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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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완혁(夫琓爀, 일본식 이름: 大山丈夫 , 1919년 ~ 1984년 12월 31일[1])은 대한민국관료, 언론인, 기업인이다. 미군정기때 잠시 학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960년대 이후 사상계를 인수하여 맡아보기도 했다. 경성부 출신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경성부에서 출생했다. 1941년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선산군 군수를 지내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편집]

관료 활동[편집]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1948년 국무총리 이범석의 비서관이 되면서 다시 관계로 돌아갔다. 1952년에는 기획처 물동국장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1955년에 관계를 떠나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면서 경제 전문가 출신 언론인으로 유명해졌다. 4·19 혁명 후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곧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재야로 돌아갔다.

정치 활동[편집]

제3공화국에서는 《사상계》에 기고하며 문필 생활을 하였고, 1967년에는 신민당에도 입당하여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장준하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뒤 그에게 사상계를 넘겼다.[2] 그러나 강원용에 의하면 전임자인 장준하와 갈등했다고 한다.[2]

부완혁이 사상계 발행인을 맡아 경영하던 중, 1970년에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김지하의 담시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가 폐간되었다.

만년[편집]

1976년에는 맏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아 경영인으로의 변신을 꾀했으나 회사가 해체되어 성공하지 못했다.[3] 저서로 《신제국주의》,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등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조선일보 전 주필 부완혁씨 별세”. 조선일보. 1985년 1월 1일. 7면면. 
  2.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Archived 2007년 8월 31일 - 웨이백 머신 신동아 2004년 03월호(534호)
  3. 이나리 (2000년 12월). “[추적취재] 율산 再起 8857일의 기록 - 집념의 신선호,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신동아》.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