Soviet 1945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PDF). Leavenworth Papers No. 7 (영어). Fort Leavenworth, Kansas: Combat Studies Institute. 2017년 9월 9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4월 23일에 확인함. 
  2. "Battlefield Manchuria – The Forgotten Victory", Battlefield (documentary series), 2001, 98 minutes.
  3. Glantz, David M. & House, Jonathan (1995),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Lawrence, Kansas: University Press of Kansas, ISBN 0-7006-0899-0, p. 378
  4. 한상용 (2020년 8월 14일). '일장기 든 소련군'…러시아, 1945년 대일전쟁 희귀사진 공개”. 2024년 6월 9일에 확인함. 
  5. “우리역사넷”.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6. “Рис. 1. Смоделированные функции распределения для двух групп.”.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7. “태평양 전쟁의 종전-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문 < 사료로 본 한국사”.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8. “김찬우 기자의 돌아보기 (3) 태평양전쟁은 8월 15일에 끝났지만....”. 2023년 8월 9일.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9. 김황록 (2021년 7월 14일). “[Focus 인사이드] 8월에 들어온 소련군, 9월에 온 미군…점령군 논란 팩트는 바로 이것”.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0. “46년 전 소련군 한반도 첫 진주화면 공개”.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1. “北 진주 소련군 만행 기록한 ‘바스델 하사관 보고서’ 발굴”. 2024년 1월 3일.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2. “The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led to Japan's Greatest Defeat” (미국 영어).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3. “Cost of the Korean War | State Historical Society of Iowa”.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4. 기자, 이윤주 (2011년 9월 1일). “[어제의 오늘]1945년 한반도 분할 점령 선언”. 2024년 6월 9일에 확인함. 
  15. “소련군의 진주와 대북정책①”. 2020년 12월 14일.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6. “[경기도사 ; 한국전쟁과 경기도] | 경기도메모리 디지털 아카이브”.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7. “동북아역사넷 < 동북아역사재단”.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8. 뉴시스 (2020년 2월 24일). “[해방정국 3년] ③8월26일 소련군 사령관 평양 입성·시가 행진”. 2024년 6월 8일에 확인함. 
  19.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할 점령-미국 러스크 대령의 진술 < 사료로 본 한국사”. 2024년 6월 1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